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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동학기행(7일간의 순례)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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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송암이윤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3,915회   작성일Date 13-10-08 22:39

    본문


    제1차 동학기행(7일간의 순례)
                -순례기간 9월 28일~10월 5일-

                                                                                글.사진/송암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 목차 -

    1. 삼천포교구 백주년기념행사

    2. 동학, 천도교 제1성지 용담정
    3. 해월신사 성지, 포항지역순례
    4. 대신사 순도지 대구지역 순례
    5. 진주 원동마을 궁을촌에 가다.
    6. 정읍.부안지역, 익산사자암순례
    7. 장군들의 유족과 묘소를 찾아서


    1. 삼천포교구 백주년기념행사

    나에게는 작은 꿈이자 소원이 하나 있었다. 전국의 동학, 천도교 역사기행을 하는 것이다. 성지순례의 마음자세로 동학의 발생지인 경주 용담정을 비롯하여 스승님의 자취를 찾아 걸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유적지와 3.1독립만세운동의 사적지도 걸으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소박한 꿈이었다. 간간이 일정기간을 정하지 않고 기행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7일간의 순례를 정해놓고 중요사적지를 형편에 맞게 골라 순례하였다. 마침 사천시 삼천포교구에서 ‘사천. 삼천포교구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등고 경상도일대 성지순례를 결심하였다.

    9월 28일 오후 전주를 출발하여 삼천포에 도착하였다. 전주에서 삼천포까지는 정암 주선원님과 동행을 하였다. 정암장님은 멀리 서울에서 출발하여 이곳 전주까지 오셔서 필자와 함께 자신의 승용차로 수고하여 주셨다. 삼천포지역에는 자신을 스스로 주선(술좋아하는 신선)이라 칭하는 심암 이규남 동덕님이 '가야건재'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심암장님은 역학과 동양철학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도인이셨다. 그곳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명화당 장정숙 선도사님이 반겨주셨다. 또한 심암장님의 내수도이신 숙성당 박송학님께서 우리가 오는 모습에 화들짝 놀래시며 반겨주셨다. 우리들은 밤이 늦도록 도담을 나누며 천포형제의 우정을 다졌다. 

    다음날 9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우리는 삼천포교구로 출발하였다. 삼천포교구에 도착한 나와 주정암님은 교구주위의 마을들을 돌아보았다. 삼천포교구는 소문대로 명당자리임이 분명하였다. 교구 뒤에 있는 와룡산이 잠에서 깨어 산아래의 삼천포교구에 신령한 기운을 내려보내고 있는 모습과 같았으며, 드넓게 펼쳐진 논밭의 대지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이하 대신사라 칭함)님의 경전‘시문’의 글귀를 떠오르게 하였다. ‘겨우 한 가닥 길을 얻어 걸음걸음 험한 길 걸어가노라. 산밖에 다시 산이 보이고 물밖에 또 물을 만나도다. 다행히 물밖에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밖에 산을 넘어 왔노라. 바야흐로 들 넓은 곳에 이르니 비로소 대도가 있음을 깨달았노라.’ 이와같이 삼천포교구는 지형의 특수성과 교인들의 노력에의해 서서히 포덕광제로 다가서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100주년 기념행사의 시간인 오전 11시가 다가오자 원처근처에서 풍운같이 모아드는 천도교인들의 모습에 사천. 삼천포교인들의 기뻐하는 표정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1부-기념식, 2부-백년사 출판 봉고식, 3부-한울님 덕을 나눔(점심 베풀기), 부외-교령님과 대화 등으로 성대하고 뜻 깊은 사천. 삼천포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게 되었다. 이번 기념행사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종교인으로서 한울님의 감응을 느꼈다. 하루 전부터 당일 날 비가 많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거론하며 모두들 걱정하였다. 많은 교인들의 기원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기념행사 1, 2부가 끝날 때까지 맑은 날씨였다. 그리고 기념식을 마치자 말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함께 모인 3백여 교인들은 말없는 가운데 한울님 스승님, 선열님께 감사하는 모습이었다.

