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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 3.1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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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재덕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121회   작성일Date 14-12-22 08: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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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여름 울산 언양교구는 지역 언론사인 울산저널 의
    이종호 기자님을 통해서 울산3,1운동사를 정리하였습니다.


    자료출처 :(울산저널) http://www.usjournal.kr/News/54038


    언양교구 원로이신 원암 이철우 전교구장님께서 대대로 소장해오신 

    비고장 원본은  안전한 보관을 위해 

    올해 2014년 부산대학교에 

    기증되었습니다.


    1919년 4월 2일 언양 만세 시위 

    95년 전 1919년 4월 2일 오전 11시 경남 울산군 언양면 언양 장터. 시장 한 모퉁이에서 누군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든 청년들이 맞받아 만세를 불렀다. 장터는 삽시간에 장꾼 2,000여 명의 만세 소리와 태극기로 가득찼다. 다급한 일본 경찰(순사)이 주동자를 붙잡아 주재소로 끌고 갔다. 지금의 언양초등학교 옆 주재소로 성난 군중이 몰려갔다. 시위대는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경찰은 성벽 위로 올라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손입분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김길천과 정달조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김종환은 총알에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갔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시위대는 흩어졌지만 장터에선 만세 시위가 저녁까지 이어졌다.


    이날 26명이 잡혔다. 이무종, 최해선이 징역 1년 6월, 이성영, 이규경이 징역 1년, 최한홍, 김낙수, 김정원, 서태식, 강기형, 김한준, 허황, 신동목, 박채우 등 9명이 징역 6월, 김경수, 김종백, 김정욱, 정태원, 윤봉수, 손수복, 서석룡, 강문필, 김운봉, 정용득 등 10명이 태형 90대를 맞았다. 강재주, 김성진, 이민연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규경은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김낙수는 감옥에서 숨졌다.

     

    천도교 울산교구 만세 시위 주도

     

    언양 4.2 만세 시위는 천도교 울산교구의 교인들이 주도했다. 천도교 울산교구는 1910년 언양군교구로 설립됐다. 당시 교구 상황은 고 이현희 교수(성신여대)가 1984년 발굴한 울산교구 <비고장>에 잘 나와 있다. <비고장>에는 1913년 교구실 건축시 의연인, 1917년 삼동면 전교실 매수시 의연금, 1921년 9월 교구 채무보상 등이 기록돼 있다. 성금을 낸 교인은 연인원 189명에 달하고, 성금액수도 800원이 넘는다. 이현희 교수는 “1910년대의 쌀 한 가마 값이 11원 정도였다”며 “각종 헌납은 은밀히 천도교 중앙총부로 위장송금돼 3.1운동과 독립군 자금으로 쓰였다”고 했다.


    지난해 4월 천도교 언양교구는 1912년 5월부터 1917년 2월까지 월별 성미대금 납부 상황을 기록한 원본 자료를 발굴해 공개했다.(<울산저널> 2013년 4월 17일자 34호 7면) 교인들이 끼니 때마다 식구 수에 맞춰 쌀 한 숟가락씩 모아 성금을 냈다.

     

    7인 거사 결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돌연 사망하자 천도교는 곧바로 손병희 교주 이름으로 국민대회 소집을 알리는 포고문을 냈다. <고 국민대회>는 윤덕영과 한상학이 궁녀를 시켜 고종을 독살했다며 2천만 동포의 봉기와 궐기를 호소했다.


    당시 천도교 울산교구의 김교경 교구장은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의 인산(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김 교구장은 독립선언문과 천도교 비밀신문인 조선독립신문, 국민회보를 울산교구에 보내 거사 준비를 당부했다. 울산교구는 휘문의숙을 나온 이규장을 서울로 보냈다. 김교경은 거사를 서둘라고 지시했다.


    최해규, 곽해진, 이규천, 유철순, 이무종, 이규로, 이규장 등 7명이 몰래 만나 거사를 결의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이규장과 이무종이 총책을 맡았다. 상북면 후리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썼다. 이무종은 거사 나흘 전인 3월 29일 밤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면사무소에 몰래 들어가 등사기를 훔치고 휘문의숙 동문인 황선운과 밤새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등사기는 이튿날 새벽 다시 제자리에 갖다놨다. 태극기도 만들었다. 이규장과 황선운은 한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대나무와 싸리나무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무종과 최해선, 이규인도 이규인의 빈집에서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만세 운동 주역들, 민족교육에 전념

     

    경찰은 전국으로 번지는 만세 시위를 막으려고 요시찰 인물인 최해규, 최해선, 곽해진, 유철순 등을 언양주재소로 먼저 구인했지만 별 혐의점을 찾지 못해 풀어줬다. 3월 28일 양산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4월 1일엔 통도사 스님들도 만세를 불렀다.

     

    4월 2일 이른 아침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이종능 등 7명은 언양장터로 걸음을 옮겼다. 장터 들머리 주막 석남집 뒷방을 본부로 정했다. 태극기는 문화상회에 맡겨뒀다. 망태기에 넣어 짚으로 덮어둔 태극기를 청년과 장꾼들에게 나눠줬다. 장터를 돌아다니며 11시에 만세운동이 있으니 전을 펴지 못하도록 했다. 무장한 채 장터를 돌던 경찰이 요주의 인물로 지목한 정병한을 붙잡아 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를 본 김성진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4.2 언양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이현희 교수는 <동학혁명과 민중>(1986 대광서림)에서 “만세시위의 첫 신호는 바깥장 중앙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는 시각으로 삼았는데 어떤 장정이 깃발이 오르기 전에 ‘독립만세’를 외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터졌다”고 설명했다.

     언양 만세시위는 이틀 뒤 4월 4일과 5일 병영 시위로 이어졌다. 병영에서는 경찰 총격으로 4명이 숨졌다. 4월 8일엔 남창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구속을 피한 이규장, 김교경, 최해규, 이규인, 이규로, 이규천, 강경찬, 곽해진, 유철순 등은 국외로 망명하거나 피신했다. 김교경, 이규천, 이규로, 이규장, 이무종은 1920년 상북면 거리 천도교 울산교당에 양정학원을 세웠다. 이듬해 곽해진과 김효동은 중남사립보통학교를, 황선운은 두동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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