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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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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473회   작성일Date 13-09-0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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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3)

    4. 계몽주의문학 / 啓蒙主義文學(literature of enlightenment)

     

    '계몽주의 문학은 계몽사상을 표방하는 문학으로, 계몽주의는 문예사조라고 하기 보다는 18세기 서구에서 유행한 지적, 문화적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 더 어울려요. 여기서 '계몽' 또는 '계몽하다'라는 말은 과거의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 과학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모색하는 것을 뜻하는데,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문학사에선 최남선과 이광수의 작품들을 '계몽주의 문학'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들이 문학 작품을 통해 새로운 합리주의를 전파하고 그것에 의거해 당대 우리 민족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음을 깨우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봉건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문학으로,

    지식수준이 낮거나 의식이 덜 깬 사람을 깨우쳐 주는 것을 목표로 한 문학. 우리나라의 경우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이 이에 속한다. /국어사전

    근세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자아의식이 눈뜨면서 그리스도 교회와 봉건적 권위에 반발하여 이성적 판단과 인격적 존재를 존중하는 계몽사상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에 번졌다.

    이와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17~18세기의 문학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를 저술한 후부터 사상사에서의 용어가 되었다. 계몽이란, 아직 미 자각상태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신학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철학이란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 ·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서 삶의 실학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원의 물음에다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現世)의 과제가 덧붙여진다. 본류(本流)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 ·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源流)는 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 ·사상활동의 저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支柱)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 프랑스 계몽주의 문학 리포트 자료요약 /2009.10.16 레포트 플라이 등록 

    한국에서는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 위치하면서 이념적으로 유교를 받아들이고 정치적으로는 절대 왕권을 지향한 국가였다. 즉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경계 바깥의 지리나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유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기(技)보다는 도(道)를 존중했고 왕권의 권위를 신성화한 '자족적'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조선의 자족적 존속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조선은 동아시아의 바깥 국가들에 의해서 '발견'된 또 하나의 지리로 인정되어 거듭 통상 요구를 받게 된다. 결국 조선은 일본, 미국, 영국 등에 문호를 개방하여 바야흐로 '개화'의 노선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개화기의 사회 변동은 근대적 시민 국가의 형성으로 귀결되지 않았으니, 이 점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라 하여도 그리 과언은 아니다. "오로지 자기 역량으로 근대성을 쟁취하는 결정적인 우위에 오르지 못한 시민계급의 근본적 미성숙단계에서 조선왕조가 서구자본주의와의 파경적 충돌 속에서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강제로 편입되고, 더구나 후발 자본주의국 일제에 의해 그 편입이 대행됨으로써 20세기 초의 한국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즉 조선 사회는 일본에 의해 규율되는 부속 사회로 변질되어 버린다. 조선은 결국 일본의 압박에 의하여 문호를 개방하기에 이르게 되니 엄밀히 말해 조선의 개화는 '강요된' 개화였다. 그러므로 개화기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의 조선은 점차로 일본 제국주의의 경계 안으로 포섭되어 가는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논의를 이렇게 전개할 때 두 해를 기억해야 한다. 1905년과 1910년이다. 1905년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로 이 시기에 조선은 반식민지의 상태로 전락한다. 그리고 1910년은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완전히 병탈 된 해이다.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은 한국 사회의 위기 현상을 초래한다. 정치·사회적 위기는 말할 필요도 없으며 인식론적, 위기, 도덕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위기가 깊어지면 그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모색의 움직임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은 광범위하게 전개하게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차원으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은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언론, 종교, 문학, 예술, 학술,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진행된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힘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개화기 지식인들은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언론, 종교, 문학, 예술, 학술,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진행된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힘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가 확산되었다.’ / 현대문학사 중 ‘계몽주의 문학의 시대’의 내용요약 중에서

    ■ 계몽주의사상과 계몽문학.

