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감박감박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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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의 감박감박거림
다음에 올릴 글은 우리 고유 신명칭인 '하느님' '하나님'의 변천
과정을 눈여겨 봄도 역사 찾기에 주요 골자인 것 같아 발췌하여
게시해 봅니다.이 단원은 긴 문장이라 3회로 분별하여 올려볼 생각입니다.
神 개념의 발전은 정치,사회적 발전과 병행한다.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4세기 무렵이다.
그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다.
삼국 모두가 부족연맹에서 겨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빕권적 정치구조를 가질 수 없었다.
부족들은 부족들 나름대로의 신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들 신은 모두 화신-무교적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왕들은 이들 무교로 무장된 부족을 지배할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했다.
이들 무교적 신관은 모계 농경사회로부터 물러받은 것이다.
하늘에서 남성신의 아들로 자처하던 고구려의 주몽,신라의
박혁거세,가야의 김수로 등은 아직 태모를 제압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한 항태였다.
주몽의 '주'는 '붉을 주'(朱)이므로 태양을 상징하며,
'혁거세'역시 빛의 광채를 의미한다.
김수로는 하늘에서 직접 구지봉에 내려 왔다고 했다.
이들 제왕들은 모두 한결 같이 하늘의 아들임을 자처한다.
삼국초기 부족국가들의 지도자들은 '태모'를 숭배하고,
신흥 제왕들은 태양의 아들 또는 하늘의 아들임을 자처한다.
여기서 남녀 神의 맴돌이 교체현상이 나타난다.
여신은 '감','검','곰'이며 남신은 '밝'이다.
(하단주;'김'씨의 유래는 곰,검계와 관련된다.
'밝'은 '朴','白','解'와 같이 한자로 전음되어 왕들의 이름과 성이 된다.))
그래서 맴돌이란 '감박감박거림'을 의미한다.
태모를 중심으로 한 무교적 정치세력이 남아 있는 삼국 초기의 왕권은
극히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족과의 정치적 타협을 모색한 '화백'같은 제도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런 때에 불교가 삼국에 유입되었다는 것은 종교적 의미는
물론이고 정치적 의미도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연히 무교를 지켜온 토속 귀족들은 불교를 반격할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왕실은 적극적으로 수용할 자세를 견지했다.
한판 큰 싸움이 벌어질 전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왕들은 토속귀족들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위해서는 불교라는 이데올로기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왕과 토속귀족들 사이의 한판 싸움에서 순교한 인물이 이차돈이었다.
이차돈의 목에서 피가 아닌 흰 젖이 나왔다는 것은 무교적 신앙을 가진
귀족계급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신호가 되었다.
이차돈의 죽음에 설득당한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무교를 꺽을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능가하는 사상이 불교 속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무교는 다산(多産)의 물질적 이익을 추구한다면,불교는 정신적 자비를 추구한다.
두 이데올로기는 각축을 벌이게 된다.
하나가 인격신에 의존한다면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 절대무에 의존한다.
절대적인 왕권을 수립하는 데 불교의 업설은 매우 적절했다.
아무튼 불교의 제석천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인간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여러 권속의 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으뜸이 '사천왕천'이다.
제석은 직접 인간세계로 내려가는 대신 사천왕천을 보낸다.
이는 마치 환인이 환웅을 땅으로 내려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는 사천왕천이 인간이 된다는 얘기는 없다.
다음으로 업설은 인도에서 바라문 계급의 종성론(種性論)을 부정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업설의 전륜성왕(轉輪聖王)개념은 왕권수립에 지대한 도움을 준다.
정법으로 선정을 베푸는 전륜성왕이 나타나면 평화롭게 천하가 통일되고,
미륵과 같은 부처님도 그런 왕이 다스리는 세계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업설에서 나온 미륵신앙은 삼국 초기의 왕권확립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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