    사천. 삼천포교구 100주년기념행사를 준비하시며 애써주신, 준비위원장 연암 강호경님과 사천교구장-신만석, 삼천포교구장 최봉수, 백년사출판에 수고하신 도암 장정갑님께 교인의 한사람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올린다. 또한 천도교중앙총부 박남수 교령님과 연원회 한광도 의장님을 비롯한 많은 교역자, 교인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특히 사천. 삼천포지역 국회의원님, 시장님, 시의회의장님, 시의원님 등 기관장님들께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나는 이번 백주년기념행사에 참여하면서 포덕광제의 기운을 몸과 마음으로 확연히 느꼈다는 고백을 해본다. 

    * 사천. 삼천포교구설립 100주년기념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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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포교구 전경(백주년기념식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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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수 교령님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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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식에 참석한 내외 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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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삼천포교구 백년사

     

    2. 동학, 천도교 제1성지 용담정

    10월 29일 오후, 삼천포교구기념행사와 뒤풀이를 모두 마치고 나는 예정되었던 경주 용담정으로 갈 준비를 했다. 용담정까지 이동할 차량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중 서울에서 온 화암 고시형동덕님이 선뜻 동행할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화암장과 한차로 온 박길수, 이재선, 최은석 동덕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세분 동덕님들은 미소로 화답을 주었다. 삼천포교구를 출발하여 용담정까지 이동하는데 약 3시간정도 소요되었다. 서울로 직행하는 것보다 2시간가량 더 소요되는 것에 미안함이 있었다. 그런데 후배동덕님들의 넓은 아량으로 평안하게 용담정으로 향했다. 

    함께한 일행들이 용담정에 가까워지자 그 부근 식당에서 자암 박남성 원장님과 내수도 수인당 김정자님께서 미리 칼국수를 주문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천도교 성지인 구미산 기슭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에서 먹는 음식이라 꿀맛같은 느낌이었다. 화암장 일행은 곧 서울로 향하고 나와 박원장님, 수인당 사모님은 용담정에 가서 향긋한 차와 무공해 어름열매를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자암 원장님은 언제 뵈어도 도인의 풍모를 잃지 않는 천도교 수행자였다. 그리고 수인당 사모님은 늘 웃는 낯꽃에 많은 사람들에게 편한함을 주는 선녀같은 분이다. 자암 원장님과 도담을 나누는 사이 수인당님께서 내가 먹을 아침밥과 반찬을 미리 챙기시고 이부자리까지 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감개무량(마음에 깊이 사무치는 느낌이 그지없었다.)하였다. 

    용담정에서 하룻밤 지낸 소감은, 성스러움과 경이로움 자체였다. 그리고 대신사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1~2시간 홀로 주문수련을 하는 기분은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다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음날 9월 30일 이른 오전에, 대신사님 존영 참배와 용담정 여러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대신사님의 용담가 중 이런 글이 머리를 스쳤다.
    '수세도 좋거니와 산기도 좋을시고. 금오는 남산이오 구미는 서산이라. 봉황대 높은봉은 봉거대공 하여있고 첨성대 높은탑은 월성을 지켜있고. 청옥적 황옥적은 자웅으로 지켜있고. 일천년 신라국은 소리를 지켜내네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런승지 구경하소. 동읍삼산 볼작시면 신선없기 괴이하다.' 
    이어서 대신사님 생가 순례와 포항지역 해월 최시형 신사님(이하 해월신사라 칭함) 성지순례를 위해 짊보따리를 챙겼다. 그리고 박 원장님과 차를 한 잔 마시는 사이, 군암 박남문 동덕님이 용담정에 도착하였다. 박원장님과 나는 군암장의 차를 타고 대신사 생가복원현장으로 갔다. 이제 제법 규모를 갖추어가는 생가복원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언제나 큰형님처럼 잘해주시는 박원장님은 생가터에 머무르시고,  군암장님과 나는 포항으로 향했다.

    * 용담정과 대신사 생가복원 모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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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정 포덕문(박남성 원장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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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정 대신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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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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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사 득도지, 와룡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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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정(용담서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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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정 대신사 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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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사 생가 터(복원공사가 한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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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사 생가터 유허비를 오른쪽으로 옮겨 공사중이다.