    근세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자아의식이 눈뜨면서 그리스도 교회와 봉건적 권위에 반발하여 이성적 판단과 인격적 존재를 존중하는 계몽사상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에 번졌다. 이와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17~18세기의 문학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서양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왕성했던 사조로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다. 계몽주의 문학은 작가가 교사 선각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합리성에 호소하여 가르치려 하는 일종의 교훈주의 문학이다

    민중의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학 운동이 대표적인 것이며, 이성과 사실에 따른 비판정신으로 민중을 무지상태에서 해방시키고자 한 문학이다. 그 정신적 바탕은 인간 사회의 모든 불합리는 이성에 의하여 타파될 수 있다고 믿는 계몽사상으로, 그 당시의 문학가들은 가톨릭 교회와 특권 계급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의 경우는 1900~1910년대에 나타났다. 그 형태는 신채호·박은식·장지연 등이 중심인 것과 최남선과 이광수가 주동한 2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전자는 근대화를 통한 국권수호를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그들은 국한혼용문을 기본문체로 택하여 광범위한 독자를 흡수했으며, 민족사에 대한 재인식을 근거로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주된 장르는 위인전이었다. 후자는 문학표현의 근대화를 기본과제로 삼았으며, 자체의 전통을 계승하기보다는 서양 또는 일본 근대문학의 전례를 이식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비지성적인 단순논리와 반민족해방의 의지는 그 기반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 두 형태의 공통점은 작가는 시대의 선각자라는 인식과 문학의 사명을 독자의 각성에 두고 있는 점이다. / 문헌정보학 용어사전.

    ■ 독일의 계몽주의 문학

    유럽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작품의 총체로, 이전 세기를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라고 한다면 라이프니츠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으로 본질이 규정되는 계몽주의 시대는 이에 대한 반동의 시대였다. 교조적 종교는 이신론(理神論)에 자리를 양보했고 우주는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한 경건주의가 독일 종교계에 되살아난다. 문학 역시 교육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계발하고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현저하게 교훈적인 성격을 띠었다. 특히 영국문학의 영향이 점차 강해졌는데, 스위프트·디포·밀턴 등의 작품이 번역되었고, 영국의 선례에 따라 많은 도덕적 주보(週報)들이 발간되었으며 맥퍼슨의 〈오시안 Ossian〉이나 셰익스피어 등은 후에 독일문학의 새로운 시대, 즉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1724~40년 독일의 비평가 요한 크리스토프 고체트는 프랑스 고전주의에 입각한 문학개혁에 성공했다. 그는 〈독일의 비평적 시론에 관한 소론 Versuch einer kritischen Dichtkunst vor die Deutschen〉(1730)에서 보다 나은 문학을 생산하고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되는 원칙들을 규정했는데, 스위스의 요한 야코프 보드머와 요한 야코프 브라이팅거는 그의 경직된 이론에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을 바탕으로 상상력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여파가 고체트파 자체에도 영향을 미쳐서 브레멘 기고파 가 형성되었고, 1748년 프리드리히 고틀리프 클롭슈토크의 〈구세주 Der Messias〉(1773)가 일부 그들 기관지에 발표되자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천재성은 서정시에서 더 유감없이 발휘되어 감상적이고 애국적인 주제가 주종을 이룬 그의 송가들은 대단한 예찬을 받았다. 이 시기 서정시는 아나크레온풍의 서정시가 우세했는데, 바르톨트 하인리히 브로케스의 자연시, 요한 빌헬름 루트비히 글라임의 애국시, 프리드리히 폰 하게도른의 사교시, 알프레히트 폰 할러와 잘로몬 게스너의 전원시, 에발트 크리스티안 폰 클라이스트의 감상적 자연시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유럽 전역에 알려진 최초의 독일 비평가였다. 그 역시 고전주의를 신봉했지만 프랑스 고전주의가 아니라 동시대의 요한 요아힘 빈켈만과 같이 고대 그리스 예술과 문학을 모범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보다는 셰익스피어를 우위에 놓았으며 〈최근 문학동향에 관한 서한들 Briefe, die neueste Literatur betafend〉(1759~65)·〈함부르크 연극론 Hamburgische Dramaturgie〉(1767~69), 빈켈만을 연상시키는 비평 〈라오콘 Laokoon〉(1766)에서는 조형예술과 시문학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레싱에 의해 독일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는 이론 작업뿐만 아니라 〈사라 삼프손 양 Miss Sara Sampson〉(1755)·〈미나 폰 바른헬름 Minna von Barnhelm〉(1767)·〈에밀리아 갈로티 Emilia Galotti〉(1772) 같은 작품을 써냄으로써 다음 세대의 시민극을 예고했으며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1779) 같은 바이마르의 독일 고전주의 관념극의 선구적 작품을 낳았다. 그는 프랑스 문학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영국 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독일 본연의 창조성을 추구하는 길을 튼 사람이었다. 또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는 이국적인 문학을 소개함으로써 독일인의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운문 로망스 〈오베론 Oberon〉(1780) 외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심리소설 〈아가톤의 이야기 Die Geschichte des Agathon〉(1766~67)와 풍자소설 〈아프데라의 사람들 Die Abderiten〉(1774)은 독일 산문소설을 진일보시킨 작품이었다. / 브리태니커

