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동학기행(5일간의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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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동학기행(5일간의 순례)
-10월 17일~10월 21일-
글.사진/이윤영(동학혁명기념관장)
-목차-
1. 전주기념관에서 정읍까지 동학군의 길을 따라
2. 보은,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전국기념대회
3. 충북 보은일대순례(기념공원, 북실, 장내리)
4. 전남 장흥, 강진순례(석대들-기념탑, 전라병영)
5. 전북 완주 삼례순례(삼례봉기기념비, 역사광장)
1. 첫날.10월 17일- '전주기념관에서 정읍까지 동학군의 길을 따라'
오늘,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에 많은 관람인파가 줄지어 오신다. 주로 가을수학여행이나 소풍을 겸한 학생들의 단체손님들이다.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손님이 아니라, 한울님이 강림하셨다.’라는 말씀이 기념관에 오시는 분들에게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인가는 늘 나의 임무이자 사명감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이유에서 오늘부터 계획되었던 2차 동학기행을 5일간 가야 하는 나의 마음은 편하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동학-천도교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 두 발 띠며 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혁명군들의 길을 따라 나섰다. 전주기념관에서 차를 몰아 풍남문을 거쳐 김개남장군 순국 장소인 전주완산칠봉기슭 초록바위 터에 들린다.
이어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였던 길을 역류(일본군, 관군에게 몰려 후퇴하던 길)하여 용머리고개에서 금산사 가는 길 독배를 돌아 원평에 도착한다. 필자의 고향인 김제원평에는 동학혁명, 3.1혁명 유적지가 있다. 또한 동학농민군 무명용사묘지들이 있다. 다시 원평에서 신태인방향의 동학군 진격과 후퇴 길을 따라 가다보면 정읍 이평면 만석보유지비와 만석보혁파비가 나온다. 그 길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돌면 동학혁명창의비가 있는 부안백산 유적지가 나온다.
백산을 들려 다시 전봉준고택으로 향하다 보면, 녹두장군단비인 빈묘(가묘)가 나온다. 전장군 고택에서 동학농민혁명 최대승리 터 황토재로 향한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참배를 하고 황토현 동산에 홀로 앉아 있으면 혁명군선열님들이 떠오르며 담배 하나가 저절로 입에 물려진다. 나는 혼자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오늘의 목적지인 정읍교육지원청에 도착했다.
오늘 오후 정읍교육청에서 필자를 초청해 동학사상강연회를 갖는 날이다. 나는 2시간동안 ‘동학과 인내천 사상’의 제목으로 열강을 하였다. 필자는 강의가 끝나고 늦은 시간 밤길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전주에 도착함으로서 첫날의 동학기행을 마쳤다.
전주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 2층 전시실에 줄지어 들어오는 단체관람 학생들과 일반인들(가을,수학여행 등)
정읍교육지원청 초청강사로 약 2시간 '동학과 인내천 사상'강의하는 필자(동학농민혁명강사육성교육)
2.둘날1. 10월18일 - '보은,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전국기념대회'
기념재단주최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취진위원회주관
* 오늘은 충북 보은 문화예술회관에서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전국기념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필자는 어제 약속한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신함식 집행위원장(천도교전주교구동덕)과 함께 동행의 길을 재촉했다. 보은기념대회는 17일~18일 양일간 열렸다. 17일에는 '1893년, 동학농민혁명 전야'라는 주제로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가 열렸고,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답사와 유족의 밤 행사가 진행되었다. 필자는 17일 일정관계로 18일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18일, 보은문화예술회관에서 오전 10시부터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기념 초청 강연회가 신영우 충북대학교 교수를 모시고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대회와 기념일 제정의 방향’의 주제로 열렸다. 이어서 기념식 식전공연으로 동학창작공연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총연출 : 김양식)가 공연되었다.그리고 오전 11시부터 기념식이 정식 개최되었다. 