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소설 수운 최제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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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은 집에서 조카들과 여동생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무극대도인 리기허령이 사람으로 태어난 까닭을 헤아려본다. 그런데 슬며시 리기허령이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있어야만 허령은 마음으로 화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란 의식이 든다. 뒤이어 ‘그럼 몸속 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이 뭘까?’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마음은 이유나 목적에 따라 움직이므로, 무극허령도 어떤 이유에 따라 사람 마음으로 화생했을 거라 여겨진 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거듭 헤아려본다. 무극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 그 이유가 뭘까?
그때 마침 세상에 파다하게 도술가로 이름난 9촌 삼촌인 최림(1779∼1841) 어른이 떠돌이생활을 거두고 고향인 하구리에 돌아오셨다는 말이 떠올랐다. ‘외와집(畏窩集)’이란 문집을 남긴 그도, 구미산 아래 하구리에서 태어날 때 산이 세 번 울었다는 이인이다. 그 역시 서자 출신으로 친척으로부터 따돌림 당해 주로 외지로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늙고 병들어 돌아왔다는 거다. 그는 고려의 명장이며 도술가였던 강감찬처럼 작달막했고 못생겼으나 학문이 깊고 음양술수에 밝았단다. 그래서 수운은 최림 삼촌에게 ‘무극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을 여쭤볼 속셈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병색이 깊었던 최림은 물음과 딴판인 상대방 마음을 움직이는 최면술을 가르쳐줬다. 그러나 수운은 남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도술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짓이라 여겨 실망하고 돌아왔다.
그 뒤 수운은 ‘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을 알려면 마음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주자·퇴계·율곡·송시열·노자·서경덕 등의 글에서 마음에 관한 글을 살펴본다. ‘주자’는 “사단 이것은 리의 발이요, 칠정 이것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했는데, ‘퇴계’에 와서는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기는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고 리는 그것을 탄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발전한 것을 본다. 그리고 율곡에 와서는 ‘기발이리승(氣發而理乘)’만 수용되고 나머지는 버려지는 것을 본다. 그래서 오랫동안 헤아려보니 기발(칠정)인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두렵고···.’ 하는 마음이, 리승(사단)인 ‘예의를 살피고 시비를 가리는 등’의 마음보다 앞서 발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수운은 마음을 ‘기발리승(氣發理乘)’ 구조로 본다.
수운이 19세가 되어 아버님 탈상을 하고 결혼 채비를 할 때, 신부 오라버니가 와서 한숨 섞어 하는 말이 아버님이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제환과 신부오라버니가 걱정하고 있으므로 수운은 그러면 계절만 바꿔 올 가을에 신부집 결혼식을 생략하고 신부를 데려와 여기서 결혼식을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래야 누이동생과 세조의 결혼도 차질이 지지 않을 거라고 한다. 수운의 말대로 해야 집안혼사가 꼬이지 않으므로 한가위 뒤인 10일째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가윗날이 지난 지 며칠 뒤였다. 수운이 용담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안마당에 말 한 필이 말뚝에 순히 묶여있었다. 털빛이 누르고 이마와 뺨엔 흰점이 있는 간자말이다. 제환이 수운을 보자 날 좀 보자고 해서 수운은 따라가 앉았다. 형님 옆에 활과 화살집이 놓였는데 거기엔 열 개 가까이 되는 화살이 들어있었다.
“너도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이 우리 칠대조가 되시는 걸 잘 알 거다. 그 어른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란 때 공을 세우셔서 임금께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맞먹는 정무(貞武1651)란 시호를 내리시고 경주 이조리에 ‘용산서원(1699)’을 지어 받들게 한 분이 아니냐. 그분 후예임을 우리는 긍지로 삼아왔다. 넌 정무공처럼 용기와 분별력이 뛰어나 무관으로 성공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말과 활을 마련해왔다. 대구 관덕장이 무관시험 보는 곳이니, 거기 가서 군관한테 자세한 건 알아보고 배우도록 하라”고 한다.
그런데 정무공의 뒷손으로의 긍지엔 속다툼이 숨겨있다. 그건 정무공 형님 되시는 진홍께서 아들이 없어 정무공 넷째 아들인 ‘동길’을 양자로 삼았고 그 뒷손이 국전·수기·경우·종하·최옥(근암)·제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례로는 봉사 벼슬을 한 진홍이 조상이 된다. 그래서 정무공 집안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종하 어른은 근암이 과시에 붙기를 바란 거였고, 그런 마음은 제환한테도 있어서 제선(수운)을 무과에 응시해 출세하기를 바란 거다.