     

    3. 해월신사성지, 포항지역순례

    9월 30일 오전, 군암 박남문 동덕님과 해월신사 성지,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에 있는 ‘검곡(금등골)’에 도착하였다. 기다란 저수지를 지나 고불고불 오솔길의 산길을 한참 오르다보면 ‘천도교성지, 검곡’가는 길의 팻말이 나온다. 해월신사께서 동학-천도를 지키며 수행하시던 곳이다. 대신사 순도 후 해월신사를 잡으려는 관군에 의해 폐허가 된 이후 산야에 묻혔고 현재에도 성지라 할 수 없을 정도 버려진 땅이 되었다. 10월초, 지금은 숲이 우거진 관계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검곡 뒤쪽에 솟아있는 괘령산을 등지고 우리는 돌아서야 했다. 이른 봄이나 늦가을에 올라갈 수 있다는 군암장의 설명이다. 이어 우리는 검곡에서 5리정도 떨어진 마북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해월신사는 이장(집강)일을 보셨다 한다. 다음은 마북에서 산등성이 하나 넘어 기일리로 향했다. 기일리는 해월신사님께서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며 제지소 직공일을 하시던 곳이다. 현재 제지터에는 가옥이 두 채 있었다. 말그대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군암장의 말에 의하면 해월신사께서 마을이장 등 직무에 충실한 공로로 지역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해월신사 송덕비는 언제 없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포항지역 순례를 하면서, 동학, 천도교의 성지가 분명 있는데도 성역화가 되지 않는 것은 말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다음은 신광 대로변 하천과 밭 사이에 세워진 해월신사 어록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록비는 해월신사 순도 100주년 기념으로, 신광면 주민들과 천도교인들이 함께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 신광중학교 학생 이향미 글씨로 해월신사 말씀을 새겼다. 해월신사 어록비에 새겨진 대인접물 중 한소절을 소개한다.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
    이렇게 포항지역 순례를 마치고 군암장이 재직하고 있는 ‘포항제철소’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는 포항 특미의 물회가 맛있다는 소문이다. 나는 처음 먹어보는 물회가 진짜 맛이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군암장 승용차로 천도교대구교구로 가기위해 포항터미널로 향했다. 나는, 언제나 믿음직한 군암장님께, 포항지역 동학-천도교 향토사학가로 거듭 나시길 부탁하며 대구로 출발했다.

    * 포항지역 성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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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유적지 검곡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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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가 근무했다는 제지소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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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어록비(해월 최시형 선생님 말씀-대인접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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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문 동덕님이 근무하는 포항제철소를 배경으로(영일만 해변)

     

    4. 대신사 순도지 대구지역 순례

    나는 9월 30일 오후 대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부근에서 기다리는 천도교대구시교구 광암 서광우 동덕님을 반갑게 만났다. 광암장님 차로 대구시교구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그리고 광암장님과 나는 대신사님 성지를 순례하였다. 제일먼저 간 곳은 대신사님 순도(순교)터인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 있는 동아백화점이었다. 그곳 백화점자리가 분명 대신사님 순교터라는 대구시교구 교인들의 일관된 이야기다. 또한 향토사학가이며 대구시문화해설가 출신인 연암 추연창 동덕님의 말씀도 뒤바침 해준다. 현재 ‘관덕정’ 자리에 천주교(서학)에서 건립한 ‘천주교순교기념관’이 있다. 당시 대신사님처럼 중죄인 처형장소가 아닌 평범한 천주교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추정된다. 사실 천주교순교기념관 자리는 대신사 순도자리가 아님이 확실시 되고있다. 그래서 필자는 대신사순도비건립예정지인 동아백화점 북서쪽 측면 차량 나오는 곳, 바로 우측에 있는 작은 화단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대신사 순도비 세우기는 평수가 작지만 백화점측의 무상영구임대가 된다면, 그 자리에 순도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이곳 외 대신사 순도비를 세울만한 장소가 거의 없다는 판단이다. 내년 포덕 155년이 바로 대신사 순도 150주년이다. 필자는, 대신사 순도터에 기념비 하나 없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고민스러웠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이 천도교인의 한사람으로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대신사님 순도터에서 큰 길 건너 ‘천주교순교기념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한참을 서있었다. 천주교순교기념관이 보라는 듯이 건립되어, 천도교인으로서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순도 100주년기념으로, 달성공원에 대신사 동상을 세웠지만, 순도터에는 150년이 다되도록 아무런 표지석하나 세우지 못한 것은 교단차원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천주교순교기념관에서 다시 동아백화점쪽으로 향했다. 대신사 순도기념비를 세울 예정된 장소에 서있다보니, 대신사님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 하였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내가 선화仙化한지 150년이 되어가건만, 현재 천도교의 모습을 바라보면 한숨만 절로 나온다. 나는 천도동학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 바쳐 성령의 힘으로 대도 중흥을 도우려 하지만 너희들의 하는 일들을 보니, 걱정이 크도다. 제발 정신들 차리고 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일심단결로 포덕광제에 앞장들 서라.”... 나는 스승님 말씀에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운 대선생님, 저에 능력은 많이 부족하오나 부족한만큼의 노력으로 스승님 정신을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어 대신사님께서 대구감영에 갇히시어 엄천난 고문을 받던 곳에 빠른 걸음으로 도착했다. 필자의 옆에서 묵묵히 순례를 안내하던 광암장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말씀 던지듯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대구시교구에서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대신사님 순도비를 세우겠습니다.”의 말씀이 내 귓가에 우렁찬 소리로 들려왔다. 이어 대구감영자리로 이동했다. 대구감영의 선화당을 복원한 멋들어진 기와집과 공원이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이어 우리는 대구종로초등학교 ‘최제우 나무’로 향했다. 종로초등학교에 있는 최제우 나무는 회화나무로서 대신사님이 갇힌 독방을 바라보았다 하여 일명‘최제우나무’가 되었다 한다. 

