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동학혁명120주년특별기획(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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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5. 동학군 최후의 전투와 오늘의 과제
전북도민일보 2월 14일
▲동학대혁명과 항일전쟁 전봉준 대장의 건의에 따라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선생에 의해 동학총기포령이 내려지고 혁명군은 전국적 상황으로 전개된다. 1차 기포 때 참여하지 않았던 부안의 김낙철 대접주를 비롯해 전라도 전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충청도·경상도 일대는 물론 강원도·경기도·황해도 등 전국기포로 확산된다. 또한 흥선 대원군의 밀지에 의한 항일전쟁의 지지는 혁명군에게 탄력을 준다. 김덕명포를 중심으로 전주삼례에 집결한 혁명군주력부대는 손병희 통령의 동학군과 연합하기 위해 논산으로 출진하면서 전주에 남은 김개남의 혁명군과 함께하지 못한다. 또한 전략상 최경선 장군과 손화중 대접주의 혁명군을 광주·나주로 출진시켜 일본군의 해로를 통한 협공을 차단케 한다. 이때 호남에서 동원된 동학민중혁명군은 총10만에 가까웠다.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 2,000m의 미제 스나이더소총과 무리다소총 등 최신식무기로 무장을 한 연합군과 달리 동학혁명연합군은 대다수 농민들로서 칼과 활·죽창으로 무장했다. 총이라곤 관군에게 빼앗은 화승총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동학정신과 애국애족으로 뭉친 동학민중혁명군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했던 것이다.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관군은 마치 일본의 용병이 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백성들을 무참히 사살하는 등 망국의 한을 자초하게 된다. 논산 황화대에서 전투를 했지만 패하고 다시 강경에서 수천명에 불과한 전봉준·손병희·김개남의 잔류부대가 합류해 11월 19일 전주성에 도착한다. 그러나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일 수 없어 22일 밤을 틈타 전봉준과 손병희 부대는 원평으로 후퇴하고 김개남 부대는 남원방향으로 흩어진다. 동학군이 철수한 전주에는 이튿날 경군이 들어와 전주성을 장악한다. 북실에서 탈출한 손병희 부대는 충주 무극시장에서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자 최시형 교주는 해산 명령을 내리고 만다. 이후 최시형 교주와 손병희 통령은 몇 년간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후일 손병희 선생은 동학 3대교주 자리에 오르고 해월선생이 교수형을 받아 순국순도하자 손병희 교주는 동학교단을 수습, ‘천도교’로 교단의 이름을 바꾸고 후일 기미 3.1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동학혁명군 주력부대의 해산에도 불구 광주에서 해산한 혁명군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장흥과 강진으로 이동해 이방언 대접주와 합류한다. 이방언 장군에 의해 광주인근과 남평·보성·능주·화순 등은 물론 전봉준 본진에 있었던 김제금구 김방서 대접주도 합류하게 된다. 수만의 혁명군은 12월 4일~5일 벽사역과 장흥부성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접수하지만 일본군의 소나미 소좌의 지시를 받은 관군에게 패퇴하고 결국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 수백명의 희생자을 내고 만다. 인근 야산에 숨어있던 민간인마저 참혹하게 학살을 당한다. 이어 17일 옥산리의 마지막 전투에 수백명의 죽음과 함께 해산한다. 이밖에 2차 기포를 전후로 남원 방아치 전투에서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홍천·고승산·세성산·대둔산 등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일본군 및 관군에게 참살당하는 최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는 마치 몽골군이 자행했던 초토화 적전을 방불케 하는 일본 본국의 지시인 ‘동학당을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아 산사람들을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리는 집단학살을 자행한다. 동학대혁명은 일시적으로 좌절됐으나 천도교에 의해 다시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켰으며 해방 후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등 끊임없는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에 동학민중혁명의 역사적 결실은 바로 분단된 남북의 통일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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