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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한통일개벽단’을 설립하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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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담암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01회   작성일Date 16-02-24 23:50

    본문

     ‘한통일개벽단’을 설립하게 되었는가? 

     

      평화통일신문 발행인 고순계 동덕께서 이 민감한 시기에 전 천도교 교령을 지낸 오익제 교령의 방북관련 동영상을 올렸다(게시판: 1859). 그러나 오 교령의 방북사실이 동영상의 내용대로라면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본인의 통일관을 통해 피력해보고자 한다. 또 경암 황숙 동덕께서 ‘한통일개벽단’이 출범하게 된 배경을 교령선거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였다(게시판: 1857). 최근에는 도생이 교령선거운동에 바빠 본 게시판을 자주 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지금 보게 되어 두서없이 본인의 생각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우선 남북관계가 경색된 시기에 이런 동영상을 소개하는 것은 냉전논리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한반도에서는 보수세력으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목소리마저 오해를 받게 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현 교령께서 역대 교령 가운데 가장 많이 북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느 언론에서인가 15번인가 북을 왕래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도 상황논리에 따라서는 오해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경암장께서 ‘한통일개벽단’이 평소에 설립 운영되지 못하고 교령선거에 즈음해서 이러한 조직이 결성되게 된 영문을 물었다. 선거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인 것 같은데 이 부분도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설명해보고자 한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 개벽단의 아이디어는 심오암의 구상이다. 설립취지를 정암장의 글에 대해 황문식 동덕이 댓글을 올렸는데(게시판: 1852) 이 정도면 이미 설립배경이 설명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본인의 통일관은 ‘교령출마의 변’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천도교 수첩에 나와 있는 약 700명에 해당하는 전국의 천도교 교인들에게 편지로 수차례 보낸 바 있고, 또 주소가 없는 경우에는 이메일로 도생의 ‘통일교령’의 의사를 중복하여 소개한 바 있다.

    첫 편지라고 할 수 있는 연하장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불과 3개월 전에 신암장 김철 전 교령님으로부터 교령에 나와도 좋다는 동의를 받고 교령에 나오게 된 것이다. 역대 교령 가운데 인내천(人乃天)에 기초한 평화통일의 철학을 교정쌍전(敎政雙全)으로 하여 천도교 청우당을 재건하여 통일운동을 하고자 일로매진한 이만한 분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해방정국에서 남북협상에 참석한 바 있는 진성당 허경일 도정님이 ‘통일교령’이 되라는 평소의 격려도 교령출마에 큰 힘이 되었다.

       지난 시간을 회고해보면 본인은 계대 교인이 아니고 대학시절에 입교하여 반세기에 가까운 긴 세월을 오관실행을 하며 오늘 천도교 교령에 나올 수 있게 되기까지 과거를 회고해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은 교단의 주요직책을 맡고있는 분이 한 때는 본인더러 천도교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최덕신 교령 재직시 입교하여 활동하던 청년들이 거의 천도교단을 떠났는데 아직도 천도교에 남아있느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저를 오늘까지 천도교인으로 남아있도록 해주신 분이 바로 신암장과 진성당인 것이다. 그들은 평소 많은 사람들이 평화통일을 얘기하지만 천도교인만이 확고부동한 평화통일관을 가지고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실상은 평화통일을 말하면서도 북한붕괴론의 흡수통일이거나 반공통일이라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통일철학을 가지고 남ㆍ북의 정치이데올로기의 특징을 이중구동(異中求同)의 정신으로 종합 지양하여 대화와 타협으로 제3의 평화통일을 표방해가야 하는데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수명포(受命包)의 종로 교구의 매 시일은 바로 이와 같은 대학 강의를 비롯하여 일반 시중에서는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하는 천도교의 평화통일 강연을 오랜 세월을 두고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천도교의 통일논리는 6ㆍ25 동란을 거친 한국 사회에서는 전쟁의 피해의식으로 하여 선진국에서처럼 좌ㆍ우이념이 학문적으로 제대로 수렴되지 못하고,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한 정치이념마저 우적(友敵)개념의 논리로 왜곡되어 인신공격도 마다하지않는 무의미한 사상논쟁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작금의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안보와 국방이 우선시되는 정국에서는 평화와 외교가 더욱 더 제대로 평가받기가 힘든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 노선은 냉전논리로 좌ㆍ우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실정이다. 민족사상을 두고 좌에서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 우에서는 친북 좌경이념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자들은 백범, 몽양을 비롯 좌ㆍ우를 막론하고 비명에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남ㆍ북이 모두 단군의 후예인 천손민족이므로 더 이상의 살상과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동학의 통일방안 말고는 과연 이 한반도에서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천도교 이념의 통일방안 말고는 다른 통일방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본인의 주장에 대해 의견이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대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그래서 본인은 바로 이런 문제에 해답하는 교정일치의 ‘통일교령’이 되기 위해서 교령에 출마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우선 병신년 연초에 보낸 연하장 내용을 첨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회가 되면 좀 더 길게 설명한 ‘교령출마의 변’ 등의 자료도 소개할 용의가 있다.

