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동학혁명120주년 특별기획(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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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특별기획-동학농민혁명, 미래를 꿈꾸다
전북도민일보/소인섭 기자
올해 갑오년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지 120년이 되는 해다. 100주년에는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세계적인 혁명으로 자리매김했고 우리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계승하는 활동도 이뤄졌다. 본보는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정립한 바 있다. 그리고 120년이 되는 올해 본보는 다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이고, 교육적인 현실의 입장에서 계승차원의 재조명을 시도하기 위해 '동학관련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총 10회에 걸쳐 특별기획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2014년과 미래를 살아갈 지표로 삼고자 한다.
■ 게재순서
1. 동학농민혁명 발생가치 뭔가
2.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고부봉기
3. 동학혁명군 승전과 전주성 점령
4. 공주전투와 우금티의 좌절
5. 동학군 최후 전투와 오늘의 과제
6. 동학특별법과 명예회복
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단체의 활동
8.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문화재등록
9. 보국안민은 복지다
10. 계속되는 동학농민혁명
■ 자문위원
1. 이윤영 전주동학혁명기념관 관장
2.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 남원 은적암은 수운 최제우가 포교활동을 했으며 처음 동학이라 명명한 곳이다. 김개남군이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
1. 동학농민혁명 발생
1894년 1월 10일(음력 2월 15일) 농민 500여 명(문헌에 따라 수 십에서 1천 명)은 죽창 등으로 무장한 채 동헌을 습격했다. 고부에서 수탈을 일삼던 조병갑이 고부군수에 다시 임명된 다음날이다. 이것이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 원인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던 혁명자체를 중심으로 보면, 사회경제적 측면의 정치세력의 부패와 외세의 경제적 침탈, 그리고 봉건적인 신분차별의 문제 등으로 볼 수 있다. 농민 주체의 자발적 봉기로서 동학조직을 이용한 민중혁명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에 따라 사건의 명칭에 있어, 갑오농민전쟁과 농민혁명이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등 동학의 사상적 배경과 농민대중의 결합으로 일어났다는 해석도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동학의 개벽 즉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지지와 참여 그리고 주체적인 농민들의 희생적 결단이라는 총체적 원인과 전개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것에 중심을 삼고 시작하여 본다.
▲농촌 양극화·수탈
19세기 초 조선농촌사회는 직파법 대신 이앙법 발달로 노동력은 줄이는 대신 생산량은 증대시키는 농촌경제의 변화로 이어졌다. 보리와 벼농사를 번갈아 지을 수 있는 이모작도 가능하게 됐다. 또한 수리시설의 발달과 농기구 개량으로 작물재배가 발달하면서 농업생산이 증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지주나 대농, 상인들에게 이익이 집중되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소작농민은 몰락하고 대다수 농민은 무척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따라 농민은 유랑민으로 전락하고 궁핍한 노동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양극화로 대다수 농민은 파탄에 직면하게 된다.
세금제도도 농촌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수취제도 모순은 18세기 중반이후 가혹한 농민 수탈로 이어져 조병갑 고부군수와 같은 관리를 배출한다. 이러한 농촌의 약점을 이용하여 환곡제도가 더욱 기승을 부려 먹고살기에도 힘든 지경이었다. 또 19세기 초(순조) 왕실과 연결된 권세의 소수집안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일삼았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도정치가 끝나는가 싶었으나 10년 뒤 대원군이 퇴장하고 민씨집안이 다시 등장해 조선은 위기에 빠진다. 민씨정권은 취약한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 굴욕적인 개국을 허용하고 만다. 또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조선을 청나라의 소국으로 전락시키는 과오를 범한다. 또한 관직을 팔아먹는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지방 관리들의 농민 수탈은 극에 달한다.