    어느새 해가 서쪽에 기울며 붉은 하늘의 노을이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는 서둘러 달성공원으로 향했다. 달성공원 입구에 들어서 조금 오르면, 오른쪽에 대신사님 동상이 보인다. 대신사 동상 조형물을 보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시천주 신앙의 상징적 표현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광암장님과 나는 ‘대성인’이신 대신사님 동상 앞에서 예의를 갖춰 심고를 올렸다. 그런데 대신사 동상 뒷부분에 여러 동물들을 사육하며 동물원을 운영하는 바람에 악취가 코를 찔렀다.내가 좀 우려스러운 표정을 짓자, 광암장님 말씀에 의하면, 머지않아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대구시 계획을 말씀 하였다. 

    우리는 달성공원을 나와 고서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나 대신사님 친필등 체포당하실 때 압수당한 자료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결국 대신사 친필을 찾지 못하고 광암장님과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대구시교구로 향했다. 대구시교구는,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약간 들어서면 아담하고 소박한 교구건물이 나온다. 2층으로 되어있는 교구건물은 1충에 사무실과 잠자리를 할 수 있는 방이 하나 있다. 2층은 천도교시일을 모시는 교당이, 여느 교회당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대구시교구에서 하룻밤은 나에게 천도교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어느 어디를 가나, 천도교인들은 천포형제답게 온갖 정성으로 교인을 대하는 모습에, 천도교는 정말 잘 되리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다음 날 10월 1일,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의 아침이 왔다. 개인사업가로서 바쁘신 광암장님이 김밥에 도시락까지 가져와 아침식사를 하였다. 식사와 구수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광암장님은 일터로 향했다.  바로 그때 대구시교구 생수당 박위생교구장님과 영암 최영식 내외분이 오셨다. 두 분께서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수십 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진 이산가족상봉처럼 기쁨의 만남같았다. 생수당 내외분은 대신사 순도비 건립준비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나는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송함과 적극 돕지 못하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대신사 순도비 건립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직접 듣지 못한분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필자는 교단차원의 대책과 전국의 천도교인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자세로 한울님 스승님께 지극한 심고를 올렸다.

    생수당님께서 향토사학가 연암 추연창 동덕님을 불러 모셨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대구지역 성지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순도비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들었다. 나는 천사님 감응과 대구시교인들의 노력으로, 대신사 순도비가 예정대로 세워질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드렸다. 생수당님 그리고 두분 교역자님들과 순례를 하며 나눈 대화는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의 말씀으로 새겨졌다. 나는 대구시교구 관계자들과 헤어지며 다시 대구시청 부근 고문서책방에 들렸다. 대신사님 친필유물을 찾을 욕심으로 관찰하였으나, 역시나 찾지 못하고 당일 오후 진주터미널로 향했다. 원래 이번 성지순례를 진주지역부터 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사정상 처음 순례지를 삼천포 교구로 바꿨던 것이다.

