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교육강좌, 동학과 인내천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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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사단법인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주관으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안내 시민강좌 및 답사 강사교육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1월 3일 이후,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의 '동학과 인내천 사상'의 주제로 정읍계승사업회 회의실에서 11월 중에 특강이 예정되어있습니다.』
동학과 인내천 사상
이윤영/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 본 글은 필자의 저서 ‘이야기 동학비사, 만고풍상 겪은 손’의 편집출간 전 원본의 내용 중에서 동학사상 즉 수운선생과 해월선생의 사상적 이야기의 일부를 간추린 것임을 미리 밝힌다. *
수운 최제우 선생과 동학사상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가 없다. 그 어떤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그 역사가 일어난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와 함께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난 역사를 통해, 현실과 미래에 있어 삶의 거울이 되게 하고 새 역사창조의 지혜를 얻도록 해야 한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동학운동 곧 동학과 천도교의 전체적인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동학사상을 알아야 한다. 또 동학사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동학사상을 창명한 동학교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대선생(水雲 崔濟愚 大先生, 1824~1864) 1824년 10월 28일(음력)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수운의 본향은 경주이고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며,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도언(道彦)이었다. 후일 구도수련 과정에서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바꾸었고, 호는 수운(水雲)으로 지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부른 이름 ‘복술’은 어머니 한씨(韓氏) 부인이 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당시 경주지역에서는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복술이라 이름 짓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 근암공(최옥)이 낳은 귀한 자식이라, 귀동자를 부를 때‘복술’이라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별명처럼 불러졌다고 본다.
수운선생의 득도, 동학을 창도하다.
수운선생의 구도수행이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순간인 경신년(庚申年, 1860년) 봄이 찾아왔다. 새봄을 맞이하여 수운의 기도수행은 더욱 더 강하게 솟구치며 하늘에 사무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왕조의 상황은, 안으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왕권마저 위협하였으며, 밖으로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침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또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아랑곳 하지 않고 관리들의 횡포는 극에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대국으로 믿었던 중국마저 서양에게 무릎을 꿇는 위기의식 속에 조선민중들은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이 매우 위태로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시국상황이었다.
이러한 어지럽고 위험한 일들이 급물살처럼 밀려오고 있을 때, 수운은 늘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또한 기도수행에 혼신의 노력을 하면서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나날이 많았다.
어느덧 4월이 되자 수운의 마음과 몸은 이상하리만큼 생기가 넘쳐나고 사명감에 의욕이 솟구치고 있었다.‘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는 순환의 이치와 같이 완연한 봄을 맞이하여, 용담일대가 연두색 녹음으로 바뀌면서 수운의 암울한 기분은 사라지고 맑고 밝은 청명한 기운이 심신(心身)에 전율처럼 퍼지고 있었다.
경신(1860)년 4월 5일(음력)은 큰조카 맹륜(孟倫, 세조)의 생일이다. 아침 일찍 조카가 의관(衣冠-옷과 갓, 당시 정장)을 보내어 오시기를 청하니, 수운은 그 정을 무시할 수 없어서 기도수행을 잠시 멈추고 짬을 내어 참석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여름 날씨에도 몸에 한기(寒氣-추운기운)가 들린 듯 떨리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잔칫상을 물리고 집에 돌아왔다.
몸과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대청마루에 오르자, 정신은 더욱 혼미해지고 기(氣)의 발동으로 몸이 저절로 뛰어 오르며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말자 공중에서 신선(神仙)의 말씀처럼 또렷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이때가 오전 11시경으로서 동학, 천도교에서는 수운의 득도(得道)는 물론 동학을 창도한 것으로 정하였다. 물론 득도와 창도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창도과정으로도 말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수운선생은 초월적 신관에서 내재적 신관으로 변화발전은 물론 한울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더욱 구체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이는 바로 사람과 신이신 한울님이 원래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천상(天上)의 상제신관과 다른, 사람에게 모셔진 시천주 신관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하는 동시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즉천(人卽天)의 경지까지 설명하게 된다. 수운의 직필경전 도덕가에 하늘의 이치를 설명하며,『사람의 수족동정 이는 역시 귀신이요, 선악간 마음용사 이는 역시 기운이요, 말하고 웃는 것은 이는 역시 조화로세』라고 하여, 사람과 하늘님은 근본적으로 일체라는 설명을 한다.