그러나 수운은 오직 “무극허령이 사람의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된 거다. 그래서 세간을 나야하고 자립하려면 직업은 있어야하므로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서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제환은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 번 네 결혼식에도 말이 필요하므로 서둘러 구입한 거라 한다. 이제 엿새밖에 남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말 타는 연습을 하란다. 그리고 말에 오르고 타는 법을 가르쳐 줘서 그대로 하니 어렵잖게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튿날 점심을 먹은 뒤엔 경주 형산강까지 가서 지형을 살피고 왔다. 그 이튿날 세조도 타보고 싶어해서 뒤에 태우고 형산강 강변에 가서 번갈아 타며 재게 걷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는 서서히 뛰는 연습도 번갈아 해봤다. 신부 집에 갈 즈음 되어서는 몸이 말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쾌감을 느꼈다.
신부를 데려오기로 한 날, 형님이 배행하려는 것을 수운은 70여리나 되므로 형님도 저도 고생스러운 길이 될 뿐이라며 혼자 가겠단다. 그리고 진솔옷만으로 갈아입고 말에 올라탄다. 유곡동에 이르러보니 해가 아직 하늘중심에 떠있었다. 그가 말에서 내려 아이들에게 신부 집을 물으니 ‘신랑이 왔다.’고 소리치며 앞장서 냅다 뛰어간다. 좀 있다가 가정리 집에서 낯익힌 수더분한 암소상의 신부 오라버니가 나와 맞으며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반긴다. 수운은 신부 오라버니를 따라 마루에 올라가 신부 아버님 상청에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린다. 그리고 안방으로 길잡이 되어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다소곳이 앉은, 앞머리 가르마가 반듯한 송아지상의 아가씨와 눈이 마주친다. 마치 두더지가 땅굴을 뚫다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확 그네의 얼굴상이 뇌리에 각인 된다. 송아지 상에 앞니가 약간 바듬하고 반반한 이 아가씨가 한평생 운명을 같이할 짝이려니 여겨지자, 바야흐로 새로운 운명의 첫 장이 열린다는 실감이 든다. 아직 민얼굴의 이 아가씨와 함께 새끼줄을 꼬듯 함께 운명을 꼬아가야겠구나 하는 의식이 맘속으로 스며든다.
그 이튿날 수운은 어두운 꼭두새벽에 일어나 신부 오라버니와 함께 아침밥을 든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 신부는 가마에 타고,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 오라버니는 이부자리를 소에 싣고 혼행길에 따라나선다. 유곡동을 벗어나 태화강을 끼고 부지런히 경주 길을 가는데 차츰 신부를 태운 가마가 느즈러지기 시작한다. 신부 오라버니가 ‘날 저물기 앞서 다다라야하는데’라고 했지만 그때뿐 점차 더 느릿해진다. 수운이 보기에도 돈독이 들어 겉수작 꾸미며 몽니부리는58) 것이 눈꼴틀리어 말에서 내린 그는 처남에게 신부를 말에 태워가자 한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자 “만들면 법이지요.”라고 가로지르고, 수운은 뒤쳐져 쉬는 가마로 날파람 내며 다가가서 가마꾼들의 상판대기를 역적 눈이라고 놀림 당한 그 눈알로 꼬나보고 나서, 가마 문을 열고 신부한테 내리라고 손짓한다. 신부는 흔들리는 가마를 타고 오느라고 멀미해서 숫제 걸어가길 바라던 터라, 꼬기작거리며 가마에서 내린다. 수운은 가마에 엽전을 한 개 던져 놓고 신부를 데리고 단박에 말에 태우고 말고삐를 잡고 앞장서 곧장 간다. 가마꾼들은 엉겁결에 부닥뜨린 일이라 당황해하다가 따라나서며 신부 오라버니에게 잘못했다고 빈다. 하지만 신부도 다시 가마를 타느니 걸어가는 게 낫다고 버티어서 결국 빈 가마로 되돌아갔다. 마을 어귀에서 왕눈의 박대여가 혼행을 마중하려고 기다리다가 놀랜 얼굴로 사촌동생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 신부 오라버니는 꼬인 일들을 고대로 일러바치니 왕눈의 박대여는 종지만한 눈을 크게 뜨고 그렇다고 남우세스럽게59) 신부가 말을 타고 와서 쓰느냐고 동생을 나무란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결혼식 올리는 집답게 와글거리는 속에서 무탈하게 식을 치렀다. 하지만 ‘말 타고 온 신부’라고 혹은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쑥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58)몽리부리는: 심술 굳게 욕심 부리는
59)남우세스럽게: 남이 우습게 보게.
16. 1. 6.길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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