기념식에는 박남수 천도교 교령, 조현재 문체부 제1차관, 이시종 충청북도지사, 정상혁 보은군수, 박덕흠 국회의원(보은, 영동, 옥천), 이달권 보은군의회 의장, 이왕재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등 내외 귀빈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특히 이날 기념식에서는 내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슬로건 공모전 및 119주년 청소년 백일장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120주년기념 슬로건공모전에서는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가 대상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기념식 축사에는 제일먼저 박남수 천도교교령이 기념대회 축하와 수고하신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였다. 특히 내년 동학혁명120주년을 남북한 천도교인들이 합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기념식 후에는 각기관장들과 동학혁명유족, 천도교인, 지역민들이 하나 되어 펼치는 동학혁명군 만장 행렬이 이어졌다. 이번 기념대회를 지켜본 소감은, 충북 보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3. 둘날2-18일, 충북 보은일대순례(기념공원, 북실, 장내리)
기념대회를 모두 마치고 점심식사 후, 필자와 신함식 위원장은 충북 보은지역 동학기행에 나섰다. 제일먼저 간곳은,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다. 동학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각종 조형물과 시설, 전시물이 잘 세워져 있으며, 특히 산 중 터에 위치한 웅장한 기념탑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 듯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까지 오르는 우측 하늘돌계단 길이 있고, 내려오는 좌측 하늘나무계단길이 있다. 필자가 볼 때는 전국 기념시설 및 기념공원 중에서 제일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의 조화가 돋보이며, 바른 역사를 공부하고 체험할 수 있는 장점을 들 수 있다. 다만 기념공원 내에 상설전시관이 없다는 아쉬움은 남게 한다.보은, 북실전투
다음은 보은지역 두 번째 기행목적지인 불실마을로 향했다. 기념공원에서 나와 오른 쪽 위로 조금 오르다보면 좌측에 북실장승마을 가는 길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119년 전 동학혁명군영령들을 상징하는 듯 장승들이 길가에 처량하게 서있다. 북실 안마을에서 입구에서 좌측 길로 가다보면 북실마을 출입구가 또 나온다. 그곳에는 동학 보은 길 안내판이 삭은 목재가 되어 조금은 안쓰럽게 서있다. 안내표지목재가 서있는 이곳에서 북실마을 가는 길 우측에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다. 마을과 대지주위는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커다란 새집처럼 둘려져 있다.
바로 이곳이 1894년 12월 17일~18일 새벽까지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불과 8시간 만에 2600 여명의 동학혁명군이 참살당한 곳이다.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게 최대피해를 본 세 곳 중(공주 우금티, 장흥 석대들, 보은 북실)한곳이다. 지금은 농촌의 평화스러운 모습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반봉건 반외세 혁명봉기의 엄청난 피해를 본 역사적 현장이다. 필자가 순례한 10월 19일의 북실전투 역사현장에는 가을추수가 거의 끝나가고, 쓸쓸한 풍경 속에 논밭을 갈아엎는 트랙터만이 부릉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있다. 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참혹한 역사를 이곳 주만들과 국민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필자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애써 참으며 서둘러 장내리로 향했다.
보은, 장내리 취회 터
차를 한참몰아 보은지역 세 번째 기행장소인 장안면 장내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1893년 3월 동학도인들이 전국에서 모여 쌓은 돌성의 자취가 있다. 1893년(고종30년)3월 11일(음력)부터 4월 2일까지 동학(천도교) 제 2세교조의 해월 최시형 신사님 지도로 동학의 신앙자유와 더 나아가 보국안민, 척양척왜 깃발아래 최소한 2만 3천여 명이 모여 21일간 집단 평화시위를 벌인 곳이다. 당시 해월신사님의 지시로 참여한 동학도인 대다수는 의관정제(당시정장)하고 도유(천도동학의 도를 닦는 선비)의 호칭과 함께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동학대도소가 있었던 장안 장내리는 교조신원운동차원을 넘어 외세를 배격하고 국가를 개혁하여 반석위에 올리려는 의지를 천하에 선포한 곳이다. 이후 동학도인들은 확고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부산 종교인평화회의 전주기념관 방문
필자는 18일, 일정상 충북지역 순례를 마치고 동행한 신동덕의 차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오늘 ‘부산종교인평화회의’일원이(대형버스1대)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을 방문하기로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종교지도자들이 기념관에 오실 시간에 필자는 충북지역 순례를 하고 있었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천도교 박차귀 정심당님으로부터 저녁식사자리 참석을 요구받아 서둘러 전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가는 도중 만찬장소가 전주풍남관광호텔이라는 연락을 천도교 이시복 성암장님께서 전화로 자세히 알려주었다.
