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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소설 수운 최제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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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경흥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343회   작성일Date 15-12-09 14:35

    본문

      올겨울도 추위가 닥치기 전에 휴강하기로 하고 내년엔 ‘명리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용담골짜기는 북향이라 겨울 추위가 매운 곳이다. 눈이 오면 잘 녹지도 않고 많이 오면 눈구덩이에 빠지며 넘어지며 곱은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다녀야한다. 기력이 떨어져 추위를 많이 타는 근암으로서는 가정리 집까지 다니기엔 무리어서 근년에 와서는 겨울엔 휴강을 길게 한다. 한씨부인이 무명을 짜던 윗목의 베틀 대신 세월이 덕지덕지 낀 책장이 다시 놓였고, 거기서 근암과 수운은 같이 기거하며 공부한다.

      수운은 신선으로부터 ‘무극대도 날 것일세’란 말을 들은 뒤 오나가나 ‘무극’에 마음이 쏠려있다. 그는 용담에서 가져온 책을 정리하다가 아버님이 필사해서 만든 몇 장에 불과한 얇은 책인 주렴계(周濂溪1017-1073)의 ‘태극도설’을 발견하고 집어낸다. 그는 ‘태극도설’이 ‘무극태극’의 해설이며, 신유학의 실마리가 된 책이란 말을 아버님으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불도의 ‘반야심경’처럼 ‘태극도설’도 백여자로 이뤄져 있다. 수운은 ‘태극도설’을 공부하기로 하고 한번 읽은 뒤에 주요 내용을 음미해간다.


      “무극이 태극이니(無極而太極)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太極動而生陽) 움직임이 극에 닿아 고요해지면(動極而靜) 고요함은 음을 낳고(靜而生陰) 고요함이 극에 닿으면 다시 움직이나니(靜極復動) 일동일정이 서로 뿌리가 되어(一動一靜互爲其根) 음 양으로 나뉘어 두 가지 꼴이 세워지도다(分陰分陽兩儀立焉)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陽變陰合而) 수 화 목 금 토가 생기어(生水火木金土)··· 만물이 태어나고 태나니 변화가 무궁화도다(萬物生生而變化無窮焉)··· 고로 성인은(故聖人) 천지 덕에 합하고(與天地合其德) 해와 달의 밝음에 합하고(日月合其明) 사계절 질서에 합하고(四時合其序) 귀신 길흉에 합하였네(鬼神合其吉凶)···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안다 했으니(故知死生之設) 위대하도다 역의 이치여!(大哉易也).”


      다음 장은 도본(圖本)이 그려져 있는데 ‘무극·태극-음양-오행-곤도성녀(坤道成女) 건도성남(乾道成男)-만물화생(萬物化生)’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시작인 ‘무극·태극’이 하나의 원으로 표시된 것은 둘은 하나라는 뜻이라 여겨지는데 끝인 ‘만물화생’도 똑같은 원으로 표시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어째든 ‘무극태극’이 만물로 <화생>한 거라는 글이 그의 마음을 환하게 한다. 서학의 무한자 천주가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것보다는 신유학의 무극태극이 만물로 화생했다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여겨져서이다. 창조론은 없는 공(空)에서 천주가 며칠 만에 천지만물을 이뤄냈다는 것이요, 화생론은 무극태극이 억 억년을 걸쳐 천지만물로 화생했다는 것이어서 더 타당성이 있어서이다.

      그래서 ‘무극태극’은 최초의 원인이 되고 ‘만물화생’은 최종의 결과가 되는데 왜 똑같은 원으로 표시한 것인가? 그 까닭을 골똘히 헤알려는51) 수운의 모습을 본 근암이 ‘태극도설’을 설명한다.

      “주렴계 선생이 ‘무극태극’과 ‘만물화생’을 같은 원으로 표시한 건 ‘무극태극’이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있기 때문에 둘을 매한가지로 봐서다. 주자께서도 이 같은 ‘태극도설’에 따라서 ‘하나의 물은 하나의 태극을 각기 갖췄다[一物各具一太極]’라고 하셨다. 그래서 퇴계 선생도 ‘성학십도’의 일도(一圖)인 ‘태극도설’에서 ‘만물일태극(萬物一太極)’ 즉 ‘만물은 일 태극을 갖춘다.’라고 하신 거다. 이 같은 주렴계 선생의 ‘무극태극’ 설에 의해 신유학인 도학은 발전한 거다.”