       지금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버니 샌더스 후보를 보라.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독일의 평화통일도 배경에는 브란트 총리가 주도한 사회당의 동방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한국의 경우 소앙 조용은의 삼균주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정국에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돌아와서 남·북(미·쏘)의 대결국면을 직감하고 곧바로 한독당을 탈당하고 사회당을 결성하여 성북구에서 유석을 꺾고 전국 최고의 득점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례가 있지 않은가? 만일 그해 6ㆍ25로 납북만 되지 않았다면 도생이 추진하였으면 하는 통일방안의 구상이 소앙선생을 통해 이미 실현될 수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국내외의 평화통일의 정치적 사례를 보면서 통일을 외세에 의존하여 시도하고 있는 현정권을 보면서 새삼 본인의 교령출마의 대의명분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외세에 의존하여 과연 평화통일이 이루어진 경우가 있는지 당국자에게 묻고 싶다. 지금 국회에서는 테러방지법 논의를 두고 밤을 세우며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방해, 무제한 토론)가 진행 중에 있다.

       자세한 본인의 통일구상은 평소 각종 유인물에서 밝히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전국에서 본인의 편지를 보고 이 시대의 천도교령의 역할은 바로 통일교령이 나오는 것이라며 편지와 격려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 민족통일야말로 ‘동학혁명의 계승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개벽단’이 설립되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교령선거 운동을 시작하면서 평소 천도교 게시판에 의(義)로운 글을 올리는 동덕들을 만나 보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동덕들이 심오암, 경암, 송암 같은 천도교인들인 것이다. 평소에 꼭 그들의 삶을 현장을 찾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란 것은 평소 글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이미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천도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 참으로 이들 동지, 동덕들을 늦게라도 알게 되어 가슴 뿌듯하게 여기고 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교자, 애국자들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들을 대하면서 간디가 남긴 “한번의 기도보다 한번의 행동으로 단 한사람에게라도 기쁨을 주는 일이 훨씬 낫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현실은 이들의 평소 천도교단에 개진한 개혁방안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화를 해본 결과 본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이들과 의기투합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급기야는 심오암이 중심이 되어 ‘한개벽당’이 창립되게 된 것이다. 본인의 교령선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본인의 교령출마와 더불어 이렇게 제기된 현안들이 후보들의 선거공약이나 구호로 반영되어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령선거와는 관계없이 이번 기회에 이런 조직을 만들어 그들 뜻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이런 기회를 활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본인이 본 기구의 대표로 추대된 것에 대해 지금도 당혹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인이 교령이 되면 그들의 천도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제기한 과제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해결해갔으면 한다. 설사 다른 분이 교령이 되더라도 ‘한개벽당’의 설립취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새 교령의 리더십으로 교단을 새롭게 정비하여 교인들의 개혁적인 목소리들을 더 이상 치지도외(置之度外) 되지 않도록 하였으면 한다. 서소문역사공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1년여의 긴 세월동안 교인들이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였으면 교령이 나서서 어떤 형태로던 결론(해결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오늘에 이르러 여러 언론을 통해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 심기일전하여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인재들을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천도교단을 쇄신하는 그야말로 ‘다시 개벽’을 실천해가는 계기를 마련해갔으면 좋겠다.

                                                                    

                                                                                                                     2016. 2. 24

                                                                                                                담암 노 태 구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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