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1차 합동과 2차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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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1차 합동과 2차 분열
1, 제 1차 신구파 합동.
천도교 청년단은 1925년 4월에 중안 위원회에서 결정된 일반 노선에 따라 국제적인 농민단체인 크레스틴텐
른(국제적색농민조합)과의 접촉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크레그틴테른에서는 가입을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것
은 조선공산당을 통하여 입수한 정보로 조선농민사의 성격이 타협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
선 농민사는 1925년 8월17일 청년당 임시총회의 결의에 의해 천도교인과 일반인이 함께 참여하여 1925년 10
월29일 조직한 합작단체로 사화 각 방면의 폭넓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단체였다. 그레서 화요회가 주도하
는 제2차 조선공산당은 자치주의를 옹호하는 천도교 신파를 비난하고. 반대세력인 천도교구파와 육임파를
지원 하면서 천도교청년동맹을 통하여 신파를 약화 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청년당을 1926년
7월 조기간과 설린을 북경에 파견 하였고, 동년 11월에는 농민 부위원인 김달농이 크레스틴테른에 편지를 보
내어 가입을 요청 하기도 하였고, 또 1927년 1월 신파의 대변인 박진순이 조훈과 함께 천도교 신파를 변호하
는 보고서를 코민테른에 제출 하기도 하였으나 조선농민의 가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
년당 당두 김기전은 1927년 6월 정광조와 함께 동경과 일본 각지를 시찰 하였고 조기간도 9월23일 밤 동경으
로 갔다. 그런데 이 무렵은 최린이 동경에 머무르면서 아베와 자치 실현에 대해 협의하고 있던 때로 최린은
이들과 자치운동에 관해 협의 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전과 조기간이 귀국한 직후 천도교 청년당은 정치연구
회를 조직한데 이어 1927년 10월 23일 곽산에서 열린 청년당 평북도연합회에서는 정치연구위원회를 두기로
결정 하였고. 같은 날 함남도연합회에서도 사회정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또 10월24일에는 순천군 은산에
서 도내정형요람을 만들기로 하였다. 1928년 4월 최린은 구미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여 측근들에게 “앞
으로 조선민족의 진로는 자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청년당원들에게 자치주의를 고취 시키면서 결속을 다지
고 신파의 지지를 얻고자 열중 하였다. 그러자 청년당은 곧 바로 제2차 전당대회를 열고 당 본부에서 정형연
구 방침을 각 지방부에 지시하여 연구토록 하였다. 1928년 12월20일에 임시 법회에서는 도령사가 조직되고
도령에 최린, 부도령에 정광조가 임명되었다. 이것이 천도교 신파의 종리원을 최린등의 자치운동 세력이 장
악 하였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교권을 장악한 최린은 자치운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천도교의 모든 부문 운동
기관을 청년당 산하로 중앙 집권화 하였다. 12월23일에 열린 청년당 제2차 확대 중앙 집행위원회에서는 학생
회 사월호 소년회 조선농민사 등과 법적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1929년 4월 조선 농민사 제2회 전체 회의에
서 조선 농민사를 청년당 농민부 산하에 두려고 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1930년 제 3차 전체 회의에서는 긑내
이를 관철 시켰다. 1929년 하반기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자 최린은 본격적으로 자치운동을 전개 하였다. 모스
크바와의 제휴를 이끌었던 김기전 김도현 등은 자치운동 전개를 반대하고 1929년 9월 조선 박람회를 기회로
사회주의자와 연계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모종(오심당)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기도 하였으나 이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193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자치운동을 전개하였
다. 3월에 온양온천에서 정광조등 간부들과 협의하여 자치운동에 대한 계획안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북풍회
계의 사회주의자인 서정희 송봉우 이석 등과 접촉하고 자치운동에대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송진우 이정섭
과도 왕래하며 비밀리에 자치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 하였다.