또한 흥비가에서,『전략)이글보고 저글보고 무궁한 그이치를 불연기연 살펴내어 부야흥야 비해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울 속에 무궁한 내아닌가.』로 끝을 맺는다.
흥비가는 불연기연의 논리와 짝을 이루는 글로서 수운의 경전집필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들이다. 아마 이때 수운은 기도수행이 최고조를 이루는 경지에서 말한 것으로 봐야한다. 이러한 경전의 말씀을 참고해보면 수운은 자신의 근원이 한울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현재도 한울님과 하나라는 인내천의 경지를 독파한 것으로 본다.
후에 동학 2대교주 해월(최시형)은 수운의 명교(命敎-명하여 가르치다)라 하며, 자신의 대표적인 법설 대인접물(待人接物-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다루는 법)의 첫 시작에서,『사람이 바로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라(人是天 事人如天)』하며, 수운의 가르침(대선생 명교)으로 강조하는 것을 보면 수운은 제자들에게‘사람은 하늘님(천도교에서는 현재 '한울님'이라 칭함)을 모신 존재이므로 사람의 존엄성은 하늘님-한울님(이하 하늘님이라 칭함)과 같다.’하여‘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섬기기를 하늘님 같이 하라.’는 말씀을 분명 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해월선생은 또한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으니 자연생명도 공경해야 한다는 대인접물의 법설을 보면, 수운의 불연기연 논리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불연기연에서 사람과 만물의 근원적 존재는 바로 조물자 즉 하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사람을 비롯한 만물의 탄생은 하늘님이 어버이와 같은 존재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면서 수운선생은 현재의 나 즉 자신이 하늘님과 같이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논리에 사람의 대자유(大自由)를 선언한 것이다. 또한 객체(客體)와 전체(全體), 소아(小我)와 대아(大我)의 대통합(大統合)을‘아니다, 그렇다.’의 역설적 논리를 통해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만물의 주인은 사람이라 하여 사람과 만물은 같으면서 다르다는 것도 말하였다.
수운선생은 도덕가에서,『천지음양 시판후에 백천만물 화해나서 지우자 금수요 최령자 사람이라』하였고, 또한 안심가에서,『대저생령 추목군생 사생재천 아닐런가 하물며 만물지간 유인이 최령일네.』하여, 사람을 비롯한 우주만물과 자연생명이 하늘님의 조화에 의해 나왔지만, 사람이 최령자로서 만물 중에 최고로 영특한 으뜸임을 밝혔다. 이는 사람과 만물이 하늘님과 궁극적인 본질로서 둘이 아니라, 지기(至氣)와 성령(性靈)으로써 하나임을 밝힘과 동시에 하늘님을 영적으로 체행하는 사람의 본질을 밝혔다.
수운선생의 수제자인 해월선생(2대교조 최시형)은 법설을 통해,『한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안에 계시나니, 그러므로 만물의 정기는 한늘이니라. 만물 중 가장 신령한 것은 사람이니 그러므로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니라. 사람은 태어나는 것으로만 사람이 되지못하고 오곡백과의 영양을 받아서 사는 것이니라. 오곡은 천지의 젖이니 사람이 이 천지의 젖을 먹고 영력을 발휘케 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한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니, 이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 원리에 따라 사는 우리 사람은 심고(心告)로써 천지만물의 서로 화합하고 통함을 얻는 것이 어찌 옳지 아니하랴.』고 하였다.
해월선생은 또 수운의 말씀이라 전하면서,『나의 한 기운은 천지우주의 원기와 한줄기로 서로 통했으며, 나의 한 마음은 조화귀신의 소사와 한 집의 활용이니, 그러므로 하늘이 곧 나며 내가 곧 하늘이라. 그러므로 기운을 사납게 함은 하늘을 사납게 함이요, 마음을 어지럽게 함은 하늘을 어지럽게 함이니라. 우리 스승님께서(수운 대선생) 천지우주의 절대원기와 절대성령을 체응하여 모든 일과 모든 이치의 근본을 처음으로 밝히시니, 이것이 곧 천도이며 천도(天道)는 유· 불· 선(儒彿仙)의 본원이니라. 내가 잠자고 꿈꾸는 사이인들 어찌 스승님(수운)이 남기신 가르침을 잊으리오. 선생께서 인내천(人乃天)의 참뜻을 말씀하시되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事人如天-사인여천) 하셨느니라.』의 법설을 남겼다.
