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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그림전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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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덕재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373회   작성일Date 13-10-11 11:14

    본문

    무위당 장일순은 우리 스승님이신 해월신사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체행한 오늘날의 참천도인이셨다.

    비록 종교는 천주교를 하셨지만...그 분의 삶과 그림전을 부산 민주공원에서 부산 한살림에서 주관하여 행하므로 포덕영우회와 한울연대가 후원자로 참여하여 알찬 행사가 되도록 기운을 보태기로 하였다.

    우리 천도인 모두 많은 참여와 관람바랍니다.

    부암 정덕재

     

    모시는 글

     “바람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내년으로 20주년이 됩니다.

     선생님의 삶의 흔적, 남기신 자취와 말씀은 우리마음 속에 되살아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크신 가르침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 커서도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듯 본원적인 그리움이 됩니다.

     이제 여기 선생님의 말씀과 행적이 글 그림으로 아로새겨진 시서화 작품을 마주하여 선생님을 오랜만에 뵈옵고 있습니다. 못난 저희가 오래된 미래인 듯 큰 절을 올립니다.

     선생님은 1950년대 초중반에 안창호 선생의 뜻을 받아 원주에 대성학원을 세우셨고, 그리고는 중립화평화통일론으로 일선 정치개혁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1960년대 말에는 강원도 일대에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일으키시고는 70년대에는 지학순주교와 반독재민주화투쟁에 함께 하시고 80년대 초에는 민주세혁을 결집하여 <민주통일 국민연합>결성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교육운동과 정치개혁운동, 그리고 노농운동,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삶의 근원자리로 돌아와, 공생과 나눔을 실천하는 생명운동을 주창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삶 속에서 지속적인 변환이면서 동시에 이 땅 진보적 개혁운동에서 큰 전환점을 이루는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천지만물, 삼라만상이 모두 한 가지로 생명근원의 거룩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깨닫고, 네가 이 있어 내가 있음에 겨워, 하늘과 사람과 동식물과 바람과 돌과 하찮은 물건까지도 거룩함으로 공경하는 삶을 사시면서, 쓰레기로 덤불이 된 세상 살림살이를 씻기고 보듬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 생명기운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이 땅의 온 분야에 스며들면서 새 차원의 운동을 빚어냈습니다. 그리고는 종교, 예술은 물론이고 일상삶에까지 두루 새로운 기운을 뻗치고 있습니다.

     도농직거래 조직인 <원주 소비자협동조합> 창립을 필두로 생명 공생공동체의 실현이라고 하는 ‘한살림운동’도 그 구체적인 실천의 한 보기일 것입니다.

     부산지역 한살림공동체가  생긴지 20주년을 맞아 선생님의 삶의 자취를 뒤쫓는 이야기마당을 열고, 예술향흔으로 남기신 서화작품들을 거두어 여러 지역, 여러 동사분들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마련하는 것은 거기에서 선생님이 뿌리신 생명기운을 받아 크고 작은 살림살이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뜻을 이어받은 여러 지역 후학들의 작품과 함께 부산지역 후학들의 작품도 선생님이 서화작품 곁에서 같이 큰 절을 올리는 것입니다.


     “바람 바람 바람은 서 있는 놈이 없으면 바람도 아니야”

     몰아치는 바람 바람에 흩날리는 난초잎들의 세찬 물결, 거기에 한 줄기 뻗어 서있는 난초꽃잎을 보십시오.

     세찬 바람이 있기에 의기로움이 있고, 의기로움이 있기에 바람이 바람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충돌하며 화쟁하는 혼연지일기(渾然之一氣)의 활동하는 모습입니다.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뿌리는 생명기운의 바람입니다.


    모시는 이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 이청산(부산민예총), 박영관(민주공원), 김명숙(부산한살림), 임재택(생태유아공동체), 오상훈(부산대사학과), 박준건(부산대철학과)





    소리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가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글그림전


    일시 : 2013년 10월 29일(화) ~ 11월 3일(일)  오전10시 ~ 오후 5시

    장소 : 민주공원 3층 기획전시실


    전시1 : 무위당 장일순의 생애

    전시2 : 무위당 장일순의 글그림

    전시3 : 무위당의 후학들 작품

    전시4 : 부산지역 작가 작품



    개막식

     일시 : 2013년 10월 29일(화) 오후 5시

      장소 : 민주공원 3층 기획전시실

               

    축하공연

      일시 : 2013년 10월 29일(화) 오후 5시 30분

      장소 : 민주공원 3층 기획전시실  

     내용 :  ○ 춤 - 하연화    ○ 연주 - 청    ○ 소리 - 홍순연  

        

    살림의 날 :

      10월 29일 15:00~17:00  소극장

        토크콘서트 ‘생명사상의 스승 무위당’ : 이현주목사와 우창수의 노래나무심기

    협동의 날 :

