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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주제 부활과 청년동맹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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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성민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533회   작성일Date 23-01-02 09:27

    본문

    3, 교주제 부활과 청년동맹재건

     

    1932814,15일 양일간 개최된 천도교 임시대회에서는 의절을 수정 하였다. 이 의절 입교문에는 신성


    사의 생신 기념식을 거행하고. 교회의 기념일과 기도일에는 天宗수운 최제우, 道宗해월 최시형, 敎宗의암 손


    병희, 法宗춘암 박인호를 새로 추존하여 삽입하였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김귀연 외 73인이 건의안으로 제출


    교주제 부활건을 상정 하여 수리하고, 1224일 인일 기념일부터 실시하기로 하였다.


    <建議案(교주제 부할의건)>


    大道主制敎主制로 변경되던 그때에 교주는 춘암으로 하되 춘암교주는 종신직으로 하라”,하심은 我 先聖師께서 교회에 대한 최후 유훈이였


    . 춘암 선생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교주를 사면 하신후 이래 10여년간 교회는 분규와 분열을 거듭하여 아등의 미력으로서는 도저히 


    統整통정 할수 없는 금일의 현상에 다다랐다. 아등은 이제 성선사의 유훈을 다시금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수 없다. 그리하여 아등은 교주제를 부


    활하는 동시에 춘암 선생이 노령이심을 불구하고 다시 교주로 복직하여 주심을 懇願간원하는 所以이다.


    1932(포덕 73)815


    건의안 제출자 김귀연외 73

     

    이와 같이 대회에서 교주제 부활을 결의하여 한현태 최준모 박용태 3인이 박인호 댁으로 가서 이를 품달하


    자 박인호가 한참 동안을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그 교주직에 있어서는 참으로 不勝基任이나 그러나 여러분


    이 성선사의 유훈에 기 하여 이렇게 대회에서 결의까지 한 데에는 여러 말을 하지 않겠다고 승낙 하였다


    19321223일 대회에서는 규제 변경을 토의 하였는데 종래의 天約을 폐지하고 교주제인 교헌을 통과 시


    키고 그동안 신파와 똑같이 사용하던 천도교중앙종리원의 명칭을 천도교중앙교회로 개칭하였다. 임시대


    회가 끝난후 오후 5시에는 1천여명이 참석하여 제 4세 교주 박인호의 교주 취임식을 권동진의 집례로 거행 


    하였다. 이날 청우당 역시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청우당명칭을 천도교청년동맹으로 변경하고 새로 제정한 


    규정을 통과 시켰다. 이어 중앙 집행위원을 선거헌후에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천도교정체폭로비판회와 천


    도교 신파 청우당 사건 추이를 주시하기로 하였다. 중앙 집행 위원으로는 위원장 박내원, 서기 박양신, 상무 


    위원 손세종, 집행위원 윤원세 외 34, 중앙검사 위원 손재기 외 4, 상무 위원 박한규 외12명등을 선출 하


    였다.

     

    4, 종문 심법과 사리원파와의 합동


    19332월 박인호는 종문심법이 확고함을 천명하는 윤고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 윤고는 1927814일 


    지일기념일을 맞아 종금 이후로는 종문 심법을 어떠한 한 개인에게 전수 하지 못할것이며, 이 설법은 5만년 


    영원히 천도교인에게 일반적으로 심법을 전수 하는 것이다라는 법설을 한번 확인하기 위해 발표한 것이다.

     

    <輪告>


    만사는 생각과 實際가 전연히 다른 것이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 스스로 생각하기를 육신의 나는 십년 전후에 변함이 있는 나이나 나는 십년전 그


    때의 나와 십년후 오늘의 내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나이다. 일생의 출처진퇴를 교회에 바친 나로서 이제 늙음을 빙자하고 여러분의 요구를 저버


    리는 것은 나의 본분이 아니라 하였던 것이다. 어찌 알았으랴. 실제 이 자리에 나오고 보니 모든 것이 생각과는 전연 반대이다. 어떻게 하여야


    聖師의 최후 유탁-敎主終身職-을 다시는 땅에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하여야 동덕의 기대를 만분지 일이라도 비우지 아니할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오늘의 임무가 과거보다 더욱 무거워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십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장구한 시간이랴마는 오늘의 교회는 벌써 


