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한국 근대사상과 동학, 고창 -제4강 1편- > 자유게시판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천도교소식
  • 자유게시판
  • 천도교소식

    자유게시판

    한국 근대사상과 동학, 고창 -제4강 1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환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138회   작성일Date 14-08-11 13:29

    본문

    시인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동학 120년 

    4강 / 동학문화기행 <1편>

     

    2414513853E7112F0575CC

     

    고창읍성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 졌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50,172평)로 동.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 하였다, (고창군 홈피 내용)

     

     

    252C9C3453E70AEE20AB77

     

     

    221C413453E70AF134A263

     

     

     

    2743EE3453E70FF714837F

     

    안 도 현(시인, 우석대 교수)

     

    동학농민운동을 최초로 형상화 한 시는 1947년 해방공간에서 나온 카프계열의 시조시인

    조운(曺雲)의 시를 들 수 있다. 영광 출신으로 가람 이병기와 절친이었다.

     

    그의 시 '고부 두승산' 을 소개하자면.

     

     斗升山 이언마는 녹두집이 그 어덴고 
       뒤염진 늙은이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배트소롬하고 묻는 나만 보누나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만 여기고서 
       일나서 敗했다고 설거운 노라마라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奉準이로다.
     

     

     

    ※ 원작에서는 고부 斗升山을 斗星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1947년 3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간행한 『연간조선시집』에 실렸던 시조다.        

    아래는 안도현 시인이'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옮겨온 것이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준비할 때 나는 동학과 관련된 시를 모으는 일을 맡았다.

    1000명 가까운 시인들에게 원고청탁서를 보냈고, 근대 이후 출간된 어지간한 시집을 다 뒤졌다.

    그렇게 해서 90여편을 묶어 시집을 낸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시인들은 1894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의외로 외면하고 있었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는 그 원인을 일제의 혹독한

    검열과 한국 근대문학의 이식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이 시조는 1947년 조선문학가

    동맹에서 펴낸<연간조선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동학 관련 최초의 시라는 점 이외에

    ‘봉준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혁명을 주도한 인물에 대한 친근성과 연대의식이 작용한 것.

    조운은 1900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했고, 영광·장성·고창·정읍 등지에서 문화운동과 교육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문단>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조운 선생의 생가가 고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학에 관한 詩는 늦었지만 동학에 관한 민요는 진즉부터 불리워 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만 여기고서/ 일나서 패했다고 설거운 노라마라/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봉준이로다”  ‘봉준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잎에 앉은 새야/녹두잎이 깐닥하면/너 죽을 줄 왜 모르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너 뭣하러 나왔느냐/솔잎 댓잎 푸릇푸릇/하절인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엄동설한이 되었구나 (새야 새야 파랑새야)부분.

     

     

     

    가보세 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되면 못가리.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년이 되면 못가리.

     

    비록 민요라는 형태로 우리가 알고 있지만 詩로 쳐도 굉장히 명쾌하다 할 수 있다.

    언어의 유희도 아주 교묘하고 뜻도 아주 잘 살렸다고 본다.

     

    전봉준을 장군, 대장 등의 수식이나 존칭 없이 보통 '개똥이' '소똥이'라 부르 듯

    그냥 '봉준이'라 표현한 것에서 민중적인 연대의식이 훨씬 더 강조됨을 알게 된다.

     

     

     

    2640553453E710001BA68A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 도 현 -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에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2743E13453E70FFB1633BD

     

     

    위 시는 내가 대학 4학년 때 쓴 것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발표,

    시인의 명찰을 갖게 되었다. 당시 연애질에 빠져 있을 때 쓴 것인데, 그 때 사귀던 여학생과는

    헤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일동 웃음)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사진 속 강렬한 눈빛에 감동하여 쓴 것으로

     후로 전봉준에 관한 이모저모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얼마 전, 그 사진은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압송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재판 받으러 가는 사진이다." 라는 내용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30여년 전에 썼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런 부분을 참 잘 썼다고 생각되는 부분과

    어떤 부분은 왜 내가 이렇게 썼지? 라고 생각되는 게 있다.

