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이야기 동학비사, 만고풍상 겪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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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이 책 전북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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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포스터 앞에 선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사진=김도기 기자) (* 아래 기사내용중에 책내용과 다른 내용은 기자가 임의로 작성한 내용임을 미리 밝힙니다.) |
(전주=국제뉴스) 이승희 기자 = 동학(東學)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다수 국민들은 전봉준 장군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전봉준이 동학을 창시했다고 오해하고 있기도 하다.
기자는 청소년기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중학교 교과서인가 고등학교 교과서인가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선사회 후반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민란이 이곳저곳에서 조선사회를 강타하기 시작할 때 경주에서 태어난 최제우 선생이 1860년 동학을 창시했다.
1864년 강화도 도령 철종이 죽는 해에 동학의 급속한 확산에 공포를 느낀 조선왕조와 유교 노론벽파 세력과 세도가들이 최제우 선생을 대구에서 참수했다.
그런데 이것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충북 보은에서 동학 교도들이 교조신원운동(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알려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운동)을 했는데 수만명이 모였다.
전북 완주 삼례에서도 교조 신원운동을 했는데 보은집회보다 더 많이 모여 삼례평야가 사람으로 가득했다. 저서로는 동학의 교리를 담은 동경대전과, ‘동학을 글을 모르는 아녀자들까지 알 수 있도록 노래로 만든’ 용담유사가 있다. 대체로 이런 기록을 교과서에 실은 것 같다.
▲ '만고풍상' 저자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기념관은 전주한옥마을 은행로 300년 된 은행나무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어 한옥마을 관광객들에게 역사공부 하는 재미를 더 하고 있다.(사진=김도기 기자) |
◆ “아! 동학에 길이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인가 보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 제우(濟愚)라는 이름은 선생이 득도한 후 개명한 이름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제도(濟道)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1970년대 후반. 20대에 세상사에 대한 방황으로 밤새는 일이 잦은 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어릴때부터 태권도가 좋아 일상 중 반은 태권도 수련을 하는 일이었다.
20대 후반. 방황의 끝을 보리라.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행정진(修行精進)했다. 그러기를 두 어달. 깊은 명상 속에서 인당혈(얼굴 미간 바로 위 혈자리로 신명이 밝아지면 열린다고 한다)로 선명한 글자가 보였다. 동학(東學)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 동학에 길이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전주로 나와서 찾았다. 동학이 2대 교조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에 이어 3대 교조 손병희 선생 때 천도교(天道敎)로 일제가 독립운동으로 지목해 탄압하는 것을 피하고자 1905년 개칭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기에 천도교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잠깐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족종교들에 대한 스토리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원래 단군교(檀君敎)에서 일제가 독립운동으로 지목해 탄압하자 이름을 바꾼 대종교(大倧敎)다.
동학의 천도교 개칭은 “전남 낙악읍성 출신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弘巖) 나철 선생이 단군교(檀君敎)를 창시하시고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 되면서 일제가 단군교를 독립운동으로 지목하자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한 것”과 비슷한 스토리다.
조선말기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해 수십만명에 이르던 민족종교 동학. 그런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수십만명이 죽고 교세가 위축되면서 해방 이후는 더욱 초라해진 동학,
그러한 민족종교 천도교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2개월여 끝에 어렵게 천도교 전주교구를 찾았다. 김제 원평이 고향인 이 관장은 아예 전주시내를 골목골목 일일이 뒤져 나섰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날 이후 천도교에 일생을 바치며 살아왔다. 30여년의 세월.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이렇게 동학과 만났고 청년기부터 중년기까지 평생을 살아 왔다. 민족종교 천도교 한 길을 살아 이제는 집나이로 58세가 되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역사의 부름 속에서 의미 있고 보람 찬 삶을 살게 되리라.
이렇게 살아 온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이 책을 내고 지난 9월 12일(토) 전주한옥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야기 동학(東學) 비사 상(上) “만고풍상 겪은 손”이다.
‘만고풍상(萬古風霜) 겪은 손“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 선생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고 한다. 선생이 몰락한 양반 집안 늦동이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7살에 여의고 13살에 결혼해 겪은 세월은 그야말로 만(萬)가지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궁핍으로 인한 찬바람 속에서 서리 맞으며 산 세월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책은 최제우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그런데 왜 책 제목 앞머리에 “이야기 동학비사”로 했는가.
