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천도교 신구파분열.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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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도교 청년동맹 조직과 지부 활동
삼일운동 이후 1920년대 후반부에 천도교는 연합교회파, 신파, 구파, 육임파 등 4파로 분열되엇다.*
*천도교 신파는 인도의 스와라지운동을 모방하여 합법적. 불복종적. 비타협적 정신에 의한 민족자치운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색채가 농후하
고, 구파는 급진.비타협적 사회운동 방면으로 진출하여 신간회를 조직하는 데 관계하고 민족당일당의 결성에 분주 하였으며, 천도교연합회파는
좌경적 공산주의 색체가 농후해서 누차 공산당 사건에 연루된자가 많고 육임파는 고루적 순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엿다.“조선총독부경무
국, 최근000..천도교의민족운동 연구” 선인 2066.10.30.,169쪽
신파는 서북지역의 교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대일 타협적 태도를 기조로 문화운동과 자치운동을 전
개하였다. 구파는 기호와 호남지방의 교인들이 중심 이였는데 육십만세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는등 비
타협적인 방법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지영등의 연합교회파는 사회주의 색체가 농후하여 비권위적
이고 비계급적인 방향으로 교회를 운영하며 형평운동에 참여하고 고려혁명당을 결성하는 등 사회주의적인
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1922년12월 교회 혁신을 주장하던 오지영과 김봉국 등이 천도교 연합교회를 조직
하고 분립하여 이탈한 후 천도교는 대헌제를 종리사제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1925년 8월 천도교 주도세력이
자치운동을 전개하자 동학시대의 육임제를 고수 하려는 종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던 오영창 김봉국 등의
육임파는 교인대회를 개최하며 이를 반대하여 분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양파를 조정하기 위한 통일기
성회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천도교 신파가 자치의 실현을 예상하고 농민을 장악하기 위하여 서울파.상해파.
공산주의자와 제휴하자, 구파는 화요회가 주도했던 제2의 조선 공산당과 제휴 하였다. 신파가 조선 농민사
를 조직하고 이동휘와 박진순의 도움을 받아서 조선농민사의 크레그틴테른 가입을 추진하는등 활발하게 움
직이자 구파는 천도교인으로 조선 공산당의 당수였던 강달영과 접촉하여 구파와 공산당이 민족협동전선을
멪기로 합의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하에서 박내원 박래홍 조정호 손재기 박양신 신순 이기영 김재계등 구파측 인사 10여
명은 1926년3월24일 동대문밖에 있는 영도사에서 영춘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구파의 청년단체를 조직하자
는 논의가 있었다. 그 후 4월1일에는 구체적으로 당명까지 논의가 되었는데 “천도교동학당과 천도교청년동
맹”이 제기 되었으나 천도교 청년동맹을 채택하였다. 1926년 4월3일 9시 대교당에서 열린 발기회 대회에서
는 임시의장 신태순이 청년단체 조직의 취지를 설명하고 단체명칭을 천도교청년동맹으로 확정한 후에 규약
기초위원으로 박내홍 조정호 박내원 등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4시에 대교당에서 천도교 청년동맹
창립총회를 개최 하였다. 임시의장 신태순의 사회로 개최된 창립총회는 의장의 취지 설명과 이종린과 오영
창의 축사가 있은 후 서기 조정호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규약을 심의하여, 지방부는 10명이상의 동맹
원이 있는 지방에 설치토록한 조항을 13명으로 변경하고 통과 시켰다.
