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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가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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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고향숙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799회   작성일Date 13-11-19 08:18

    본문

    신앙목적이 무엇인가 돌아보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신앙을 시작할 때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까지 한다고 해 왔는데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요즘 들어서 새삼 자꾸 생각 해 보게 됩니다.

    도덕가에서 지벌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 하셨듯이 천도교 신앙은 가세, 지벌, 문필, 가진 것과 교리를 많이 아는 것, 말을 잘하는 것을 넘어서서, 군자사람, 즉 도덕군자 내성군자 성인군자가 되기 위함이라고 경전에서 말씀 하십니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전을 스승삼아 수도를 하라고 강조 하신 것 같습니다.

    수도는 물론 한울님을 공경하는 경천수도가 기본이 되며 사람을 공경하고, 물건까지도 공경해야 덕을 이루는 데 들어간다고 하셨지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일용행사 도 아님이 없으니 성경외심으로 대인접물을 하는 것,

    성- 내 마음을 잃지 않았나, 게으러지 않았나. 경 - 모앙함을 늦추지 말고, 그슬리고 어두움을 두려워하라. 외- 공변되게 사사로움이 없이, 죄없는곳에서 죄있는 것 같이.  심- 마음 쓰는것에서 공과 사를 살펴, 오늘은 어제의 그름을 생각하라고 팔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결국 마음을 공경하는 경천수련, 사람을 공경하는 경인, 물건도 공경스럽고 적절하게 가려쓰는 것은 사사천, 즉 성경외심의 가르침을 지켜 사는 것이 모든 한울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어떤 종교인의 목적처럼 사후에 좋은 곳에 가고자 한다거나, 일신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서 라거나,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한 신앙과 수도가 아니라, 천도교의 가르침은 개인의 신앙과 수도는 자신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질을 향상되고 가족친지들 가정사, 사회, 국가, 온 한울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고자하는데 있습니다. 이왕 하는 일 바르게 멋지게 어김없이, 한울님 뜻에 맞게 하려고 신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자신을 돌아보고 혹 생각이나 습관 등 마땅치 않은 점이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고쳐 보완하고 수정 다듬는 즉 개벽 하는 것이 최우선이 될 것 같습니다

    2. 자신의 본분을 알고 자기 자리를 찾게되는 것이지요. 뭘 해야하는가? 내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비유하면 고삐에 매인 송아지나 개가 목줄 길이 안애서 자유롭듯이, 사람도 먼저 자신의 가야할 길, 해야 할 일이나 활동, 범주, 자기 페이스, 본분 분수를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지나친 욕심은 생각, 말, 행동은 차차 줄어들게 될 것 같습니다.

    3. 나아가 장기는 더욱 개발하여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울에 이바지 하고자 수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게 되겠지요. 송곳은 더욱 뽀족하고, 절굿대는 더욱 뭉실하게 되어야하고, 칼은 더욱 날이 서야 되고, 젓가락을 뽀족하고 숟가락은 넓적해야합니다. 컵은 작아도 되고 바가지는 커서 많은 물을 잘 퍼게 되듯이.. 수련을 할수록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두리뭉슬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송곳이나 칼은 예리함을 갖고 있지만 수련을 통해서 잘 다스려 꼭 사용할 때 쓰는 것이 도인일 것입니다.

    사람도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송곳은 절굿대 기능이 없듯이, 날카롭고 에민한 사람은 너그럽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절굿대는 두리뭉슬하기 때문에 때려서 구명을 뻥 뚫을수 있지만 정교한 구멍은 뚫지 못합니다. 상부상조해야만 합니다. 작아야 술잔이지요. 큰바가지는 은 술잔 기능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합니다.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구정물 통이 크다고 결코 값나가는 것은 아니지요. 술잔이 구정물 통을 비난해서도, 절굿대가 송곳을 나무래서도 아니 됩니다. 모두 필요한 가재도구이니 자신의 장기나 개성을 살려서 주진 일을 더 잘하도록 갈고 닦는 것이 신앙과 수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자기자리를 찾아가는 길인데, 누가 자리를 깔아주고 분위기 만들어 줘야만 합니까? 초보일 때는 필요성을 가르쳐 주며 이끌어 줘야합니다. 설령 도와주지 않아도 진짜 배가 고프던지, 먹어야 산다는 것을 알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지금 3-40년 평생 수련하는 분들 중에는 간혹
    1. 수련하는 분위기를 안 만들어준다. 시설이 불편하다 교단이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 없다. 등 불평을 하는 분들이 간혹 계시는 것 같습니다.

