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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제;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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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하경숙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180회   작성일Date 16-01-28 13:08

    본문

              무제;즉 일단 저의 생각들을 피력하는 글이 됩니다.

    곧 게재할 글은 어느 저서에서 발췌하여 올리는 글입니다.
    이 글을 게시하는 이유는 "감성"이라는 용어를 우리 한번 진지하게
    나누어 봤으면 하는 심정에서 입니다.
    제가 '감성'에 유독 관심을 표출하는 연유도 지금까지 접해본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한결같이 선천적이면서 기독교적 선악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듯한 어투와 행위에 있음을 발견해서입니다.
    특히 대신사께서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이유에 매혹되기도 했습니다.
    대신사님의 사상과철학을 접해본 분들이라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동학천도교인들에게서 그런 의식구조가 더 심하게
    보이는 것은 의아할 정도이네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기 감정을 호소하면 거의 대부분이 '왜 그러느냐,
    그러지 마라,그러면 안 되지,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마음을 비워라 비워야 한다는 식의 말들이 마구 남발되는
    현상들입니다.


    여기서 또한 의문이 생기더군요.
    경전 속의 '천주는 불택선악한다.'는 격구를 아직도 이해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불택선악한다는 격구는  결국 자기언급이라는데서 일상사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들을
    자기창조로 전환이 이루져야 함을 밝히는 격구임을 알게 되더군요.
    자기 감성을 잘 개발하면서 또 경전 속 "음양상균 만물화출 어기중.."의 의미를
    잘 파지하게 되면 기독교에서 발생된 선악의 문제와 인간의 자유문제는 그 자체가
    문제도 되지 않게 됩니다.
    거듭 말하자면 구색창연할 정도로 사람을 평가함에 선악을 기준으로 계속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 정신만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며 정신 진화가 아니라 퇴보하게 되는
    현상을 많이 봐 오게 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싶으시면 다음 게재할 글에서 스스로 잘 음미하면서 그
    의미를 자신 속에 담아보시길 권합니다.


                감성

    아기가 부모를 알아보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것이다.
    즉 감성에 호소하면 얼마든지 기연을 통해 불연의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감성은 이성과 감각을 종합한 것이다.
    이성은 좌뇌의 작용이라면 감정과 감각은 우뇌의 작용이다.
    그러나 감성은 좌우뇌를 종합 연관 시켜야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을 두고 이성적 동물이라고 할 때 그것이 곧 인간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3만 년부터 뇌 속의 신피질의 급작스런 발달과 함께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그 이전의 고피질과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피질과 신피질 사이에 불균형이 생겼다.
    신피질의 발달이 장점이 아니라 두 피질의 조화와 균형이 장점이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보다도 균열양상이 심각하다.
    양자의 불균형은 병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스인들의 신피질만에 의한
    합리적 사고는 곧 정신병의 시작이기도 하다.

    정상이란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한쪽의 불균형적인 발달보다는 양자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성과 감정의 균형이 잘 이루어진 '감성적'인간상의 등장이 요청되고 있다.
    감성을 통해 불연-무-초월의 세계와 기연-유-현상의 세계는 틈 없이 만나게 된다.
    (중략) 수운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알아보는 일상성에서 바로 이러한 감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감성을 개발하면 신비주의는 합리주의와 연관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감성을 개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신비적 세계를 말로
    형언할 수 없다고 탄식한다고 수운은 한탄하고 있다.
    즉 "왜 앎이 없다고 하는가,왜 앎이 없다고 하는가"하면서 말이다.
    이는 곧 수운의 서학에 대한 탄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탄식은 이원론에 대한 탄식이다.


    이성과 감정,정신과 물질을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킨 나머지 신비주의는 이성을 부정한다.
    이성과 같은 매체없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신과 같이 영원한 존재가 되며,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알게 되고,어디에나 있게 되고,모든 것과 같아진다"고 말한다.

    감각적인 육안,이성적인 심안,영적인 영안의 삼안이 있다.
    감성이란 삼안의 조화로 나타난다.
    수운이 초학자들에게 권한 <초학주문>은 "천주를 위히기 위해 나의 정을 돌아보라"고 했다.
    어떻게 천주와 인간의 감정을 연관시키고 있단 말인가?
    바로 여기서 플라톤이 '이성'을 자체권과(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자체권'이란 '지기'와
    일치시키면 좋겠습니다.^^) 과 소유권(지기가 화한 '천주') 사이의 매체라고 본 데 대하여
    수운은 그것을 인간의 '감성' 또는 '감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수운이 말한 '정'은 퇴계나 주자의 것이 아닌 율곡이 말한 마음의 근본 바탕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율곡의 '정'속에는 '이성'마저 포함된다.
    심지어 이성마저 거기서 연유하는 그러한 감정인 것이다.
    플라톤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감정을 일깨우는 시를 읽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플라톤은 생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쾌락과 고통 같은 감각적이고
    감정적이 것은 모두 영혼을 육체에 가두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육체의 모든 감각적인 것과 감정적인 데서
    해방되어 나와야 한다고 보았다.

    정으로 천주를 만나라는 말에 귀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이성의 소리를 들으라고 할 것인가?
    수운과 플라톤 가운데 누가 과연 우리 시대의 대안적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가?
    동학의 <본주문>속에 있는 지기 다음의 '금지'란 '지금 여기에'란 뜻이다.
    순수 자체권이 구체적인 소유권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 다음 '간절히 원하여 바라나니 영이시어 내리소서(원위대강)"라고 한 것은 더 구체화하여
    나에게 내리소서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체권이 소유를 원하는 주문이다.
    수운은 주문을 반복해 암송하도록 제자들에게 권했다.


    영혼은 생명 자체이고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육체이다.
    수운의 시대적 사명은 화랑정신에 나타난 감성교육의 부활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교 선비들이 금기시한 검무를 즐겼으며,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육체의 중요성 그리고 감정의 개발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잡힌 죄목 가운데는 그가 검무를 통해 역모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28년 동안 동굴 속의 기도와 산천을 주유하며 신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신비주의들과 같이 이성을 무시하는 초월의 세계만을 탐하지도 않았고,
    이성만을 수단으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알아보는 것,소가 주인을 알아보는 것,까마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것이었다.
    그의 자호가 복술->제우->수운으로 변하는 데서 그의 사상이 감정적인 데서 이성적인 데로,
    그리고 감성적인 데로 변하는 모습을 본다.
    누구나 감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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