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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총동맹 체제와 지부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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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성민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413회   작성일Date 22-12-14 09:24

    본문

    청년총동맹 체제와 지부 확장

     

    천도교청년동맹은 19264월에 조직되었지만 각 지부 조직은 육십만세 운동으로 간부들이 피검되고 또 일


    제의 감시가 심한 까닭으로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7년 긴간회가 창립되어 본격적으로 운동을 전


    개하게 되자 청년동맹도 각 지방에 집중적으로 지부를 설립해 나갔다.


    1927년부터 1929년에 이르는 기간에 지부가 속속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신간회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28년에만 14곳의 지부가 설치되어 동맹 지부수가 12%증가하고 동맹원수는 18% 증가 하였다. 그러나 신


    간회 해소 논의로 논쟁이 비등하던 1930년에 이르서는 동맹지부가 설립된곳은 5곳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이것은 천도교청년동맹이 신간회 활동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 하였던 것으로 청년동맹의 조직과 활


    동이 신간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1930년 현재 39개에 달하는 지부가 설립되었고 


    동맹원수도 1300여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천도교청년동맹은 천도교 구파의 전위조직으로서 민족운동 세


    력의 비타협적인 인사들을 견인하여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청년동맹의 지역적 분포를 살펴보면, 남한21


    북한 15,이었고 지역별로는 전라도가 9곳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 평안도와 황해도가 가각 7곳이였으며 충


    청지역에 6곳이였다.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19271928년 경에 설립된곳이 많앗고 충청과 경상 및 


    삼남지방은 19281929년경에 설립된곳이 많았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세


    력이 확장되자 조직 체게를 변경하엿다. 1928310일 개최한 제2회 청년동맹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이제


    가지 사용하던 천도교청년동맹을 천도교청년동학당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를 실현 하기위해 44


    일에 임시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규약 개정 및 의안작성위원으로 박내홍 조정호 오일철 3명을 선정하엿다


    청년 동학당이란 명칭이 청년동맹 창립시에 제기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은 명칭이다. 그런데 다시 청년동학당


    이란 명칭을 사용하려는 것은 동맹의 활동을 가이충 쇄신하기 위해 동학혁명의 기치를 내세워 활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즉 청년동학당의 이름으로 천도교 신파와 연합교회파 및 육임파 그리고 기타의 동학 계열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단편적 국부적이 아닌 대동단결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유일당 신간회 운동을 성과 


    있게 전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92846일 동학당 임시대회가 박완의 사회로 개최되어 명칭 변경에 대


    한 결의를 하려고 하였으나 일제 당국이 천도교청년동학당은 조선의 과거 혁명단체의 명칭이라 하여 금지하


    여 부득이하게 명칭을 천도교청년총동맹으로 변경하게 되엇다. 또한 규약 개정은 5명의 개정위원으로 하여


    금 개정코저 하였으나 이것 역시 일제의 검열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중앙집권위원회에 일임하였다 이어서 


    박한규등 13명의 전형위원들이 중앙집해위원으로 조정호등 35명을 선출하고 대회에서 투표를 통해 박내홍


    을 대표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47일에는 총동맹 제1회 집행위원를 개최하고 전날 개회에서의 위임한 규약 개정은 오일청 조정호 유


    한일 손재기 박내홍 5명의 규약개정위원을 선정하여 다음 대회까지 개정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또 상무 위원


    으로 박완과 한용순을 뽑아우며, 회게감찰을 위한 감찰부를 신설하여 감찰위원으로 손재기 오일철 한순회


    를 선정 하였다.


    19271214일 지일기념을 기하여 동맹원들에게 동원증을 발부하고 지방순회 강연을 통해 세력 확장에 


    진력하였다. 19291223일 위원22명이 참석하여 박완의 사회로 제4회 중앙 집행위원회를 개최 하였다


    원래 12월중에 정기 대회가 열릴 예정이였으나 이때 경리책임을 맡고 있는 소재규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결산은 차기회의까지 연기하기로 하고 예산도 전년도에 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중집위원중에 5명의 상무


    위원회를 조직(박완 조정호 한용순 유한일 박한규)하였다. 1927년부터 1931216일 신구파 합동에 의해 청년당과 


    합동할 때가지의 청년동맹부는 50여곳에서 조직되었다. 이와 같이 천도교청년동맹 체제로 바뀌면서 중앙 집


    권적 체제가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지방조직도 확대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조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지방


    조직을 통하여 관리하기 위해 1929224일에 황해도 연맹을 시작으로 각도 연맹을 조직하였다.


     

    5, 천도교 여성 동맹의 조직과 활동


    192445일 창립된 천도교내수도 1925년 교회분규에 즈음하여 분열되어 구파에서는 새로 천도교여성동


    맹을 창립하였다. 192767일 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서는 규약을 통과시키고 한봉소 박명화 


    홍종희 김상화 강운화 박정자 김숙 이소암 박호진 등 10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 하였다. 그리고 64일에는 


    상춘원에서 창립을 축하하는 원유회를 개최하였다. 천도교여성동맹의 사명은 우리나라는 부인문제가 연구


    시대를 지나 실행시대에 이르러 곳곳의 여성단체에서 여자교육을 진흥시키며, 재래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


    하며, 과거의 법칙과 습관을 따르던 폐풍을 개량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여성에게는 현실에 편중하는 경향이 


    있어 자신을 몰각하고 환경의 노예가되어 가고 있는데 특히 교육을 받은 신여성에게 많다고 할수가 있다.