해월선생이 전하는 수운선생의 법설강론은, 수운이 직접 시천주(侍天主)에 의한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운선생의 대각
수운선생의 기도수행 즉 창도과정은 1년여를 거치며 서양의 인식인 종교관은 물론 동양에서 말하는 도학(道學)의 개념에서도 일대변화의 새로운 신념체계를 세우기 시작한다. 바로 당시에 국교나 다름없었던 유교와 서양이 동양침략에 앞세웠던 서학을 중심으로, 모든 종교와 사상 즉 종교혁명을 선언한 것이다. 수운선생은 득도 후 1년이 지나면서 예전에 수운이 아니라 전혀 다른 수운으로 거듭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역사를 인식하는 가치관이 완전 바뀌었다.
그동안의 종교체험을 하나하나 뒤돌아보며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런지도 헤아려보았다. 또한 현실의 세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지도 깊게 생각하였다. 또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하며 결국 그 무엇 때문에 하늘님의 망극(罔極-이루 말할 수 없이 큰)한 은혜로 세상에 다시없을 무극대도를 받았는지의 억누를 수 없는 사명감이 솟아나고 있었다.
수운선생은 1860년 4월 5일의 득도 상황을 용담가에서,『천은이 망극하여 경신사월 초오일에 글로어찌 기록하며 말로어찌 성언할까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의‘꿈도 같고 깨어있는 것도 같고’의 상태에서 하늘님께 도를 받았다는 것에 득도(得道)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수운선생이 하늘님께 도를 받은 경지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연속된 기도수행과 하늘님과 일체화되기 위한 일념의 자세로 한 해 동안 초인적인 수련을 중단 없이 행하였다. 그리하여 수운은 끝내 무극대도 즉 천도를 크게 깨닫는 대각(大覺)의 경지에 오른다. 앞서 밝혔지만 수운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도법으로 하늘님과 일체화된, 일심동체(一心同體)를 이루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하늘님과 하나로 연결됨을 밝혔다. 그래서 흥비가에,『무궁한 이울속에 무궁한 내아닌가』를 노래하여 하늘님과 일체라는 것을 나타냈고, 불연기연에서,『오늘날의 내가 옛적의 하늘님이요, 옛적의 하늘님이 오늘날의 나』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밝힌 것이다.
또한 동경대전 전팔절 중에서,『不知道之所在 度吾信之一如(도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믿음이 한결같은가 헤아리라.)』질문하고, 후팔절 짝을 맞추는 글에서,『不知道之所在 我爲我而非他(도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니라.)』하며 답을 하였다.
후에 동학(천도교)3대교주 의암(손병희)선생은 법문에서,『汝必天爲天者 豈無靈性哉 靈必靈爲靈者 天在何方汝在何方求則此也 思則此也 常存不二乎(너는 반드시 하늘이 하늘된 것이니, 어찌 영성이 없겠느냐. 영은 반드시 영이 영된 것이니, 하늘은 어디 있으며 너는 어디 있는가. 구하면 이것이요 생각하면 이것이니, 항상 있어 둘이 아니니라.』하여, 수운의 시천주(侍天主)에 의한 인즉천(人卽天)과 해월의 인시천(人是天)에 의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도법(道法) 즉 심법(心法)을 의암은 천인일체(天人一體)에 의한 인내천(人乃天)으로 연결하여 스승의 심법을 바르게 계승함을 밝혔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해보면, 수운‘사람은 하늘님을 모셨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다.’해월‘사람이 바로 하늘이므로 사람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의암‘하늘이 하늘된 것이 사람이므로 사람이 이에(같은) 하늘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결코 틀린 논리나 사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학, 천도교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이, 수운은‘시천주’이고 해월은‘사인여천’이고 의암은‘인내천’으로 변화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주관적인 설명은 동학사상을 깊이 알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수운선생은 상제 즉 하늘님의 계시를 받아 천사문답(天師問答)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득도를 이루었고, 또한 1년여의 도를 닦는 수행(修行)을 지극정성을 다하여 무극대도 즉 천도를 크게 깨닫는 대각(大覺)을 함으로서 후천 오만년의 새로운 개벽세상을 열게 된 것이다.