    * 대구지역 대신사 순도성지 순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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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종로초등학교 최제우 나무(회화나무)앞에서(서광우 동덕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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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감영자리, 우측이 복원된 선화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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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달성공원 대신사 동상(대신사 순도 100주년기념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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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사순도비 건립예정지(대구 동아백화점-북서쪽 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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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시교구 생수당 박위생 교구장님과(수운 최제우 순도비건립 준비위원회 현판앞에서)

     

    5. 진주 원동마을 궁을촌에 가다.

    10월 1일 오후 진주터미널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한 진주교구 탁암 심국보 동덕님과 만났다. 탁암장님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소탈하시며 대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특유의 웃음을 간직한 학자스타일이다. 탁암장님 내수도 서소연 선생님이 승용차를 가지고 오신다기에 한참을 기다리며, 진주지역 가을축제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저녁 해가 기울 무렵 서소연님이 도착하였다. 서소연님이 운전하며, 진주시 일반성면 남산리 원동부락으로 향했다. 원동부락에는 수암 김희수 직접도훈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시골 고향마을로 귀촌한 수암장님의 모습은 도인의 풍모와 함께 농부가 다 되어가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장부와 같은 위엄도 풍기는 분이시다.

    수암장님 누님 되시는 분의 정성으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참 나누면서 탁암님 내수도 서소연님을 바라보니, 밝고 환한 얼굴에 미모와 말담까지 갖춘 여걸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으로 보였다. 필자와 오래전부터 수암장님, 탁암장님은 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소연님은 처음 뵈었는데도 금방 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탁암님과 소연님은 진주 집으로 향하고 나와 수암장님은 원동마을 바로 뒤 외딴집‘원동 수덕실’로 갔다. 원동 수덕실은 오래전 묵암 신용구 선생님께서 천도교 강론과 설교 등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유서 깊은 곳으로 알려졌다.

    수암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 수덕실이 모체가 되어 진양교구가 탄생되었다 한다. 수암장님과 나는 함께 기도수련을 같이 하며 하룻밤을 지냈다. 10월 2일, 나는 수암장님과 원동마을 부근을 돌아봤다. 수암장님 소유의 수만 평의 산야를 눈으로 확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수암장님과 경상도청장년들은 이곳에 궁을촌을 꿈꾸며 여러 가지 사업들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전라도지역 천도교에 비해 교세가 월등한 경상도지역 천도교인들이 정말 부러웠다. 필자도 언젠가는 전북 부안에 있는 ‘호암수도원’을 중심으로 궁을촌을 생각해왔기에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수암장님의 따듯한 배려와 수암장님 누님의 감칠맛 나는 시골음식의 고마움을 간직한 채 원동마을에서 1박2일을 마쳤다. 수암장님과 나는 점심을 같이 먹고, 곧 진양교구로 향했다. 진양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등사기가 있다는 중요정보에, 사진도 촬영하고 역사도 기록하려고 갔는데, 진양교구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수암장님과 교구 안에 들어갈 방법을 모색해보았지만, 교구관계자들의 바쁜 일정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고 경상도일대순례를 일단 마감하게 되었다. 더 많은 지역이 있겠지만 일정관계상 전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본 글을 비러 수암장님과 탁암장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이상 경상도일대 동학, 천도교 순례에 대한 소감을 마친다.  

    * 진주지역순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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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동마을 앞에서 수암장님과 함께(460년 정도 된 회화나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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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동, 천도교수덕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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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교구(3.1 독립선언서 등사기가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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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남강 유등축제 현장에서(필자)

     

    6. 정읍.부안지역, 익산 사자암 순례

    10월 3일 개천절 아침이다.(필자는 10월 2일 진주를 출발하여 저녁 늦게 전주에 도착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며 간간이 메모한 기행 글과 사진들을 정리하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왠지 진암 박영인 선도사님 환원 1주기(10월 3일)에 역사기행의 날들과 겹쳐 참석치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지극한 심고로 대신했다. 10월 3일 오전, 예전에 기행 했던 곳들을 다시 돌아볼 생각으로 전북지역 주요 사적지 탐방에 나섰다. 전주를 출발하여 원평 옆 황새마을, 전봉준장군이 청소년시절 살면서 서당을 다닌 집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정읍 신태인을 거쳐 이평면에 있는‘만석보유지비’에 도착했다. 탐관오리 조병갑군수의 수탈을 상징이라도 한 듯 커다란 둑 위에 유지비는 우뚝 서있었다. 만석보를 지나 ‘만석보혁파비’를 살펴보고 곧바로 황토현 기념탑으로 향했다.