       10월 31일 13:00~15:00  소극장

        영화상영   We can do that(111‘) - 협동운동

      10월 31일 15:00~17:00  소극장

      강연 ‘무위당의 생명사상과 협동운동’ : 김용우(원주 한알학교장)

      모심의 날 :

        11월  2일 13:00~15:00  소극장

        영화상영   동경핵발전소(110‘) - 탈핵운동

      11월  2일 15:00~17:00  소극장

      강연모시는 삶’     :    한원식(농부)

     한살림의 날

       11월 2일 17:00~  중극장  부산한살림 생산자 ‧ 소비자 만남의 날

       11월 3일 13:00~15:00  소극장   영화상영   GMO OMG(92‘) - 먹을거리

       11월 3일 15:00~17:00  소극장   부산한살림 20년사 발간기념 행사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글그림전 부산추진위원회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사상에서 배우고, 생활속에서 옮겨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2013년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글그림전을 부산에서 준비하는 모임입니다.


    단체 추진위원  : 무위당 만인회, 민주공원, 민족미학연구소, 부산민예총, 부산한살림,  부산생협, 생태유아공동체, 연제공동체, 부산실업극복지원센터부설협동사회연구회, 부산시민센터, 마을만들기지원센터, 민주시민교육원‘나락한알’, 우창수의 노래나무심기, 울산한살림, 가톨릭센터, 부산초록온배움터, 대천마을학교, 부산노동자생협, 부산YWCA생협, 빛뜰협동조합, 맨발동무도서관, 부산귀농학교, (사)금샘마을공동체, 천도교 한울연대, 천도교 포덕영우회


    개인 추진위원 : 오상훈, 박준건, 이용흠, 장병윤/정명숙, 윤일성, 신종권, 김해창, 김홍주, 배다지, 송기인, 강희철, 안하원, 박중록


             무위당 장일순은 누구인가?

    장일순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좌표

    한살림 등 대안운동 통해 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의 길 연뒤 67세로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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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 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다.

    30대 초반에는 '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특히 삼십 대 중반,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 장일순은 그 뒤로 파워 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 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다.

    19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 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살림의 세계관인 생명평화사상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세계적인 사상가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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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사상은 하늘과 땅과 내가 한 뿌리라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1992년 6월       원주 행구동 밭에서 새싹을 돌보는 무위당 선생.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은 채 이루어냈고  또한 평생 돈벌이를 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부부간이나 가족간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장일순을 두고 세상은 제가와 평천하를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두루 잘 아우른 사람이라 말했다.

    무위당의 면모는 성장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친 일이라거나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조부의 모습은 어린 장일순에게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했는데 이러한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조부를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칭했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럽되 언행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또한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년 중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위당 장일순에 대해 세상은 부모 없는 이들의 맏형으로 아버지로 모시는 등 세상의 애정은 각별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한눈에 반했다 했고 목사 이현주는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다.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라 했고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 이슬'의 김민기는 그를 아버지로 섬기고 살았다. 판화가 이철수는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았고 일본의 사회평론가 쓰무라 다카시는 마치 '걷는 동학' 같은 인물이라 평했다.





    ■무위당 장일순 약사


    20세기 경쟁과 투쟁의 논리, 인간의 오만과 횡포를 넘어 이 땅에 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의 큰 길을 연, 우리 시대 마지막 '도덕 정치가','초야서가草野書家'의 문인화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도덕 정치가'이자 마지막 '초야서가(草野書家)'의 문인 화가였던 무위당 장일순은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다니던 한 시절을 빼고는 줄곧 원주에서 살았다.

    무위당은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해방구였던 원주 캠프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50년대엔 원주 대성학원을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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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위당 선생에겐 늘 가르침을 묻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91년 겨       레의 노래 공연 직후 서울 잠실에서 김민기, 김지하 시인과 함께 하고 있다.


    1960년 4.19 직후 혁신 정당이던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으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중립화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던 그를 감옥에 가뒀다.

    이후 장일순은 정치 정화법과 사회 안전법에 묶여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그런 와중에도 지학순 주교, 시인 김지하, 박재일 등과 함께 강원도 일대의 농촌과 광산 지역의 농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 운동을 지도하면서 원주 해방구를 일궈냈다.

    이후 무위당은 1972년 이후부터 1979년 유신정권의 붕괴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농민운동 등 제반에 걸쳐 반유신 저항 운동의 정신적 표상으로 막후 지도를 해왔다.

    걷는 동학이라 불리던 장일순은 밥이 곧 하늘이고 모든 생명은 하나임을 일깨우며 80년대엔 한살림운동을 이끌어냈다. 원주 봉산동의 그의 집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피난처이자 오아시스였고 장일순은 그들의 사상적 버팀목이 되었다.  

    말년의 아호를 한 알의 작은 좁쌀이란 의미의 일속자一粟子로 스스로를 낮춘 무위당은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 주창하며 20세기 경쟁과 투쟁의 논리, 인간의 오만과 횡포를 뛰어넘는 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의 큰 길을 열어놓고 1994년 5월 향년 6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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