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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당시 정보당국이 풀 수 없는 암호지령 급증"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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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희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061회   작성일Date 16-05-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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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화평 "5·18 당시 정보당국이 풀 수 없는 암호지령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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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광주민주항쟁 당시 금남로 일대의 시민, 학생과 차량 시위대.

    《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허 전 수석은 “광주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또 “공공기관을 습격하고 좌익 수가 많은 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하거나 무기고·방산업체를 일시에 덮친 것은 모종의 ‘컨트롤 타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라고 했다.

    육사 17기 출신인 허 전 수석은 9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준장, 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과거 경험상, 남한의 정치사회적 격동이 있을 때마다 평양이 들썩였다. 대남 적화노선이 유지되는 한, 북한은 남한 정세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려 한다”고 주장했다. 뜨겁고 낯선, 그리고 아직 아물지 않은 1980년대 상황을 허 전 수석의 증언을 통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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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화평 전 청와대 정무수석.
     
    1980년 ‘서울의 봄’에서 ‘광주 5·18’까지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80년 1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이미 법제처에 헌법 연구반을 구성,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처음 공개하면서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하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최 대통령은 10·26으로 불거진 박정희(朴正熙) 시해사건을 매듭짓고, 유신체제를 대체할 정치일정을 결정하는 데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2·12로 인해 권부(權府) 내에서 블랙홀 현상이 일어났다면, 1980년 5월 김대중(金大中)을 중심으로 한 재야의 ‘최후통첩’이 두 번째 블랙홀을 낳았다. 그 ‘최후통첩’이 무엇인지는 다시 언급하겠다.
      
    1980년 4월 21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뜻밖에도 강원도 사북에서 일이 터졌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는 당시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었다. 계엄사령부의 집회불허를 거부하고 광부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광부들이 다치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저임(低賃)과 막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원인이었지만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북사태의 불길이 다른 노동현장으로 번지지 않을지 초조하게 예의주시했다. 게다가 북한에서 사북사태를 두고 대남 선전선동이 요란했다. 마치 사북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하듯 생생히 전하며 연일 혼란을 부추겼다.
     
    5공과 박근혜
     
    국내 정치상황도 점점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김재규를 반(反)유신의 의사(義士)인 것처럼 동정하는 여론이 번져났다. 박정희 정적(政敵)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박정희 유족을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박정희 추도식을 국립묘지에서 갖지 못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18년 동안 철권통치하던 박정희가 별안간 사라진 이상, 반유신 세력은 이 기회를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활용하려 덤벼들었다. 만약 박정희 인사들이 공개 모임을 갖고, 외부 추도식을 가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비가 붙고 말썽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내가 직접 박근혜(朴槿惠)를 찾아간 일이 있다. 신당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지 않는 봉사사업은 결국 돈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반유신 바람이 거센 마당에 재야 투쟁의 빌미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박근혜는 아쉬워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도, 거부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뒤 국민운동 차원에서 새마음봉사단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박정희 정권시절 측근들이 5공을 삐딱하게 여긴다. 속이 좁은 것이다. 5공 집권 7년 동안 박정희 측과 불필요한 갈등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 하나도 없었다. 5공이 박정희의 산업화를 마무리 지었기에 지금의 박근혜가 존재한다. 측근들이 5공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국민 가슴 속에 살아나야 측근들도 존재 이유가 있다. 5공 때 박정희에 대한 부정여론을 그냥 내버려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DJ의 최후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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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원탄좌 사북탄광 소속 광부들의 시위 현장. 1980년 4월 24일 광부 대표가 수습대책회의에서 돌아와 합의 사항을 동료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다시 1980년 5월로 돌아가자. 사북사태 이후 반유신 세력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그해 5월 12일 서울역 앞에서 30여 개 대학 소속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전경버스가 불타고 많은 학생이 연행됐다. 최규하 정부와 군은 재야가 탈권투쟁을 본격화하려는 기미로 판단했고, 관련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여기서 재야란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을 말한다.
      
    그래서 시국수습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향후 정치적 혼란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불허였다. 그해 3월 DJ는 복권이 이뤄졌으나 YS의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DJ는 재야 민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거기에 추종하는 세력들, 학생과 반유신 투쟁자들이 모여 급진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2일 서울역 시위에 앞서 11일 전북 정읍에서 동학제가 있었다. 정읍은 동학운동의 시발지다. 여기서 DJ는 “동학란은 민주주의 혁명”이라 규정하며 “제2의 동학란이 일어나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튿날 서울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자 DJ는 동교동 사저에서 소위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뒤 16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란 명의로 언론기관과 각 대학에 선언문을 배포했다. 선언문에는 비상계엄 해제, 신현확(申鉉碻) 총리 퇴진, 정부 개헌심의위 해체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DJ는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22일부터 국민과 더불어 요구관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 최후통첩이 5·18 광주사태와 연결돼 복잡해지는데, 만약 최후통첩이 없었다면 5·17 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5·17 조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그날 아침에도 재야 지도자들이 모여 “민주화촉진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키자”, “최규하 정부가 흐리멍덩하게 나오면 전 국민적 궐기를 결행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보안사 정보처는 재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손쓰지 않으면 정상적 국가질서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상계엄확대 조치가 나온 것이다.
     