     

    첫 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전봉준이 피노리에서 체포될 때가 정월 이었을 터이고,

    서울로 압송 될 당시 상당히 추웠을 것이고 한 번 쯤은 눈이 내렸을 것으로 짐작해서였다.

    시의 끝까지 눈에 관련시킨 점은 아주 잘 했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눈이 왔음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문학의 상상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여기서 물결 소리라는 의성어를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철썩철썩' '출렁출렁' 정도일텐데 책을 읽다 보니 동학 당시의 여러 슬로건이 있었다.

    그 중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척화(斥倭斥化) '척양척왜(斥洋斥倭)등이 있었는데

    시를 쓸 당시는 화(化)를 중국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화(化)가 서양을 의미함을 몰랐던 것이다.

     '척왜척화' '척양척왜' 가운데 어떤 걸 쓸 것인가를 한 이틀 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척양척왜' 보다는 '척왜척화' 즉 ㄱ과 ㅎ이 만나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함을 알고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이 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잘 못 썼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두 번째 연.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라는 부분이다.

    시를 쓸 당시는 '들꽃'을 이름 없는 '민초' '민중' '백성' 쯤으로 생각했었다.

    굉장히 부끄럽게 여기는 부분으로, 이름 없는 '들꽃'이 없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부산의 어떤 시인께선 "이름 모를 들꽃"이라는 표현을 쓰면 혼줄을 낸다고 들었다.

    무심코 쓰는 표현이지만 아무리 작은 식물이라도 이름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창 군청에 차를 세우고 보니 앞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멀리서 볼땐 회화나무로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멀구슬 나무'라 적혀있었다.

    제주도나 남해안 일부에 자생하는 나무로 고창에 이토록 큰 멀구슬 나무가 있음에 놀랐다.

     

    120년 전의 동학군들은 이 나무를 분명 보았을 것이다.

      1984년 전두환 정부 시절 어떻게 위와 같은 시를 썼느냐고 남들이 내게 묻는다.

    5공 치하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시를 더 많이 읽어 주신다는 생각이다.

    그 시절에는 80년 오월의 광주를 말 조차 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문인들은 그 때의 일을 글이나 시를 통해 비유해서 말하곤 했는데,

    나는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는 사진을 보면서 '동학농민운동'의 실태와 

    '광주민중항쟁'의 좌절'을 오버랩 시켜 보고 싶었던 것이다.

     

     

    2239513453E70FFD223AE6

     

    - 시인과의 대화 시간 -

     

     

    2339CC3453E71002244DC9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읍성의 관아건물 보수시에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이 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

    (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

    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옹성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 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

    하였으므로 성종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 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

    (1484)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고창군 홈피 내용)

     

     

    2652DD3453E7100403354A

     

    무장읍성(

     

     

    2243BA3453E7100618B85E

     

    무장현은 지정학적으로 고창의 서부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이 지역은 대부분 해안가를 끼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바닷길은 인력과 물자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도 이용되지만 외적의 침입을 쉽게

    받기도 한다. 이에 따라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백성들의 생계와 안위를 위해서는

    읍성을 축조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무장읍성이 축조된 배경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먼저 고창군의

     서부 지역에 삼국 시대부터 2개의 현, 곧 무송현과 장사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왜구의 침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고창현에는 고창읍성을, 흥덕현에는 흥덕읍성과 흥덕진을,

    무장현에는 무장읍성과 무장진 을 배치하여 왜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223C8F3353E71009310C8B

     

    연해 읍성의 축성은 1415년(태종 15)부터 시작된다. 무장읍성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1417년에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무장군읍지(茂長郡邑誌)』 등

    무장현과 관련한 기록이 수록된 지리지 등에는 “1417년 병마사 김저래 때 전라도 각 관의 승려와 백성 2만

    수천여 명을 무장에 데려와서 읍성을 쌓고 공아(公衙)와 관사(官舍)를 세웠는데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끝마쳤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재의 읍성은 사두봉(蛇頭峰)이라 부르는, 남북으로 기다란 구릉을 중심

