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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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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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
1. 천도교 교단사 관련 자료들의 기록 중, 잘못된 기록이라 심증(心證)이 가는 기술이 많아 관련된 부분에서는 잘못된 기록들을 비교 설명을 충분히 했습니다.
2. ‘天道敎政治理念’의 原本은, 이 일에 관여하셨던 척암(拓菴) 이응진(李應辰)원로께서 수택본(手澤本; 손때 묻은 귀중한 책 또는 조상의 유물)으로 수장(收藏; 거두어서 깊이 간직함)하셨던 것을, 둘째 아드님이신 일암(溢菴) 이창건(李昌建) 동덕의 후의(厚意)로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를 할 수 있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3. 修訂本 1.2 중에서 원본에 대한 첨삭(添削)이 있을 때에는, ( )안에 원본을 삽입(揷入)했고, 임의로 원본문장을 삭제하고 대체(代替) 문장으로 수정을 했을 경우에는 원본과 대체문장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하였으니 참작(參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간단한 용어의 뜻은 ( )에 설명했습니다.
4.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는 초고(草稿)로, 우선적(優先的)으로는 교인들을 위한 해설서(解說書)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天道敎 政治理念’을 더 많이 읽어, 동학과 천도교, 그리고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주해(註解)에 있어 많은 배려를 했습니다.
註 00; “天道敎政治理念”의 정치와 종교의 사상적 이론의 바탕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도서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新人哲學; 李敦化. 天道敎中央總部. 1924.
人乃天要義; 李敦化. 天道敎中央總部. 1924.
黨憲釋義; 趙基栞. 東學之光社 出版部. 1931
天道敎 靑年黨 小史; 趙基栞. 天道敎 靑年黨 本部. 1935.
福念; 李敦化. 天道敎中央總部. 1936./ 천도교 청년회에서 1967년에 등사본으로 복간함.
黨志 -李敦化. 北朝鮮 宗學院出版部. 大深印刷所. 1946.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 新人間社. 1969.
東學之人生觀; 李敦化. 天道敎中央總部. 1972.
敎政雙全; 李敦化. 天道敎中央總部. 1972에 東學之人生觀의 附錄으로 간행됨
동학사상과 한국민족주의; 신복룡. 평민사 1978.
東學. 天道敎; 金用天外 14人共同執筆. 시인사. 1987.
靈友會秘史; 東學靈友會. 1989.
동학, 천도교 역사의 재조명. 황선희. 모시는 사람들. 2009.
동학의 정치사상; 임형진. 모시는 사람들. 2002.
동학의 정치철학. 오문환. 모시는 사람들. 2003.
한국 근대사의 재조명; 황선희. 국학자료원. 2003.
註 00; 黨志 - 이돈화가 집필한 것으로 1946년 11월 25일 함흥에 있는 대심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발행소가 종학원출판부로 되어 있지만, 일설에는 고(故) 입암 이도천(立菴 李道天) 선도사의 출자에 의해 평양이 아닌 함흥에서 출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암 이도천의 본명은 이도삼(李道三)으로 1908년에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 1929년에 입교하여 1938년에는 함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교회 사업에 진력하여 1946년에는 함흥 종리원장에 피선되었고 6.25동란으로 월남하여 1968년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춘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976년에는 춘천 교구장에 선임되어 교구발전에 헌신하다가 포덕 119(1978)년 8월 5일에 임진강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머리에는 삼층관을 쓰고 단정히 도복을 입은 채 통일을 염원하며 분신 순도하였다.
또 다른 ‘黨志’는, 1960년대 초 천도교 청년회에서 등사본으로 간행된 77페이지의 포킷용 ‘黨志’가 있다. 그러나 그 책의 제목이 ‘黨志’가 아니고, ‘天道敎志’로 되어 있고, 출판년도와 발행처를 밝힌 판권관련 내용이 없다.
5. 참고로 척암(拓菴) 이응진(李應辰)원로의 약력과 저술을 소개합니다. / 이 자료의 작성은, 필자가 실험적으로 하나의 유형을 만들기 위한 시도로 작성한 것입니다. 앞으로 교단은 교단사(敎團史)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에 대한 자료정리는 이런 유형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명사전을 만들 때에는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백과사전식의 기술형태로(관련사진도 삽입)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08년 6월 25일. 평남 안주군 안주읍 남천리 108에서 父 李東虁 와 母 朴堯卿의 次男으로 출생.
