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속 한울님의 신관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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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 한울님의 신관은?
머리말
‘자유게시판’에서 <번호1587. 천도교신관을 말해본다>의 담암님의 글을 보고, <번호1600. 천도교신관에 대한 댓글>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범재신관보다 범천론이 동학적 신관이 아니겠는가란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담암은 <번호1604.길로정경흥님의 글을 보고>에서 복잡하다며 ‘범재신론’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번호1637. 교령의 사명, 천도교의 신관을 돌아보며>에서 김상일이 지은 ‘수운과 화이트헤드’를 인용해 ‘범재신론’을 동학의 신관으로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주요 글을 옮겨봅니다.
[수운의 인격신관 수용방법은 실학자들과 달랐다.‧‧‧범재신론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범재신론은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는 경우이다.‧‧‧한국의 김경재는 동학의 신관을 범재신론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상일은 천도교의 인내천신관은 “All is in god and god is in all"이라며 이러한 신 개념은 한국의 신관을 지닌다고 했다.].
여기서 인용된 김경재나 김상일은 한국신학대학 교수출신입니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계속 믿으라고 하는 건 혹세무민이라 여겨져 대안으로 범재신론을 제시했으나 기독교 내에서도 잘 수용되지 않아 따돌림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신을 자기취향에 맞게 인지하고 범재신론에 적용해 확산을 꾀한 거라 여겨집니다. 그들은 범재신관이 기독교신관이지만 다른 종교에도 통용될 만큼 포용적이라고 합니다. 전지전능한 단일극성적 신관에서 벗어나 포괄적인 양극성인 범재신관이어서라고 합니다. 즉 범재신관은 신의 무궁성도 인정하고 현재의 창조진화 과정에도 임재하는 신으로 인정해서 사실에 합하는 신이란 겁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궁극적 신은 인간이 알 수 없으므로(불가지론), 알 수 있는 현상계의 과정에서 신을 발견하고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재신론 학자들도 창조진화의 결과가 좋지 않은 결과도 있어 곤욕스러운 신이 되고 마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또한 범재신론의 신인 신의식(神意識)은 존재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해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의식’은 ‘깨어있는 의식’을 의미하는데 그런 신의식은, 과학인 ‘생리심리학’이나 철학인 ‘수반철학’에서 허무지설로 부정되고 있습니다. ‘의식’은 뇌에 수반되어서 형성되는 것이지 뇌 없이는 생성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단편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범재신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근본적인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어서 우리의 장점과 문제점도 함께 헤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또 문제점이 드러나면 수정하기를 거듭하다보면 끝내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동학적인 신관이 드러나리라 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고 제기해 주신 담암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문제는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문제에 무관심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여겨서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주신 담암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그럼 신관이 시대에 따라 수정되는 이유부터 알아봅니다.
1)신관의 형이상학화와 과학화
‘신관’이란 신에 대한 인식론입니다. 인류는 신을 어떻게 인식하며 수정해 왔는지를 봅니다. 우주와 지구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모를 때는, 신화적으로 말하기도 했듯이, 신관도 신화적으로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다신관과 일신관이 등장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복잡한 다신관보다 단출하고 합리적인 일신관을 선호해서 일신관이 승자가 됩니다. 이때의 유일신의 특징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의식을 갖춘 전지전능한 신이었습니다. 당시의 지적인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시원적(始原的)인 실재(實在)를 탈레스(BC6)는 ‘물’이라 하고, 아낙시만드로스(BC6전반)는 ‘무한’이라 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하였습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존재론(형이상학)이라 하면서 제일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존재론을 중세에 이르러서야 신부인 안셀무스(1033∼1109)는 ‘대어록(對語錄)’에서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 무한이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더는 신화적인 신을 고집할 수 없어서 합리적인 존재론(형이상학)에 대입해 신을 인식하게 된 겁니다. 그 뒤, 지적인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이 옳음을 안 갈릴레이(1564~1642)와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톤(1642~1727) 등에 의해 자연과학이 발전합니다. 이 같은 과학적 지식을 갖춘 스피노자(1632-1677)는 ‘윤리학’에서 ‘신의 속성이 우주자연으로 화생한 거’라는 논리를 남기고 환원하는데, 이를 뒤에 사람들이 스피노자의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그 뒤 수리과학이 발전하여 보어에 의해 1910년에 양자학이 회자되고 1927년에는 하이젠 베르크가 ‘움직임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없다’는 ‘불확정적 원리’가 발표됩니다. 이 같은 양자역학지식을 갖춘 영국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철학자인 화이트헤드(1861~1947)는 1924년 미국대학서 강의한 책 ‘종교란 무엇인가’(문창옥역 87쪽)에서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서 복잡한 상호연관들을 발견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상호연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이 ‘과정철학(유기철학‧신형이상학)입니다. 그가 영국에서 1923년 63세에 정년퇴임하자 미국하버드대에서 철학교수로 초빙하여 거기서 새로운 형이상학인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을 강의하게 되어서 나오게 된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시원자의 실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시원자의 작용에 해당하는 그 과정을 논합니다. 화이트헤드는 궁극적 실재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피해 간 겁니다. 그의 제자인 미국 철학자‧신학자인 하트숀(1897-2000?)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이 너무 복잡해서 자기대로 정리해 ‘범재신론’이라 하고 신의 5가지 특징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신관은 ‘형이상학화하고 과학화하면서 수정되어 온 것’입니다.
