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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과연 그는 누구인가?( 어느 기독교인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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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682회   작성일Date 15-08-18 17:28

    본문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축출 된 것은 논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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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논문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에 관한 논문으로

    미국이 한국을 신탁통치 해달라는 논문이었고, 이에 격분한 임시정부에서는

    만장일치로 그를 탄핵 했지만 이승만은 나는 대통령 이므로 너희들의 탄핵은

    인정 할 수 없다 며 무시하자,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격분했다고 합니다.

     

    또, 전명운 장인환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 들이 정말 목숨 같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애국지사를 죽일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들 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습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 대 철학박사인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합니다.

     

    그러나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달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 같은 돈으로 그의 조건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만 쓰고 시간만 허비하다가,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 수 없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망국의 한을 품은, 교민들을

    타국 땅에서 믿었던 이승만 땜에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 없는 절망에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만 했습니다.

     

    1904년"민영환 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이승만은 1905년,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의 포부는 남달라서 미국사회에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틈나는 대로

    편지와 메모로 자신의 입지를 폭 넓게 굳힌 것 같다.

    그것은"테어도어 루즈벨트"대통령을 조그만 동양의 고학생이 만났다는 사실에서

    입증되며, 후에 2차 대전의 영웅"맥아더"를 만난사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가 5년 만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함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가 천재적 기질을 갖고 애국을 한 사실은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1908년 3,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의사가

    미국인"친일파"스티븐슨"을 살해 했을 때

    이승만은 이들의 법정통역을"살인재판"으로 명명하고 무참히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테러로 간주하고 살인자라 맹비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1,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는"교육과 선교활동에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로 거절했을 수 있고,

    2.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곤란하게 하므로 통역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던 거절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럼,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펼쳤을까?

    미국 외에 접촉한나라는 몇 나라나 될까? 전혀, 소득의 결과가 없다.

    그는"하와이"로건너와"박용만 이 이끄는"국민회를 장악하고 법정투쟁을 벌리는데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든든한"친위대"를 양성시키는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이 승만 의 야심 과 비열한 욕망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 1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발언이었다.

    "그는"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기독교"국가를 건설하고"미국식"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 건방을 떨며" 새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 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국무총리"직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하여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임정의 대통령"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그리스신화"의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연상 시켰다.

     

    1918 년"국민군단"과 박용만 사건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일본 동경으로 유학, 1904년,"보안회"에 입회하여"

    일본의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감옥에 투옥됐는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결의형제가 되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1906년"헤이팅스 대학에서"정치학과"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신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1913년"하와이"로 와서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군대를 양성해 일본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 ! 고 외쳐

    교포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 교포들의 감동으로 그는 1913년 6월11일

    하와이"호놀룰루시"의 큰 산 너머 코올라우(Koolau)구역 "아후이마누"에 위치한"

    파인애플 농장(1360에이커)에 "대조선군단"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애국심에 독립이란 감동이 더해져 교포사회의 지원은 상상 이상 이었다.

    박용만은 1차적으로"하와이 항"에 정박 중인"일본함정 츌운호"를 격침시키는

    목표를 세웠는데, 때를 같이해"이승만은"하와이의 독립운동 자금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인 우월주의에 돈 없는"황색인종"이

    무슨 방법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돈"의 힘이었다.

     

    그는 미국본토에서"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 와,

    그곳애서 교육 사업으로 학교를 세워"역사 와 세계사를 가르치고"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가는 곳마다"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 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 감리교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사제"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의 와해를 획책키 위한 고도로 기획된

    야비한 이승만 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 와"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KBS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을 들어보자.

     

    밀고성 증인이 된 이승만

     

    이승만!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평화를 빙자해 동족의 피의 대가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와 외교를 지향한 그가 하나님을 앞세워 행한 일은 종교와 동족분열,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테러리즘을 손수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 로 전락하는데........

    국민군단의 위용이 나날이 높아지자, 주미"일본영사관"에선 어찌 알았는지?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국인의 군사훈련에 항의를 하여"무기불법 소지"문제로

    교민의 대표인"박용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이승만에게"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영토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것은"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츌운호"를

    격침시키기 위함이며,"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 간 외교를 깨려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진술을 했다.

     

    그로인해"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대조선 국민군단"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 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 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성 고발이며 결의형제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이는 마치 "씨저"를 살해한" 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파렴치한 짓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의 극치였다.

     

    그의 테러행각은 오늘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국조"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 "뉴라이트"의 공로다.

     

    지금도 이승만을 우상화 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때 임정에선"총리"와 대통령직을 박탈하고"주미외교위원회"위원장에 위촉했으나,

    그는"떠들지 말라"며 자칭"대통령직을 고수했다.

     

    우리헌법 전문에"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 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헌법전문"마저 고치려 한다.

     

    그 첫 번째 행태가 1948년을 건국절로 명명하고 이승만을"국조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세계적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지만원,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복거일, 이명희 등

    을사5적 과 같은 맥락의 인사들이다.

     

    전쟁영웅"맥아더"의 후광

     

    해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해방직후 "신탁통치를 위해" 미국에선 "하지중장"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이므로

    제일 높은 사람이 "하지 중장'이었는데, 하지가 이승만에게 경례를 붙이자,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 하지 보다 더 높은 사람, 이승만 !

    그것은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 '에게 편지와 메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로 인간적 교우를 다졌던 터에,

    맥아더의 배려로 하지에게" 대통령의 예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 의 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일이라

    이상할 것은 없는 사실이나 그때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다만 라디오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애국한 애국자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더욱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에 충분했다.

     

    귀국한 이승만에게 "러브콜"을 한 무리들은"친일파 들이었다.

    "하지중장"의 입장에서도 통치의 경험이 있는"친일파"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 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난적 신익희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

    "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4.19혁명 중, 하와이로 도주,

    망명,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분을"대한민국의 국조로 모신다니…….

     

    국민이여,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입니다.

    자칫하면, 맥아더도 제2의 국조로 섬겨질까 두려워 집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친일파"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대한민국"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믿는"기독교"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룟유다"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어이없어

    목 놓아 울분의 기도만 할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성경적"일까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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