천도교 동맹의 활동
1926년 4월4일 중앙종리원 회의실에서 제1회 청년동맹 중앙집행 위원회를 집행위원 전원이 참석하여 개최
하고 대표위원으로 박내홍, 상무위원으로 이기정을 선출 하였다. 또 청년동맹의 자문기관으로 고문을 두기
로 하고 구파 중앙종리원 각과 대표인 이종린 오상준 김승주 등 3명을 선정 하였다. 그리고 의사 진행은 일반
의 협의제로 하기로 하여 첫째, 일반 사건은 통신 결의로 처리. 둘째. 지방부의 기관 설치(지방대회 및 집행위원)
셋째, 의무금(가맹금) 중 30전은 중앙에, 1원은 지방비로, 넷째, 매년 1월에 월례회를 개최하는 등의 사항을 결
의 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에 청년동맹 지부를 조직하기 위한 순회위원을 선정하여 손재기와 김덕연은 평
안도와 황해도. 김재계와 박한규는 전라도, 강세희는 경기도, 신태순은 충청도에 가각 파견키로 하였다. 3일
오후 1시부터는 동대문 밖의 상춘원에서 천일기념 여흥을 겸하여 청년동맹 간친 원유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상춘원의 만화정에는 박인호가 여러 장로들과 더불어 정좌한 가운데 이미 구분한 9개 구역의 동맹가맹원과
교인 등 5백여명이 정원대로 들어찬 가운데 원유회가 진행되었다. 모든 참석자에게는 오적어 한 개와 과자
한 봉지씩을 나누어 주었으며 각구역별로 여흥을 즐겼다. 박인호는 4월 5일 천일 기념일 아침 6시에 찿아온
13명의 집행위원으로부터 청년동맹 조직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이때 박인호는 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는 보
고를 받은 후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同盟이라 하면 은연히 생사를 같이 하지는 의미가 포함 된 것이었다. 그른 일이라도 한 마당에서 생사를 같이하는 동시에 옳은 일이면 더욱
强味있게 굳게 結束하여 생사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잘 살 땅을 구하려면 죽음을 내기 하여하 되느니라. 잘 살 땅을 生死를 불구하고 물이 있던
지 불이 있던지 전진 하여야 되느니라. 단결의 힘은 물과 같다 물이 山容間에 一絲流일사류 로 흐를때에는 참으로 우습지만 그것이 모이고 모여
서 江河가되고 海洋이되면 그 얼마나 위대하며 힘이 있느냐. 그것이 한번 물결 친다면 태산도 붕괴 시킬수 있을 것이다. 또 실을 가지고 말하여
보자. 그 실이 외올로 있을 때에는 젖먹는 아이라도 끊을수 있으나 그 낱술이 몇만 오라기가 합한다면 비록 역사라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
므로 사람은 마음을 團合하여 대포도 소용없고 창검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장래에 세상은 청년의 세상이다. 온 사회의 일은 청년에게 있
다. 단합만 한다면 무서울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청년을 극히 사랑하는 동시에 이번에 동맹이 조직된 것을 끝없이 기뻐한다. 아무조
록 잘해 보라. 그대들은 다른 청년과 특별히 다른 점을 살펴라. (청도교 청년동맹창립의 전후, 천도교월보 제184호 1926.4.15.,37쪽)
4월6일 제2회 집행위원회에서는 중앙에 “천도교청년동맹중앙부”로 각 지방에 “천도교청년동맹 ㅇㅇ부”로
간판을 달도록 하였다.
한편 중앙종리원 각 과 대표들이 청년동맹의 고문이었다는 것은 천도교 청년동맹이 단순히 청년 활동을 위
한 단체가 아닌 청년을 매체로 한 천도교 구파의 실질적인 청년활동을 위한 단체라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다. 청년동맹 주도 인물은 당시 천도교를 주도하던 신파의 주 출신지역인 서부지역이 아닌 기호 지역과 호남
지역 출신 들이였다. 이 지역은 동학 혁명때 처절한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서북지역 출신에 비해서 반일 감정
이 한층 강하였다. 이러한 정서적인 배경은 천도교 청년동맹이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된 이유가 될
것이다. 교육적인 면에서도 일본 유학생이 많았던 신파에 비해서 유학이나 중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상대
적으로 많은 편으로 성균박사 이종린, 보성소학교출신의 박내원, 북경대학에서 유학한 박내홍, 남경 금릉대
학 출신의 이황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 이러한배경 때문인지 청년동맹원들 중에는 일본 유학생처럼 일본 정
치인들과의 유대관계를 맺은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조선에 자치를 허용한다고 해도 청년동맹
원들의 정치적 활동은 어려웠을 것이다. 정치역학적인 면에서 보면 바로 이런 점이 천도교 구파가 타협적 자
치운동을 반대한 한 가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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