    ■ 18세기의 프랑스문학

      구제도(ancien régime)가 허물어지고 대혁명이 일어나는 18세기는 계몽주의시대로 불리지만, 철학정신 발전의 전반기와 철학정신 승리의 후반기로 양분될 수 있다. 고전예술의 시와 웅변이 물러가고 정치 ·사회 ·도덕 ·종교 등 현실문제의 검토를 통해 땅 위의 인간 행복이 추구되는 18세기는 문학자도 철학자로 불릴 만큼 철학의 세기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계시에 바탕을 둔 전통적 신앙을 인식의 원리로 삼던 전통에서 벗어나 이성과 경험을 인식의 원리로 삼게 되고 그래서 과학의 권위가 종교의 권위를 물려받게 된다. 온갖 편견을 버리고 실증적 사실에만 입각해 새로운 인간조건의 확립을 꾀한 그들은 제도의 혁명에 앞서 정신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반기의 철학적 투쟁에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투사로서 싸웠고, 후반기에는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와 루소가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뚜렷한 진보와 변화를 노리는 의욕에 그 표현형식이 금방 뒤따르지는 못하여 고전주의적 취미는 구태의연하게 전반기를 지배하게 된다.

    몰리에르와 라신이 정착시킨 국민극은 이 시기에도 여러 계층에 가장 인기 높은 문학 장르로서 데스투슈(1680∼1754), 피롱(1689∼1773), 르냐르(1655∼1706), 당쿠르(1661∼1725) 등의 희극이나 라모트(1672∼1731), 크레비용(1674∼1762) 등의 비극이 많이 상연되었으나, 마리보만이 뛰어난 독창성과 재능으로 후세까지 길이 기억되었다. 《사랑과 우연의 희롱》(1730) 《거짓 고백》(37) 등의 성공작으로 마리보는 라신의 연애심리비극과 맞설 만한 연애심리희극을 창시했으며, 인간심리의 뉘앙스를 표현하기에 알맞은 그의 유려한 문체와 교묘한 언어구사의 경향은 뒤에 ‘마리보다지’라 불리게 되었다.