마침내 최린은 1930년 4월4일 천일기념일을 기하여 각 지방에서 상경한 주요 교인대표들을 가회동 자택으로
불러 “천도교의 갱신을 위해서는 우리들의 목표를 민족 독립에서 일시 민족자치의 방면으로 전환해야 한
다”고 자치운동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표면화 했다. 이같이 최린이 자치운동의 불가피성을 유포하자 신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구파에서는 신간회와 연개하여 이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고 “천도교 역사
와 근본 정신을 무시한 것”이라 하면서 최린 김기전 이돈화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천도교 청년동맹에서도 4
월8일 상무 집행위원회를 열고 최린파의 자치운동은 천도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절대 반대한다는 결의
를 하여 발표하였다. 또 4월 9일 이종린등은 구파 간부들을 규합하고, 자치운동에 반대표명을 하고 신간회
경성지회와 제휴하여 각 일간지에 이종린 명의로 “천도교 일파의 자치운동 대두에 절대 반대, 철저히 규탄,
천도교인으로 묵과 할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나 자신이 천도교인이기 때문에 종래 최린 일파에서 이러한 운동이 구체화 된 것은 나 자신으로서도 부인하고 싶습니다, 我 천도교가 그들과 분
립한 것은 일시적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 소문이 과연 사실이라면 나는 천도교로서 이러한 정치적 문제를 討究토구 할 경우 그 자신 천도
교의 정신에 근본적 모순이 생길 뿐만 아니라 우리 일반 교도가 이러한 결의를 한 것이 과연 현아 조선의 필요 문제인지 아닌지 별문제로 한다고
해도 우리 천도교로서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한 태도를 규명하여 절대 반대합니다.(이용창,“1920년대 천도교의 분규와 민족주의운동”72쪽,<천도
교의분열과 합동>,480-481쪽)
이에 신파의 청년당원 60여명이 4월9일 10시경에 청년동맹 사무실에 몰려 들어와 폭력을 가하면서 청년동맹
원 박완 박양신 이일순 정환석 주호석 손재기 등과 청년당원 김영환등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청
년동맹 상무위원회에서는 4월9일 오후8시에 긴급회의를 규탄하는 “최린파 자치운동 반대결의 전말 보고문
의 개요”를 발표하여 여론을 환기하였다. 자치운동으로 인한 신구파의 충돌은 각 지방에서도 발생하였는데
철산에서는 신파 당원들이 청년동맹원을 습격하여 구파의 사무기기를 훼손하여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천도교 신파의 자치운동은 이러한 구파의 완강한 반대로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12
월 테제와 9월 테제의 영향으로 그간의 상층부 통일전선 추진전략을 변경하여 하층구조의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천도교와의 제휴가능성은 더욱 약화되엇다. 그러자 최린은 1930년 10월17일 천도교 구파에
대해 “조선의 사회적 정세는 한갓 배제, 항쟁만을 일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특히 현재 재계의 불황은 조
선민족 전부를 극도의 생활고로 위협하며 대중적 전투력의 강화를 제안하고 있다”고 하여 구파의 노선 변경
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 구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자치운동에 대한 자당봉괴의 전환책으로 오세창을
방문하여 일방적으로 합동할 것을 제의 하였다. 그리고 1930년 10월17일 오후 8시 권동진 집에서 권동진 오
세창 최린 3인이 모여 신구 합동 문제를 협의 하는과정에서 최린은 “宗法大義 하에 박인호의 승통기념을 전
과 같이 봉행할 것을 비롯하여 교직을 균등하게 양분한다”는 파격적인 합동 조건을 제시 하였다. 18일 하오 7
시 세사람이 박인호를 방문하여 이를 품달하여 승낙을 받았다. 19일 정오에 이인숙 이군오 오상준 이종린 등
이 모여 교회 합동은 최린의 제안한 조건대로 실현하고, 사리원의 오세창에게도 교섭 위원을 파견 하기로 하
였다. 1930년 11월 10일 오후 합동위원 오상준 이종린 김재계 이인숙 이군오 이돈화 등이 종법실로 모여 합
동 조직에 착수 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12월 23일 신파와 구파가 합동대회를 개최하고 전격적으로 합동 하
였다. 그리고 1931년 1월 18일에는 박인호의 승통기념인 제 23회 도일기념식을 거행한 후 대관원에서 기념축
하회가지 열었다. 결국 신파는 자치운동을 재계하는데 따르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국면타개책으로 구파와
정치적 타협을 한 것이였다. 그리고 1931년 4월 3일과 4일 이틀동안 대교당에서 천도교중앙종리원 제1회 정
기대회를 개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구파 합동은 중앙과 지방의 충분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
었다. 당초에 갑자기 최린이 합동을 제의해 오자 오세창은 최린의 저의를 의심하였고 그 밖에도 신파에 이용
당하는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는이가 많았다. 결국 신구파 합동과정은 중앙간부들간의 형식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것에 불과 하였다. 특히 합동조건을 보면 의견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점이 있어 처음부터 재분열이
조짐을 내포하고 있었다.
천도교 신구파가 합동함에 따라 1931년 2월16일에는 청년총동맹과 청년당도 쌍방의 전권위원을 뽑아 타협
한 후 합동대회를 개최 하였다. 명칭을 “천도교청우당”으로 결정하고, 당헌을 채택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
45명과 후보위원2명, 감사위원 8명과 후보위원2명, 대표 손재기, 부대표 정웅봉, 상무위원 7명을 선출하고
고문으로 김기전을 추대하였다. 또한 그동안 양분되었던 지방조직도 청우당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4월 1
일 청우당은 기관지로 월간지‘당성“을 창간하였도, 4일 에는 제1차 전당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집행부에 선전
과와 통훈과를 증설하고 노동부산하에 조선노동사를 설립키로 결의 하였다. 이어 5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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