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꼴레르(bricoleur)
페이지 정보

본문
어릴때 놀이로는
딱지치기. 구슬따먹기와
혹은 시골 집 처마밑에 걸려있는 구차한 거미줄을 전나무 가지를 꺽어 베드민턴 채 체럼 만들어 거미줄을 휘휘ㅠ감아 따서 잠자리를 잡던 그 자체가 무의식속에서 브리꼴레르적인 체험과 경험으로 무한 가치 창조를 익히 체험을 하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넉넉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어려운 역경에도 그 어린 나이에도 모두들 놀이에 심취해 만들고. 부수고. 이렇게도 해보고.저렇게도 해 보면서
나름대로의 초 자연적 사고를 발휘하며 성장통을 앓아 왔을것이며.
어떠한 규범이 없이 자유 자재로 여러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잠자리채를 만들때 어려운
역경속에서 피는 사고의 소유자 인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도 아니며 학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그저 낙서처럼 끄적여 보면서 더 나아가 많이
서술하지 않겠지만
道를 닦는 것에도
전문가적 자세가 아닌 브리꼴레르 처럼
자연적인 모든것을 모아서 道닦음에 실용해 보면 좋을것이라 생각 해본다.
1대 교조 최제우 대신사님은
사람이 한울님 이다 라고 밝히셨다.
어느 누가 사람이 하느님이란 생각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 시대에 대신사님은 돌변 자체였을것이다.
자연에서 습득하시고 자연에서 거듭 하시면서 초자연적인 말씀으로 인간을 구하게 하시고.나라를 구하게 하셨다.
2대 교주 최시형 해월 신사님께서는
정좌해서 道를 通하신 것이 아니고
그 어려운 國運의 틀안에서 짚신을 만들면서도 3만독씩을 모시면서 道를 通하셨으니 1800년대 의 브리꼴레르의 초 자연적 소유자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더욱이 사람으로서 한울님으로서 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이야말로 전대미문의 사람과 한울님을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는가?
道를 通함에 어디 규범이 있어 따르고 다른 방법을 무시하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브레꼴레르식 通은 아닐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리를 펴고 주문을 모신다던가.
걸어가면서 소리 내어주문을 모신다든지.
누워서 소리내어 주문을 모시는 것 또한
브리꼴레르식 요구하는 것이 아닐것이다.
3세 교주 손병희 의암 상사님 께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직접 왜적에 나라에서 생활도 해보시고. 여러 경험을 토대로 國魂에 힘을 주신 말씀 또한 브리꼴레르식 通이 아닐까?
4세 도주 박인호 춘암 상사님 께서는
3분의 말씀이 세상의 이치를 말씀 하셨으니
본인은 오직 道 닦음에 然念 하리라 하시고 오직 스승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道를 通하신 분이시라 거기에 수많은 벼랑위에서의 역경을 과 경험을 통하여
브리꼴레르가 바라는 모든것을 모아서 道의 세계를 접하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된다.
모든 일용지 행사에 道 아님이 없는 天道敎 東學의 교리로서 앞으로 나아갈 세계적 과학의 전문성으로 기계화되어 만들어지 는 세상속에서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며 헤메이는 전문적 지식의 세계속에서
앞으로의 5만년의 대계가 서서히 살이 깎여 나가며. 뼈가 부서지는 고통속에서 이 세상을 빛으로 환원 시키리라..
敬人
敬物
敬天
이라 하셨으니
이 모든 말씀이 大 宇宙의
초 자연적 속에 모든 경험의 바탕의 道로서
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나아가 세계속의
평화를 지켜 나아가 사람사는세상의 축이 되리라..
가평 산속 펜션에서
딱지치기. 구슬따먹기와
혹은 시골 집 처마밑에 걸려있는 구차한 거미줄을 전나무 가지를 꺽어 베드민턴 채 체럼 만들어 거미줄을 휘휘ㅠ감아 따서 잠자리를 잡던 그 자체가 무의식속에서 브리꼴레르적인 체험과 경험으로 무한 가치 창조를 익히 체험을 하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넉넉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어려운 역경에도 그 어린 나이에도 모두들 놀이에 심취해 만들고. 부수고. 이렇게도 해보고.저렇게도 해 보면서
나름대로의 초 자연적 사고를 발휘하며 성장통을 앓아 왔을것이며.
어떠한 규범이 없이 자유 자재로 여러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잠자리채를 만들때 어려운
역경속에서 피는 사고의 소유자 인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도 아니며 학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그저 낙서처럼 끄적여 보면서 더 나아가 많이
서술하지 않겠지만
道를 닦는 것에도
전문가적 자세가 아닌 브리꼴레르 처럼
자연적인 모든것을 모아서 道닦음에 실용해 보면 좋을것이라 생각 해본다.
1대 교조 최제우 대신사님은
사람이 한울님 이다 라고 밝히셨다.
어느 누가 사람이 하느님이란 생각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 시대에 대신사님은 돌변 자체였을것이다.
자연에서 습득하시고 자연에서 거듭 하시면서 초자연적인 말씀으로 인간을 구하게 하시고.나라를 구하게 하셨다.
2대 교주 최시형 해월 신사님께서는
정좌해서 道를 通하신 것이 아니고
그 어려운 國運의 틀안에서 짚신을 만들면서도 3만독씩을 모시면서 道를 通하셨으니 1800년대 의 브리꼴레르의 초 자연적 소유자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더욱이 사람으로서 한울님으로서 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이야말로 전대미문의 사람과 한울님을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는가?
道를 通함에 어디 규범이 있어 따르고 다른 방법을 무시하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브레꼴레르식 通은 아닐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리를 펴고 주문을 모신다던가.
걸어가면서 소리 내어주문을 모신다든지.
누워서 소리내어 주문을 모시는 것 또한
브리꼴레르식 요구하는 것이 아닐것이다.
3세 교주 손병희 의암 상사님 께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직접 왜적에 나라에서 생활도 해보시고. 여러 경험을 토대로 國魂에 힘을 주신 말씀 또한 브리꼴레르식 通이 아닐까?
4세 도주 박인호 춘암 상사님 께서는
3분의 말씀이 세상의 이치를 말씀 하셨으니
본인은 오직 道 닦음에 然念 하리라 하시고 오직 스승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道를 通하신 분이시라 거기에 수많은 벼랑위에서의 역경을 과 경험을 통하여
브리꼴레르가 바라는 모든것을 모아서 道의 세계를 접하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된다.
모든 일용지 행사에 道 아님이 없는 天道敎 東學의 교리로서 앞으로 나아갈 세계적 과학의 전문성으로 기계화되어 만들어지 는 세상속에서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며 헤메이는 전문적 지식의 세계속에서
앞으로의 5만년의 대계가 서서히 살이 깎여 나가며. 뼈가 부서지는 고통속에서 이 세상을 빛으로 환원 시키리라..
敬人
敬物
敬天
이라 하셨으니
이 모든 말씀이 大 宇宙의
초 자연적 속에 모든 경험의 바탕의 道로서
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나아가 세계속의
평화를 지켜 나아가 사람사는세상의 축이 되리라..
가평 산속 펜션에서
- 이전글불망(不忘)이란 존상(存想)의 의미 25.07.30
- 다음글대신사께서 말씀하신 수도법 <좌잠> 25.07.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