    고전주의가 거의 개척하지 못한 장르인 소설이 이 시기에 발전을 보아 근세 신흥문학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문필로 생계를 꾸려 첫 직업작가가 된 르사주(1668∼1747)는 《절름발이 악마》(1707)와 《질블라스》(1715∼35)에서 신랄한 풍자를 곁들인 당대의 풍습과 각계층의 인간형을 묘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후세 사실소설의 선구가 되었고, 마리보는 소설 《마리안의 생애》(31∼41)와 《벼락출세한 농부》(35)에서도 정확한 심리분석과 사실적인 세태묘사에 성공하고 있다. 정열에 희생되는 라신의 비극을 마치 소설화한 것 같은 《마농레스코》(31)로 크게 성공한 프레보는 이미 인간의 본능 존중을 내세운 낭만주의 소설의 선구자이다. 《회상록》(34∼53)의 저자인 생 시몽은 루이 14세를 거침없이 비판할 정도의 자유사상과 뛰어난 심리적 인물묘사로 이 시대의 특이한 예외적 존재였으며, 《잠언집(箴言集)》(46)의 보브나르그 후작은 17세기 사상가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선한 본성과 고귀한 정열을 믿는 낙천주의자로서 루소의 선구자가 된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사상의 뼈대를 만든 것은 부르주아 혁명을 먼저 이룬 영국에서 배운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이다. 법관이면서 자연과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이기도 한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타고난 계몽주의자로서, 먼저 《페르시아인의 편지》(21)에서 당시 유행하던 이국취미를 이용, 프랑스의 정치 ·사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법의 정신》(48)에서는 정체(政體)의 비교연구와 권력분화의 이론을 통해서 정치를 필연적인 관계들의 인식을 토대로 하는 학문으로 정립시켰다. 시 ·극 ·소설 ·역사 ·철학 등 모든 부문에 걸친 문학활동이 거의 18세기를 지배한 볼테르는 그 사회활동이나 유럽적인 명성과 더불어 이 세기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지만 문학적인 평가에서는 고전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구제도에 대한 폭탄과도 같은 《영국 서간(철학 서간)》(34)을 비롯해 《철학사전》(64), 철학소설 《자디그》(47)와 《캉디드》(59), 역사문학 《루이 14세의 세기(世紀)》(56) 등에서 명쾌한 산문으로 사회의 온갖 악폐와 용감히 싸운 볼테르는 역시 열렬한 개혁주의자임에 틀림없다. 후반기는 《백과전서》(51∼72)의 간행과 더불어 시작된다. 디드로를 비롯한 조쿠르, 달랑베르 등이 당국의 탄압과 맞서가며 20년 동안 끈질기게 추진시킨 이 사업은 과학 ·철학 및 기술의 계통적인 보급을 통해 반종교 ·반전제정신을 고취 ·결집함으로써 대혁명의 한 원동력이 되었다. 디드로는 또한 많은 철학논문과 소설 ·예술평론을 발표하여 오늘날의 공리주의나 물질주의를 예고하였고, 비극과 희극의 구별의 철폐를 처음으로 극작에서 시도한 공적도 크다. 《박물지(博物誌)》(49∼89) 편찬에 평생을 바치다시피한 뷔퐁은 과학에의 정열을 예술에의 정열과 결부시켜 자연과학을 문학에 끌어들인 특이한 존재이다. “문체는 바로 사람이다”라는 명언을 담은 《문체론(文體論)》(53)은 그의 아카데미 회원 취임연설이지만, 《곤충기》(1870∼89)의 파브르와 더불어 프랑스문학의 다양함을 말해주고 있다. 계몽사상의 모든 요소를 한몸에 지니면서 이 시대를 마무리짓고 다음 시대를 예고한 것은 장자크 루소이다. 착하게 태어난 인간이 사회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신념에서 출발해 인간본성(nature), 즉 자연을 되찾기 위한 사회와 인간의 개조를 부르짖은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 《에밀》(62) 《고백록》(65∼70) 등의 명저를 통해 정치 ·교육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이고도 범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혁명을 통한 민권사상의 보급, 자유교육 ·개성교육 ·자연교육 등 교육원리와 방법의 혁신, 자연 ·개성 ·감성 존중의 낭만주의 문학의 태동 등은 다 그에게서 말미암은 것이어서, “현대에 이르는 모든 길목에는 루소가 서 있다”는 귀스타브 랑송의 지적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철학이 지배하던 18세기는 그 말엽을 장식하는 몇몇 문학 장르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루소의 제자인 베르나르댕드 생 피에르는 이그조틱한 소설 《폴과 비르지니》(87)에서 자연 속의 인간 행복을 찬양했고, 라클로는 호색적인 소설 《위험한 관계》(82)에서 당대 귀족 사교계의 복잡한 연애관계에 예리한 심리해부를 가해 패덕(悖德)의 작가라는 악평을 받았으나 20세기에 와서는 스탕달을 예고한 심리소설가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75)와 《피가로의 결혼》을 보마르셰는 재치와 반항심이 넘치는 하인이라는 새로운 타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 경묘 ·쾌활한 희극 밑바닥에 강렬한 사회비판을 깔아 앙시앵 레짐의 몰락을 암시하였다. 앙드레 셰니에는 산문이 풍미하던 18세기 유일의 두드러진 시인으로서 “새 사상 위에 옛 시구(詩句)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그리스 시의 모든 양식을 프랑스어로 옮겨놓으려고 시도한 마지막 고전파 시인이며 낭만주의 시의 선구자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18세기의 프랑스문학 (두산백과)