    올 10월 3일은 '갑오동학혁명기념탑'건립 50주년의 기념일이다. 오늘 정읍시청 주최로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여러분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서울에서 오신 고시형 동학민족통일회 집행위원장님과 성주현 상주선도사님, 동학문화역사연구소 조광환 선생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기념식이 끝나고 천도교중앙총부 김인환 종무원장님과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고윤지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정읍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건립에 정읍지역주민들은 물론 전북지역 유력인사들이 나서서 동학혁명 최초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국최초의 동학혁명기념탑이다. 기념식이 끝나고 정읍시청에서 준비한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임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내년 동학혁명120주년기념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환하였다. 식사 후 유족회 임원들과 천도교에서 참여한 분들을 모시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무실로 이동하였다.

    재단사무실에서 재단임원과 유족회 임원 그리고 천도교임원들간에 내년 사업들과 앞으로 전개될 동학혁명계승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필자는 삼천포교구에서 가져온 ‘사천. 삼천포교구100년사’ 한 권을 김인환 종무원장님께 드려 재단사무처장에게 기증하게 하였다. 재단방문을 마치고 동민회 상임의장과 총부 종무원장님을 고시형동덕께서 모시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나와 성주현박사는 부안군 백산면으로 향했다. 일명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으로 알려진 백산성터에는 ‘동학혁명창의비’가 있다. 현재 천도교에서는 공식적으로 ‘동학혁명기념일’을 백산기포일 3월 21일로 하고 있다. 이날 21일은 해월신사탄신기념일이기도하다. 백산에서 성주현박사와 동학혁명에 대해 많은 의견교환을 하였다.

    우리는 백산에서 하산하고 필자의 차로 성주현박사를 익산역까지 모셨다. 그리고 나는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 사자암으로 향했다. 사자암은 해월신사께서 제자들과 49일 기도를 하였다는 곳이다. 사자암 입구에는 주차장 시설이 있고 가파른 돌계단을 약 20여분 오르다 보면 복원된 사자암이 나온다. 이곳은 풍수지리로 봐 수도하는 사람이 거처하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진돗개로 보이는 개들이 다섯 마리정도가 눈알을 부라리며 쳐다본다. 무슨 절간에 맹견들이 득실거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월신사님이 49일간 거처하신 사자암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신체가 건장한 주지스님이 불청객인 나를 애써 외면하는 듯 했다.

    필자는 ‘역사를 공부하는사람이라’ 스스로 소개하고 해월신사님의 49일 기도에 대해 여쭤보았다. 뭔가 신비한 대답을 기대한 나는, 주지스님의 싱거운 대답‘전혀 모릅니다.’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약 2년 전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와 그런 질문을 했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이곳 사자암은 원래 사자사였다. 사자사 부근에 암자가 있었는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현 주지스님이 현존하는 사찰 대부분을 건립하였다 한다. 나는 주지스님과 해어지고 사자암 밑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자암은 마치 남원의 은적암을 생각하게 하였다. 쫒기는 자들이 숨어지내며 수도하기에 좋은 하늘이 감춘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해월신사님은 나처럼 여기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의 상상을 하며 어둠이 짙어오는 것을 보고 사자암을 내려왔다. 그리고 내일(10월 4일)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장군(동학 대접주)후손들과의 면담을 생각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 정읍.부안지역, 익산 사자암 순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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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만석보 유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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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만석보혁파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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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황토현, 갑오동학명기념탑 건립 50주년(우측부터, 성주현-김인환-고윤지-이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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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회(이철규-90세)-녹두장군을 숨겨줬다가 큰 피해를 본 이종록의 손녀, 증언청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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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군 백산, 동학혁명군 창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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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시 미륵산 사자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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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암 대웅전 앞에서(필자)