1930년 3월 16일 天道敎靑年黨 執行委員/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PP.486-487)에는 있으나 天道敎靑年黨小史-第三編黨部歷代委員(PP.71-79)에서는 1932년에 中央執行委員, 學生部委員이며 政經部와 體育部의 特種委員과 4월에 部務課常務로(P.76) 처음 參與하여 1940년 4월 4일에 新舊合同會議를 마치고 各 部分의 任員들을 任命하였다. 滿洲의 公主嶺의 敎區長/ 1943이후까지)에 任命됨.
1929년 3월. 天道敎 靑年黨 東京黨部 代表 被選.
1932년 3월. 日本 와세다(早稻田) 대 정경과 졸업.
1933년 1월. 天道敎 道師.
1945년 8월 17일. 天道敎靑年團을 조직하고 7人의 執行委員으로 選出되다.
1945년 9월 14일. 天道敎靑友黨 復活. 黨 委員長에 被選.
1945년 10월 31일. 天道敎靑友黨 副委員長 /1948년 5월 黨解體時 까지 歷任.
1946년 4월 1일. “開闢” 復刊 2號(通卷 74號)부터 發行人.
1946년 10월 31일. 天道敎靑友黨 副委員長.
1948년 10월. 開闢社 代表理事 就任.
1949년 1월. 國民運動團體인 萬化會를 組織, 副委員長 兼 經濟局長에 選任.
1950년 10월. 農林部 長官 顧問. 天道敎保國聯盟 副委員長 被選.
1951년 4월. 天道敎保國聯盟(1950년 9.28收復後 結成 委員長 林文虎) 委員長에 被選.
1952년 8월. 保國聯盟 副委員長에 被選. 宗議院 議員
1955년 1월 17일. 新人間社 社長 任命. 4월에 천도교 상임 종의원. 12월 25일/ 敎憲修正委員에 選任.
1957년 4월 9일 天道敎維持財團 理事로 被任.
1957년 11월 21일. 布德 100年 記念 敎史 編纂委員 21人에 選任.
1957년 12월 22일. 宣道師 兼 常任宣道師 選任.
1957년 12월 24일. 天道敎保國聯盟과 靑年會를 發展的 解體를 하고 東學會 結成. 7人의 指導委員에 選任.
1961년 4월 12일. 天道敎 常任 宣道師 被任.
1962년 4월. 天道敎 宗議院 議長에 피선되어. 1963년에 재선하여 1969년까지 역임.
1970년 4월 4일. 새인간 聯盟 共同(敎團側 代表로) 副總裁로 被選.
1975년 4월. 天道敎 宗法師. 追尊.
1977년9월 29일에 還元하시어 京畿道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산 2에 안장됨.
道號; 拓菴(척암). 雅號; 壽光(秀光은 筆名)
#이상은 拓菴의 유족인 次男 溢菴 李昌建 同德이 제공한 묘비 제막식 및 추가 약력 자료와 교단 내 관련 기록에 의존한 것임. 단 교단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음과 같은 대외활동은 생략되었다. / 생략된 내용.
1924년. 天道敎 學生會員으로 活動.
1927년 4월. 安州 農高 재학시 천도교 안주 학생위원장으로서 平北 搏川 圓寂寺에서 金鉉國, 金寬善, 林基赫, 朴性九 등 4인과 朝鮮 獨立黨 創黨.
1930년. 金午星(亨俊), 金炳淳과 함께 “大衆之光”, “東學之光” 등 월간 思想誌를 발간. / 이상은 次男 溢菴 李昌建의 個人記錄에 의함.
1934년. 中國 廣東 中山大學의 재학생인 安炳武으로 부터 廣東 軍官學校에 입학할 학생을 추천해 다라는 요청에 따라 활동 중 발각 체포되어 도꾜, 나고야, 경성, 평양, 안주 등지로 약 6개월간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것이 후에 廣東 軍官學校 사건으로 알려졌다./ 묘비문에 기록된 내용.