    ■ 헝가리의 계몽주의 문학

    헝가리어로 씌어진 문학의 총체로, 헝가리 계몽주의는 독창적인 발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프랑스와 영국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1772년 디외르디 베셰녜이의 첫번째 문학작품으로서 프랑스어본에서 번역한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이 출판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걸작 〈토리메네슈의 여행 Tariménes utazása〉(1802~04)은 헝가리 장편소설의 효시로서, 계몽주의에 반대되는 모든 것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다. 새로운 사상에 자극을 받은,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통주의자였던 요제프 그보다니와 온드라슈 두고니치는 문학적 가치와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재미있는 작품을 썼다. 이들은 평민들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아담 팔로치 호르바트는 진정한 민요의 보고라 할 수 있는 450여 편의 시를 수집했다. 18세기말은 시어의 실험기였다. 헝가리 운문에서 그리스와 라틴 운율을 헝가리 운문에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려던 선구자들의 실험을 이어 베네데크 비라크는 시적 영감이 넘치는 운율을 도입했다. 다니엘 베르제니는 1813년에 발표한 단 1권의 시집에서 위대한 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전 운율의 쓰임새를 보여주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헝가리에서는 대체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수입된 모든 사상을 불신했고 정부도 지적 자유의 정신을 점차 의심하게 되었다. 몇몇 작가들은 급진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이들 중 가장 재능 있었던 야노슈 보트샤니는 모든 폭군들에게 "그들의 경계심 많은 눈을 파리에 붙잡아두게"라는 박력있는 경고의 시 〈프랑스에서의 변화 A Franciaországi változásokra〉(1789)로써 헝가리 문학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혔다. 발린트 볼로시 이후 최초의 서정시인은 미하이 초코노이 비테즈로서, 그는 순수하게 형가리의 시적 전통을 이어나갔다. 많은 작품이 릴라라는 여인에게 바쳐진 노래로, 쾌활한 우아함과 예리한 생각이 적절하게 섞여 있다. 샨도르 키슈폴루디는 매우 적은 서술로 줄거리를 엮어나가는 서정적 연작인 첫번째 작품 〈쓰디쓴 사랑 Keserg szerelem〉(1801)으로 헝가리 문학에서 자리를 굳혔다. 페렌츠 코진치는 평범한 시인이었으나 영향력 있는 문필가로서 40여 년간 문단의 중심 인물로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장식적이지도 대중적이지도 않은 세련된 문학을 원했고 문체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헝가리어를 신선하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가장 섬세한 개념까지도 표현할 수 있도록 추구한 언어 개혁자들인 네올로기(neologi:언어개혁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 브리태니커

    ■ 이탈리아의 계몽주의 문학

    계몽주의에 있어서는 이성(理性)이 인간 행동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 이성에 의하여 진리를 발견하며 행복을 얻으려는 데에 주된 목표를 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각지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의도에 의해 진리 탐구를 위한 학술 단체가 생겨 다수의 계몽주의자를 배출하여 가톨릭 교회의 특권 제한, 법률 운용의 합리화, 재판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또 과학 이론의 해설,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보급 등이 저서·논문·신문 등에서 행하여졌으나 프랑스에 있어서의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가 끼친 것과 같은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없고, 문예와 사회의 협력은 결정적인 형태로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밀라노와 나폴리는 가장 활발하게 운동이 전개된 지역이었다.

