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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천도교 신구파분열( 천도교역사 제대로알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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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성민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563회   작성일Date 22-12-08 19:08

    본문

    천도교민족종교의 새로운 이해  중에서..출판도서 모시는사람들


    p 213면부터



    1차 천도교 신구파 분열


    1, 민족 주의자 포섭을 위한 자치론

     

    삼일운동 이후 일제가 한민족의 민족운동의 실효성을 거세 하기위해 도입한 문화 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1년도 못되어 끝나버리고 오히려 비타협 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래서 일제는 제2단계로 자치론을 앞세워 데일 타협의 기조로 하는 정치단체 결성을 통해서 민족주의자


    들을 포섭하기 시작 하였다.


     1924년경부터 나타난 자치론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민족 운동도 좌경화해 가는 상황


    에서 민족주의의 연성화를 노린 하나의 민족 분열 정책이였다. 이러한 포섭 정책은 1925년 공산당 사건


    을 거쳐 민족 협동전선 (신간회)의설립. 그리고 사이토 총독이 사임에 이르기 까지 끈질기게 계속 되었


    . 자치론을 표방한 본격적인 타협 공작의 추진체로 꾸며진 것이 19241월에 비밀리에 결성된 (연정


    )였다. 연정회를 결성한 것은 192412일부터 5일간에 걸쳐 <동화일보> 사설로 실린 이광수의 민족


    적 경륜이 자치운동을 본격화 하기 위한 예비적 시론이라는 비난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민족


    개량주의의 대일 타협노선을 크게 불신 하면서 맹렬히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연정회는 결국 민중의 세


    찬 반대와 동아일보에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면서 유산되고 말았지만 그 준비는 이미 1953년 가을부


    터 최린이 신석우 김성수 송진우와 자주 만나면서 계획된 것이다.이와 때를 같이 해서 이광수가 북경에 


    가서 안창호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래서 일제당국도 이 계획이 국내의 민족주의 우파가 타협의 길에 들어


    가려고 안창호등 文治派와 사전 협의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 진단했다. 일제가 연정회결성공작에 어느정


    도 간여했느냐 문제는 아직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첫째 이러한 극비화합의 상세한 내용이나 이광수의 북


    경밀행을 당국이 알고 있었으며, 둘째, 주역을 한 최린과 이광수가 이미 당국에 회유 이용되고 있었고,


    , 송진우등 동아일보 간부와 총독의 접촉이 1923년경부터 부쩍 빈번하였으며, 넷째, 언론통제와 정치 


    담당인 총독의 참모인 아베 요시에가 이 문제에 전부터 관심을 품고 송진우 김성수와 자주 만낫고, 다섯


    , 1926년 말 연정회 부활 계획때도 아베가 막후에 도사리고 있었으며, 여섯째 동아일보가 이 계획을 전


    후해서 의도적으로 관측 기구 논설을 띄우고 있었고, 일곱째, 국내의 민족의자의 좌경화가 일제 당국의 


    골칫거리로서 대책이 검토 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일제가 이러한 움직임에 간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쉽사


    리 짐작할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연정회 결성이 유산된후 민족개량중의의 대일 타협적 자세에 대한 민족


    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의 공격은 날로 날카로와졌다.


    한편 1924년 좌익주도로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합법적 단체로 결성되자 이를 기반으로 


    19254월에는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창립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도 <서울파> <화요파> <북풍회


    등의 파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192511월과 19266월 두 번에 걸쳐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혼란 상태


    에 놓이게 되었는데, 일제는 이러한 당파 분립 경향을 최대한으로 조장 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개량주의자의 대일 타협적 성격을 반대하였으며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고 있는상황에서 1925925(조선사정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이 연구회는 겉으로는 연구단체이지


    만 주 목적은 총독부경무국이 진단 하였듯이 반공민족주의를 선정하고, 3파로 대립한 천도교를 통일하


    여 죄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일대 세력을 형성하는것과 물산장려운동에 자금을 대주는 것이 였


    ..



