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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군 후손의 애타는 심정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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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동학기념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15회   작성일Date 15-03-21 18:34

    본문

    동학농민군 후손의 애타는 심정

     

      오늘(동학농민혁명 121년) 3월 21일 오전 12시경 노신사 한분이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오셨다. 친구 한분과 함께 전시관을 둘러보시며 무척 관심 깊게 전시유물과 내용을 살펴보는 모습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어르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관람하시다가,

      “혹시 기념관 관계되시냐?”

    고 하시기에,

      “예, 기념관장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무실에 들어가 의논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필자와 약 1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어르신의 존암은 ‘정필모’이며 연세는 83세였다. 정필모 선생 할아버지 존암은 ‘정홍조(가명 정국향?)’이며, 혁명 때 전주 옆에 있는 완주 구이에서 보급 즉 식량보급을 맡았다고 하였다. 이어 말씀인즉 조부모께서 갑오년 당시 동학군이었는데 자신의 집안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하면서,

      “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하고 시작하면서,

      “갑오년 겨울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당시 쫒기는 몸이라 밤늦게 집에 오셨다가, 할머니와 함께 주무시고,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밤새 눈이 쌓여 신발(짚신?)을 거꾸로 신으시고 급하게 나가셨다 합니다.

     

    나가시자 말자 일본군 몇 명이 집에 들이닥쳐 큰 소리로 고함지르며,

      “동학당 정홍조는 당장 나오라”

    고 위협을 하자, 이불속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집에 안 계신다.”

    고 말하자,

      “눈 쌓인 위에 신발자국이 집으로 향했다.”

    고 말하며 당장 나오라고 하였다 한다.

     

    할머니가 놀라시며 진짜 집에 안 계신가고 말씀하시자,

      “그럼 집에 불을 질러보면 알 것이다.”

    고 하며 제법 부잣집이던 큰집에 불을 절러버렸다고 한다.

    순간 불길이 치솟아 완전 잿더미가 되었고, 그 후 멀리 이사 가서 숨어 지내며 살았다 한다. 이러한 전설을 자주 들었으며 어디 나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한다.

     

    그리고 10여 년 전 정부로부터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선포되어 참여자신청을 했으나, 정확한 증빙서류와 기록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한다. 정필모 선생은 간절한 소망의 눈빛으로 말씀하시길,

      “저희 할아버지가 분명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식량보급의 운송까지 담당했다는 할머니 등 집안 어른들의 확고한 증언과 집안이 풍지박살이 나 여러 곳을 이사 다니며 숨어살았는데, 이제 와서 어디다 하소연 할 수 도 없고 답답한 마음으로 찾아왔다.”

    는 말씀을 하였다.

     

      당시 불에 탄 집터(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구암부락 1004번지)가 현재도 있으며, 자신의 앞으로 되어있다고 말씀하신다. 집터는 230평으로서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구이 임실 산외 등에서 식량보급을 맡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필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 이병규 부장에게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곧 연락하여 자세한 조사와 유족인지를 알아본다고 하였다.

     

      필자는 기념관에 근무하면서 가끔 정필모 선생과 같은 처지의 입장을 듣는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때론 기념재단에 연결도 해준다. 아마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고 국가차원의 유족에 대한 보훈법이 통과되면 이러한 입장의 많은 분들이 문의해 올 것이다. 지난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특별법에 따라 신청을 받아 참여자 498명, 유족 10,563명을 등록하였고, 위원회가 직권 조사하여 참여자 3,146명을 등록하여 참여자는 총 3,644명이 확정되었다.

     

      문제는 참여자가 총 3,644명으로 등록이 마감된 것이다. 현재 당시 참여자를 수십만(20~30만 명) 명으로 보는 게 정설인데, 3,644명에 그친 것은 등록절차와 참여자 명단의 기록 등의 한계성으로 보인다. 후손들의 유족등록은 선조들이 참여자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증언 등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면 어렵게 되어있고, 또한 법률개정이 되지 않으면 확실한 증거가 있다손 치더라도 현재는 정부차원의 참여자 및 유족 등록이 되지 않는다.

     

      현재 국회에 법률개정이 계류중이며, 조속히 개정되어 활발한 연구조사와 추가 등록이 될 수 있도록 기념재단은 물론 유족회, 천도교 등이 노력하여 국회차원의 법률개정이 이루어져 후손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동학농민혁명 121주년을 맞이하여,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추진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또한 19년 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봉환한 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 안장을 추진하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동학관련 외부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국가기념일이 10여 년간 논란 속에 추진이 멈춰진 상태에서 최근 다시 시작했지만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혁명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부 인사들을 보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기념일인지 자괴감마저 든다. 동학군지도자 즉 무명지도자 유골 안장문제도 지역 간 첨예한 대결양산이 마치 기념일제정의 과정과 같아, 한편으로 슬픔을 억누를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다.

     

      오늘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오신 정필모 어르신과 헤어질 때, 선생은 필자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관장님, 우리 후손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세요? 우리 집안은 여지 것 역적의 후손이라는 불명예로 살아왔습니다.”

    라고 하시며, 힘없이 걸어가시는 노인의 뒷모습이 나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아직도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은 미완의 상태며, 할 일들이 태산처럼 많다. 제발 국가기념일과 지도자 유골안장 추진이 이전투구의 모습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여 자랑스러운 동학농민혁명 후예들이 되었으면 한다.

     

    2015년 3월 21일

    동학혁명기념관장 송암 이윤영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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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필모(83세) 선생과 함께(전시관 1실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좌상 앞에서)

     

     

    배따라기음악속으로

    새야새야 파랑새야/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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