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자치론과 제2차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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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차 자치론과 제2차 분열
1931년 7월 2일 지린성 장춘현 만보산 지역의 관개수로 공사를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농민 사이에 분쟁이 발
생한 이른바 “만보산 사건” 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의 이간을 꾀
하는 일제의 치밀한 술책으로 빚어진 것으로 일제는 이를 대륙 침탈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어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중국 만주에서 류타오거우 사건을 획책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에는 러일전쟁
의 결과로 일본이 획득한 특수 권익이 있었으나 중국의 국권 회복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소련이 1928년부
터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의 진척등이 관동군을 자극하여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 전역을 점거할 계획을 모의 하였다. 이들은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 외곽의 류타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만철 연선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 행동을 개시
하여다. 일본군은 1932년 초까지 거의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일본의 괴리국가인 만주국
의 성립을 선포하여 만주를 대륙침략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었다. 국제연맹은 중국의 제소에 다라 리턴 조
사단을 파견하고 그 조사 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 하였으나 리허성을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
하고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하였다. 으를 계기로 일본 정국은 정당내각에 종지부를 찍고 파시즘 체제
로 전환 하였으며, 이러한 침략 행위는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우
리나라에서는 1929년 8월 사이토 총독 부임 이후 천도교의 신파와 동아일보계가 중심이 되어 총독부의 시책
에 주목 하면서 자치제 실시에 대비하였으며 신간회 내부에서도 자치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움직
임이 대두되었다. 1930년 12월 구파와 합동을 이끌어낸 최린은 신간회 해소가 결정되자 1931년 5월 동경으
로 건너가 일본 정계를 상대로 자치청원 운동을 전개 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신파 교인
들에게 “自重淨觀”을 지시하면서 자치운동을 사실상 중단하고 말았다.*
*金璟載,“興亡岐路에 선 천도교”, “三千里” 제6권 제7호 1934.06.01. <그는 천도교의 두령을 모아 놓고 동경행의 필요성을 말하였으니 “나는 동
경에 가서 유수한 정치가를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요구하겠다. 조선의 산업을 조선사람 본위로, 조선의 교육을 조선사람 본위로, 미간지를
마음대로 개척토록 할 것” 그리고는 1931년 5월에 동경으로 갔다. 전 신파 교중은 여비 조달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동행은 敎衆의 기대에 副하
기 위함이었다기보다 차라리 휴게하기 위하여 동경으로 갔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그가 동경으로 대판으로 경도로 우왕 좌왕 하면서 유연
히 그곳의 풍경을 點看 하던 동안 때마침 9월 18일부터 시작된 만주사변을 보게되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12월에 경성에 돌아 왔다. 12월 24
일 인일기념일에 敎衆 은 또다시 “우리 先生님” 고견을 奉廳코저 모여 들었다. 이에 두가지 표어가 나왓으니 그 하나는 “ 自重靜觀하라”는 것이
요. 다른 하나는 “생사초월 하라”는 것이 였다. 이 두가지 표어 밑에 숨어서 또다시 어느 기간까지 눈을 감고 참선을 시작하여 바야흐로 禪 三味
에 깊이 들어거려 하였다. 그러나 咸南을 비롯하여 천도교의 청년중에는 최린崔麟씨 태도에 반항하려는 경향이 점차로 농후 하여짐을 간파한 그
는 桂洞에다가 13.000원의 대건물을 사들이고 第2夫人의 명의로 소유등기를 내기까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1932년 4월 천도교는 다시 신구파가 분열 하였다. 1931년 8월 12일에 개포된 사관원의 결
정으로 지금까지 주었던 堂號는 褒賞으로 하고 박인호가 주는 婦人齎號는 道號로 하기로 하였다. 이에따라
교주 박인호는 1931년 8월 19일 궁정동 자택으로 중앙종리원 대령 이하 각 관장을 모이게 한 후 청수를 봉전
하고 심고를 마친 후 定水月執義春의 법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몇칠일후 대령 정광조와 부대령 최준모는
박인호에게 “성사시에도 법문이나 법시를 기관에서 선포하지않고 성사께서 친히 선포 하였으니 금번 법문
도 춘암 선생게서 친히 선포하는 것이 정중하다”고 하여 직접 법문을 반포하기를 품고 하였다. 이에 박인호
는 “주기는 내가 주되 일반 두목에게 고루 알리라” 고 하여 대령사에서 일반교인에게 선포 하도록 하였다.*
* 포덕 51년 6월에 손병희께서 聽啞語를 아는가, 天胞肉身. 性抱天地를 아는가, 聞水聲不見水知水源不見流를 아는가 하고 물으셨다. 내가 아
무리 둔하지만은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이 법문은 내가 자신에서 出한 것이 아니요. 天師의 靈感으로 出함이니 대령
사에서 정식으로 일반 도인에게 선포 하라.“ 하시다.( 吾敎2二十五年間 歷史略抄) 천도교월회보 제 256호 1932.5.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파는 법문에 반대 하면서 내부적으로 대립을 야기하여 분열을 시도 한 것이다. 1932년
1월20일 신파 측은 신도관정 최석련은 대령 정광조와 부대령 최준모에게 빅인호의 법통을 부인하면서 정수
월집의춘의 법문과 부인재호 도호출첩에 대하여 횡설수설을 하였다. 그러자 장광조는 “의아 있는 사람에게
의아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는가?” 하였고 최준모는 “춘암 교주의 법통을 지금 논하자는 바가 아니요 이미
의암성사께서 정하여준 선수문이 있고 또한 의암성사 생존 시에 16년간이나 도일기념일을 보지 않았는가?
