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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소설. 수운 최제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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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경흥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957회   작성일Date 15-10-01 14:20

    본문

      한상원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꾼과 함께 헐레벌떡  왔다.  제환은 상원이를 보자마자 채어 사랑방으로 데리고 간다. 상원이는 일꾼한테서 앞뒤 얘기 다 들었다면서 이것은 천명이니 수일 내로 식을 치르자한다. 제환은 그렇게 뜸들일 것 없이 오늘밤만 넘겨 내일 당장 치르는 것이 어떠냐한다. 이때 일꾼이 와서 근암께서 두 분을 부른다고 한다. 상원이는 죄지은 사람처럼 근암께 인사드리고 한씨고모에게도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상원이가 놀란 것은 고모가 아랫목에 마치 주인이나 된 듯이 천연덕스레 꼿꼿이 앉은 모습이다. 근암공 이야기만 나오면 귀 막고 돌아서 버리던 그렇게 쌀쌀맞던 고모가 아닌 딴판이다. 해 지는 방안의 끄느름 속의 고모의 곧은 어깨와 그 위의 그림 같은 얼굴은 신상(神像)과 진배없다11).

      “너희들이 뭘 의논했는지 안다. 번거롭게 할 일이 아니다. 정안수 한 그릇으로 하기로 했으니 그리 해라.”라고 근암이 단정한다.

      그럼 두 분이 벌써 마음을 맞춰 판 벌린 것인가? 아들 없이 환갑을 넘긴 근암이나 10년을 수절하던 한씨나 이런 인연 저런 천연으로 만난 것을 억지로 끊기보다는 오늘의 만남을 핑계 삼아 내외의 인연을 맺는 것이 순리라 여긴 거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 떳떳한 결혼은 아니어서 멍석 깔고 할 순 없지만 소박한 예식이라도 치러야할 것 같아 ‘정안수로 하겠다.’ 한 거다. 그래서 저녁상을 물리자 제환 처는 밥그릇에 담긴 찰랑찰랑한 정안수를 개다리소반에 받쳐 모셔오고, 정안수 양쪽에서 두 분이 맞절을 하고, 두 분에게 제환 내외가 큰절을 올리는 것으로 식을 마쳤다. 그 이튿날은 음식을 좀 장만하고 근암의 두 동생과 그 식구들을 불러 서로 맞절하는 것으로 첫 인사치례를 했다. 다음날은 한씨와 함께 금척리 순부공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하룻밤 묵고 오는 것으로 처가 댁 인사도 마무리하였다. 예전처럼 근암은 이레에 한 번씩 집에 들려 새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용담서사로 가지 않고, 이제는 하루 밤 묵어가는 것이 변했을 따름이다.

      열녀문을 자랑으로 삼는 유학 사회에서 순정한 여인의 재혼은 때로는 고통이 된다. 과부의 재혼을 더러운 짓으로 여기는 유학풍습에 젖은 한씨는 새로운 시집에 쉬이 적응할 수 없었다. 제 얼이 돌아오자 결벽증이 되살아난 거다. 새로운 환경이 설었고 근암도 낯선 사람이었다. 이 같은 죄의식은 스스로를 가둬서 바깥출입은 뒷간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래에 한 번씩 들르는 근암은 신선처럼 여겨져서 신을 접해 신의 정기를 받는 거라 여겨졌다. 그렇게 근암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밉다가도 언뜻 죽은 지난 신랑이 떠오르면 칡넝쿨에 감긴 나무처럼 가슴이 죄여오곤 했다. 이 같은 갈등에서 헤어나려고 한씨는 마루와 장롱과 그릇을 영이 나도록 닦으며 세간에 정붙여 살아보려 애썼다.

      그러다가 헛간 잡동사니 속에서 케케묵은 베틀을 보자, 무명을 짜서 근암에게 옷도 지어드리면 굄 받은 빚도 갚아지리라싶었다.

      그래서 제환에게 헛간의 베틀을 수리해서 안방 윗목에 마련해주면 고맙겠다하였다. 그렇잖아 새어머니가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아서 걱정이던 참이라 그날부터 일꾼과 작업에 들어가 깔끔하게 손질한 베틀을 안방 위 칸에 마련해드렸다. 행랑채는 일꾼들이 드나들어 번잡해 안채를 택하셨나보다 여기고 군말 없이 안방에 마련해드린 거다. 그리고 곧 목화를 사들였다.           