    으로 하여 평원을 마름모꼴에 가깝게 네모지게 성벽이 감싸고 있다. 둘레가 대략 1.2km이고 성벽은 바깥의 돌이

    흙 속에 묻힌 채 높이 1∼2m로 확연하게 남아 있다. 해자는 너비 4m, 길이 574m가 남아 있다. 성에는 남문인 진무루

    (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는데,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 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성안에는 조선시대의 각종건물터와 사직단·여단(厲壇)·성황단 등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으로는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성안의 중요한 건물들은 별도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디지털고창문화대전)


     

     

    2653713353E7100B16856F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무장객사는 1581년(선조 14)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면사무소로 이용되었다가

    1990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객사는 『무장현읍지』 등의 기록을 참고하면 읍성의 축조와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1988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49년(인조 27), 1736년(영조 12)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관이

    이용하는 좌익헌(左翼軒)은 1895년(고종 26)에 신축했음이 밝혀졌고, 무관이 이용한 우익헌(右翼軒)은 1849년에

    중수되었을 알 수 있어 초기에 축조된 객사가 아닌 중수 과정에서 건립된 객사로 추정된다.

     

     

    225FCA3353E7100D035B49

     

    무장읍성 비석군

     맨 왼편은 고창의 유일한 철비로 ‘전참봉 김영곤 선행불망비’이고, 그 옆으로 ‘행군수 이창익 청덕영세불망비’,

    ‘현감 최효용 청덕선정비’, ‘현감 정권영 영세불망비’, ‘군수 이희하 청덕애민선정비’, ‘현감 오섬 청덕선정비’,

    ‘어사 심상학 만세불망비’, ‘이교인 선정비’, ‘현감 이수현 청덕선정비’, ‘현감 임득렬 청백비’, ‘현감 유진오 영세불망비’,

    ‘행현감 이찬하 애민선정비’, ‘김상운 시혜불망비’가 있다.불망비와 선정비가 대부분이지만,

    그중 몇몇은 저수지 축조와 절목 사항을 적은 비석이 있어 앞으로 연구 가치가 크다.

     

     

    27545F3353E71010146370

     

    객사의 규모는 먼저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송사지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 익헌은 4칸이며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높이 80㎝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돌계단 마무리 옆에는 태극무늬, 측면에는 동물과 나무 구름무늬 등이 양각되어 있고, 계단 양 옆의 축대

    돌에도 연꽃과 꽃병에 꽃이 담긴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황당이 성내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책실(冊室)·작청(作廳)·현사(縣舍)·읍취루(揖翠樓)·문루(門樓)·관노청(官奴廳) 등의 건물 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33F733353E710122C3E0B

     

    객사 송사지관(松沙之館)

    무장은 장사와 무송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역으로,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에서 한 자씩 사용하여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 하였다.

     

     

    2760803353E7101402AB0C

     

    객사 축대 좌측 끝부분에 새겨진 석조연화 문양

     

     

    235B5D3353E710160B7B09

     

    좌측 계단 소맷돌 바깥부분에 새겨진 것으로

    호랑이, 구름 등의 문양이라는데...

     

     

    2629543653E7101917C211

     

    축대 우측 끝 부분에 새겨진 연화꽃병 문양

     

     

    231FBB3653E7101B245375

     

    계단 우측 소맷돌 바깥 부분의 문양

     

     

    211BFA3653E7101D2F6407

     

     

     

    2516E33653E7101F40D913

     

    관아 취백당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무장현읍지(茂長縣邑誌)』 등의 기록을 보면 1417년 무장진병마사 김저래가 완공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동헌은 현감이 집무하던 곳으로 객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97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이용되었다. 동헌은 무장읍성 축성 당시 창건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635년(인조 13)에 축조되어 1728년(영조 4), 1839년(헌종 5)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개건되었다고 한다.

    1983년 중창을 한 후 전면에 취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겹처마 형식을 하여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준다.

    2333123653E71021090D4F

     

     

     

    2634E63653E7102306923F

     

     

     

    231B133653E71025324CA8

     

     

     

    2438A73753E710270515D0

     

    취백송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