    2. 자신은 특별한 냥 다른 교인들을 내려다보면서 사인여천을 배우는 교인들이 자신을 한울님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도 남이 만들어주는 분위기에서 한울같은 대접받으며, 좋은 분위기에 얻혀서 왕자 공주님처럼 수련만 하고 싶어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봅니다.

    물론 수도원이나 교당을 운영 책임자께서는 오시는 분들의 위해서 편의시설 식사 청소 등 최선을 다해주셔야 하겠지만, 이런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교인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할 수 있는 것부터 가꾸어가는 교단, 다듬어가는 수도원, 신앙과 수도 분위기 이끌어 가는 선도자가 되신다면, 앉아서 수련만 하는 것보다 큰 감응으로 개인이나 교단에 더 좋은 일이 자꾸 생기지않을까 생각합니다. 불평을 일삼는 부정적인 시각을 벗어 버리고, 희망적이고 새롭게 나아질 것을 생각하며 노력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가까운 곳 쉬운 것부터, 자신의 능력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부터, 마음먹는데서 부터, 작은 것이라도 먼저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로써 자신의 신앙 수준이 차원이 먼저 높아지고 동덕과 교단 세상에 더 큰 덕을 베푸는 길이 될 것 같지 않으세요?

    수련비 내고 다른 분들로부터 한울같은 대접을 받으러 오는 곳이 수도원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이 좋은 교당분위기 마련해주면 귀인 대접 받으러 오는 곳이 교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조금만 서운한 일이 있어도 남 탓을 하며 등을 돌리기 쉽습니다. 궂은일은 남들에게 미루고 자신은 체면만 내세운다면 한울님의 감응과 복을 차버리는 격이되겠지요. 그래서 교당이 교단이 안 되는 것이 아닌지요?

    영 유아기, 어릴때야 부모님의 가르침과 보살핌을 덤뿍 펴주지만, 중고등학생이 되어도 그렇게하면 절대 아니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궂은 일 좋은 일 부모님 대신 스스로 도맏아 하며, 부모님께 밥도 지어 올리고 잘 봉양하듯이 인제 3-40년 신앙과 수도를 하신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분위기가 안되면 자신이 분위기를 만들어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하고, 청소가 안되어 있으면 스스로 손길을 내밀고, 배가 고프면 밥을 대접 안해 준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밥을 지어 자신도 먹고 남도 대접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접을 안 해주고 모르고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비난하고 삐죽대고 흉볼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주고, 채워주고, 도와주고, 베풀어주고, 손길을 내밀어야 할 곳과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곳이 많다. 즉 자신이 해야 할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교단 내에는 여러가지 허술한 곳이 많다고 불평 할 것이 아니라 ‘와~ 내가 할일이 이렇게 많다니 천도교야 말로 블루오션인 셈이다.’ 저는 요즘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 봤습니다.
    어떤수도원
     원장님께서 수련하라고 많이 보살펴주고 배려해주고 다둑여 준 사람은 늘 대접 받기를 원하더랍니다. 혹 소흘하거나 서운한 점이라도 있으면 자신을 한울님 같이 대접안해 줬다고 서운해 하거나 떠나게 되더랍니다. 그런데 특별히 베려해 주지도 보살펴 주지 않아도 꿋꿋이 신앙과 수도를 하신 교인은 혹 무슨일이 있어도 잘 극복하며 혼자 서기를 잘 하고, 스스로 일을 찾아 보탬이 되려 하며 남에게 베풀고 도와주는 모범 교인이 되더라고 합니다.