호텔에 조금 늦게 도착하여보니, 만찬이 끝나가는 무렵이 되었다. 이시복선배께서 챙겨주시는 뷔페음식을 먹으며, 부산지역 종교인들의 평화스런 모습과 화합의 멋진 장면을 감동 깊게 바라보았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 임원, 천도교 측 공동대표에 부산시교구장 정암 김길철, 원불교 측 부산-울산시교구장 정숙현교무님, 상임대표에 불교 측 삼광사 주지 무원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른 종단대표님들은 사정상 참석하지 못한 듯 했다. 만찬과 종교화합회의를 주제하는 박차귀 정심당님의 리더십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필자는 같은 천도교인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박남수 천도교 교령의 축사하는 모습(충북 보은 문화예술회관)
김대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의 기념사
기념대회 공연모습
총부 정정숙 교화관장.동학민족통일회 고윤지 상임의장.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 이윤영관장
기념대회 후 거리행진하는 만장행렬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충북 보은 성족리)
기념공원 안내도
기념공원내 기념탑에 오르는 우측 - 천도교경전 '교훈가'등 여러곳에 동학경전내용의 조형물이 있다.
기념탑에 오르는 길 '민중광장' 왼쪽에 대신사 해월신사 존영이 모셔져있다.
광장에서 바라본 기념탑 모습
광장 오른쪽 기념탑 오르는 '하늘길' 돌계단 통로 양쪽 벽에 동학혁명관련내용들이 전시부착되어 있다.
기념탑오르는 오른쪽 하늘길에서 바라본, 웅장한 탑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을 상징하는, 1894cm 높이의 웅장한 기념탑 모습
기념탑 뒤쪽, 동학혁명관련 내용들이 설치되어있다.
기념탑 왼쪽 내려오는 하늘길에서 바라본 탑의 모습(동학, 보국안민, 사인여천)글자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는 듯 하다.
내려오는 하늘길 계단 곳곳에 동학관련 역사기록들이 설치되어있다.
탑에서 내려오는 나무계단과 하늘길 밑에 노란꽃들이 눈부시게 피어있다.
기념공원 문화해설사 김헌수 선생과 함께..
기념공원 앞 길건너 왼쪽으로 가다보면 북실마을 입구가 나온다.
북실전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도로가에 서있다.
조형물 뒷면에, 보은 동학길(다시 하늘 여는 길) 안내하는 지도와 내용
북실전투의 역사적 현장, 추수가 끝난 가을들녘의 모습
보은 장내리 동학취회지 안내표지판
보은 장내리 동학취회 터
충북보은일대 순례마치고, 부산종교인평화회의(천도교, 불교, 원불교 등)소속 교역자들과 전주풍남관광호텔에서 만찬모습-이날오후 전주동학혁명기념관에 단체 방문하였다.
4. 셋, 넷날. 19일-20일-전남 장흥, 강진 동학혁명유적지 순례
필자는 10월 19일~20일 이틀간 전남 장흥, 강진지역 동학기행에 나섰다. 이번 기행은 사)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주최, ‘남도문화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순례와 장흥, 강진의 문화유산답사를 겸하는 방식이었다. 동학유적지기행을 하면서 역사문화답사를 겸하는 것이 지루하지도 않고 역사문화를 바로 공부하는 기회가 된다는 주최 측 설명이다. 정읍계승사업회는 올해로 30회의 15년간 봄가을, 년 2회 연속기획으로 역사문화 답사를 해온 경험이 풍부한 단체였다. 필자는 이번 답사에서 동학농민혁명부분의 강사임무를 맡았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전남 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일원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로서 사적 제498호로 지정된 곳이다.
