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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이의 죽음(춘원 이광수)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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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재덕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753회   작성일Date 14-08-26 19:5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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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이의 죽음 : 1923년 <개벽>지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소설

    수운 대신사에 대한 최초의 단편 소설 입니다.

     

    줄거리:

    어느 눈 덮힌 산골 몇 집 안 되는 마을  박대여의 집에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님이 관가에 쫒겨 이리저리 떠돌다가 피신을 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동학 교도인 박대여와 내수도 김씨는 청수 한 그릇을 떠놓고  그 앞에 절을 하면서 수운 최제우 선생을 도와 달라고 한우님께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린다.

     

    첫닭이 우는 새벽, 접주들과 함께 박대여의 집에 도착한 선생은 모두 굳게 일어나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자는 제자들의 말에 조선 방방곡곡이 한우님을 부르고 새 나라를 세우려면 우리가 굳게 뭉쳐 한덩어리가 되는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늦게 도착한 제자 해월님의 피신하라는 강청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오만 년 무극대도를 맡긴다는 말을 남기고 태연히 관가에 잡혀가 거룩한 순도의 길을 선택한다.

     

    이 소설은 순교의 거룩함을 진솔하고도 경건하게 서사화한 소설로서,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gongu.copyright.or.kr/file/WritingFileDownload.do?writingSeq=9031941&fileSeq=1

    -------------------------------------------------------------------

          춘원  이광수(李光洙) 

    일본식 이름: 일본어: 香山光郞 가야마 미쓰로, 

    (1892년 3월 4일 평북 정주 출생 ~ 1950년 10월 25일) 


    소설가이자 시인·문학평론가, 언론인이었으며, 사상인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변절한 이후에는 친일파로 일컬어진다. 

    1950년 한국 전쟁때 납북되었다.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92년( 1세)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이종원과 그의 세 번째 부인 충주김 씨를 부모로 하여 

                      전주 이씨 문중의 5대 장손으로 태어남. 
    1899년( 8세)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며「대학」,「중용」,「맹자」,「논어」등을 배움.
    1902년(11세) 8월, 부모 사망. 외가와 재당숙 집을 오가며 자람.
    1903년(12세) 12월, 동학에 입도하여 

                평북 정주에 사는 접주 박찬명 대령(大領)집에 기숙하며 서기 일을 봄.

    1904년(13세) 일본 관헌의 동학 탄압에 따라 상경.
    1905년(14세) 6월, 일진회(천도교)가 만든 학교에 들어가 

                      일어와 산술을 배움. 8월, 일진회 의 추천으로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감.
    1906년(15세) 3월, 대성중학교에 입학, 12월 일진회의 내분으로 학비가 중단되어 귀국함.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끌던 단체)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었다. 


    그는 이듬해인 1938년 병보석으로 

    풀려 나온 뒤 1939년부터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30년에 이르고 있으니 

    독립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는다. 

    그는 1948년 친일행위와 관련해 반민특위의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다시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병약했던 그는 다행히, 후에 북한의 부수상까지 된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한 채 

    1950년 겨울 어느날 숨을 거뒀다.


    그러나 친일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은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일제 강점하에서 조선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였으며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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