저자 이윤영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에 대해 잘 알고 동학에 대해 많이 공부한 사람들에게 만고풍상 겪은 최제우 선생의 일대기는 상식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비사(祕史)다. 대개는 선생의 삶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제우 선생이 득도한 날의 얘기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팔도강산을 주유하다가 경주로 돌아와 수행정진(修行精進) 할 때 어느 날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게 된다.
득도(得道)하는 순간이다. 이후 하늘로부터 받은 주문이 시천주(侍天主)다.
시천주는 “시천주 조화정 / 영세불망 만사지 / 지기금지 원위대강”으로 간결하다. 풀이하면 “조화주 하나님을 제 가슴에 모십니다. / 세상사 모든 일이 조화주 하나님의 큰 뜻 속에서 이루어 졌음을 영원토록 잊지 않겠나이다. / 그러하오니 ‘지금 여기(hero now)' 저에게 큰 힘을 주시어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소서.”
어떤일을 공심으로 하고자 할때 시천주를 봉송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면 실제로 원하는 바가 이뤄진다고 한다. 저자의 시각에선 이런 얘기들이 비사(祕史)인 것이다. 책은 총 7장으로 이뤄졌다. 처음 장은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 없다”로 시작한다. 이어 “구미산 기장하다” 등으로 계속된다.
기자에게는 한 번에 눈이 가 읽게 된 장이 있다. 5장에 나오는 “동학과 남원”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주로 영남과 충청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제우 선생이 남원에도 와 포교와 수행을 했다는 얘기가 전라북도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눈에 확 띠게 되었다.
마지막 장은 “삼절의 수를 잃지 말라”로 종결된다. 책은 초등학생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를 위주로 잔잔히 선생의 일대기를 풀어 가면서 더불어 한자 한문 공부를 하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여기에 최제우 선생의 발걸음이 머문 대표적인 聖地를 일일이 답사하면서 찍은 아름다운 사진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 하나의 재미.
박홍규 화백의 그림이 책 표지와 중간 중간에 실려 있어 사진과 함께 초등학생들도 지루하지 않게 책을 읽게 배치했다.
소래 박홍규 화백은 미술로 대학을 전공하고 충남 공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을 해온 중견 화백이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데 서울까지 대학 보내놨더니 농사나 짖겠다고 해서 고향에서는 농사를 못짖고 충남 공주로 간 얘기가 유명하다.
또한 동학군 김경천의 밀고로 순창 피노리에서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전봉준 장군이 전주에 도착했을때 미국인 선교사가 촬영한 “전주 남고산 아래 좁은목에서 찍은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그림으로 그리고 판화로 완성한 작품이 유명하다. 이 그림은 기자도 1992년 결혼식때 축의금 대신 받아 보관하고 있다.
박 화백 그림들은 전봉준 장군 대표적인 초상화 작가로서 농민들의 삶과 우리를 키워내고 살 찌운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출처- 국제신문, 국제뉴스 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1884
만고풍상 최제우 삶, 비사 아닌 역사로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동학농민혁명 전반 다룬 책 펴내
2015년 09월 21일 (월)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 관장이 ‘이야기 동학비사(상), 망고풍상 겪은 손’(신인간 발간, 1만5,000원)을 펴냈다.
‘만고풍상(萬古風霜) ’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즐겨 쓰던 말로, 몰락한 양반 집안 늦동이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7살에 여의고 13살에 결혼해 겪은 세월은 이른 바, 만(萬)가지 괴로움과 고통, 궁핍으로 인한 찬바람 속에서 서리 맞으며 산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탄생과 성장 과정는 물론 득도하는 과정, 남원 은적암의 포교,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 등 동학농민혁명의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역사에 대해 잘 알고 동학에 대해 많이 공부한 사람들에게 만고풍상 겪은 최제우 선생의 일대기는 상식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비사다”면서 “이는 보통의 경우, 선생의 삶을 모르기 때문이다."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해석을 적절히 구사한 의미 있는 책이다”면서 “마모되고 없어지고 왜곡된 동학 천도교의 역사를 다시 복원시키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책이다”고 말했다.
한편 최제우는 남원 은적암서 머물며 동학사상의 이론화를 도모했다. 1861년 2월 경, 최제우는 은적암에서 ‘칼노래’ 즉 ‘검가’를 지었다.‘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패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 년의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대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 있네, 만고망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칼노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중에 혁명적인 노래의 핵심이다. 최제우가 은적암에서 숨어 지낸 8 개월이 남접(南接)의 시작이 됐다./이종근기자
출처-새전북신문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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