    밀라노에서는 '푸니 아카데미'가 기관지 <일 카페>지(誌)를 갖고 있어 피에트로 베리(Pietro Verri, 1728-97), 알렉산드로 베리 등이 열성적인 추진자들이었으며 이 그룹에 속한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 1738-1794)의 <범죄와 형벌>(1764)은 당시의 유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폴리 그룹은 프랑스 문화를 불신하는 태도로 관찰하였다. 이 그룹의 안토니오 제노베시(Antonio Genovesi, 1712-1769)는 승려였으나 나폴리 대학에 개설된 경제학 강좌를 담당하였다. 페르디난도 갈리아니(Ferdinando Galiani, 1728-1787)는 <화폐론>의 저자였다.

    이탈리아 문화 혁신의 한 방편으로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외국 작품의 번역이 이 시기에 성행하였다. 번역가로 저명해진 사람으로는 <오시앙의 노래>를 번역한 멜키오레 체사로티(Melchiore Cesarotti, 1730-1808)가 있다. 원시적 감정이 힘차게 표현된 이 노래는 독자를 압도했으며 이탈리아 계몽주의기(期)와 낭만주의기(期)의 시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학적 취향(文學的趣向)을 낳게 한 점에서 중요한 뜻을 갖는다. 이 시기에 골도니, 가스파로 고치(Gasparo Gozzi, 1713-1786), 파리니, 알피에리 등이 배출되었다. 골도니의 희극에 있어서의 새로움은 등장 인물의 선택과 이들을 자연의 환경에 배치한 것이었다. 고치의 인간으로서의 새 경지(境地)는 신문 편집 활동에서 드러났으며 평소 일어나는 일로부터 이야기 줄거리를 끄집어내는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었다./위키백과사전

    ■ 폴란드의 계몽주의 문학

    17세기 말부터 폴란드에 인접하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3개 강국은 폴란드 대 귀족들의 왕위 계승권 쟁탈전에 따른 국내 분열을 이용, 내정 간섭을 시작했고 18세기 말에는 마침내 이들 3개국에 의한 3회에 걸친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져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18세기 후기는 폴란드 문화의 개화기에 해당되는데, 계몽 운동이 국내에 퍼지고 합리 사상과 애국적 정열에 의한 국가의 부흥과 근대화에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사회 개혁을 위한 준비와의 관계가 의식되어 소설이나 희극이 저술되었고 특히 풍자의 장르가 유행했다.

    이 시기를 장식하는 대표적 문학자는 폴란드 근대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크라시츠키(Ignacy Krasicki, 1735-1801)와 시인 트렘베츠키(Stanisław Trembecki, 1739-1812)이다. 전자는 <우화와 비유담>(1778), <풍자시>(1779) 등 걸작 외에 폴란드 소설의 선구인 <미코와이 도스비아트진스키의 모험>(1776)을 저술했다. 또한 후자는 라 퐁텐(La Fontaine) 풍의 우화시를 썼다. 이 두 사람 외에는 폴란드 최초의 희극 <의원의 귀환>(1790)을 쓴 니엠체비치(Julian Ursyn Niemcewicz, 1757-1841)를 들 수가 있다. /위키백과사전

