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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임순화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51회   작성일Date 15-05-22 14: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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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를 통해 본 일본의 침략 역사

     

    아래에서 제시하는 자료는 한국의 고문헌인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등에 실려 있는 왜인의 침입에 대한 역사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714회이니, 실제 침략 회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는 일본의 침략근성이 최근의 100여년 사이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침략행위를 통해 그들의 선조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것임을 증명해 준다.

     

    이러한 일본의 오랜침략근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 일본의 무력 도발 시도를 원천봉쇄하여, 한국의 안보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의 유지를 위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이 글을 쓴다.

    사료(史料)에서 표현된 ()’라는 용어의 기원과 의미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일본을 지칭할 때 ()’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우리나라도 일본을 ()’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나 중국의 고대 사료에는 일본이라는 표현이 거의 없으며, ‘일본은 근대에 와서 주로 사용된 명칭이다.

     

    ()’라는 명칭은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각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통칭할 때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인을 주로 왜인, 왜병이라고 표현하였고, 고려시대 말기 이후부터는 주로 왜구(倭寇)’라고 하였다.

     

    왜구의 침략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특히 13세기 말 일본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 생활기반을 상실한 일부 무사집단과 농민들이 이키(壹岐) ·쓰시마(對馬) ·기타큐슈(北九州)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등을 근거지로 하여 한반도와 중국의 해안지대에 출몰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들이 점차 해적 집단화되면서 왜구라고 불리어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918~1392 AD) 후기의 충정왕 ·공민왕 ·우왕에 이르는 40년 동안에는 왜구가 100~500척의 선단으로 무리를 지어 마치 전쟁을 하는 군단을 방불케 하여 경기도 강화(江華)의 교동(喬桐)과 예성강(禮城江) 하구 등 수도 개경(開京)의 코앞에서 노략질을 자행하였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수도의 치안까지 위협하였다.

     

    이렇듯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에도 우리민족은 주로 왜적의 방어를 위한 국방력을 강화하였을 뿐 침략이나 노략질을 한 적이 없다. 1377(우왕 3) 최무선이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을 설치하여 화약을 만들고 육화(六花) ·석포(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등 각종 화기(火器)를 제조하였으며 한편 전함(戰艦)의 건조에도 힘썼다. 그 결과 1380년 왜구가 500척으로 대거 침입하였을 때에는 최무선이 진포(현재 군산 앞바다)에서 화포, 화통 등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 500여 척을 전멸시켰다. 이 역사적 전투가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인 진포해전이다.

     

    일본의 침략과 약탈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조선(1392~1910 AD) 초인 1417(세종 1)에는 이종무 장군으로 하여금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의 대마도(쓰시마(對馬))를 정벌하게 한 후 포로로 잡혀있던 중국인들을 다시 중국 본토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대마도 도주 종준(宗俊)과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보내고 일본국에서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왜구들은 함부로 조선에 침입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중국의 연안을 빈번하게 약탈하여 명왕조를 멸망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

     

    혹자는 왜구의 침입을 임진왜란이나 일본강점기와 같은 일본 정부군의 침입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병력 규모를 볼 때 왜구는 정부군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도 평범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독도 문제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 없지만, 문제는 언제나 소수 일본의 정치권과 극우 세력들이다. 이들의 성향은 과거 우리나라를 수없이 침입한 왜구의 침략성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정부군이니 비정부군이니 구분해서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구나 침입을 당한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피해와 고통의 정도가 너무 컸고, 고려는 장기간 동안 왜구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소모되어 쇠퇴하기에 이른다.

     

    사료를 통해 본 왜인 침략의 횟수는 왜인이 바다를 건너와서 여러 지역을 노략질 했을 경우, 각 지역 침입을 1회로 하였다.

     

    신라시대 왜인 침입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의 신라침략 기사)

     

    남해차차웅 11(서기 11) 倭人이 병선 100여소를 보내어 해변의 民戶를 노략하므로, 왕은 六部精兵을 일으켜서 막게 하였다. (1)

    탈해이사금 17(서기 74)(이하 서기 생략) 왜인木出島(목출도)를 침노하자, 왕이 角干(각간) 羽烏(우오)를 보내어 막다가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죽었다. (2)

    지마이사금 10(121) 왜인東邊(동변)을 침범하였다.(3)

    조분이사금 3(232) 왜인이 갑자기 닥치어 金城(금성)을 에워싸므로, 왕이 친히 나아가 싸우니 적이 潰走(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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