동학혁명군 3만 여명과 관군일본군-조일연합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 양측 사망자가 2천여 명이나 발생한 최대 최후의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이때 참여한 동학농민군이 3만여 명이나 된다는 것은 기록상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천도교인 동학연구가 삼암 표영삼 선생의 연구논문을 보면, 장흥-강진 동학도들이 족히 1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리고 동학혁명군 본진이 해산한 후 멀리서 금구, 화성 능주 보성, 영암 해남 등 여러 곳에서 장흥석대들 전투에 참여하였으므로, 동학혁명군 2만 명 정도로 필자는 추산해본다. 장흥 석대들을 중심으로 벽사, 강진, 병영 등은 전라도 남진에 있는 관군으로서는 전략요충지이다.
장흥은 부읍 이었고, 벽사는 벽사도를 관장하는 찰방이 있는 역참이었으며, 강진은 보수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또한 병영은 전라병마절제사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장흥-강진지역은 권력기관에 의해 민중들의 피해가 다른 곳에 비해 컸던 곳으로 짐작한다. 그래서 당연히 동학에 입도하는 백성들이 많았고 저항의식도 남다른 곳으로 파악된다. 동학군의 전주성점령에 큰 몫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동학도들은 이곳에 도소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한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11월 말 금구의 지원을 받아 재기포한 동학군들은, 12월 초부터 본격 전투에 임한다. 12월 4일 벽사역참을 불태우고 5일에는 장녕성을, 8일에는 강진성을 10일에는 병영의 전라병영까지 불태우며 쓸어버렸다.
그리고 12월 12일부터 일본군과 경병이 들어오자 이들과 격전하기위해 3만여 동학군은 12월 15일에 일본군을 공격하다 석대벌로 후퇴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12월 17일에는 관산 대내장 전투를 끝으로 장흥지역 동학혁명운동은 막을 내린다. 표영삼 선생, 관변, 일본자료 등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혁명좌절 후 약 2년여 동안 일본군과 관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동학군들의 근거를 없애버리려는, 초토화 작전의 지역으로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 일본이 영구히 조선을 지배하려면 뭔가 엄청난 희생의 본보기를 자행하여 두려움과 무서움을 주어 다시는 저항하게 못하게 하는 작전의 일환으로 이곳 장흥-강진을 택한 것으로 필자는 본다.
아, 동학군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것도 모자라, 생포한 동학군의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물속으로 뛰어들게 하여 집단사살하고, 머리에 관솔을 박아 불붙여 머리가 산산 조각나게 하는 미친개들처럼 야만의 짓들을 한 일본군을 어찌 쉽게 용서하리, 장흥의 이방언 대접주님을 비롯하여 수천의 동학군희생자들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이같이 장흥-강진지역의 투철한 항거의 정신들은 바로 동학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 동학이 포덕 된 시기가 바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 생존부터(1862~3년)시작하여 1882~1883년경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1891년에서 1894년 갑오동학혁명 전후에, 장흥-강진에만 약 1만의 동학도인들이 입도하여 활동에 들어간 역사의 기록이 있다. 이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확고한 신앙에서 나온다는 역사의 교훈을 준다. 이상 장흥, 강진지역의 순례를 마친 소감을 밝혔다.
전남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설명표지판
전남 장흥 석대들,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앞에서(필자)
전남 장흥 석대들 전투의 역사적 현장, 해지는 가을들녘 전경
전남 장흥에서 강진으로 이동, 폐교-리모델링한 숙소앞에서 깊어가는 가을 밤의 보름달 모습
전남 강진 백련사 앞에서(필자)
백련사에서 산넘어 다산초당 가는 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산길에, 그윽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뽑내는 야생 녹차꽃 모습
강진 다산초당에서(필자)
동학혁명사적지 강진 병영성, 복원하는 모습
복원하는 병영성 안 모습
다산의 유적지 강진 '사의재'에서(필자)
김영랑 시인, 강진'생가'에서(필자)
다섯날. 21일-전북 완주 삼례- 동학혁명유적지