      목화를 본 한씨부인의 옅은 금색 눈망울(虹彩)속의 눈동자는 어린 시절의 반가운 벗을 만난 듯 빛났다. 그네가 자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명 짜기다. 금척리에서도 그네의 무명은 발이 간잔지런한 명주처럼 곱다고 정평이 났었다. 그건 한씨부인의 옅은 금색 눈망울(홍채) 속 동자가 밖을 살피는데 빛나기보다는 대부분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데 빛났기 때문에 손끝에 정성이 깃들어서다. 그네는 목화를 한 소쿠리 담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씨아에 물려 씨 뽑아내기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목화를 활로 타서 고르게 부풀리어 말대에 말아서 갸름동글한 고치를 만들어낸다. 이를 물레 돌려 실톳에 곱게 어긋맞게 감고, 다시 도투마리에 감는 따위의 꼼꼼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베틀에 건다. 그러고 베틀신을 신고, 베틀에 앉아 발을 당기고, 북을 집어넣고 바디를 쳐 당기고하는 잇댄 과정을 학이 춤추듯이 온 몸을 절로 놀린다. 안방은 그네가 몸을 절로 놀리며 짜는 북소리·바디소리만이 고즈넉하게 감돈다. 그네는 1마 정도를 짜고는 속이 좋지 않아 베틀에서 내려온다. 가끔씩 방에 들어와 구경하던 제환 처가 떡 벌어진 어깨에서 뻗어 나온 큰 손으로 말코에 감긴 무명을 만져보며 ‘곱네요, 참 곱네요.’를 잇대어한다.

      한씨부인은 이례 만에 한 필의 무명을 짜냈다. 그네는 몸의 이상을 느꼈지만 베틀에 눌어붙어있는 바람에 지나쳐 버리곤 했는데, 한 필을 마치고 보니 여러 가지 이상한 점이 마음에 걸려왔다. 가끔 음식냄새를 맡을 참에 가볍게 느낀 헛구역이며 달거리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은 것이며, 죄다 처음 겪는 낌새들이라 이상히 여기며 흘려 넘겼지만 되짚어보니 회임이란 의아심이 몰려오며 가슴이 설레더니 조마조마해진다. 그네는 아기선 증세를 고향 벗들로부터 여러 번 들어서 초기에 몸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아서다. 그런데 무명을 짜는 일이란 온 몸을 긴 시간 움찔거려야 하는 넘친 짓이어서 맘에 걸린 거다. 그만치 그네는 자기가 아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근암이 올 때면 여자는 아기를 낳음으로써 그 집 식구가 되는 거라고 맘을 도스르며12) 일렁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초혼에서는 아기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집사람이 아니었으며 재혼을 해서도 아기를 갖지 못하면 역시 자기는 최씨 집안사람이 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네는 최씨 아기를 낳는 공덕을 쌓아야 비로소 최씨 집안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여자로서의 제 운명이라고 여긴 거다.

      한씨부인은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장독대에 가랑가랑한 정안수를 모셔놓고 아들 낳기를 빌었듯이 그렇게 다잡아 정성 드리고 싶었다. 날님(생명의 신인 해)의 정기가 배속에 들어와 신기하게 머리와 팔 다리가 생겨서 사람의 형태를 이루어 가는 미묘한 과정이 무탈하게 이뤄지도록 삼신할미에게 정성들여 빌고 싶은 맘이 달아든 거다.

      

     ‘비록 눈물 콧물로 엉기고 감기는 삶이지만, 뭇 생명 중에서 최령자인 사람으로 태나는 너는 복 받은 거야.’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마침내 그네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꼭두새벽 장독대에 정안수를 모셔놓고 아기에게 정성들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홑몸이 아니어서 무명 짜는 일도 하루 한 시간을 넘지 않을 정도로, 그것도 천천히 쉼 삼아 짜다가 아퀴를 짓는다. 이미 짠 면포로는 반짇고리를 끼고 근암 바지저고리를 마름하고 정성 드려 한 땀 한 땀 꿰매간다. 다음에 제환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제환 처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려 건네준다.

      “아버님 먼저 드려야죠.”

      제환 처는 얼결에 받으며 미안해한다.

      “내일 오시면 드리죠.”

      한씨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제환 처가 앞을 막는다.

      “혹시 어디 불편하시지 않으세요?”

      제환 처도 눈치를 첸 기색이다.

      “회임인 성 싶어요”

      “정말이예요?”

      제환 처는 그 큰 손으로 배를 만져볼 듯타가 손끝을 가무리며 “정말이군요.”라고 말꼬리를 내린다. 반가우면서도 부러운 무늬의 음색이다. 그래서 한씨부인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했지만 결국 들키고 만 거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제환 처는 오지랖 넓고 화통한 여인이다.

      “도련님이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도 도련님 덕 좀 보지요.” 

      “고마워요.”

      한씨부인은 제환처를 그 금빛 눈으로 지르보며13) 고마운 눈빛을 띄어 보낸다. 그러고 방으로 들어와 복받치는 눈물을 줄줄이 흘린다. 비로소 자기가 아기를 가졌다는 실감이 났고, 이를 인정받은 기쁜 감정이 치밀어 오른 눈물이다. 참다못해 흐른 그 눈물엔 언젠가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이 신에 이끌려 어디론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맘떨림이 함께 씻겨나간다. 한씨부인은 근암을 만나고부터 제 몸속의 신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 신이, 또다시 자기를 밖으로 이끌어낼 것 같은 맘떨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일에 몰입하고, 근암에게 착한 아내가 되고, 아기를 가진 한 식구로 인정받음으로써 신기의 이끌림에서 헤어나길 바랐다. 그런 바람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복장이 벅차올라 눈물이 흐른 거다.

       11)진배없다: 다를 것이 없다.                 12)도스르며: 무슨 일을 이루려고 마음을 긴장해 다잡아 가지다.

       13)지르보며: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치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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