    19251128일 이 연구회를 바탕으로 해서 이상재 조병옥 이관용 안재흥 유억겸 등 20여 명이 태평양


    문제연구회를 결성해서 민족자본의 눈길을 끌고자 하였으나 대중을 끌어모을 수는 없었다. 일제당국은 


    조선사정연국회에 민족주의자를 끌어들인 뒤 민족개량주의자 영향에 있던 자로 하여금 1926년 후반부


    터 2단계로, 독립을 부정하는 것을 전재로 하는 본격적인 자치운동 단체 조직에 착수했다. 일제가 이 


    시기에 이 단체 결성을 용인한 것은 사회주의자의 방향전환론이 제창되어 분립에서 통일로라는 기


    치로 비타협 민족주의자에 대한 접근을 기대할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따라서 1926713일에는 서울 청년회의 김교영 이경호 등이 조선물산장려회의 명제세 김종협 등과 함


    조선민흥회에 이어 결성계획을 발표하였고, 115정우회선언에 이어 1927215일에는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가 결성 되었다. 이렇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자가 제휴를 지향하는 움직임은 죄익에 


    반대해서 자치론은 고집하는 민족주의 우파의 단결을 촉진 시키면서 한때 좌익이 당파 분열로 분해 될 것


    을 기대하고 잇던 일제 당국에게 조급하게 자치론을 표방하는 단체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송진


    우 최린 최남선 이종린 등은 안창호가 품고 있는 자치운동으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연구를 거듭하다가 


    19269월 말경에 자치운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10월부터 아베의 간여로 준비에 착수 하


    였다.


    이때 연정회 부흥 계획에는 그 후에 사회주의자가 된 한위건과 김준연 같은 자와 심우섭과 같이 이미 친


    일파였던 자가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아베의 직접 간여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 진


    상을 알게 된 안재홍과 김준연이 조선민흥회에 그 내막을 알리자 이런 사실을 모르고 참가했던 민족주의


    자들이 반발하여 깨지지 않을수 없게 되었으며. 나아가 민족주의자의 자치론자에 대한 우경단체의 결성


    이 아니라 일제 권력에 따른 식민지 지배정책의 하나로 추진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제는 자치론을 이용해서 민족분열 정책을 끈질기게 책동하였다. 연정회 결성을 막후에서 추진시켯던 


     아베는 총독의 양해로 대일 타협의 길에 들어서지 않은자들을 접촉했는데 그 중에서도 최린을 가장 유능


    하고 이용가치가 있는 위인으로 보고 발군이라는 평소의 소견이 확인된 것을 기뻐한다고 총독에게 전


    했다. 아베 요시에가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경에서 최린과 나눈 이야기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아베는 머지않아 조선에 자치를 주어 조선의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던졌으며 이에 참가


    하는 것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승인한다는 것이며 만일 장차 개선될 조선의회에서 좌익이 다수를 차지할


    경우 정치상의 권세는 자연히 그들에게 옮겨가지 않을 수 없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강조해서 위기감을



    부채질하고 최린의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 호소하면서 그 준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논의하였다. 이에 답


    해서 최린은 조선의회에 참여할뜻이 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만일 일본의 정치가 및 당국에게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왜 일찍 그 뜻하는 바를 밝혀서 조선 인민에게 가야 할 바를 알리고 앞날에 한 길 빛을 주지않았느냐?... 조선독립은 오늘날 할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있어 가장 긴요하고, 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반드시 조선 의회의 한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으며, 또 안창호를 추대해서 영수로 모시지 않으면 지금 낱낱이 흩어진 인심의 수습이 어렵고, 오늘의 이야기는 둘 사이에서 그치기로 하고... 총독에게는 당신이 말씀 올려달라.”(강동진,앞의책425)

     

    이 무렵 천도교 내에서는 분규가 점차 심각해져서 자치운동은 잠시 중단하는 듯하였다. 이때 최린은 천도


    교 신파의 세력을 강화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였고 8월에는 청년당과 내수단을 신파의 핵심 전