도호와 재호는 의암성사께서 용호장을 상아에 새겨 춘암교주에게 전수하여 앞으로 도첩을 줄 때 日後道號出
帖을 쓰라고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2월3일 최린은 부대령 최준모와 감사관정 김재계에게 전날 최석련의 말
과 똑같이 “교회가 일 것 같으면 재분열 해야 하겠다”고 말을 하였다. 그후 3월 7일 총부 간담회에서 대령 정
광조는 박인호의 법문과 도호 재호 문제로 금번 대회에서 건의안이 상정될것이니 미리 대책을 강구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19일 고문회의가 개최된 날짜까지도 아무런 해결책은 없었다. 결국 3월 31일 개최된 사관 회
의에서 정광조는 교회를 분열 하자고 선언하였다. 이대 김재계는 “당초 합동도 당신내 주장이요 지금의 분열
도 또한 당신네의 주장이니 우리로서는 다만 응할뿐이요”라고 말하자, 이에 정광조는 “교회에 주객이 없으
니 누구는 주동이요 누구는 피동이라 할수 없다”고 하였다. 성도관정 오상준이 분열의 수속 방법을 묻자 법
도관정 이군오는 쌍방이 합의하여 대회를 개최하지 말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최준모는 “분열이라는 말은 여
기서 하는말이지 춘암교주를 본다면 來者는 불거不拒요 王者는 막추莫追이지 분열이 없다”고하였다. 이와
같이 수차의 모임이 있었으나 결국 협의가 되지 않고 4월 2일 전국 대회가 개최되었다.
1932년 4월 2일에 개최된 제2회 대회에서는 처음부터 99인의 연명으로 법문 재호취소 건의안을 김급 동의
로 상정 하였다. 이에 대회장은 신구 양파가 충돌하여 소란 해졌고 의장 김병준은 돌연 무기 휴회를 선언하
퇴장해 버렸다. 다음날 3일 오후 3시에 대회를 개최하여 성원이 되었으나 의장은 대회를 진행 하지 않고 있
다가 30분이 경과 하고서야 속개를 선언 하였다. 그러자 이를 향하여 구파 측에서는 대령 정광조에대한 출석
을 요구하고 신파 측에서는 다시 의사 진행중에 점명을 요구하는 등 회의장이 소란 해졌고 의장은 전날과 같
이 무기 휴회를 선언하고 퇴장해 버렸다. 4일 오후 4시에 대회를 속개하고 순서에 들어가려하자 김정주가 긴
급 동의 하기를 “상방이 이미 신앙이 다른 것은 아는 사실이니 가부를 토의할 필요가 없이 우리들은 분열하
고 이 대회를 산회하자”고 하였다. 이에 장내가 극도로 긴장해지자 의장 김병준은 신파 측과 함게 회의장에
서 모두 퇴장해 버렸다. 회의장에 남아 있던 구파 측에서는 장내를 정돈 한후에 제 4세 대도주 선수문과 기
미 독립운동 때의 손병희의 유시문 등본을 단상에 붙이고. 부의장 이종린이 “신앙문제는 원래 어떤 힘이나
양으로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산화된 대회의 결의안을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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