      그러면서 주렴계 선생은 오직 학문을 현인군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여기셨던 분임을 강조한다.

      수운은 아버님의 의중을 헤아리며 서가에서 도학 관한 책들을 추려낸다.

      그 중에서 근암이 필사한 ‘황극경세 격양집(皇極經世 擊壤集)’이라고 쓴 소옹(강절1011~1077) 글을 훑어본다. ‘황극경세’ 편에서 ‘사람 정신은 곧 천지 정신(人之神則天之神)’이란 글을 보고, 또한 ‘천지의 마음(天地之心)은 만물을 낳는 근본이다(生萬物之本).’라는 글도 본다. 그래서 소옹은 ‘마음’을 만유의 근본으로 보고 태극으로 봄을 안다.

      그는 다음에 장재(횡거1020~1077)의 ‘정몽(正蒙)’을 펼쳐 든다. 거기에 근암의 해설이 간략히 적힌 쪽지가 있다. <북송 협서에서 일어난 학을 ‘관학’이라하는데 중심인물이 장재다. 그들은 물질인 기를 태극·태허로 보고,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사실인 것, 실용인 것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우물을 파고 밭을 개간하고 관리하는 것 같은 실용을 연구하고 궁구하였다. 장재는 ‘태허즉기(太虛卽氣) 태허즉천(太虛卽天) 태허즉성(太虛卽性) 태허즉심(太虛卽心)’을 거론했지만 ‘태허즉기’가 주제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정몽’은 장재의 제자들이 편집한 것으로 그의 후학들이 경전처럼 여기고 공부했다.>는 의미의 글이다.

      그래서 수운은 ‘정몽’에서 ‘태허와 기’에 관심을 갖고 살펴본다. ‘태허와 기’는 곧 ‘무극태극’에 해당하므로 장재는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그는 장재가 기를 모이고 흩어지(取散)는 성품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을 본다. ‘태화’편에서 “태허는 기 없이는 능할 수 없으며, 기가 모이지 않으면 만물이 이뤄질 수 없으며, 만물이 흩어지지 않으면 태허가 이뤄질 수 없으며 이같이 들고 나는 순환, 이것은 다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다.[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爲萬物 萬物不能不散爲太虛 循是出入 是皆不得已而然也]”라고 한다. 이처럼 기의 모이고 흩어지는 끝없는 순환에 의해 이 우주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논리가 앞뒤 맞는다고 헤아려져서 마음에 든다. 모름지기 이 같은 기가 무극대도라 여겨진다.  

      수운은 다시 도학을 집대성한 주자(1130~1200)의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펼쳐들고 훑어간다. 주자는 ‘리·기’가 만유의 근본이지만 ‘움직이게 하는 리’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으므로 리(理)를 앞세운다. 그래서 ‘리는 기 앞에 있다[理在氣先]’라고 하면서 ‘리 이것이 근본[理是本]’이라는 논설을 펴나간다. 그래서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사계절을 순환시키는 것을 ‘리'라고 한다. 사단[仁義禮智]에서 나온 마음을 도심이라하고, ‘칠정[喜怒哀樂愛惡慾]’에서 나온 것을 인심이라고 한 것도 사단을 리로 보고 칠정을 기로 본데서 비롯한다. 아버님이 일러 주신 주자의 말씀이라고 하던 ‘일물각구일태극(一物各具一太極)’의 ‘태극’도 ‘리’에 해당한다. 이처럼 주자는 만사를 ‘리’로써 설명하려고 얼마나 치밀하게 공부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소옹은 을 무극으로, 장재는 를 무극으로, 주자는 를 무극태극으로 봤으므로 결국 무극태극은 ‘심·기·리’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의식이 들었다.  