     

    7. 동학군 장군들의 유족과 묘소를 찾아서

    10월 4일, 동학혁명지도자 대접주(장군)들의 후손과 묘소를 찾아 나서는 계획에 따라,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 신함식 동덕님을 만났다. 신동덕님은 나의 권유에 따라 몇 년 전 천도교에 입교한 걸쭉한 인물이다. 검도 고단자에다 힘꼴 꾀나 쓰는 사나이의 기질이 다분하다.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동학농민혁명기념행사를 거뜬히 소화해내는 기념행사경험이 남다른 분으로 소문이 나있다. 신함식 동덕이 미리 동학대접주 후손들에게 연락하여 필자와 인터뷰약속을 잡아놓았다. 나는 정읍계승사업회에서 신함식 동덕과 정읍 상평동 음성마을에 사시는, 손화중장군 손자 손홍렬 선생을 찾아뵈었다. 필자와 오래전에 몇 번 만났는데 손선생은 기억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손홍렬 선생과 나는 약 2시간 질문과 답변의 인터뷰를 하였다. 나는 꼼꼼히 손선생의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갔다.

    손선생의 증언은 손화중장군 내수도이신 할머니께서 아들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현재 손자인 자신에게 전해졌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중요한 이야기 몇 개만 소개하기로 한다. 손선생 말씀에 의하면, 손장군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잘생겼다한다. 해월 최시형 교주님과 손화중장군의 사이는 아주 각별했다고 한다. 그리고 6세 연상인 전봉준 장군과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손화중 대접주께서 혁명 전 동학포교(포덕)을 위해 집에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와 혁명 후 집안의 멸문지화로 엄청 고생하였으며, 옥구로 이사해 여러 곳에 피신하였다 한다. 그리고 성과 이름도 몇 번 바꾸며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는 선조들의 고생담이었다. 장시간 인터뷰가 끝나고 손화중장군 묘소를 참배했다. 묘소는 손장군의 고택인 음성마을에 있다.(손화중장군의 묘는 빈묘(가묘)이며, 부인 고흥유씨와 영혼의 합장을 하였다.)

    다음은 정읍 산외면 지금실에 사는 김개남장군의 증손 김종기 선생을 만나로 갔다. 손화중장군 후손과 인터뷰가 길어지는 바람에 김종기 선생이 밭에 일하로 나간 상태였다. 신함식 동덕과 나는 정읍시 산외면 지금실 마을 입구에 있는 김개남장군 묘소를 참배했다. 김개남장군 묘소도 손장군처럼 빈묘(가묘)이다. 증손인 김종기 선생과 손전화 연락이 되어 겨우 산 넘어 일하시는 밭으로 향했다. 개남장군이 5척단신(150)의 다부진 신체라서 그랬는지 증손도 역시 작은 키에 야무지게 보였다. 필자가 오래전에 개남장군 큰 증손을 몇 번 찾아뵈었는데 이미 돌아가셨다 한다. 그래서 둘째 증손은 처음 대면하는 사이이다. 김종기 선생은 뜨거운 태양에 그을린 새카만 모습의 전형적인 농부였다. 밭에서 열심히 고추를 따고 있다가 필자와 약 1시간 30분가량 인터뷰를 하였다. 김선생은 입을 열자 말자, 한숨을 쉬며 동학의 후손이 이렇게 산다며, 원망의 눈빛이 역역했다.

    김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결코 증조할아버지인 개남장군이 과격한 분이 아니었다고 한다. 개남장군님은 학식도 있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양심적인 분이라고 강조한다. 혁명당시 동학군들이 자신의 집과 동네에서 3천명이 3일간 숙식을 하였는데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3일의 마지막 날 김장군 내수도는 곡식이 떨어졌다는 핑계로 밥을 해주지 않자, 개남장군은 부인 앞에서 큰 절을 올리며, ‘나라를 위해 일어섰으니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하였더니, 내수도께서는 우리집 아이들 식량이 없을 것 같아 숨겨놓았다는 말씀과 함께, ‘장군님 나라를 구하소서’하며 마지막 식량까지 털어 동학군을 먹였다는 일화를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김개남 장군의 이야기는 개남장군이 해월선생에게 정성 것 몇 벌의 옷을 지어 바쳤다는 것과, 해월선생을 극진히 모셨다는 것으로 마친다.