1935년 2월. 孔鎭恒, 李宣根, 李應文, 金龍南 등 선생과 같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척하여 둥포들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滿蒙會를 조직하여 滿蒙會社를 창립하여 주역 역임함(만몽사 근무경력. 약 10년간). / 묘비문에 기록된 내용.
1938년 3월. 조선일보 안주지사(? 정확하지 않음) 지국장 역임.(2년간). / 次男 溢菴 李昌建의 개인 기록에 의함.
1941년. 劉錫鉉, 李鍾郁, 朱履國선생과 함께 朝鮮民族解放聯盟을 조직하여 상해 임정과 연결 일본의 패망에 대처하려고 강원도를 순방 중 1945년 6월경에 通川에서 金鉉國, 宋重坤과 함께 日警에 체포되어 2개월여의 고문을 당하다가 8. 15해방으로 석방됨. / 묘비문에 기록된 내용.
1946년 12월. 과도정부 입법위원. 피임. / 묘비문에 기록된 내용.
1948년 2월. 3.1 再顯運動을 위하여 북한 천도교측의 李敦化, 金德麟, 金一大선생에게 남한에서 밀사를 보내어 密旨를 보내어 3.1 再顯運動이 일어나 분단없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뜻은 펼쳤으나 87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 묘비문에 기록된 내용.
復刊 開闢 誌; 6篇
信託統治와 解放運動’ / 통권 74호 - 1946년 4월(PP.68-73)
協助의 길을 찾는 世界(國際情勢) / 통권 76호 - 1948년 1월(PP.42-46)
國際情勢의 展望 / 통권 77호 - 1948년 3월(PP.19-23)
美蘇兩國에 對한 公開狀 / 통권 79호 - 1948년 8월(PP.11-14)
內亂에 呻吟하는 中國 / 통권 80호 - 1948년 12월(PP.13-16)
亞細亞의 受難과 保國安民之方略 / 통권 81호 - 1949년 3월(PP.30-33)
新人間 誌(1945-1953년간의 통권 190, 191, 192, 199호는 缺本으로 確認不可.); 48篇
國際政局의 새로운 動向 / 통권 193호(제1집) - 1952년 10월(PP.12-13)
休戰會談의 展望 / 통권 194호(제2집) - 1952년 11월(P.9)
國際情勢硏究 / 통권 195호(제3집) - 1952년 12월(PP.10-11)
平和에 對한 展望 / 통권 198호(4월호) - 1953년 4월(PP.10-11)
南北統一의 展望 / 통권 206호(2호) - 1956년 2월(PP.30-33)
변모하는 世界相 / 통권 207호(3호) - 1956년 7월(PP.16-18)
激動하는 世界政局의 動向 / 통권 208호(4호) - 1956년 11월(PP.12-15)
保國安民計將安出고 / 통권 209호(4호) - 1957년 1월(PP.41-42)
危機의 絶頂에서 / 통권 212호(8호) - 1957년 11월(PP.4-5)
統一문제는 어떻게 되어가는가 / 통권 215호(11호) - 1958년 7월(PP.42-45)
(시사해설) 中東 대만은 어찌되나 / 통권 216호(12호) - 1958년10월(PP.41-43)
敎勢振作을 促求 / 통권 217호(13호) - 1959년 2월(PP.46)
(時評) 人類의 危機와 頂上會談 / 통권 220호(16호) - 1959년 12월(PP.59-62)
四月革命과 政局의 展望 / 통권 221호(17호) - 1960년 5월(PP.32-37)
保國安民運動의 새 方向 / 통권 222호(18호) - 1960년 12월(PP.44-48)
東學黨의 歷史的性格과 社會的條件 / 통권 223호(19호) - 1961년 4월(PP.50-54)
盛衰之理와 今次革命 / 통권 224호(20호) - 1961년 6월(PP.16-19)