    대교육을 받은 여성을 관찰할 때현실의 물질문명을 그대로 흡수하여 사치를 숭상하고 안전의 욕망에 만족


    하여 항구적 정신이 부족한 것을 볼 수 잇다. 인류의 최고 이상을 실현 하려면 무엇보다도 인격수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처한 천도교여성동맹 창립의 의의와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


    . 이러한 사명에 따라서 우리는 인내천주의 하에 단결을 굳게 하고 모든결의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천


    도교 교리와 학술을 강습하고 순회강연을 통한 활동을 할 것이다. 여성동맹의 사업은 회무확장에 따라 여러 


    가지 형식이나 기관으로 나올것이나 오늘날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첫째로 건전한 신체와 고상한 정신이며 


    둘째로 가정생활의 개선이 급선무 이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은 신체가 약하며 무슨일이나 감정적으로 해석


    하고 냉정한 판단을 못하고 의지가 박약하여 최후가지 분투하는 기운이 없는데 이를 솔선 개선 할것이며 가


    정생활을 간이하게 하여 시간과 노력의 절약에 힘서 사회에 공헌하며 자기수양을 열심히하여 사회의 분자가 


    되자고 주창 하였다. 또한 여성동맹은 사람이 한울 그대로 나타나자, 지상천국에 실제 각성을 촉진하는 의


    미로 천도교의 인내천주의인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단결을 약속한 것으로 천도교 종지로 시대적 여성운동

    을 하자는 것이 였다.


    192845일 오후1시 대교당에서 회원6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박명화의 사회로 개최

    되었다.


    임시집행부를 선거하여 의장에 박호진, 서기로 김수월과 김상화를 선출한 후 청년동맹 대표 한순희, 종리원 


    대표 김경함, 종법사 대표 이종린 등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집행부위원을 선출하고 안건을 결의하였는데 


    이날 전국대회에서 근우회를 지지한다고 결의한 것은 천도교 여성동맹이 단순한 천도교의 여성단으로뿐 아


    니라 천도교청년동맹이 참여하고 있는 신간회 및 근우회와 제휴하여 비타협적 민족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뜻


    을 담은 것이였다. 이때 선출된 한봉소를 비롯한 집행위원의 대부분은 종리원 간부와 청년동맹 간부의 부인


    들이였다. 193047일 오후 3시 대교당에서 제3회 정기대회를 개최하엿다 박명화의 개회사와 이종린의 


    축사가 있은 후 임시의장 김수월의 사회로 의안으로 상정된 교양 문제에 관한건, 여성 동맹문제, 지방순회 관


    한건 등을 결의 하였다. 또 집행위원으로 한봉소 등 11명을 선정하였으며 상무 위원 박문혜로 하여금 평양 


    진남포 안주 곽산 선천 용천 구성 신의주 해주 옹진 재령 연백 장연 사리원 황주 백천 등지를 순회하도록 결


    의 하였다 천도교여성동맹의 지방부는 청년동맹부가 설치된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


    고 413일에는 종법실에서 제1회 중앙집행 위원회를 열고, 인장의 일치, 회원방문, 강좌의건, 원유회에 관


    한 건, 공문서식 일치의 건 등을 결의 하였으며 부서별 임원을 선정하였다. 193062일 하오1시 대교당에


    서 개최된 천도교여성동맹 창립 제3주년기념식은 대표 한봉소의 사회로 김경함과 이병헌이 축사를 한 후에 


    최시영의 연혁보고와 김숙의 감상담으로 대성황을 이루엇다.

     

    천도교 여성 동맹과 근우회

     

    천도교 여성 동맹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는 근우회를 통한 대외적 활동이였다.


    신간회의 자매 성격을 띠고잇는 근우회는 1927527일 창립된 대표적인 항일여성 운동단체 이다. 여성운


    동계의 김활란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현신덕 등과 사회주의 여성운동게의 박원민 정종명 주세죽 그리고 천


    도교의 박호진 김숙등이 참여하여 조직되었다. 19272월 신간회가 창립되자 여성 운동계에서도 분산을 


    통합으로라는 구호로 좌우파 간의 통합움직임이 일어났고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 중심의 여성 60여 명이 


    1927416일 조선일보사 2층에 모여


    전국적인 통합여성단체 조직에 합의한 후 유각경 등 13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준비위원들은 각계각


    층의 지도급 여성 41명으로 발기인을 구성하고 426일 발기총회를 열었다. 근우회의 창립취지는 조선여성


    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민간적 지위에 있지 못하였고 가정에서도 세상과 벽을 쌓고 살아왔으므로 여성의 지


    위향상과 굳쎈 단결을 하자 는 것이였다. 19297월 위원회에서 결의한 행동강령은 첫째 여성에 대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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