    “권정달의 1996년 검찰 진술은 거짓말”
     
    권정달(權正達)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1996년 1월 역사바로세우기 검찰조사에서 “전두환 장군의 지시를 받아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또 “허화평, 허삼수(許三守), 정도영(鄭棹永), 이학봉(李鶴捧)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했다”고 주장하며 “허화평 비서실장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에서 주로 만나 논의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참모들이 모여 그런 시국수습책을 세울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비상계엄과 국회해산, 국보위 설치 문제는 모두 정보처 소관사항이다. 수사를 맡은 대공처와 군 업무를 담당하는 보안처의 업무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보·대공·보안처가 서로 머리를 맞댔다고 의심할 순 있지만, 권력기관의 속성상 고유업무 외의 일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 방안이란 것도 정부 기능이 붕괴될 때를 대비해 세워둔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는 정보처와 계엄사, 청와대가 관련된 내용이다. 보안사 비서실장 옆 회의실에서 수습방안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내가 일하던 회의실이란 게 변변한 회의탁자조차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던 그곳에서 어떻게 심각한 회의를 할 수 있었겠나?
      
    재판정에서 내가 부인하자 권정달은 그제야 진술을 번복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회의실이 아닌, 박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 안기부 안가에서 회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왜 권정달은 거짓 진술을 했을까. 그는 민정당 창당 주역이자 초대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계엄 도중에 보안사·계엄사·청와대의 협력을 이끌던 이가 정보처장이다. 제일 먼저 구속돼야 할 사람이지만 위증을 해 혼자 처벌을 면했다. 1996년 당시 안기부장이 육사동기인 권영해다. 같은 권씨이기도 하다. 추측건대 권영해가 정부의 지시를 받고 모종의 ‘작용’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5공 주역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중요한 것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담은 5·17 조치가 불가피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DJ가 이끄는 ‘국민연합’의 ‘5·16 선언’이 없었다면, 재야의 성급한 급진노선이 없었다면, 5·17이 없었을지 모른다.
      
    광주 5·18의 비극
     
    지금 나의 고백이 5·18 광주시민의 희생을 건드리거나 원점에서 시비할 생각은 없다. 광주 5·18은 군인의 광주시민을 향한 발포가 불가피했다고 해도 비극이었고 지금 와서 이를 새삼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계엄해제 요구가 정당했다고 해도 무기고까지 탈취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광주시민도, 군인도 희생자였다. 쌍방 간 어떤 타협점도 찾을 여지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또 다른 비극이었다.
      
    광주 5·18은 당대 정치상황이 직접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더 근본을 캐고 들여다보면 분단과 이념, 정치사회적 갈등이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것을 떠나 본질을 얘기할 수 없다. 5·18은 결국 최규하 정부 퇴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고, 정국이 더 이상 추스를 수 없는 긴박한 상태로 가게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5공이 탄생되는 전환점이 됐다.
      
    광주 5·18은 학생들이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도서관에 가는 것을 공수부대 군인들이 쫓아낸 것이 시발이었다. 등교거부를 당한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가 시민들과 합류하게 되고 계엄군과 충돌,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 무렵, 광주시내에 유언비어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젖가슴을 도려냈다’거나 ‘임신부의 배를 군인들이 갈랐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죽이러 왔다’는 식이었다. 이 유언비어가 광주시민의 증오심을 극대화시킨 도화선이 됐다. 소문을 듣고 시민들이 흥분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5월 19일과 20일, 시위군중은 공수부대와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점점 늘어났고 희생자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사람들은 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느냐고 묻는다. 공수부대는 소수 간부요원으로 편성된다. 절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적지 깊숙이 들어가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저항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부대다. 이 부대가 광주에 파견된 것은 계엄사의 우발사태에 대비한 사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권정달은 “광주사태의 근본원인이 공수여단이란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한 때문이고, 이와 같은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전두환·황영시(黃永時)·정호용(鄭鎬溶)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와 검찰이 듣고 싶어한 이야기이자, YS 정부가 듣고자 했던 주장이었다. 권정달은 철저히 5공 주역을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발언을 계속했다. 정말 광주를 진압할 생각이 있었다면 공수부대가 가면 안 된다. 보병여단이나 사단이 갔어야 했다. 오히려 공수부대 숫자가 적다 보니 초동진압에 실패, 문제가 복잡하게 됐다. 시민군은 공수부대 수를 보고 만만하게 본 것이 불행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신원 확인이 안 된 12구의 시신
      
    5월 21일 13시경 시위대가 장갑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도청 앞으로 돌진을 시도했다. 도청 앞은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몰려오니까, 그땐 이미 자위권 발동 명령이 있었을 때다. 자위권은 위협을 받았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그 경우 ‘발밑으로 쏘라’는 지침이 계엄사에서 내려갔다.
      