      수운이 ‘무극태극’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걸 본 근암은 자신이 쓴 글을 내어 놓고 손가락으로 짚었는데 在 吾腔子裏 理氣虛靈(재 오강자리 리기허령)’이란 글이다. 근암이 말하기를 

      “‘내 몸 빈자리 속엔 리·기·허령이 있다.’라고 한 것은 나는 ‘무극태극’을 ‘리·기·허령’으로 보아서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태극을 <리·기·심>으로 보지 않고 <리·기·허령>으로 보셨다는 것은 소옹(1011∼1077)처럼 ‘마음’을 무극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본체인 ‘허령’을 무극태극으로 보셨다는 것이구나 여겨진다. 마음의 본체가 ‘허령’이므로 아버님처럼 무극태극을 ‘리·기·허령’으로 보는 게 더 옳다고 여긴다.

      ‘그런데 유한한 내 작은 몸속에 어떻게 무한한 무극이 들어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계속 든다. 그는 파란 하늘을 그리어본다. 하늘은 있는 것이며, 있는 것은 끝이 있을 것이며, 그래서 파란 하늘은 끝이 있을 것이며, 그 하늘 끝 너머 무한이 이어지는 무한대인데 그렇게 큰 무한대가 어찌 내 몸속에 있을까?’

      그런데 모든 것은 ‘음·양, 천·지, 남·여.’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으므로 의당 ‘무한대’가 있으면 ‘무한소’도 있을 거란 의식이 든다. <무한대>는 밖으로 무한히 가면 만나는 무한이요, <무한소>는 자기 몸을 구성하는 물질인 ‘火‧水‧木‧金‧土’의 원소를 넘어 가고, 음양을 넘어가면 마침내 만나는 거라고 여긴다. ‘무한대 무한’이나 ‘무한소 무한’이나 똑같은 ‘무한’을 공유하므로 둘은 같은 거라 여긴다. 이 같은 ‘무한소무한’을 품고 있는 것이 우주요 만물이요 티끌이다. 주자께서 <일물(一物)은 일태극(一太極)을 각기 갖췄다[一物各具一太極]>라고 한 것은 태극을 ‘무한소무한’으로 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몸 빈속 무한소무한에 리‧기‧허령이 있다.’는 아버님 말씀도 진실임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무한소무한인 ‘무극태극‧리기허령’이 ‘무극대도’란 의식이 든다. 그 짬에 홀연히 <무극대도는 내 몸속에 있다.>라는 깨달음이 캄캄한 밤하늘을 빗뚫고 지나가는 별동처럼 떨어져 들어온다. <무극대도가 몸속에 있다.>라는 환한 깨달음이야말로 만사를 꿸 꼬챙이가 될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든다.

      그 뒤 그는 <‘무극대도’인 ‘리기허령’은 내 몸속에 있다>라고 여긴다. 그럼 태초의 무극대도인 ‘리기허령’은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있었으므로 무극대도가 ‘본디의 나’라고 헤아려진다. 몸과 마음은 변하고 옮기는 것이어서 본디의 나가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오직 ‘본디의 나’는 무시무종하고 공공적적하며 영생불멸하는 내 몸속에 있는 무극대도뿐이라 여겨진다. 이 같은 ‘무극대도인 참나’를 ‘정체’로 삼아야 세상일에 휘둘리지 않고 초월해 살 수 있을 거란 의식이 든다. 이어서 나는 어머니의 자식, 아버지의 자식, 최씨가문의 자식이기 앞서서 무극대도의 자식이란 의식이 맘속으로 스며든다. 몸맘이 객체로 여겨지며 초연한 의식이 든다.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모든 걸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이 마음이 넓어지는 걸 느낀다.

      그러고 보니 사람으로 태어난 까닭이 무극대도인 리기허령에 달려있는 거였다. 그래서 리기허령의 뜻을 알면 사람으로 태어난 까닭도 알게 되리라 여겨진다. 그는 무한소이며 무극대도인 ‘리기허령’이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있는 까닭을 헤아려본다.

     

       51)헤알려는; 헤아려 알려는   

           15. 12. 9   길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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