다시 民族의 先頭에 서자 / 통권 225호(21호) - 1961년 12월(PP.13-15)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통권 226호(22호) - 1962년 3월(PP.64-68)
變革期에 있어서 우리의 任務 / 통권 227호(23호) - 1962년 6월(PP.68-71)
民政移讓을 展望하면서 / 통권 229호(25호) - 1962년 6월(PP.29-31)
모든 決意事項을 實踐에 옮기자 / 통권 231호(27호) - 1963년 5월(PP.8)
(설교) 現代의 危機와 새信仰 / 통권 232호(28호) - 1963년 8월(PP.61-63)
몇 가지 건의 / 통권 234호(30호) - 1964년 4월(P.50)
民族正氣와 天道敎 / 통권 235호(31호) - 1964년 7월(PP.26-29)
大會를 앞두고서 ‘代議員 여러분께’ / 통권 236호(32호) - 1964년 12월(PP.8-9)
韓國近代化運動과 民族의 進路 / 통권 238호(2호) - 1965년 6월(PP.15-18)
새 歷史創建은 새 信仰에서 / 통권 240호(4호) - 1965년 10월(PP.7-9)
敎理硏究와 集團煉性을 -宗議院 議長- / 통권 241호(5호) - 1965년 12월(P.13)
論壇. 새 歷史創建과 우리의 反省 / 통권 249호(13호) - 1967년 5월(PP.9-10)
敎會中興과우리의 任務 / 통권 252호(16호) - 1967년 11월(PP.6-8)
다시 民族의 先頭에 서서 싸우자 -宗議院 議長- / 통권 253호(17호) - 1968년 1월(PP.7-10)
체코 자유화 운동과 드골체제의 동요 / 통권 255호(6월호) - 1968년 6월(PP.64-67)
時事問題 / 통권 256호(7월호) - 1968년 7월(PP.132-134)
成功하는 사람이 되자 / 통권 259호(11월호) - 1968년 11월(PP.57-58)
越南休戰의 可能性 외 2篇 / 통권 259호(11월호) - 1968년 11월(PP.114-115)
새해의 提言 / 통권 261호 - 1969년 1월(PP.17-18)
3.1再顯運動의 眞相 / 통권 262호 - 1969년 3월(PP.42-45)
時事解題. 유럽의 금융위기 / 통권 264호 - 1969년 5월(PP.96-97)
人類最大의 위기를 극복하자 / 통권 266호 - 1969년 7월(PP.50-51)
남해지구를 돌아보고 / 통권 267호 - 1969년 8월(PP.32-33)
새로운 교역자 양성이 시급 / 통권 271호 - 1970년 1월(PP.67-69)
平生을 敎團에 바친 한빛 선생 / 통권 274호 - 1970년 4월(PP.61-62)
保國安民 / 통권 276호 - 1970년 6월(P.77)
修道와 喜悅 / 통권 277호 - 1970년 8월(PP.99-100)
(시일설교) 萬事知라야 萬事能이다 / 통권 280호 - 1970년 11월(PP.80-81)
참다운 교단중흥을 기대하며 / 통권 282호 - 1971년 1월(PP.26-27)
기관 대 기관의 理解를 갖자 / 통권 285호 - 1971년 5월(PP.28-29)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
第三章 緖說 三一再顯運動의 淵源과 그 經緯. 1969년 4월. (PP.25-32)
참고; 拓菴의 遺作 / “別乾坤”과 “學生”에 발표된 글은 추가로 정리하여야 함.
포덕 154(2013)년 2월 28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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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2. 해방 전후사에 비친 천도교.
3. 해방 전후의 상황 속에서 천도교의 대응(對應).
4. 天道敎政治理念의 간행(刊行)에 대한 解說.
5. 天道敎政治理念 全文의 比較分析과 解說.
6. 參考文獻 資料.
7. 나가면서.
1. 들어가면서.