    그런데 위협사격을 아스팔트에서 하니 파편이 튀고 그 유탄에 사람이 맞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경찰과 예비군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벌이게 된다.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퇴진’이나 ‘계엄해제’ 요구와 비교해 지나친 것이다. 평범한 시민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군 속에 숨어 있던 소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으로 군은 판단했다. 교도소는 5월 21일 6차례에 걸쳐 공격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제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성공하지도 못했다. 당시 교도소에는 2700여 명이 수감돼 있었고, 그들 중 170여 명이 좌익 정치사범이었다.
    교도소 습격은 보통 일이 아니다. 혁명군이 자기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습격하는 법이다. 한 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교도소 점령을 시도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무기고 탈취가 당시 44개 지역에서 일시에 일어났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장갑차를 탈취했다. 600명이 무장을 했다는데, 그 넓은 지역에서 무기고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누군가의 지휘통제를 받지 않고서는, 일거에 무기 탈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위대가 도청에 돌진한 것이 5월 21일 13시경인데, 무기고 탈취는 21일 낮부터 이뤄졌다.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탈취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18 당시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이 116명인데, 전부 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다. 그런데 총상 사망자 116명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카빈총에 의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것은 시민군 안에서 누군가가 시민을 향해 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계엄군은 M16을 사용했다. 총상을 조사하니까, 뒤에서 맞은 시위 군중이 많았다.
    무기고 탈취방법이나 교도소 습격, 총상 사망자 형태로 보면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광주시민 다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2구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것도 미스터리다. 누구일까.
    북한 탈북자들이 “광주 5·18을 다시 보자”고 주장한다. 그들이 왜 광주에 주목할까. 자기네들이 북한에서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
     
    나는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과거 경험상, 남한의 정치사회적 격동이 있을 때마다 평양이 들썩였다. 대남 적화노선이 유지되는 한, 북한은 남한 정세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려 한다.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10·1 폭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어록에 “1960년 4·19 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는 말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직후 대남파트는 전력투구해 정보를 수집했을 테고,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공작을 최대한 감행했을 것이다.
      
    1980년 5월 북한의 대남 방송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파쇼 도당을 까부셔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 공공기관을 습격하고 좌익 수가 많은 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하거나 무기고·방산업체를 일시에 덮친 것은 모종의 ‘컨트롤 타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게다가 북한은 광주 5·18을 남한보다 더 거창하게 기념한다.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5·18 영화를 제작하고, 5·18을 북한이 이룩한 최고의 대남 공작사례로 소개한다. 또 탄도탄 제조에 쓰이는 1만t급 프레스를 ‘5·18 청년호’라고 부르고, 천리마 운동을 ‘5·18 무사고 정시 견인 초과운동’이라 칭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만, 만약 북한이 남한을 집어삼킨다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5·18의 숨은 영웅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광주의 진실규명을 위한 요구가 결과적으로 전투적 반정부 단체를 형성시켰고, 북한과 손을 잡고서라도 군사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좌파세력을 등장시켰다. 그 결과, 종북 좌파세력이 한국사회의 거대 흐름을 형성시켰다’는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당시의 비극적 상황에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 있었다면, 그리고 소위 정치권력에 의한 사법부가 5공 인사를 단죄했는데, 그것이 정치적 게임이지 역사의 진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실체적 진실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토대로 화해하고, 역사교훈으로 가져가야 한다. 
      
    5·18은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인 반미(反美)·종북(從北)·좌파(左派)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전부터 그런 세력이 있었지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해 5공세력이 단죄받자 그 투쟁이 정당화됐으며 결국 반우파 체제 투쟁의 고리가 됐다.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정부, 이승만(李承晩)·박정희·전두환·노태우(盧泰愚) 정권을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며 반민족·친일·친미 파쇼정권으로 몰아세웠다. 광주 5·18에 대한 YS정부의 정치적 단죄는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할까. 이것을 투쟁의 고리로 삼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군대를 광주시민을 학살한 범죄집단으로 몰아 군에 대한 거부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젊은이들에게 군에 가면 청춘을 허송세월하는 거라 생각하게 만들었고, 군 시설을 혐오시설로, 군 기지 건설과 기지 이전도 반대하게 만들었다. 반미 역시 마찬가지다. 왜 한·칠레 FTA, 한·EU FTA는 놔두고 한·미 FTA만 결사적으로 반대할까. 반미는 5·18을 경험한 386세대 정치인의 기본인식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증오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5·18은 광주시민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반우파 체제 투쟁의 영양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상태가 계속 방치되면 지역갈등, 이념갈등이 계속 심화될 것이다. 시시비비를 넘어 냉정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증오의 씨앗도 씻어내고 더 이상 광주의 그늘을 남겨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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