    다음은 최경선장군 후손과 만나려 했는데, 멀리 나가 있어서 만나질 못해 최장군 진묘인 묘소참배만 했다. 그리고 신함식 동덕을 정읍으로 보내고 김제원평 동학혁명유적지와 3.1운동 사적지를 탐방했다. 그리고 거야마을로 향했다. 거야마을은 필자의 고향마을로서 동학대접주인 김덕명장군 후손들과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살았던 곳이다. 나는 우선 해가 지는 저녁이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거야마을 뒷동산 굴미(조포동-새가 알을 품고 있은 지형)의 김덕명장군 묘소를 참배했다. 김장군의 묘소는 원래 은곡(절골) 있었는데 몇 해 전 파묘 화장하여 현재 장소인 집안납골당으로 모신 상태다. 증손들이 모두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묘소관리상 그랬다 하지만, 전봉준-손화중-김개남 장군들의 묘가 가묘(빈묘)라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게 한다. 김덕명장군 묘소참배를 마치고 나니 해가 서산에 기울며 어둠이 밀려온다. 내가 간덩이가 부었는지 깊은 산골에서도 선열님을 찾아뵙는 것에 어두운 밤의 무서움도 사라졌나 보다. 김덕명장군 묘역에서 거야마을로 나오자, 석양의 붉은노을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재 필자의 고향마을에 김덕명장군 큰 증손인 김석태 선배께서 어렸을적 살던 집터에 2층집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우연인지 김선배님은 서울에서 내려와 며칠을 묵고 있었다. 김선배님은 나를 보자 무척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김선배 집안에 들어서자 말자 나는 깜짝 놀랐다. 김덕명장군 초상화가 벽에 걸려있는 것이다. 2~3년 전만해도 사진이나 초상화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장군의 초상화 내력을 내가 묻자 김선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합성하고 후손들의 증언에 의해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김장군 후손들의 얼굴을 합성하고 각색하여 증조부님 초상화가 완성된 것이다. 김선배님과 나는 김선배 부인되는 형수님께서 거나하게 차려준 술상을 받았다. 나는 6박 7일간의 순례를 마치는 날이므로 김선배와 마음껏 술잔을 들었다.

    김선배는 증조부님을 닮아서 건장한 체격이다. 김선배는 술기운이 올라오자 방안에서 '고서' 몇 권을 들고 나왔다. 나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문헌자료 같았다. 필자는 눈을 부릅뜨고 고서를 살펴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바로 ‘성경대전’ 이었다. 해월신사 당시 1892년경 ‘동경대전’ 이름이 아닌 성경대전 제목으로 펴냈다는 바로 동학경전이였다. 나는 김선배를 재촉하며 또 다른 자료가 있으면 보자고 하였다. 김선배는 나를 방안으로 오라하며, 오래된 괘작(장농)을 열어 보여 주었다. 그 농속에는 수십 권의 고서들이 꽉 차있었다. 김선배 설명에 의하면, 증조부님부터 내려온 집안 유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 권 한 권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고서들은 주로 유교경전과 집안 족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성경대전과 '궁을가' 그리고 태극형태의 그림만 동학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김선배는 나에게 내년 동학혁명120주년에 성경대전을 전시하려면 기념관에 빌려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우리 둘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동학이야기(김선배 집안에서 전해오는)를 하면서 동네가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노트에 기록을 하였다. 밤이 깊어오자 나는 동네에 사시는 셋째형님 집으로 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눕혀 늘어지게 잠을 청했다. 10월 5일, 이윽고 새벽이 밝아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에서 이번 7일간의 순례를 마치게 되었다. 이러헌 성지순례와 유적지 탐방이 나의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앞으로도 여건이 닿는다면 전국의 동학, 천도교 기행을 통해 새로운 자료발굴과 나의 책을 집필하는데 중요한 참고내용으로 활용할 것이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동학군 장군들의 유족과 묘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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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화중 장군(대접주) 손자 손홍렬 선생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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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화중 장군 묘소에서, 손자 손홍렬 선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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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선 장군 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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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 장군(대접주)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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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 장군 증손, 김종기 선생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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