1890년대 일본은 생활필수품을 위주로 팔아 먹고 농업생산물을 가져가 조선의 농촌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많은 쌀이 일본에 들어가면서 당시 쌀이 부족했던 조선사회는 쌀값 폭등 등으로 지주 대농들에게는 많은 이익이 되었지만 소농 등 농촌사회는 붕괴돼 갔다. 이는 당시 조선의 제조업 등 상업기반도 뿌리째 흔들게 된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양극화를 불렀고 영세한 수공업, 상인까지도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쌀 생산이 주로 호남에서 이뤄져 전라도 농민에 대한 수탈과 이로 인한 생활고는 심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원인
농민대중들에게 주어지는 피해와 삶을 위협하는 환경은 농민들을 투쟁의 선봉에 서게 했다. 농민들이 집중으로 일어난 시기는 철종 13년(1862년)부터다. 동학이 창도되는 시기가 1860년이므로 동학발생도 당시 사회상황과 맞물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종 25년(1888년) 민란 등 농민봉기는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국에서 60여 차례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고종 때에는 일반 봉기와 달리 수령을 살해하고 왕조에 반기를 드는 병란 성격의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1871년 경상도에서 일어난 영해 교조신원운동인 이필제난은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지방수령을 죽이는 반란성격의 혁명운동으로 전개된다. 이때 동학2대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과 동학의 접주들이 적극 가담했지만 결국 참혹한 동학의 탄압으로 이어진다. 이후 지하로 숨어들어간 동학은 최시형 2대교주의 노력으로 동학이 대중적으로 포교돼 재건이 이뤄지고 종교정치세력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1892~1893년 충정도 공주, 전라도 삼례,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등으로 연결되는 교조 최제우 신원운동과 동학포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척양척왜·제폭구민 운동으로까지 확산돼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전단계로서 역사적 연결을 제공하게 된다.
▲동학 창도와 새로운 개벽 세상
전문가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동학사상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창도와 조선정부의 가혹한 탄압과 수운의 죽음은 동학혁명의 출발로 여겨진다. 교조 신원운동과 동학민중들의 자신감, 조직력은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 또 동학의 대중적 포교와 지도력·행정력은 많은 인원을 동원하게 된다. 또한 만민평등사상과 사람이 하늘님과 같은 존엄한 존재라는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임금이 하늘을 대행하는 절대군주라는 상징 사회에서, 농민대중이 왕과 같은 신분이란 듣도 보지도 못한 인권혁명이란 자각을 불러 농민혁명을 촉발시킨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음력) 경상도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 용담성지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창도됐다. 수운은 한울님(하느님)이 자신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 진리를 자각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사람을 하늘님 같이 섬겨야 한다’는 후천개벽의 사상을 낳았고, 봉건사회를 정면 부정하는 새로운 세상의 실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조선정부는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수운을 참형에 처한다. 전라도에는 동학 창도 이듬해인 1861년 12월 중순 전파된다. 수운은 12월 중순경 경상도 경주에서 관의 탄압을 피해 전라도 남원으로 오게 되고 선국사 은적암에 머물며 당시 무극대도, 천도라 하던 도의 이름을 처음 동학이라 선포한다. 수운은 남원에서 전주 등으로 이동하며 동학을 포교한다. 수운이 참형에 처해진 뒤 해월 최시형 선생에 의해 삼남(전라도·충청도·경상도)일대에 대중포교가 이뤄져 1892~1893년 교조신원운동에서 출발한 동학운동은 결국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연결돼 세계사에 빛나는 위대한 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
소인섭 기자
자문위원 이윤영(전주동학혁명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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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윤영 전주동학혁명기념관 관장
동학연구향토사학가인 이윤영 전주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 관장은 올해로 동학 12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동학을 집대성할 계획이다. 이 관장은 “5~6월 쯤 책을 출간할 것을 목표로 동학역사이야기를 집필중이다”며 “수 십년 연구와 전국 동학혁명 발상지와 유적지를 발품을 팔아 얻은 것을 엮은 것이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올해 120주년은 60갑자가 두 번 돌아오는 2주갑의 뜻있는 해이다”면서 그러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개인의 시각의 한계속에서만 이해하고 총체적인 접근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1894년 1월초 전라도 고부에서 타오른 농민봉기는 동학혁명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면서 “120년 전 동학혁명이 민주화 요구였다는 점과 현 시대의 화두인 복지문제를 언급했다는 점 등 우리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관장은 일본의 역사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고 진단한다. 뿐만 아니라 현 한국정부입장에서 선 일부 학계나 정치인들의 역사왜곡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지경이라고 혀를 찼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서 전북도민일보의 특별기획이 바른 역사정립과 미래의 역사창조의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관장은 약 30년 전 동학(천도교)에 입교해 연구해왔고 표영삼·최현식·최순식 선생으로 부터 사사했다. 그동안 수차례 전국의 동학혁명유적지를 순례한 경험이 있다.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녑사업회 준비위원을 했고 지금은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소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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