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종학대학원11월2일(오강남 교수)특강 안내 > 자유게시판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천도교소식
  • 자유게시판
  • 천도교소식

    자유게시판

    종학대학원11월2일(오강남 교수)특강 안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087회   작성일Date 13-10-31 16:55

    본문

    제목: <세계 종교사의 견지에서 본 동학과 그 의의>

     

                                                                                                             오강남

     

    강의에서 강조하려는 두 가지 핵심 주제:

    1) 동학에서 가르치는 다음과 같은 개념은 세계 주요 종교의 심층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핵 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시천주(侍天主):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각지불이(各知不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상극(相剋)->상생(相生)

    삼경(三敬):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향아설위(向我設位)

    동귀일체(同歸一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오늘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의 표층과 심층을 중심으로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들어가며: 세 가지 비유

     

    우리의 논의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흔히 드는 예를 몇 가지 들어본다. 첫째 우물 안 개구리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실재의 전부인 줄로 안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우물 밖으로 나와 보면 넓은 하늘, 확 트인 들판 등을 보게 된다. 이제 그 개구리는 이전 개구리가 아니다. 변화된 개구리이다. 그 개구리가 계속해서 산으로 올라간다고 상상해보자.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 멀리 있는 것들이 보인다. 저 멀리 있는 아름다운 공원, 저쪽으로 보이는 맑은 호수, 더 멀리 있는 드넓은 바다--이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아하!’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개구리의 여정은 ‘아하! 경험’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새로운 개구리는 우물 안에 갇혀 있을 때의 제약된 시각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스러운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우물 안에 갇혀 있을 때의 제약된 행동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스러운 행동을 취하고, 그 때의 옹졸한 정신 상태에서 해방되어 더욱 자유스러운 정신 상태서 노닐게 된다. 요컨대 있는 그대로를 더욱 잘 알게 됨으로 변화를 받고 그만큼 더 자유스러워진 셈이다.

     

    옛날에는 바다에 끝이 있는 줄 알았다.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했다. 바다 끝 낭떠러지에 떨어질까 무서워 멀리 바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만큼 행동의 제약을 받은 것이다. 이제 바다에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전에 가지고 있던 행동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그만큼 자유스럽게 항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있음 그대로를 알게 됨으로 얻는 자유이다.

     

    마을 사람들이 동네 어귀에 큰 구렁이가 있는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어귀로 다니지 못하고 빙 돌아 다녔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가 용감한 청년 몇이 손전등과 도끼를 들고 동네 어구로 나가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라 동네 어구에 있던 큰 나무의 뿌리가 땅 바닥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이제 동네 사람들이 마음 놓고 동네 어구를 통해 바깥출입을 하게 되었다. 이것도 실재를 알게 됨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적 요소는?

     

    종교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물론 무수히 많다. 필자 자신도 여기저기에서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며 이런 저런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그런 공식적인 정의를 옆으로 밀어 놓고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예화에서 논의의 실마리를 끌어내어 보려고 한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무엇인가? 필자는 그동안 세계 중요 종교들을 열심히 섭렵하고 거기에서 필자 나름대로 발견한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진리를 깨침으로 얻을 수 있는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유”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네 개의 키워드는 진리, 깨침, 변화, 자유이다.

     

    대표적으로 예수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고, 부처님도 사성제(四聖諦), 곧 네 가지 진리를 체득하면 괴로움에서 자유스러워진다고 가르쳤다. 두 분 다 진리를 깨쳤을 때 우리가 변화될 수밖에 없고, 이 변화의 결과는 결국 자유스러워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아 틀림이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키워드를 하나하나 짚어보면 이렇다. 첫째, 진리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란 교리라든가 무슨 진술 같은 ‘말’의 문제가 아니다. ‘있음 그대로’라 할 수 있다. 일상적인 말로 실재(實在) 혹은 실상(實相)라 할 수 있고, 영어로는 'reality'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정말로 그러함,' 한문으로 진여(眞如), 범어로 tathata, 영어로 suchness, Is-ness 등이라 한다.

     

    둘째, 깨침이다. ‘있음 그대로’가 나와 무관한 무엇으로 남아 있지 않고 나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면 내가 ‘있음 그대로’를 아는 것, 깨닫는 것, 깨치는 것이 중요하기 그지없다. 능동적인 입장에서든 피동적 입장에서든 있음 그대로와 나를 맺어주는 인식의 고리가 있어야 한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있음 그대로를 그대로 볼 수 있는 ‘특수인식 능력의 활성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변화다. 있음 그대로의 더 깊은 차원에 대한 깨침의 깊이가 깊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변할 수밖에 없다. 이전의 나와 질적으로 다른 나로 변한다. 󰡔장자󰡕 첫 편 「소요유(逍遙遊)」에서 작은 물고기가 변하여 큰 물고기가 되고 그것이 다시 날개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큰 붕새로 변화되는 것과 같은 변화다.