필자가 작년 3월부터 계속해서 “天道敎政治理念” 과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의 시대정신에 관련하여 많은 글을 쓰는 근본적인 이유는, 2020년 이내에 국제정세와 국내정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대변혁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판도가 짜져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가 맞아들여야 하는 대변혁의 시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분야에서 대변혁을 가져와 우리 교단이 말해왔던 ‘다시 개벽’의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매우 낯설고 적응하기 힘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 변혁의 시대에 새로 짜여 질 판도위에서, 천도교가 정착할 위치가 어디이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어떻게 수용하며 교의에 바탕을 둔 미래세대. 즉 다시 개벽의 시대에 인류를 향하여 밝혀줄 시대정신은 무엇이며 천도교 종교적 4대목적의 실현방안은 무엇인가를 내 놓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중차대한 다시 개벽의 시대에, 시대정신과 새로운 판도가 짜여 진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추락한다면, 필자가 수차 경고한 ‘명멸(明滅)하는 종교’로 소수의 종교가 되어 해체(解體)되고 와해(瓦解)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낯선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선, 의암성사의 대영단과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선행하여야 할 일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미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 어떠한 고통도 감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과 의암성사의 새 시대를 여는 시대정신의 수용과 제기를 사례로 밝힌 ‘의암성사의 대 영단(大英斷)으로 세워진 천도교.’를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필자가 예견하는 것은 예언적인 말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앞서 나가거나 인류의 새 문명을 경험하고 있는 선진 국가(先進國家)에서 연구되어 발표되고 당면하게 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수용과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제기하고 해결의 대안을 밝힌 것을 바탕으로 종합하여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우리가 당면해야 할 시대정신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개벽의 세상이 된다는 확신의 판단의 근거가 되는 글을, 금년 상반기 안에 ‘제 4물결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아래, 21세기가 당면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제 4물결을 깊이 있게 설명하면서 제 4물결의 핵심인 지식전쟁(知識戰爭)에 대하여, “미래쇼크”, “부의 미래”, “권력이동”, “문명의 충돌”, “문명의 공존”, “미래의 결단”, “지식의 지배”, “21세기 지식경영” 등등의 책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게재할 예정입니다. 또 이미 필자가 ‘天道敎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에서 의암의 ‘경자설법(更子說法)’을 전후하여 의암이 살펴 본,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의 형편과 판국 그리고 시대정신을 어떻게 수용하였으며, 정부와 사회를 향하여 천도교의 교의를 바탕으로 한 시대정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주장하였는가를 개괄적으로 관련 자료를 제시하며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의암과 교단 지도부의 생각을 심도 있게 다루어 보려 했고 그 결과를 ‘삼전론의 전편 해설’을 완료되는 대로 상반기에 게재하려 합니다.
필자는 ‘삼전론의 전편 해설’을 통하여, 의암과 교단 지도부의 역사의식은 무엇이며 시대정신은 무엇인가와 의암과 교단 지도부는 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앞에 두고, 의암의 삼전론(三戰論; 道戰, 財戰, 言戰)을 떠나 삼정론(三政論; 道政, 財政, 言政)을 대정부 상소문에 담아 강력히 주장했을까? 이 대정부의 상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일진회(一進會)를 설립하였고, 나아가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를 하게 된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를 밝혀보려고 했습니다. 필자가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제가 만난 수많은 사상들 중에서, 동학, 천도교 사상이 제 고달픈 삶의 중심이 되어 주었다는 데 대한 고마움과 10여 년의 중앙교단에서 교직을 담당할 수 있었던 기회를 주신 한울님께 더 없는 감사를 드리는 마음에서 보답하고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매체보다도 필요한 사람이 반드시 시간을 쪼개 읽는 인터넷에 게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의 교단 최초의 작업내용들이 도용(盜用)될 것을 우려(憂慮)하면서도 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동학, 천도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과 인간의 문제를 바라다보는 시각과 평가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며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다원화 사회가 이루어지고 다원화사회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사상은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사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21세기는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으로만이 해석해 낼 수 있는 구조를 가진 다원화사회와 그 곳에서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군상(群像)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동학과 천도교가 신(神)의 문제가 아닌, 인간(人間)의 문제를 다루는 최고의 종교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필자의 독선이고 편견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런 해석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이 당연한 결과이고 올바른 평가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과 천도교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새 인간(新人間)이며, 새 인간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이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여, 이돈화는 새 인간을 ‘종자(種子) 사람이라’고 했다. 다원화 사회가 중심이 되는 21세기는, 한 분야의 전문적인 인간(special, technical, Professional human)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통섭할 수 있는 통합적인 인간(Integrated human) 또는 융합적인 인간(Fusion man /Fusion of man)을 요구하고 있다. 다원화 사회인 통섭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한 분야의 전문적인 인간보다는, 통합적인 시각과 융합적인인 지식과 해결방법을 요구하는 통섭적인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지상천국이라는 세상을 건설하려는 천도교로서는 21세기를 새 인간이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본 연구소가 걸어온 10년을 돌아보는 글에서 종학대학원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자는 대안을 이미 제안한 바가 있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요구하는 새 인간을, 천도교는 ‘종자(種子) 사람’으로서 이런 새 인간을 육성(育成)하여 배출(輩出)하는데 총력을 집중함으로써, 그들이 새 시대, 새 역사 창조의 주도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 ‘지난 10년을 돌아보며’(7-7 /포덕 154(2013)년 1월 25일)와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포덕 154(2013)년 2월 15일)를 참조하기 바람.