    ■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

      1920년대는 한국의 신문학운동에 있어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문학 근대화의 한 고비가 되는 셈이다. 물론 문학의 근대화라면 우선 그 환경이 문제가 되고 민족적인 독립국가라는 큰 전제가 필요하지만, 한국 신문학의 경우 10년에 국권피탈로 인하여 근대화의 환경으로서는 불모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신문학운동은 전개되어 19세기의 근대문학 사조인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이 들어와서 문예사조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사조들을 타고 문학지들도 많이 등장하였는데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지상에는 김억(金億) ·황석우(黃錫禹) 등이 자유시를 발표하였고, 문예동인지 《창조(創造)》에서는 일본 낭만파 시의 대량 번역과 함께 주요한(朱耀翰)의 휘트먼적 의지, 전원구가(田園謳歌), 도시통매(都市痛罵) 등 이상적 경향의 시를 볼 수 있었다. 이어 《장미촌(薔薇村)》(21), 그리고 김억 ·남궁 벽(南宮璧) ·나혜석(羅惠錫) ·오상순(吳相淳) ·황석우 ·염상섭(廉想涉) 등을 동인으로 한 《폐허(廢墟)》(1920), 박종화(朴鍾和) ·홍사용(洪思容) ·노자영(盧子泳) ·이상화(李相和) ·박영희(朴英熙) ·나도향(羅稻香) 등이 동인이었던 《백조(白鳥)》(1922), 양주동(梁柱東) ·이장희(李章熙) ·유엽(柳葉) 등을 동인으로 한 《금성(金星)》(1924) 등이 발행되었는데, 이들 동인지에 나타난 대부분의 시는 허무적인 낭만주의를 주조로 하였다. 여기에 김소월(金素月)의 민요적 정한(情恨), 한용운(韓龍雲)의 구도적(求道的) 시정신을 추가할 수 있다.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김동인(金東仁)을 비롯하여 전영택(田榮澤) ·현진건(玄鎭健) ·염상섭 ·나도향 등은 1920년대 초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 가운데 김동인은 문학의 계몽성을 거부하는 순문학을 탄생시켜 근대적인 문학정신을 심어놓은 작가라는 점에서, 또 염상섭은 냉철한 리얼리즘을 보여준 최초의 작가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920년대에 나타난 문학운동 중 색다른 것은 소위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이 두 개의 문학은 1920년 초부터 밖에서 들어온 사회주의사상과 풍조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다. 신경향파는 시보다도 소설에서 더 활발한 면을 보였는데 그 특색은 하층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극빈적 가난을 그리되 결말에 가서는 지주(地主) 등 상류계급에 대한 반항을 나타내는 것이 상례였다. 그 대표적 작가로는 최서해(崔曙海)를 들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25년에 프로 문학단체인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결성되어 약 5 ·6년간 문단의 패권을 쥐다시피 하였는데 이 프로문학의 특징은 마르크스적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계급혁명이라는 정치성이 노출되어 문학적인 작품으로서의 성과를 남기지 못하였다. 이에 속하는 대표적 문인은 임화(林和) ·이기영(李箕永) ·김남천(金南天) 등이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문학의 근대문학 도입 (두산백과)

    5. 근대 서양 계몽주의 철학

    서양의 철학사상이 발전한 과정을 기술하는 철학의 한 분야로, 또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는 수학을 자연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데 기초한 최초의 위대한 물리학적 종합이었다. 이성이 권위와 자율성을 지닌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근본적으로 뉴턴 연구의 귀결이었으며, 18세기에 모든 철학작업을 지배했다.

    ■ 전통적 영국 경험론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실재에서 정신의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관심을 돌리고 그 정신의 장치들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면서, 르네상스의 초점이었던 단순한 수학적 인식요소보다는 감각적 인식요소에 의존했다. 이른바 영국 경험론 학파는 칸트 시대 이전까지 계몽주의 철학을 이끌어나갔으며 사물보다는 관념, 본유적·필연적 원리보다는 경험을 기반으로 철학을 연구했다.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은 진리의 새로운 기준을 제안함으로써 근대 철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적으로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 책의 본래 의도는 "인간 인식의 기원, 확실성,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다음의 3가지 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인간 관념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 둘째는 이 관념의 확실성과 증거로서의 가치를 밝히는 것, 셋째는 덜 확실한 모든 인식의 권리를 검토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일반 관례에 따라 로크는 '관념'을 "인간이 사유할 때 지성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모든 합리론 학파에게 관념의 확실성은 그 자명성, 즉 그 명석성과 판명성의 함수였던 반면 로크에게 관념의 타당성은 분명히 그 관념이 생기는 양상과 방식에 달려 있었다.