     

    넷째, 자유다. 말할 것도 없이 있을 그대로를 보고 변화를 받은 사람은 그만큼 자유스러워진다. 붕새가 하늘을 날아 ‘남쪽 깊은 바다(南冥) 하늘 못(天池)’으로 비행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무지나 선입견,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제약과 속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놓임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요, 이 자유가 종교의 최종 결과라 해서 틀릴 것이 없다. 이 자유를 전통적인 용어로 하면 해탈, 목샤, 구원 등이다.

     

    다시 요약한다. 종교의 핵심은 ‘진리를 깨침으로 변화를 얻고, 거기에 따라 향유할 수 있는 자유’다. 좀 더 평범한 말로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됨으로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의 심층과 표층

     

    물론 종교에서는 산을 올라가면서 더 많은 것을 보는 것,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동네 어귀의 나무뿌리가 구렁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것 정도의 실재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이른바 ‘궁극실재(ultimate reality)’를 문제 삼고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 실재란 무엇인가? 힌두교 베단타에서는 그것을 브라흐만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하고, 도가에서는 도(道) 혹은 무(無)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理) 혹은 무극(無極)이라고 한다. 각 전통에 따라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런 궁극 실재를 추구하는 노력이 바로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변화를 얻고, 자유 함을 얻으려고 하는 종교적 노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교들이 이런 종교 본연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종교들은 현실적으로 진리니 깨침이니 변화니 자유니 하는 고매하고 심오한 종교적 측면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현실적 이익과 기복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면 잘못된 관찰일까? 현재 한국 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비리와 교세확장주의, 물질제일주의, 집단적·개인적 이기주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관찰이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비교종교학자로서 그 동안 세계 여러 종교를 비교하고 분류하는 방법에 대해 고심해 보았다. 물론 가장 보편적인 분류 방법은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 등 세계 여러 종교를 그 종교 전통에 따라 분류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종교는 모두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한다거나 불교와 유교를 비교하여 각 종교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모습들을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고 열거하는 것이 일반적이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필자는 세계 종교를 이처럼 종교 전통별로 분류하는 분류법보다 여러 종교 전통들을 관통하고 있는 ‘표층’과 ‘심층’으로 대별하는 것이 어느 면에서 더욱 적절한, 그리고 더욱 의미 있는 분류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접근법이 다양한 종교 현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 종교를 보면, 그리스도교도 표층 그리스도교와 심층 그리스도교가 있고, 불교에도 표층 불교와 심층 불교, 유교에도 표층 유교와 심층 유교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분류하고 보면, 표층 그리스도교, 표층 불교, 표층 유교 등 각 종교의 표층들 간에는 상당한 유사점과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다른 한 편, 심층 그리스도교, 심층 불교, 심층 유교 등 각 종교의 심층들 사이에도 서로 ‘통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표층 그리스도교와 심층 그리스도교 사이의 차이가 표층 그리스도교와 표층 불교의 차이나 심층 그리스도교와 심층 불교의 차이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미국 어느 신학자가 일본을 방문하고 호텔 지하에서 일본 선사(禪師)들을 만나 대화하는데 그야말로 의기투합할 정도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 통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신학자가 다시 호텔 위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TV를 켰는데, 거기 미국에서 온 TV 전도자가 나와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큰 소리로 외치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도자가 자기와 같은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었지만 자기와 이 전도자 사이의 차이가 방금 호텔 지하에서 만나고 온 선사들과의 차이보다 더 크다고 느껴졌다는 것이다.

     

    표층과 심층의 차이

     

    그러면 거의 모든 세계종교를 관통하여 발견되는 표층과 심층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시 나름대로 관찰한 바를 간단히 진술해 보고자 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20 가지 이상을 열거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여기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몇 가지만을 예거하기로 한다.

     

    첫째, 표층 종교가 변화되지 않은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죄인인 나, 불교적 용어로 탐진치(貪瞋癡)에 찌든 나, 류영모 선생님 용어로 ‘몸나’ ‘제나’로서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라고 한다면, 심층 종교는 이런 나를 부정하거나 극복하고 비우고 넘어설 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나, ‘참나’ ‘큰나’ ‘얼나’, 진아(眞我), 대아(大我)를 찾으려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참 나를 찾았을 때, 옛 자기에서 죽고 새로운 자기로 다시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를 향유하는 늠름하고 당당한 인격체고 우뚝 설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하면 부활이요, 류영모 선생님의 용어로 하면 ‘솟남’이다.