다시개벽과 후천개벽
여기서 동학사상의 중요한 내용을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할 내용이 있다. 동학·천도교에 관심이 있는 연구가들이나 일반사람들은 아마 동학하면 크게 세 가지를 떠올릴 것이다. 첫째는 동학의 사상하면 인내천이요, 둘째는 동학의 역사하면 동학농민혁명이요, 셋째는 동학의 운수하면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집약적으로 생각날 것이다. 여기서는 동학의 개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동학의 후천개벽 운수론도 사실 동학의 이념이자 사상에 포함된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는 증산교(증산도, 대순진리회)의 후천개벽사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원불교에서 말하는 개벽사상과는 분명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동학이후 많은 종교들은 동학의 참다운 개벽사상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 입장에 맞게 사용하다 보니, 동학의 개벽사상은 현재 많이 오염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동학 이후 창교 된 민족종교들이 인용하는 개벽사상과 동학의 진수인 개벽사상은 많이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수운은 득도전의 과제상황과 득도후의 실천상황에 있어‘다시개벽’이란 말을 사용했다. 수운이 사용한 개벽을 설명하기 전에 개벽에 대한 어원을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서는 개벽이란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것을 뜻한다.
동양에서는 옛적부터 갑자(甲子) 간지(干支)가 들어가는 해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사상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중국 송나라의 소옹(邵雍, 1011~1077)이다. 소옹의 시호가 강절(康節)이기 때문에 보통 소강절로 불린다. 그는 황극경세서(黃極經世書)에서 설명하기를 우주의 역사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원리에 따라 원회운세(元會運世)로 전개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우주1년은 1원(一元)으로서 12만9천6백년이다. 소강절의 원회운수를 쉽고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선천의 5만년과 후천의 5만년 그리고 빙하기의 2만 9천 6백년의 운세론이다. 선천(先天)의 5만년은 건운(乾運)의 봄과 여름에 해당되며, 후천(後天) 5만년은 곤운(坤運)의 가을과 겨울에 해당된다. 그리고 2만9천6백년의 빙하기에는 우주의 재충전기로서 생명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태로 말한다.
이렇듯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개벽에 대한 이야기는 천지우주의 변화원리를 선후천으로 나눠 후천개벽의 이론과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현재 후천개벽의 시기로서 우주론적 시간의 일대 전환점인 가을개벽을 설명한다. 또한 가을개벽의 시기에 우주변화원리에 의한 기우러진 지구의 축이 바로 서게 되면서 대혼란과 대질병이 창궐하여 사람을 비롯한 자연생명들의 멸종위기가 온다는 것을 일부 신흥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알려진 개벽론은 동학의 개벽론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수운은 ‘다시개벽’이라 말했지,‘후천개벽’이라 하지 않았다. 물론 다시개벽이란 말은 개벽을 다시 한다는 의미로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의 어원적 의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증산(甑山, 강일순 1871~1909, 증산교창시자)이나, 일부(一夫, 김항 1826~1898, 정역 저술자)가 말하는 후천개벽과는 세상을 보는 눈과 미래를 바라보는 이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강절, 김일부, 강증산 등 후천개벽사상과 동학의 다시개벽 사상을 혼동하기에 여기서 요약하여 문헌을 통해 바르게 전하겠다.
수운은 용담가에서‘개벽 후 오만 년’이라 하였다. 개벽이 시작 된지 5만년이라면 천지창조나 천지개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과학계에서는 빅뱅에 의한 우주탄생을 137억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지구탄생을 45억 년 전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인류의 조상이 150만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한다. 개벽 후 5만년의 표현은 천지개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운이 저술한 안심가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고 하여 개벽의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개벽은 열(開-개), 열(闢-벽)자로 되어있다. 수운이 말한‘개벽 후 5만년과 다시 개벽’의 낱말을 연결해보면, 5만 년 전의 개벽을 지금 다시 열자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상징적인 숫자를 10만으로 설정하고, 먼저의 5만과 나중의 5만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과거 주역에서도 그렇지만,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숫자는 5와 10이라는 숫자에 계속 더하여 표기되고 있다. 그래서 수운(최제우) 다음으로 동학의 주인인 해월(최시형)도, 다시개벽의 뜻을 존중하여 먼저개벽을 선천(先天)으로, 다시개벽을 후천(後天)으로 하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도, 유인원과 다른 사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을 약 5만 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바로 수운의 개벽사상은 동학을 창도한 이전의 세상을 선천으로, 이후의 세상을 후천으로 하는, 다시개벽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소강절의 개벽사상을 참고하여 선천과 후천의 전환점이라는 시기를 인용하였다는 것도 짐작하여본다. 수운은 선천의 낡은 인간 삶의 틀을 후천의 새로운 인간 삶의 틀로 전환하는 의미에서‘다시 개벽’의 용어를 사용하여 동학사상의 주요 철학으로 접목시킨 것으로 본다.