註 00; 통섭(統攝/Consilience/추론 결과 등의 附合 또는 一致)- 통섭은 막힘이 없이 여러 사물에 두루 통함을 의미하는 말로, 흔히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의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인 질서를 논리적으로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통섭 이론의 연구 방향의 반대로, 전체를 각각의 부분으로 나누어 연구하는 환원주의(還元主義)도 있다.
1840년에 윌리엄 휘웰은 귀납적 과학이라는 책에서 "Consilience"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基盤)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통섭의 귀납적 결론은 사실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분야를 통한 결론에 의해 얻어진 귀납적 결론이 또 다른 분야에 의해 얻어진 결과와 일치할 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은 어떤 것에 대해 발생한 사실을 해석하는 이론들을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귀납적 결론이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 통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 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으로 연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 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여러 분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
통섭이란 말은, 20세기말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1998년 저서 《통섭, 지식의 대통합》을 통해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생물학》(1975년)을 저술한 인본주의적 생물학자로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또한 C.P 스노우의 1959년 작 <두 문화와 과학 혁명>에서도 다루어진 바가 있다. 윌슨은 과학, 인문학과 예술이 사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리된 각 학문의 세세한 부분을 체계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모든 탐구자에게 그저 보여지는 상태뿐만이 아닌 깊이 숨겨진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간단한 자연의 법칙들로 설명하고자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연구하지만 오히려 환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윌슨의 제자인 이화여대의 최재천 교수가 《통섭, 지식의 대통합》을 번역하여 한국에 통섭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였다. 통섭이라는 단어는 성리학과 불교에서 이미 사용되어온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라는 뜻을 지닌다. 한편 상지대의 최종덕 교수는 한국 의철학회(醫哲學會)에서는 통섭이 마치 학문간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兩方向的) 관점의 합일로 오해하게 하고 있으나 원래 윌슨의 개념은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흡수되는 통합을 의미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2006년 창립된 한국 의철학회는 의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학문과 실천과 덕성으로 구성된 의(醫)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하고 학술지와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웬델 베리는 그의 책 《삶은 기적이다》에서 윌슨의 위 책 《통섭》이 기계적 환원주의에 근거해서 세계를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위키 백과사전을 주로 하고 관련 자료에서 발췌하여 종합 정리.
지난 18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대통령 후보자의 토론회 방송에서 한 후보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타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는 것을 밝히며 공격할 때, 우리 국민은 일제 침략기 41년간의 참상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이 나라의 장래가 매우 걱정이 된다. 일본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는 마치 내일이라도 나라가 망할 것처럼 흥분을 하면서, 정작 근, 현대사를 자신이나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역사를 수없이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알지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알았다하더라도 사회지도층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면 눈감아 버리는 사회지도층의 지식인들의 행태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가? 한 나라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국민의 집단지성(集團知性)이라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무지(無知)인 것이다. 무지한 집단지성이 판을 치는 세상은, 현실의 혼란만 있을 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역사의 흥망에서 배워야 한다. 