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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의 선구자 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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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하경숙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533회   작성일Date 16-02-01 14:27

    본문

             동학의 선구자 율곡의 이기론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정경홍님의 신관에 관한 첫회를 읽고 학식이 좁은 저로서는 그 느낌을
    체계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부족하여 범재신관에 관한 어느 교수님의 문장을 빌려봅니다.긴 문장이 될 것입니다.
    저의 댓글로 생각하시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어 발전하는 공부가 되도록 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존재의 원리"란 결국 소존재(being)에 대한 대존재(Being)란 없다는 원리이다.

    경험주의자들과 같이 경험적 대상으로서의 개별자가 궁극적이라는 원리가
    존재의 원리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대존재란 없다는 뜻이다.
    경험되는 사실존재 이외의 존재는 없다.
    전통 관념론에서는 '이성'이 항상 대존재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헤드는 '존재의 원리'를 요약하여,사실존재가 없으면 이성도 없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라는 말은 '대존재'의 대명사이다.
    사실존재가 神이라는 화이트 헤드의 주장은 이 존재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어기고 있는 주자를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관념론'자로
    규정하면서 주자는 이(理)의 우위성을 통해 봉건 지배 통치를 합리화 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여기서 이(理)란 무엇인가? 氣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언급해 두기로 한다.

    고대 유학에서 이(理)란 단지 '조리'나 '사리'정도의 뜻으로 일상행활 용어로 쓰였다.
    기 역시 유가 전통에서는 맹자의 호연지기 정도로 쓰였다.
    이와 기를 변증법적 대칭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신유학에서부터이다.
    정명도에 와서 '理로써 학문을 한다'할 정도로 이의 중시가 정이천에게
    와서 理에 대하여 氣를 대칭시키면서 소존재에 대한 대존재의 등장은 세계철학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理)를 드디어 기에 대하여 대개념정도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주자에게서 화이트헤드가 창조성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바로 소존재와 대존재의 이원론을 극복하자는 데 근본 이유가 있다.
    그리고 퇴계의 이기호발설은 언뜻 합리적인 것 같지만
    결국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理를 인성론에 적용시켰을 경우 서양의 펠라기우스의 사상과 같이
     악의 기원과 선의 기원이 따로 있는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퇴계는 사단과 선,그리고 본질지성은 理에서,악과 칠정 그리고 기질지성은 기에서 발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호발설은 결국 선악이 마치 따로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만약 퇴계가 호발설을 말할 때 상호 발하는 작용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즉 '하'의 작용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율곡의 기발일도설이란 다름 아닌 理氣가 서로 발하는 그 작용 자체를 '기'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율곡이 말하고 있는 氣는 이기를 넘어서는 그것을 포함하는 작용으로서의 기,즉
    메타-기라고 할 수 있다.
    메타-기는 이기를 포괄하면서 다시 이와 동반관계 속에 있는 그러한 기인 것이다.
    이러한 메타-기의 성격에서 보면 퇴계가 이기이원론을 말한 데 대하여 율곡이
    이기비일비이론(理氣非一非二論)을 말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
    理도 아니고 氣도 아니라는 것을 理에도 氣에도 소유권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작용 그 자체만으로서의 '하'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율곡의 '통논리'라고 할 수 있으며,이런 통논리는 한국의 주요 사상인
    "한"사상의 주요 논리이다.
    '통논리'란 전체가 부분을 포함하면서 다시 전체가 부분의 한 부분이 되는,
    음양 태극이 아닌 삼태극이 나타나 있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런 통논리는 멀리 원효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의 고유한 논리이며,
    수운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한의 통논리를 '하는님'에게까지 발전시킨 것이 수운의 동학사상이다.
    율곡은 아직 '한'의 통논리 자체에 머물고 있지만 수운은 이를 인격신
    '하는님'에게까지 연관시키고 있다.
    그래서 작용의 '하'의 통논리의 '한'과 인격신 '하는님'은 한국사상 즉 '한'사상의 삼대 요소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삼대요소가 어우러진 동학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사는 빅뱅 이후
    기나긴 진화를 해온 것이다.
    이 삼대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하고 있다면 '결여된 한'이다.
    인류사상사는 실로 이 삼자의 조화를 실현시키려는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지구 어느 구석에 삼자가 어우러진 사상이 있었단 말인가?


    여기서 율곡사상의 '존재의 원리'를 좀더 알아보자.
    理氣는 원래 한 물건이다.
    理氣는 서로 '혼잡하지도 않고','분리되지도 않고','변하지도 않으며','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율곡은 퇴계가 이와 기를 두 개의 실체인 것처럼 본 오류에 대하여
    이와 기는 하나이지만 그 작용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둘로 보인다고 했다.
    즉 이는 무형무위이고 기는 유형유위이다.
    작용에서 이기의 차이가 나는 것일 뿐 이기의 실체가 둘인 것은 아니다.
    즉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理는 무형인데 氣는 유형이므로 이는 통하고
        기는 局하며,理는 무위인데 기는 유위이므로
        氣가 발하면 理가 탄다.


    '形'으로 본다는 것은 명사로 본다는 뜻이고 '爲'로 본다는 것은
    동사로 본다는 뜻이다.
    명사로 보았을 때는 理는 무형 즉 형태가 없는 것이고 氣는 유형 즉
    형태가 있는 것이다.
    율곡의 말을 이어받아 수운도 "보이는 것 같으나 보이지 않고"라고 했다.
    理는 지기가 무형이면서 동시에 유형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명사 즉 실체인 양 보았을 때 물건이 무형으로 보이면 理이고 유형으로 보이면 氣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빛이 입자로도 보이고 파동으로도 보인다는 말과 같다.
    율곡의 이통기국론에서 理는 무형이기 때문에 어디에나 '통'하지 않는 데가 없다.
    理는 소유권이 없고 자체권만 있기 때문에 가지 않는 데가 없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氣는 유형이기 때문에 자기 소유권을 갖게 되어 사물에 국한 되어 버린다.
    '지기'에 대해 '今至"란 바로 어디에나 통하는 氣가 지금 여기에 국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율곡의 독창적인 '이통기국론'이 등장하게 되며,
    수운은 다시 '금지'를 '기접자'로 해석한다.
    화이트헤드는 영원대상이 결정되어 사실존재 속에 '진입'한다고 했으며
    수운은 이를 금지라고 했다.
    율곡의 이통기국론은 결국 한정성과 비한정성의 문제와 연관된다.

    理에 대하여 기는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 보편자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기는 동사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
    즉 기는 작동시키는 '힘'(Energy)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기의 특징이다.
    반면 理는 자체권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나 '통하는'특권을 가지고 있다.
    理를 '자체권의 특권'이라고 하자.
    理의 특기가 '통'이라면 동사로서의 기의 특권이란 '사물을 발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통'은 집합론적 특징을 지닌 말로서 두루 '통섭'해 포섭하는 의미이다.
    여기서 理論자와 氣論자는 이와기의 특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고 다툼을 벌일 것이다.
    이는 마치 빛을 입자로 보느냐 파동으로 보느냐의 논쟁에서 1920년 대 닐스 보아에 의해
    입자-파동이라는 상보성 이론으로 결론되듯이 결국 이기논쟁은 율곡이 물리학의
    보아와 같은 상보성 이론으로 공헌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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