경전에,‘하원갑, 상원갑,‘전 만고, 후 만고,‘전 춘주, 후춘추’등 이전의 용어들을 인용하였으나, 동학에서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지난시절, 오는 시절’ 등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온다는 미래 희망적인 내용으로 동학의 개벽사상을 정립하였다. 필자의 견해로 정리하자면,‘천지운수의 변화에 의한 개벽은 천지운수에 의해 자연적으로 오는 것이고, 인간문명의 변화에 의한 개벽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동학의 다시개벽 사상은, 동학창도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전개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세상의 역사 즉 인간세상의 역사란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식을 가진 인간들이 주체가 되는 창조적 순환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동학사상의 역사관이자 미래관이다.
칼노래와 칼춤의 유래
수운선생이 지은 검가 즉 검결(劍訣)에 대해서 사료에 근거하여 자세히 설명을 시도해본다. 먼저 검결은 검가와 같은 제목의 내용으로 전하여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 시작해본다. 검결은‘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중심으로 동학초기기록에 1861년 4월경에 경주 용담에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1862년 2월경 남원 은적암에서 지었다는 검가가 검결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정확히 구분하는 내용의 기록이 없다.
1883년에 해월선생이‘용담유사’를 간행할 때‘검결, 검가’를 경전에 넣지 않았다. 당시 경전(용담유사)에서 검결(또는 검가)을 뺀 이유를 생각해보면, 수운선생이 관으로부터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1864년 3월 10일(음) 순도(殉道-殉敎)를 당했을 때 적용된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중심내용에‘국정을 모반하여 반란을 획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검결을 지목했었다.
수운선생의 7주기 순도(순교)일인 1871년 3월 10일에 일어났던 영해교조신원운동인‘이필제의 난’도 교단차원의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몸소 겪은 장본인으로서 당시 검가가 얼마나 위력적이며 도전적인‘칼노래’인지 알았던 것이다. 동학교단 최고 책임자로서 칼노래와 칼춤이 해월의 입장에서는 정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검결과 검가에 대해 여러 사료들을 연구하고 분석해보면 같은 내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경상감사 서헌순이 정부에 올린 장계에 의하면,“수운선생의 아들 세정(世貞-동몽 최인득)이 미친 듯이 홀로 나무칼을 쥐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데 그 노래인즉 ‘시호시호’의 곡이었다.”고 하였다.
수운선생과 함께 대구감영에서 재차 심문을 받던 이내겸의 진술에‘검가’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현재 천도교 경전에 검결의 제목으로 전해오는 내용은 천도교 창건사의 내용과 같고, 또 다른 검가의 내용들은 필사하여 전해온 것을 옮긴 것이며 원본과 같은 것이지도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여러 사료에 나타난 검가 즉 검결의 내용은 세 가지가 중심을 이루고, 필자가 찾아낸 두 가지를 합하여 대략 다섯 가지로 전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천도교창건사’의 검가 내용은,『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 용천검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 호호망망 넓은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 용천검 날랜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 만고명장 어데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로 되어있다.
둘째, 일성록에 전해지는 내용은,『시호시호 이내시호 / 용천검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 용천검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비켜잡고 / 호호망망 넓은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 용천검 드는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 게으른 장삼소매 우주에 덮여있네 / 자고명장 어디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 시호시호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로 되어있다.
셋째,‘동학서’검가의 내용은,『청의장삼 용호장이 여차여차 우여차라/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용천검 드는칼 아니쓰고 어찌하랴/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호호막막 널은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칼노래 한곡조로 시호시호 불러내니/용천검 날랜칼은 일월을 희롱한다/계운은 무수장삼 우주를 더폐서라/자고명장 어디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시호 좋을시고/태평가를 불러내어 시호시호 득의로다/왈이동방 제자들아 너도득의 나도득의 우리집도 득의로다.』로 되어있다.