     

    똑 같이 교회나 절에 다니고 똑 같이 헌금이나 시주나 기도를 하더라도,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복을 받고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내세에서도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기 위한 준비로 생각하기가 십상이고,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은 이런 종교적 행동이 욕심으로 가득한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한 내면적 훈련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이 표층·심층의 구분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생각난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4~26절)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극복하는 것, 현세적인 이익이나 기복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형태에 함몰된 나에게서 벗어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 한 말씀도 지금의 내 목숨, 지금의 나에 집착하면 참된 목숨, 참 나에 대해 관심을 쏟을 길이 있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참 목숨, 참 나를 잃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한 표현도 표층 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지금의 내 목숨, 지금의 나에 집착하며 종교 생활을 영위하여, 설령 천하를 얻는다 한들 참 목숨, 참 나를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자문하라는 말씀이라 본다.

     

    이렇게 지금의 나를 떠받들고 사는 삶이 참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불교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불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성불 후 설파하셨다는 이른바 ‘무아(無我, anātman)’의 가르침이다. 형이상학적인 상세 부분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윤리적 방향에서 본다면 유교에서 ‘나’ 중심적인 ‘사(私)’를 죽이라는 ‘무사(無私)’의 가르침도 지금의 이기적인 나에서 벗으라는 가르침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차이로 들 수 있는 것으로, 표층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에 비해 심층은 ‘이해’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층 종교는 자기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율법 조항을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심층 종교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찌든 지금의 내가 죽고 새롭게 태어날 때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새로운 눈 뜸, 더 깊은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나 의례나 행사도 결국은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여긴다.

     

    이런 눈 뜸이나 깨달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국 “의식의 전환(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한 층 더 거창한 말로 바꾸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일상적인 이분법적 의식에서 벗어나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볼 수 있도록 하는 “특수인식능력의 활성화”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예수님이 공생에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다스리심)이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이 때 “회개”라는 말의 원문은 ‘메타노이아’이다. ‘메타’와 ‘노이아’의 합성어인 이 말의 더욱 직접적인 뜻은 ‘의식의 변화’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했을 때, 그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등 윤리적 차원에서 새롭게 됨을 요청했다고 보기보다, 우리의 의식 심저에서 우리의 의식이 완전히 바뀌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살 것을 요구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심층 종교는 이처럼 우리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때 새로운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붓다’ 혹은 ‘불(佛)’이란 ‘깨치신 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깨침을 위한 종교’, ‘깨친 이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성불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은 깨침을 이루라는 말이다. 부처님 스스로도 무엇이든 전통이나 권위에 의해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관찰하여 이해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참된 의미의 종교는 이성(理性)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contra ratio’가 아니라 ‘supra ratio’라고 한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사야 1:18)고 초청하고 있다. 여기서 ‘변론하자’고 한 것을 영어로는 “Let us reason.”이라고 번역했다. 이성을 가지고 따져보자는 뜻이다. 이성을 무시한 믿음, 이성에도 미치지 못한 믿음은 경신(輕信), 맹신, 광신, 미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유교는 어떤가?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 보면 인간이 큰 배움을 위해 밟아야 할 여덟 가지 단계가 열거되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여기서 처음 두 단계, ‘격물’과 ‘치지’는 우리가 가진 이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사물을 궁구하고 우리의 앎이 극에 이르도록 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가능해야만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무조건 믿는 믿음은 참된 의미의 믿음에 방해가 될 뿐이다.

     

    셋째, 표층종교가 대체적으로 신과 나를 영원히 분리된 두 가지 별개의 개체로 보는 반면, 심층 종교는 내가 신 속에 있고 신이 내 속에 있다고 하며, 신과 내가 ‘하나’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내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야말로 바로 나의 참 나라고 믿는다. 동학에서 주장하는 시천주(侍天主, 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나 인내천(人乃天, 내가 한울님이다)이라는 가르침이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만유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인 셈이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요한복음에 이런 가르침을 암시하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하는 구절이다. 그 외에도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8)고 한 것이나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그리고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와 같은 구절이다.

     

    사실 이 생각은 좀 더 확대되어 신과 인간 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동체(同體)임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개체는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의존하고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신유학(新儒學)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 사상이다.

     

    불교의 경우 연기(緣起) 사상, 특히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은 만물이 서로 연관되고 상호 의존되었음을 어느 사상체계보다 더욱 힘 있게,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인드라망 세계에서 모두가 상즉(相卽) 상입(相入), 상호침투, 상호일치라는 것이다. 이사무애(理事無礙) 뿐 아니라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다.