    신앙은 종단을 위한 신앙이 아니고, 수도를 위한 수도가 아니라, 신앙과 수도는 한울님과 가까워지는 한울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한울님과 친해지도록, 닮아 가도록, 한울님 일을 대신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래 신앙과 수도를 하셨는데도, 한울님과 긴밀하게 친해지지 않으면, 흐뭇한 마음이 안생기고, 불평이 자꾸 생기고, 못마땅한 것만 자꾸 보이신다면, 남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많고 대접받고 싶으시다면, 체면을 내세우고 싶으시다면, 천도교에 대한 주인의식이 미흡하시다면,  한울님에 대한 인식이나 한울님을 대하는 방법, 자신의 마음씀이나 삶의 방식, 세상을 보는 눈을 개선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끼리도 코-드가 맞는 사람, 색깔이 비슷한 사람, 레-밸이 같은 사람끼리 잘 통하지요. 세속적인 생각으로 영차영차 무리지어 목소리 높이며 밀고 나아간다고 결코 바른길이 아닐것입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영적으로 례-밸엎 해야 한울님과도 친해지게 되어, 사람과 한울님이 서로 흉허물 없이 마음을 활짝 열게되어 매사에 가르침 받으며 무슨 일이던 바르게 나아갈 수있지 않을까요?

    다시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신앙과 수도의 목적이

    1. 영성을 일깨우고
    영성의 낮다는 것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기능 즉 생각이나 행동 수준이 떨어졌다. 맑은 유리에 먼지나 때가 많이 덧칠해 져 있어 밖이 잘 안보이듯이, 타고난 영적 성능이 떨어져있다. 영성을 일깨우므로서 세속적인 생각, 에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차차 버리고 다듬고 비우고 닦고 다듬으면, 전체의 입장에서 넓게 멀리까지 바르게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2. 한울님과 가까워지고..
    한울님과 사람이 두 물건이라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가까이 접근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요. 형이하학적인 차원의 거리가 아니고, 신령한 한울님과 내 마음은 하나이지만, 바르지 못하고, 탁하고,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사심없이 맑고 깨끗하게 어질게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을 가까워졌다고 하는 것이지요. 청탁, 곡직, 지혜롭거나 우매함, 곧 성인 범인이 둘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본래 갖고있던 물건의 성능이 좋지 않으니 낮다, 사람이라고 표현한다면, 사용하던 기계를 수리해서 새 것 같이 온전하게 된 것을 성인군자 한울님이라고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요?

    3. 한울님과 더불어 삶을 개선하고 
    타고났거나 어릴 때부터 오래동안 환경에 의해서 몸에 익힌 습관을 고치기 쉽지 않습니다. 수련중이나 문득 떠오르는 영감에 의해서 자신의 허물을 알아채면, 살점을 뜯어내고 뼈를 깎아내는듯한 아픔을 감수하고, 가슴에 칼을 품은듯한 각오를 가지고 수련을 통해서 개벽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혼자서 고치기 쉽지 않지만 자신의 단점을 개벽하고자 하는 생각과 함께, 수련을 계속하면 한울님과 더불어 차차 다듬어 갈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4. 한울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제 방식대로 수준 안목으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가고 오고, 비판 뷸평, 하고 말고 하는 어리석음을 벗어 나 정명선의(正明善義)로서 각수직분을 잘 행하게 되니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던, 어김없이,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니 별 탈이 생길리 없을 것 같습니다.

    진리에 관해서 만가지를 알고,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유의유식 하는 것 만이 수준 있는 삶은 아닐것입니다. 거친 옷 거친 음식에 험한 일을 하더라도 한울님을 깊이 느끼며, 느끼기에 뜻을 같이 하며, 한울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차원높은 삶이며 가장 인간답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의 밝은 것은 나 홀로 아는 도다 하셨듯이, 아무도 모르게 홀로 마음으로 한울님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매 순간마다 무엇을 할 때마다 행복감과 자신감 주인의식을 갖고 바르고 당당하게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남이 만들어 주고 이끌어 주는 좋은 환경에서 수련하면 우선은 잘 되는 것 같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스스로 할 때 더딘 것 같지만 후자가 자생력이 생기고 오히려 한울님의 감응은 더 크신 것 같습니다. 쉬임없이 마음으로 그 무엇인가를 갈구하며, 몸을 혹사하며 까지 스스로 수련을 좀 해보았으나 내 놓을 것도, 잘 하는 것도, 아는 것도 가진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신앙을 통하여 수심정기 하여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베풀며 사는 것이 멋진 신앙인의 모습이란 결론을 얻은 것뿐입니다.

    한강교구 교인들께서는 오래동안 열심히 신앙을 해 오셨기에, 인제는 좀 널리 살피며 손길을 나누는 것도 더 높은 차원의 신앙과 생활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포덕 154년 11월 17일 한강교구 고향숙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서 설교시간에 이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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