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의 경계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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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체가 이분법의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양극단 사이에서 선택의 폭을 강요하는 선별적 허구는 한쪽은 무엇이든지 반대하고 한쪽은 무엇이든지 찬성하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삶의 실체에서도 양극단은 존재하지만, 거기에는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사이에서 양생학적 가치에 적응하려는 중도의 성정이 내포되어 있기에 한쪽으로 쏠려버리는 일방적 경향을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로 보면 나라의 정책도 그렇고 특별히 쟁점이 되는 의견이라도 반대와 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혼돈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분법의 논리로서 비유될 수 있는 극단적 성향은 대체로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이견이 대중화되면 이것이 분노와 부정의 심리에 편승하여 혼란을 더욱 가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 생명은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실체에서 보면 참 무모한 짓입니다. 요즘 사회단체에서 자주 쓰는 구호가 생명존중인데 생명존중의 초점을 한편의 논리로 국한해 그와 반대되는 논리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현상으로서는 실체적 생명의 빛을 발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 우리는 다른 의견에 대하여 그 다름을 주장하는 입장에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초이심 전심의 해법을 적응시키지 못하는 걸까요. 어떤 사안에 대하여 그 객관적 실체를 올곧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한쪽만을 듣고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각자의 해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어떤 문제점이나 사실에 대하여 객관성에 준하는 평가를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일방적 자의식의 표출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사정을 들어볼 겨를도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논리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하여야 할 집착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논리에서 정의나 진리나 생명이라는 고차원적인 질서도 예비 – 견지 – 분석 – 참조 - 중도 – 인정 – 화합의 논리로서 맞이하려 한다면 그 의미가 비록 상반되더라도 양자를 포용하는 상생의 능력은 더욱 상승할 것입니다. 결국, 논쟁의 실체를 벗어나 대화합의 길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나와 너, 우리와 상대의 입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차이와 다름이라는 상태를 인정하고 중도의 질서나 전체성을 표방하는 무극의 기운으로 공존과 공생의 의미를 적응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비단 정치인 뿐만이 아니라 극좌 극우 노선을 표방하는 여타 단체들도 나 (우리 편)는 옳고 너(저쪽 편)는 틀렸다는 극단적인 자의식의 강화를 의식화할 것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질서 속에서 공존과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중도의 길이야말로 최고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지선의 경지라는 이치를 실현에 옮기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의 측면에서 극단 대립의 갈등이 수십 년 동안 이어오면서도 그 양단을 연결하거나 해결하려는 조화의 부재야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욕적인 과실이라는 점을 천도의 덕을 구현하려는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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