    去聖得遠한 교회인지라 嗚呼 先師의 호흡은 이미 끊어지고 선사의 동정은 이미 아득 하여졌다. 하물며 그동안 시대의 추이와 사상의 변천된 것


    은 십년간 江湖에 누웠던 나로서 이것이 과연 꿈의 세상이 아닌가를 의심치 아니할수 없는 오늘의 세상이라. 날이 갈수록 태산을 지고 얇은 어름


    의 바다를 임한 듯이 의심과 두려움이 새로워질 뿐이다. 그러나 三世神聖傳授하여주신 心法이 이에 있고, 교회 전체 의사를 대표한 교헌이 완


    비하여 있나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두려워 하리오. 오늘 나의 임무는 오직 백만 동덕과 한 가지 신성의 심법 그대로를 신앙하는 그것이


    며 교헌의 규정 그대로를 시행하는 그것 뿐이다. 이외에 다시 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두렵건데 현숙하고 총명한 백만동덕을 가진 교회로서 다시 


    이 늙은 몸을 일으킨 것은 그 本意가 오로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현명한 제군들에게 그리운 마음이 서로 합하여 일심이 되


    어 가지고 각자의 임무를 따라서 成敗得失은 진리 그것에게 맡기어 버리고 반듯이 그 결과를 짓는 實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실행이 없는 결심


    은 것이 空想이고 결심이 아닌 실행은 그것이 僥倖요행이다. ㅁ반천하 죄악은 일체가 다 이 공상과 요행으로부터 일어나는니 우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 때문에 일생을 실패로 마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고 진리가 아닌 성공은 그것이 영원히 실패인 것을 認識인식 


    하여야 한다.믿을 지어다. 우리 현명한 동덕들이여!


    포덕7419332월 일.

    天道敎 敎主 朴寅浩

     

    1932년 제2차 분열 후 교회 재정은 물론 박인호의 생활비도 몹시 궁핍하여 각지 교인들이 가져다 주는 시량


    비로 살았다. 한편 192710월부터 평북 영변에 천도교 육임소를 설치하고 있던 오영창측에서는 춘암 교주


    댁 생활비로 매월 20원씩의 예산을 계상 하였다면서 1933323일 이희유 명의로20원을 보내왔다. 박인


    호는 봉교 한순회를 시켜 이를 즉시 반송 하였다. 19328월경 사리원파와 합동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잠


    시 소강 상태이다가 1933919일 공선관장 박승룡이 안악지방을 순회하던 중에 오영창을 만난 자리에서 


    다시 논의가 되어 105일에 오영창과 김승주가 상경하여 박인호를 만났다. 이때 박인호는 오영창에게 교직


    을 맡기겠으니 합동하자고 권유 하였다. 그리고 107일 간부들을 자택으로 불러 이런뜻을 알리고 양측 간


    부 연서로 합동을 ᅟᅡᆯ표하도록 지시 하였다. 그러나 오영창이 이를 수락 하지 않고 그 다음날 사리원으로 가버


    렸다. 그런데 오영창계에서는 오영창에게 심법을 전수 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구파교회가 사리원으로 


    옮겨 간다는 보도가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 실렸다. 그러자 1933812일 박인호는 요양차 있던 신천 온


    천에서 전화를 이용해 1927814일 반포한 종문 심법에 대한 설법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윤고를 발표하였다.

     

    <輪告>


    금반에 재차 오영창을 불러서 사리원 기관을 해체하고 교회의 사무적 직임을 맡아보라고 권유 한데 대하여 로부터 에게 심법을 전수한 것 같


    이 외부에 와전이 잇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이 심법문제에 있어서는 이제로부터 6년전 포덕66814일 아래의


    종금 이후로는 종문 심법을 어더한 일게인에게 전수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이번 설법은 5만년 영원히 천도교인에게 일반적으로 나의 심법을 전수 하는 것이다.


    정신상 교화와 사업상 기관은 종법사(원직)와 위원(주직)의 협동으로서 진행하여라.


    나의 이번 설법은 5만년대업의 기초를 확립하는 법설인 것을 확실히 믿으라. 의 설법이 엄연히 역사적 법통을 명중하고 있나니 이 문제만


    은 다시 容疑할 엾는 것이다.


    1933년 포덕 741012

    天道敎敎主朴寅浩

     

    천도교회에서는 이후 사리원파와의 합동을 단념하고 잇었는데 193411월에 이르러 사리원파에서 돌연 3,4


    명의 대표를 파견하여 무조건 합동을 제의 하였다. 그리하여 1935215일 내수동 박인호 집에서 양측 대


    표가 모인 가운데 오는 45일 천일기념일을 맞아 구파교회와 사리원파가 합동하기로 결정 하였다. 분열된


    9년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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