이처럼 동학의 신관도 변화를 겪게 되는 걸 보게 됩니다. 한울님은 ‘몸속에 있다’에서 ‘마음속에 있다’라고 하기도 하고, 야뢰(이돈화1884~1950)는 초기에 동학의 신관을 ‘범신론’이라고 하다가 말년(1947년)에는 ‘인내천신’을 거론합니다. 그 뒤 한국신학대학 교수 김경재는 ‘최동희(1925∼2014)‧신일철(1931∼2009)이 주관해 만든 ‘한국사상 12권(1974년) 45쪽’에 ’수운의 신 개념‘이란 글에서 하트숀의 범재신관의 5가지 특징인 “1)신은 자의적이다. 2)신은 세계를 알고 있다. 3)신은 세계 속에 내재해 있다. 4)신은 영원하다. 5)신은 시간적이다.”를 인용 비교하며 동학의 신은 범재신론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한신대 김상일이 지은 ‘수운과 화이트’(2001년간)와, 한신대 이찬수가 지은 ‘‧‧‧이제는 범재신론이다’(2014년간)가 나오면서 동학의 신은 ‘범재신관’이란 말이 자주 회자되게 되었습니다.
‘범재신론’은 전지전능한 신화적 신에서 벗어나 불확정적 양자력학을 통해 새로운 과정적 형이상학을 정립해서 이에 대입해 신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도 물리학의 일부현상이요, 신형이상학(과정철학)도 형이상학의 일부이므로 이로써 풀어낸 범재신론도 신관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어서 보편성을 상실한 신관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모호해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보편적 합리성도 상실해서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신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편적인 과학과 형이상학에 대입해 신을 정립해야 실재하는 합리적인 신이 나오리라고 봅니다. 그럼 먼저 ‘동양의 형이상학’부터 팍 줄여서 보도록 합니다.
2. 동양의 형이상학
형이상학은 동양이 더 합리적으로 발전한 걸 보게 됩니다. 우주관을 피력한 주역은 ‘복희·문왕·공자(BC552~BC479)’에 의해 이뤄진 거라고 합니다. 주역 우주관은 공자가 지은 것으로 보는 ‘괘사전’에 잘 나타납니다. 여기에 ‘주역은 태극에 있다. 이것이 음양을 낳고(易有太極 是生兩儀)···.’라는 글이 나옵니다. 이 같은 태극은 질서 지향성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음양변역에 의해 ‘밤낮․ 춘하추동’이 질서 있게 순환한다고 봅니다. 이 같은 태극을 주렴계(周濂溪1017-1073)는 ‘태극도설’에서 무극으로 봅니다. 그리고 무극태극이 만물을 이루고 만물 속에 있다고 봅니다. 또한 소옹 강절(1011~1077)은 ‘황극경세’에서 ‘사람 정신은 곧 천의 정신(人之神則天之神)’이라면서 이 정신을 무극태극으로 봅니다. 장재 횡거(1020~1077)는 ‘정몽(正蒙)’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 태허즉천(太虛卽天) 등을 거론하면서 ‘무극태극’을 ‘氣’로 봅니다. 주자(1130~1200)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리는 기 앞에 있다(理在氣先)’면서 무극태극을 ‘理’로 봅니다. 이처럼 ‘무극태극’을 ‘심‧ 기‧ 리’로 봅니다. 그리고 주자 등은 ‘심(心)’의 본질을 ‘허령(虛靈)’으로 봅니다. 또한 주자(1130~1200)는 주렴계를 따라 ‘태극도설해’에서 ‘일 물은 일 태극을 각기 갖추고 있다(一物各具一太極)’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운의 아버님이신 근암 최옥(1762~1840)은 `근암집`에서
“내 몸 빈곳 속에는 리기허령이 있네(在吾腔子裏 理氣虛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근암 최옥에 이르러서는 ‘리‧기‧심(허령)’이 몸빈곳속에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동양의 형이상학은 시원자가 물질로 화생하고 물질 속에 있는 거라고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 이른 겁니다. 그래서 동양의 형이상학인 태극은 안쪽원인자가 됩니다. 이같은 논리는 과학과 상호보완 관계를 맺는 걸 보게 됩니다.
또한 동양의 형이상학은 2,600년 이상을 사유해 오면서 ‘심‧기‧리’로써 도덕을 세워 온 겁니다. ‘주자’의 도덕관을 보면, “사단 이것은 리의 발이요, 칠정 이것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을 ‘사단‧ 칠정’으로 나누고 사단(仁義禮智)을 따르는 걸 도심(道心)이라 하고 칠정(喜怒哀懼愛惡慾)을 따르는 걸 인심(人心)이라 하며 도심을 키우는 걸 도덕으로 봅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기는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고 리는 그것을 탄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발전시키는 걸 봅니다. 동양의 신유학인 형이상학도 도덕을 세우려는 도덕 지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위에서 본 것처럼 ‘무극태극이 음양오행으로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체‧용’ 중에서 ‘체’를 중시하는 형이상학입니다. 그래서 무극태극은 체가 되고 용이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범재신관’처럼 체와 용으로 분리해서 용[過程] 위주의 논리를 펴지 않습니다.
이처럼 동양의 형이상학은 안쪽원인자가 되고, 도덕을 세우고, 체를 중시해 온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형이상학이 동학의 형이상학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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