    〈인간 오성론〉에서 로크는 기초적 감각의 벽돌들을 가지고 인간이 개념적으로 경험하는 전세계를 만들어내려 했다. 그의 인식론의 기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 관념의 궁극적 원천은 감각이고, 모든 정신작용은 단순한 감각자료를 결합하고 혼합하여 복잡한 개념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감각 여건). 로크는 굳기·형태·연장(延長)·운동·정지 등 대상 자체의 실제 특성인 '제1성질'과 색·맛·냄새 등 정신이 대상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내적 결과일 뿐인 '제2성질'을 구분했다. 로크를 계승한 조지 버클리(1685~1753)가 극복하려 애쓴 것은 바로 이러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이원론이었다. 버클리는 궁극적으로 제1성질이 제2성질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험론은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 개념이란 마음이 꾸며낸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과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감각 인상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리고 과학은 물질이라는 개념이 없어도 잘될 수 있다고 논증했다. 자연은 인간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일 뿐이며, 이 말은 감각자료를 '실체에 붙어 있는 성질'이라기보다 '마음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1711~76)도 인식의 기원을 감각인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로크가 마음의 능력에 믿을 만한 질서가 있다고 보고 버클리가 어떤 정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심성 자체를 인정한 반면 흄은 집요한 분석을 통해 외부세계뿐 아니라 마음에도 우연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지각경험의 모든 통일성은 '마음의 연합능력'에서 나온다. '관념들의 연합'은 사실이지만 이 연합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인접성·인과성 등의 관계는 본질적 타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습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인식이 기초로 삼는 인과원리는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사물들이 항상 연결되는 우연적 사건일 뿐이다.

    ■ 그 밖의 계몽주의 운동

    영국 경험론 학파가 18세기에 탄생한 유일한 철학 유형은 결코 아니었다. 지적·철학적 표현면에서 계몽주의의 본류에서 갈라진 경향들이 많이 생겨났다. 라마르크의 기사인 장 바티스트, 조르주 퀴비에, 뷔퐁 백작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등은 동물 분류체계를 완성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 후작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몽테스키외,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비코, 영국의 애덤 스미스 등은 역사학·경제학·사회학·법률학이 과학으로서 출발하는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흄, 제러미 벤담, 영국의 도덕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전문적 철학 연구분야로 만들고 있었다. 샤프츠버리 백작 3세인 앤소니 애슐리, 에드먼드 버크, 요한 고트셰트,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등은 체계적 미학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인식론 외에 계몽주의가 크게 기여한 분야는 사회·정치 철학이었다. 로크의 〈시민정부론 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1690)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1762)은 그 시대의 더욱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을 바탕으로 정치 결사를 정당화했다. 로크와 루소에게서 모든 근대 자유주의의 싹, 즉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시민의 자유, 인간의 근본적 존엄 등에 대한 신념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였다. 정치문제는 자유와 불평등의 문제였으며, 정치이론은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로크의 정치이론은 왕의 신성한 권리와 주권자의 절대 권력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왕권신수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본래 살고 있는 자연 상태는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 서로 뭉쳐 사회를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결코 그 궁극목적인 공익과 무관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루소의 경우에도 사회계약이라는 협약이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모든 합법적 권위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개인의 모든 권리가 일반 의지에 예속되는 만큼 자연 상태의 자유는 시민사회의 자유에 종속되어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체로서 그 생명은 구성원들의 결합이고, 그 법은 일반의지의 행위이며 그 목적은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다. 정부가 국민의 권력을 찬탈할 때 시민은 저항할 의무가 있다.

    ■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적 고찰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진정한 절정을 뚜렷이 보여준다. 칸트의 실질적인 위대한 업적은 인식에서 감각적 요소와 선천적 요소를 관련시킴으로써 라이프니츠의 극단적 합리론과 흄의 극단적 경험론 사이의 불화를 해소한 것이었다. 칸트는 또 철학의 새로운 정의, 철학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 철학 서술의 새로운 구조적 모형 등을 제시했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철학은 "모든 인식과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건설적(순수이성에서 생기는 모든 인식의 체계를 묘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판적(한계를 잊은 이성의 망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인간인식의 원천·범위·타당성과 이성의 궁극적 한계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는 특별한 철학방법이 필요하다.

    칸트의 방법은 선천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성이 경험없이도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기초는 인간의 인식이 대상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 아니라 대상이 인간의 인식기구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인식기구의 정확한 성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와 그밖의 문제에 대답하려는 시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의 과제였다. 그러나 칸트의 위대한 목적은 이성을 어느 한 영역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각 영역에서 고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사유(과학)에서는 〈순수이성비판〉, 의지(윤리학)에서는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 감성(미학)에서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 각각 다룬다.

                                                                                                    /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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