넷째,‘수도요람’의 검가 내용은,『청의장삼(靑衣長衫) 용호장(龍虎將)이 여차여차(如此如此) 우여차(又如此)라 / 왈이동방(曰爾東方) 자제(子弟)들아 너도득도(得道)나도득의(得意) / 시호시호(時乎詩乎) 이내시호(時乎)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시호(時乎)로다 / 용천검(龍泉劍)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처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천지(天地) 일신(一身)으로 비껴서서 / 칼노래 한곡조(曲調)를 시호시호(時乎時乎) 불러내니 / 용천검(龍泉劍) 날낸칼은 일월(日月)을 희롱(弄)하고 / 게으른 무수장삼(舞袖長衫) 우주(宇宙)에 덮여있네 / 만고명장(萬古名將)어데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무장사(無壯士)라 / 조흘시구(矢口) 조흘시구(矢口) 이내신명(身命) 조흘시구』로 되어있다.
다섯째, 한국신흥종교총감의 검결(검가) 내용은,『청의장삼 용호장이/여차여차 우여차라./시호시호 이내시호/부재래시 시호로다./만세일지 장부로서/오만년지 시호로다./무수장삼 결펴입고/이칼저칼 넌즛들어/호호망망 넓은천지/칼노래한 곡조를/시호시호 불러내니/용천검 날랜칼은/일월을 희롱하고/게으른 무수장삼/우주에 덥혀있네./자고명장 어데있나/장부당전 무장사라./좋을시고 좋을시고/이내신명 좋을시고.』로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다섯 가지 종류의 검가 내용을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다.]
첫 번째의 검가는 1933년 천도교 중앙종리원에서 발행하였고, 이돈화(1884년~?)가 편술한‘천도교창건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창건사의 검가내용을 그대로 옮긴 천도교경전에는 검결의 제목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글체는 국한문으로 되어있다.
두 번째 검가는 일성록의 기록문서로 남아있다. 일성록은 현재 국보 제153호로서, 1752년(영조28)부터 1910년(융희4)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중심으로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로서 필사본이다. 여기에 수운선생에 대한 탐문조사와 심문한 내용들이 있는데 그중 이내겸(李乃兼)이 검가를 구술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다.
세 번째 동학서의 검가는 평안도 용강에서 관이 몰수한 문건 중에 포함된 것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동학문서는 동학지도부와 동학도인들에게 관이 몰수한 문서들로서, 1863~1907년으로 추정되며, 동학역사를 연구하는데 참고할 중요문헌들이다.
네 번째 검가는 전라도 부안면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부안수도원(호암수도원)’에서 포덕 106(1965)년 인쇄한‘천도교수도요람’내용 중 끝부분에‘대신사 검가(大神師 劍歌)의 제목으로 되어있다. 동학혁명의 본고장인 호남에서 전승된 검가의 내용으로 짐작된다. 필자가 전해진 역사를 추적하여 보았는데, 해월선생의 제자인 부안대접주 용암 김낙철의 수제자이자 사위인 학산 정갑수에 의해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산선생은 당시 심신수련을 위해 목검을 들고 가끔 칼노래를 불으며 칼춤을 추었다고 한다.
다섯 번째 검결 즉 검가는 이강오 교수가 저술한 한국신흥종교총감에 있는 내용이다. 겸결에 대한 설명을‘교조 최제우가 교인들의 원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교조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한 뒤 교인들로 하여금 목검을 들고 검결(劍訣, 검가)을 부르게 하였다. 검결이란 일종의 군가와 같은 것이다. 이 겸결은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까지 부르고 있었지만 뒤에는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교수께서 수십년을 전국을 돌며 민족, 신흥종교에 대한 연구를 위한 구전 및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것이므로, 민중들의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검가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수운선생이 자신의 득도에 대한 기쁨과 도력에 대한 경지를 표현했으며, 또한 하늘님의 지극한 기운인 영기(靈氣)와 자신의 기운을 일체화시키는 건강수행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천제(天祭) 즉 하늘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검가의 내용 중에 수운선생이 강조한 내용으로서는 바로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오만 년 이라는 인간역사와 우주역사의 상징 언어까지 동원하여,“때로다 때가 왔도다. 다시는 오지 않을 나의(우리들) 좋은 때로다. 만세에 한 번 태어날 장부로서 오만 년 만에 만난 절호의 때로다. 바로 이때 용천검 잘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을 하겠는가.”의 때라는 시기를 강조하면서,“만고의 명장 어디에 있나, 이 대장부 앞에 당해낼 장사가 없도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라고 끝을 맺는다.