     

    이런 심층 차원의 신앙을 가질 때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저절로 나올 수 있다. 이웃과 내가 하나이므로 이웃이 아플 때 그것이 곧 나의 아픔으로 다가 온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처럼 내 이웃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이웃 대하기를 하느님 섬기듯 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동학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다. 사람과 하늘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사람 뿐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마저도 다 하나라고 보고 아끼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자연히 동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넷째, 표층 종교가 종교 경전의 표층적, 문자적 뜻에 매달리는 데 반하여, 심층 종교는 문자주의를 배격하고 문자 속에 들어 있는 ‘속내’를 찾아본다. 심층 종교가 이처럼 문자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유는 깊은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 내 속의 참 나를 찾는 일, 우리 모두가, 더 나아가 전 우주가 다 하나라는 사실 등의 발견은 너무나 엄청난 무엇이기에 우리가 일상 쓰는 보통의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을 표현해 놓은 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본다는 뜻이다. 종교 경전에 나오는 말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유비적으로 이해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종교적 실재를 체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다. 문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할 때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가장 힘 있게 가르친 이는 사도 바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새 번역)했다. ‘영’이라고 번역된 것은 ‘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그 문자 뒤에 있는 영, 정신, 속내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섯째, 표층 종교가 대체로 자기 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라면 심층 종교는 종교의 다양성(plurality)을 인정하고 자기 종교가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종교의 심층에 접한 사람은 인간의 지성을 통한 표현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종교 경험에 대한 한 가지 표현, 비록 그것이 자기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표현이라하더라도, 그것 하나만을 절대화할 수 없다. 자기 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대신 군맹무상(群盲撫象)의 이야기처럼 각자 자기가 만진 코끼리 경험을 토대로 함께 앉아 서로 대화하면서 다 같이 코끼리의 실상에 가까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원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종교의 심화 과정

     

    우리의 종교 생활은 대부분 표층에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인류 역사 전체를 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표층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선은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표층으로 시작했더라도 거기에 계속 안주해서는 곤란하다. 어릴 때 산타가 문자 그대로 굴뚝을 타고 내려와 선물을 주고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십이 되었는데도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지붕에 올라가 굴뚝을 쑤시고 있다면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의 깊이에 접한다거나 믿음이 자라난다고 하는 것은 이런 표층 신앙에서 심층 신앙으로 심화 과정을 밟는다는 뜻이다. 이런 심화 과정을 등한시하거나 거부하면 이른바 신앙의 발달장애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위에서 몇 가지 예로 든 것과 같이 예수님이나 사도들, 믿음의 선구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표층에서 심층으로 옮겨 가는 심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리스도교에서도 깨침과 ‘하느님의 나라’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서󰡕 같은 복음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된 후 폐기처분 명령을 받고 사라졌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이런 복음서를 통해서, 그리고 불교나 도가 사상, 신유학 사상 같은 이웃 종교나 사상체계를 보면서 이런 심화 과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그런 과정이 필요한지 더욱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경우도 지금의 기복 일변도의 종교적 태도에서 깨침을 얻으므로 자유에 이르라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유교도 형식주의적이고 복고적인 태도를 벗어버리고 소인배의 마음가짐에서 군자의 대의를 품으라는 공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맹자나 신유학에서 보는 것처럼 의식의 변화를 통해 이를 수 있는 성인(聖人)의 경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하리라 믿는다. 물론 불교인이나 유교인도 그리스도교나 기타 이웃 종교를 연구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자기들의 영적 위치가 어디인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가면서

     

    한국 종교인들은, 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의 진단에 따르면, 절대다수가 표층 신앙에 머물러 있다. 신앙생활이나 ‘나 중심’ ‘우리 중심’으로 맴돌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개인이나 집단 이기적인 표층 신앙 형태 때문에 현재 우리 종교계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가톨릭 신학의 거장 칼 라너(Karl Rahner) 같은 독일 신학자들이나 기타 종교학자, 종교문화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21세기에는 이런 표층 종교의 자기중심적 관행이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독일 신학자 도르테 죌레(Dorthee Soelle)는 이제 심층 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게 되리라는 심층종교의 ‘민주화’를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 표층 신앙에 함몰된 상태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줄어들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심층 종교가 줄 수 있는 생명력과 시원함을 향유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한층 밝고 아름다워지기를 기원해 본다.

    2) 21세기 종교는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드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칼 라너(Karl Rahner)나 도르테 죌레(Dorthee Soelle)같은 독일 신학자들이나 기타 종교학자, 종교문화 비평가들의 증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