    위 조직으로 구축하였다. 1926년경부터 최린은 아베의 간여로 연정회 부활계획을 주도하였으며. 일제 당


    국의 지시에 따랄 그 준비가 대체적으로 이루어질 무렵인 19269월초에 재외 민족주의자에 후원, 양해


    를 얻기위한사명을 띠고 외유길에 올라 동경으로 떠났다. 동경에서는 아베와 긴밀한 협의를 하는 한편 


    귀족의원과 중의원 의원등 정계원로를 만나면서 수 개월동안 자치 운동을 전개 하였다. 그리고 19276


    11일 약소민족 운동의 현황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동경을 떠나 구미 여행길에 올랐다.*


    *연래로 고생되던 만성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작년 10월부터 동경에 건너가 제국대병원에 입원치료 중이던 천도교 ㅜ종법사 최린씨는 구미로제국의 종교,교육, 산업,사회상태 등 여러 가지 방면을 사칠할 목적으로 금 11橫濱횡빈를 떠나는 天洋丸으로...,,,,백의의,서전,화란,애란,이태리,노동로국 등으로 예정은 약 1개년으로 한다.{<동아일보>1927.6.111년 예정으로 최린시 洋行,구미각국의 정세시찰목적,11日橫濱出發}.

     


    그는 미국과 구미제국을 거치면서 이승만 안창호 김양수 장덕수 등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이듬해인 


    192841일 귀국했다.**


    **최린이 일본에 체류하고 구미를 하면서 쓴돈은 약 3만원이라고 한다. 이때 천도교 신파의 1년 에산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최린의 오유는 자치당 실현을 위한 견확 정도로 이해하고 잇다. 최린은 귀국해서 다시한번 현실운동, 당면이익운동을 강조 하면서 천도교제일주의를 고창했다.(김정인 日帝占期天道敎團民族運動 硏究)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2.8178;최린 천도교제일주의,신인간192801) **나의생각 여기에서 3만원 누구의 돈일까? 천도교? 일제?*

     

    최린은 이 여행에서 비 타협적 민족주의자가 많은 중국은 그냥지나치고 일제 당국의 지시에다라 안창호


    와 이승만이 있는 미국과 당시 민족문제로 세인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있던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여행앴


    .이것은 그 무렵 일제당국이 공산주의의 확산과 민족주의자의 좌경화가급속하게 진전되는 상황에서


    미국에 잇는 안창호와 이승만을 움직여서 그 영향력하에 민족주의 우파를 묶고 그것을 이용해서 사회주


    의와 민족주의좌파와 대항하려고 했던 것과 관련있는 일이다. 또 최린은 자신ㅇ의 정체를 숨기기위해 


    1927년 부르셀에서 열린 식민지주의를 반대하는 국제집회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미국에서도 바닝ㄹ민족


    주의자와 같은 발언을 뒤섞기도 하였는데 실은 이것도 아베와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런한 최린의 언동애 관해서는 당시 미국관헌이 영사를 통해 총독부 치안 관계자에게 통보해 주고 있었


    . 한편 그 해 해외여행에 이어 최린을 소련까지 시찰 시켜서 국내 반공주의자의 기수로 보이게 하였으


    , 만주까지도 시찰시켜 재만주 조선인의 반일 독립운동 게세에도 이용하려 하였다.


    해외여행을 마친 최린은 귀국후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자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장래민족주의 진로는 자치


    의 한 방향을 두는 외에 선택할 길이 없다고 깊이 결의 하여 은밀히 자료를 모집하고 동지를 규합하면


    서 대일 타협적 성격을 한층더 짙게 해서 일제당국이 지원하는 천도교 신파의 영수로서 식민지 통치 권력


    에 적극적으로 협력 하였다. 1928년 말에는 규약게정, 중립집권제 브활, 도령제 실시들을 통해 느슨했던 


    교인들의 기분을 전환함으로써 내부의 통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미 최린 정광조등은 중앙집권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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