검가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는 도(道)차원의 운수 즉 하늘의 운수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개벽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운수도 결국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혁명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동학의 검가는 동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수운선생의 득도와 순교에서부터 갑오동학혁명으로 연결될 때까지 칼노래와 칼춤은 은밀하게 전승되어왔다. 수운은 원래,‘천제를 지내며 질병을 물리치고 개벽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뜻에서 칼 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었다.’한다. 일성록 등 관변자료에 의하면, “매우 구석지고 으슥한 산속에 들어가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글을 외워 신령이 강림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여러 명이 모여서 도(道)를 설명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최가(수운)가 글(주문)을 외워 신령을 내리게 하고 나서 손에 나무칼을 쥔 채로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나서 나중에는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한 길도 넘게 뛰어올랐다가 한참만에야 내려오는 것을 제 눈으로 본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동몽 최인득(童蒙 崔仁得-수운의 아들)은 공술하기를, “제가 사실 칼춤을 추었지만 본심에서 한 짓이 아니라 ... 나무칼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노래는‘시호시호’라고 하는 곡입니다. 이것을 익히기 위하여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냅니다.”라고 하였다.
수운이 진술하기를,“...요즘 바다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양인(洋人-서양사람)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정화(李正華) 다시 공술하기를,“최가(수운)는 말하기를‘나무의 날카로움이 쇠보다도 더하면 양인(洋人)들의 눈이 현란하여져서 보검(寶劍)으로 인정하게 되어 제아무리 든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가졌더라도 우리에 감히 접어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심문의 조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이와 같이 검가 검무는 수운시대부터 하늘에게 제사지내는 의식과 질병을 물리치는 치병 등 심신단련에 그치지 않고,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큰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논학문 지어‘동학’을 재차 선포하다.
수운은 남원 은적암에서 1861년 12월 중순경부터 1862년(임술년)겨울을 지내며 권학가를 짓고 이어 논학문(論學文) 즉 동학론(東學論)을 짓는다. 권학가를 1월초에 지었으므로 논학문은 1월 중순에서 2월 중순사이 쓴 것으로 짐작한다. 경주 용담에서 경상도일대 유생들과 관으로부터 유교의 이단으로 몰리며 서학이라는 모함과 지목을 받아왔다. 또한 일부 백성들도 잘못 알려진 소문을 근거로 하여 많은 오해가 있어왔다. 더욱 곤욕스러운 것은 최씨문중에서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가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오해와 지목을 불식시키려는 차원에서 각계각층의 눈높이에 맞추어 여러 경전을 집필해 오던 수운은 논학문을 통해 서학과 동학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논하며 또한 동학의 핵심적인 진리인 주문(呪文)에 대해 일일이 주석을 달아 정확한 설명을 붙인 글이다. 주문해석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소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수운선생은 서학을 비판하면서 논학문에,『경신년 사월에 천하가 분란하고 민심이 효박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에 또한 괴상하고 어긋나는 말이 있어 세간에 떠들썩하되, 서양 사람은 도성입덕하여 그 조화에 미치어 일을 이루지 못함이 없고 무기로 침공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하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가히 순망의 환이 없겠는가.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시며 서양 사람들에 의한 천주학 즉 서학을 침략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사랑과 평화를 추구해야 할 성스러운 종교가 침략의 앞잡이가 된 것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수운이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여러 비판들의 경전문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학의 교조인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 당시 서학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의 잘못과 이치에 어긋난 교리는 과감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운선생은 득도 후 1년 2개월이 지나고, 포덕을 본격 시작한 1861년 신유(1861)년 6월부터(양력 7월) 서학으로 지목받기 시작하면서 서학의 명칭과 대비하여 동학이라는 호칭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나 