과연 우리나라 국민의 집단지성은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을까에 대한 답은 여러분 각자의 상식과 지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41년간의 참상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사실에 대하여는 이 글 안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필자가 일제시대를 36년이 아닌 41년이라고 기술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주권이 1905년에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부터 계산하기 때문이다. 일제 36년간이라고 하는 것은,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합방(韓日合邦)에 의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는 을사늑약이후 외교권(外交權)과 관리의 임면권(任免權)이 일본에 의해 좌우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주권(主權)을 행사할 수 없었다면,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받은 것이기 때문에 주권이 없는 나라는 독립된 국가가 아니므로, 일제의 통치는 을사늑약부터 해방까지 41년이 되는 것이 옳다고 필자는 생각하여 일본의 통치를 41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일본이름을 아래와 같이 게재하면서, 창씨개명의 여부만을 갖고 친일파 또는 조력자(助力者)로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려 했고.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만을 갖고 친일분자로 모는 것은 또 다른 역사를 왜곡(歪曲)시켜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을 옹호하려는 불순(不純)한 의도(意圖)에서 출발한 반역사적(反 歷史的)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가를 하는 이유로 합당한가를 사례(事例)로 열거한 아래의 창씨 개명자(創氏 改名者)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만을 갖고 친일분자로 모는 사람들의 부모나 조부모 중, 일제의 식민지시대에서 삶을 영위했다면, 창씨개명을 한 자가 많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이 어디까지 진실로 채워져 있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동인- 淺野東仁(아사노 도진);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 중, 창씨개명한 제1호(1880년 10월)
강만길 - 姜田萬吉(쿄우다 만키치)
김동인 - 金東文仁(콘도 후미히토)
김동환 - 白山靑樹(시로야마 세이쥬)
김영삼 - 金村康右(카네무라 코유)
김대중 - 豊田大中(토요타 다이쥬)
김활란 - 天城活蘭(아마기 카츠란)
리덩후이(李登輝) - 岩里政男(이와사토 마사오)
박정희 - 高木正雄(타카기 마사오) /5·6·7·8·9대 대통령, 만주군 장교 출신.
배정자 - 田山貞子(타야마 사다코)
서정주 - 達城靜雄(타츠시로 시즈오)
송병준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 정미칠적.
심 영 - 青木沈影(아오키 진에이)
쑨원(孫文) - 中山樵(나카야마 쇼우)
이광수 - 香山光郞(카야마 미츠오)
이명박 - 月山明博(츠키야마 아키히로)
이봉창 - 木下昌藏(키노시타 쇼조)
이완용 - 李家完用(리케 칸요)- 을사오적, 정미칠적.
윤동주 - 平沼東柱(히라누마 토쥬)
윤치호 - 伊東致昊(이토 지코)
전택부 - 全家澤鳧(젠케 타쿠후)
장 면 - 玉岡勉(타마오카 츠토무)
장준하 - 張安俊河(쵸안 슌가)
장 훈 - 張本 勳(하리모토 이사오)
정지용 - 大弓修(오오유미 오사무)
주요한 - 松村宏一(마츠무라 코이치)
최규하 - 梅原圭夏(우메하라 요시나츠)
김석원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일본군 대대장 출신으로, 중일전쟁 참전.
정일권 -中島一權(나카지마 잇켄)/ 전 국무총리, 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
김석범 -金山照(카네야마 쇼우)/ 2대 해병대 사령관, 만주군 장교 출신.
노덕술 -松浦 鴻(마쓰우라 히로)/ 경찰, 독립지사를 검거하고 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병도 -역사학자로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천도교 교단도,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교단 원로들이 창씨개명을 한 것을, 新人間 통권 151호(12월호/ 1940.12.15)부터 통권 189호(1월호/ 1945.1.15)까지에서 수많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모두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화사전의‘ 관련자료 종합 재정리.
또 근자에 매우 국가의 장래가 우려되는 일이 버러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좌파계열의 대표적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제작하여 공개함으로서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의 철저한 조작에 의한 역사 왜곡에 대하여, 찬반의 논쟁이 점화되어 가열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4.19 통일 평화재단이 제작지원을 하고, ‘History for you 백년전쟁’/ ‘당신(민중)을 위한 역사. 백년전쟁’(필자가 번역함)이라는 제작방향을 제시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 시리즈 제작을 시작했다고 2012년 11월 23일 밝힌 후, 첫 번째 성과인 이승만 1부와 스페셜 에디션-박정희 1부를 제작(총 6부작으로 기획)하여, 일반인들을 상대로, 서울 아트시네마(종로 3가 낙원상가 4층)에서 시사회를 통해 공개하였다. 이에 반발하고 있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비롯하여 이승만 박사의 생애를 연구하고 있는 유영익 교수와 해방 전후사를 연구하고 있는 학계와 보수층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00만 건을 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논쟁의 흐름을 각종 관련 자료를 통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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