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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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에서 감성으로
!!이 문장에서 우리가 가히 깨달을 수 없는 경지로만
알고 있을 신비의 세계를 저자는 '불연기연'의 세계를
우회적으로 풀면서 직간접적인 신비의 세계를 감성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를 감지하였기에 이에 저자의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자체권과 소유권은 주어-술어적인 '동음일의적'관계가 아니다.
반대로 발성음은 같으나 의미가 다른 '동음다의적'인 관계이다.
양자는 동음다의적 관계이므로 모호하며 복잡한 다양성을 창출해낸다.
즉 그려진 원과 그려지려는 '원'은 동음다의적이다.
'대상'과 '메타'는 동음다의적이다.
역설은 바로 이런 동음다의적인 현상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말과 실제의 사람은 동음다의적이지만 그 말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접근할 수 있다.
'지기'는 '허령창창'하지만 만물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다.
그리고 그는 '불연기연'에서 기연을 통해 불연을 알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심연의 깊은 곳에 잠겨 있는 존재자체는 기연의 나타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운은 플라톤과 달리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수운은 '이 세상 사람이여 어찌 앎이 없는고 어찌 앎이 없는고'(불연기연)라고 했다.
이 말은 어찌 존재자체의 심연의 세계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 묻는 것과 같다.
불연의 세계가 결코 안개 속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왜 신비의 세계를 모른다고 단정하는가?
어린아이가 부모를 알아보는 것을 보라,
소가 주인을 알아보는 것을 보라,
말 못하는 까마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보라,
이런 나타난 일들을 기연이라고 본다면 어린 아이가
부모를 알아보는 것,그리고 소가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구태여 이성을 통해서라고만 할 수 없다.
플라톤은 이성이 유일한 징검다리라고 생각했던 반면,
수운은 일상적인 감각을 배제하지 않는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감성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감각과 이성의 조화로 나타나는 것이 감성이다.
이런 점에서 감성을 중요시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동학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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