연구가들은 서학을 반대하기 위해 동학을 창도했다는 주장들을 하는데, 이는 동학창도과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서학을 반대하기 위해 동학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무극대도 즉 천도의 진리가 서학으로 모함과 지목을 받는 것에‘동학’이라고 교단 이름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동학의 경전과 역사기록에 또렷이 남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운선생은 제자와 선비들과의 문답형식을 인용하여 논학문에,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대답하시기를「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묻기를「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 합니까.」대답하시기를「천도이니라.」묻기를「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대답하시기를「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
“묻기를「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 합니까.」대답하시기를「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 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 나시어 추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해 온 것이거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가히 서라고 이름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여기서 수운선생은 분명하게 도의 이름을 천도(天道)라 하고, 학의 이름을 동학(東學)이라 하였다. 현재 유교나 천주교의 종교 이름이 당시에는 도(道)와 학(學)으로 호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는 공자를 교조로 하여 맹자 순자로 계승된 선비의 도학(道學)이었다. 유교가 유도(儒道), 유학(儒學)으로 불리었듯이 예수를 교조로 하는 천주교도 당시 조선과 동양 즉 동쪽과 서쪽의 방위 개념과 바다방향에 의한 동양(東洋) 서양(西洋)을 비교하여, 양도(洋道) 양학(洋學) 그리고 서도(西道),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 등 다양하게 불리었다.
동학이라 호칭한 동학(東學)의 뜻을 간추려 해석하면, 동쪽의 학문 즉 동방지학(東方之學)의 네 글자를 ‘동학’ 두 글자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동학의 언어적 의미를 넓게 보면 서양 즉 서양학문과 대비하여 동양학문이라 해석할 수 있으며, ‘서학’에 비교하여 동학이라 호칭한 것으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또한 동(東-동녘 동)이 방향인 동쪽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해가 뜨므로 아침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침 즉 새벽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와 ‘아름답고 깨끗하다.’의 뜻이 들어있다. 당시 나라의 이름인 조선(朝鮮)도‘아침의 나라’와‘동방의 나라’라는 것이 같이 포함되어있다. 예를 들어,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조(朝)자 대신 동(東)자를 사용하였다.
동학의 명칭에 있어, 안으로는 조선의 종교요 학문이라는 민족적인 뜻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또한 밖으로의 의미로서는 동(東)자를 인류적인 차원으로 보면, 새롭게 시작하는 도(道)요 학(學)으로서 동쪽에서 해가 뜨면 서쪽에도 비치고 동서남북 관계없이 모두 밝아진다는 뜻으로 세계적인 의미도 있다. 그래서 수운은 천도와 동학이라는 두 호칭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천도(天道)는 국가와 방향을 뛰어넘어 하늘의 길이요 진리라는 크고 넓은 하나 된 통일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우주적 차원의 무극대도(無極大道)라는 호칭까지 하신 것을 보면, 시대와 역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뛰어넘는 대담한 경지의 호칭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결국 동학이 지향하는 목적에서 민족적 차원인 보국인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등 자주국가의 이념이 있는 동시에,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국제화, 세계화의 사상도 같이 존재한다.
해월선생의 천어해석
해월선생은 천어 즉 하늘님 말씀을 듣기 위해 엄청난 고행의 수도(修道)를 하였었다. 해월이 천어를 듣기까지의 과정을 ‘천도교회월보, 해월선생문집’을 참고하여 소개해본다. 해월은 35세, 1861년 6월경 어느 날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 수운 스승으로부터 직접 도를 받는 입도(入道)를 한다. 그 뒤 한 달에 몇 번씩 용담의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8월 10일경에 용담을 찾아온 도인(道人-동학 교인들을 당시 도인이라 불렀음)들이 천어를 들었다고 자랑들을 하고 있었다. 해월은 천어를 못들은 자신이 부끄러워 저녁밥을 먹고 스승에게 돌아가겠다고 큰절을 올렸다. 수운은 자고 가라고 만류하였으나 끝내 70리의 밤길을 걸어 검등골인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해월선생은 자신이 정성이 부족하여 천어(天語) 즉 하늘님 말씀을 못들은 것으로 자책하면서 굳은 결심으로 집으로 돌아가 수도(修道)를 하기로 각오한 것이다. 해월은 집에 돌아오자 밤낮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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