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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회;신의 감박감박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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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하경숙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73회   작성일Date 16-02-09 08:29

    본문

              2회;신의 감박감박거림

    신라 최초의 국영가람은 흥륜사인데 거기에 봉안된 부처는 '미륵'이었으며,
    진흥왕 같은 경우는 만년에 삭발염의하고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임을 자처했다.
    여기서 불교의 역할이 한국에서 가부장적 천강신수(天降神授)의 왕권을
    수립하는 데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불교신앙이 한국고대의 인격신 '하나님'신앙과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그 관계가 매우 궁금하다.
    <삼국유사>의 '천사옥대'(天賜玉帶)조에 보면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하느님으로부터 옥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가 즉위한 첫해에 천사가 대궐 마당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를 시켜
    옥대를 전해주게 하였노라'하니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받았다고 했다.

    임금이 대제석궁을 지었다고 했는데 그 하느님은 '제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하나님이 불교의 제석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인드라'가 '하느님'과 접합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이 제석으로부터 옥대를 받는다는 얘기를 불교에서는 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삼개를 받는 장면과 같다.
    한국의 하느님은 불교의 제석과 달리 그 객관적 타자성이 더 분명하고 더 인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초월신이 모세에게 십계명의 석판을 내려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불교의 제석에서는 불분명한데 한국의 하느님의 경우에서는 유대교-기독교의
    전통과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제석이 있는 33천(욕계 제2천)에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그래서 왕은 경주 낭산의 남쪽에 묻힌다.
    제30대 문무왕은 동해 호국룡이 되겠다고 하여 물속에 묻힌다.
    삼국통일 이후 제31대 신문왕은 동해 호국룡이 된 문무왕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피리를 받는다.
    검은 옥대는 통일 대업의 성취를,피리는 새 시대를 소리로 다스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피리는 환웅의 삼부인 세 개 가운데 방울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의 인드라 신은 한국의 고대 '하느님'과 자연스럽게 접하여 만나게 된다.
    유대교 역사에서 양자의 단절과는 매우 다르다.
    브라흐만 보다는 인드라가 더 우리 민족의 심성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이 불교의 절대무 사상이 된다.

    브라흐만은 아트만과 같아져 '브라흐만' 즉 '아트만'이라는 범아일체 사상으로 발전한다.
    인드라는 초월적 타자로서 남게 되어 아마도 후자가 우리의 성격에 잘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사실은 인드라와 하느님 은 같을 수 없는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드라는 '천둥'을 상징하며 하늘의 남성신이다.
    인드라는 땅의 브라트라란 태모신을 죽이고 등장한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는 균열과 함께 등장한다.
    이를 '인드라 균열'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제석환인은 그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인드라가 땅의 태모 브라트라를 살해하는데,한국에서는 같은 인드라가
    제석환인이 되어 그의 아들과 땅의 태모 웅녀를 결혼하게 한다.

    제석은 인간과 상호보조적 관계에 있다.
    심지어는 제석의 존망 여부가 인간이 짓는 선악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만큼 제석의
    존재는 인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인격신이 뚜렷한 제석을 고려 태조 왕건은 충분히 활용한다.
    그는 제석의 힘을 빌려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여진족,왜 그리고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도
    고려는 제석의 힘을 빌려서 이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려의 제석제는 바로 몽고의 병란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인들은 제석으로부터 극락왕생 같은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제석을 이땅에 강림시켜 국난을 타개해 보려는 데 줄기찬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그 일환으로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제석을 이땅에 내려오게 하려는 '연성법회'같은 것은 구체적인 의례행사라고 할 수 있다.
    전래 하느님에는 화상이 없는데 제석의 경우는 제석화상까지 만들었다.
    <고려사>에 따르면,제석화상을 관음보살상과 같이 그려 전국 사찰에 나누어 주어 섬기게 했다.
    고려시대에 와서 인격신 제석환인과 불교의 만남을 구체화했다.
    법신과 보신의 자연스런 만남이다.
    이런 인격신에 대한 신앙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8장에서 "태자를 하늘에 고르샤"라고 했고,
    세조는 <월인석보>에서 "천자는 하늘 아들이시니"라고 했다.
    조선시대 중엽 박인로는 그의 <태평사>에서 "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나니 하나님아"라 했다.
    심지어 불교승인 서산대사마저 <회심록>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나님전 비나이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전통 속에는 이런 인격 신관이 면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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