오늘 10월 21일 월요일, 전주동학혁명기념관이 정식으로 쉬는 날이다. 필자는 그동안 동학기행을 하면서 쌓였던 피로는 한꺼번에 풀기라도 할 것처럼, 오후 3~4시까지 잠에 골아 떨어졌다. 내수도 ‘나해당’께서 몇 번을 흔들어 깨우는 일을 반복하여 겨우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식사를 하고 전북 완주 삼례에 동학기행을 준비하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해당이 등산복차림으로 나를 따라 나선다. 삼례에 도착하자 오후 5시경이 되면서 약간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삼례시내로 진입하기 전 오른쪽 수로좌측에 ‘동학농민혁명삼례봉기기념비’비교적 작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1996년 10월 26일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당시 필자가 전주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이곳에는 작년에 와보고 올해 처음으로 기념비 참배를 하였다. 삼례봉기기념비 주위는 뭔가 개발이 한참인 것 같다. 여기저기 건설자재들이 흩어져 있고 기념비 둘레에 설치되었던 경계표지석들은 뽑혀 버려진 상태이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흔적들이 역역하다. 이러한 모습에 필자는 사진촬영을 하면서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필자와 나해당은 삼례외각에 있는 완주군문화체육센타 바로 옆 ‘동학농민혁명 삼례역사광장’으로 향했다. 이곳 역사광장이 만들어지면서 수로 둑에 세워졌던 삼례봉기기념비가 찬밥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짐작해본다. 역사광장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쇠스랑이 하늘높이 솔아있는 조형물이다. 본 조형물을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 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혁명사에서 중요지역으로 평가받는 이곳 역사광장의 시설물들은 많은 공을 드린 흔적이 보인다. 전국의 동학공원에 비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원형의 광장안에 예술적 조형물들이 돋보인다. 삼례동학의 역사는 교조신원운동부터 깊은 관련이 있다. 1892년 10월 27일 해월신사께서 경통을 발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이게 하였다. 11월 1일에 전국 각 포 두령이 포 내 도인들을 거느리고 전주삼례역에 모이자 수천 명이 넘는 도인들로 가득찼다. 해월신사님은 송암 손천민에게 명하여 입의문과 통유문, 경통을 지어 각지 도인들에게 배포하고 신원운동에 만전을 기하도록 미리 지시하였었다. 11월 2일, 동학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삼대조목의 방을 붙였다. (1,수운선사 신원. 2,탐관오리 제거. 3,교당설치 허가.)였다.
11월 초 9일 소장이 감사 이경직에게 전달되고, 도학도인 수천 명이 물러가지 아니하고 삼례역 부근과 전주감영일대에 머무르니, 감사 이경직이 감결문을 각 고을에 내어 동학도인들을 효유하는 방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는 동학을 속이고 이어지는 탄압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해월신사께서는 통유문을 내려 관측에 강력 항의하고 도인들을 위로하였다. 이곳 삼례취회는 광화문복합상소, 다시 보은취회로 이어지는 역사의 중요지점이다. 그 후 1894년 9월초(음) 동학혁명 제2차기포시 전략적장소로서,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중요거점이 된다.
이곳은 해월신사의 명령으로 손병희통령께서 북접의 수만 동학군을 지휘하여 남접과의 연합으로 우금티전쟁의 서막을 여는 그 출발점이라는 중요지역이다. 삼례교조신원운동과 항일전쟁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필자는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
동학이여,
혁명이여,
피흘린 역사여,
그 숭고한 정신은
영원히 계승되어야 하며
오늘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송암심고)
전주에서 삼례입구우측, '동학농민혁명삼례봉기기념비'는 방치되고 있으며, 주위 개발공사로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다.
기념비 뒷면에, 기념비 건립 내용과 동학혁명삼례봉기의 역사적 의의가 새겨져있다.
(1996년 10월 26일 건립)
전북 완주 삼례, '동학농민혁명 삼례역사광장'-(완주군 문화체육센터 바로 옆)
전북 완주 삼례, '동학농민혁명역사광장'에 설치된 조형물
삼례역사광장 내 설치된 조형물 중(폐정개혁12개조)
추념의 장 조형물 설명 표지석
동학농민군 출진상
역사광장 입구에서 광장까지 설치된 조형물 사방에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과 내용이 새겨져있다.
역사광장 옆 언덕에서 바라본, 삼례취회 터와 동학혁명2차기포(일본과의 전쟁)지가 보인다.
동학혁명 역사의 현장, 선열님들의 숨결을 느끼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는 나해당-내수도님
5일간의 순례를 마치며, 동학농민혁명 삼례역사광장 기념비 앞에서(필자)
▲ 북미인디언명상음악소울플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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