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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2편)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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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환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131회   작성일Date 16-09-27 07:37

    본문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포덕 157년 9월 21일 ~ 24일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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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갑사(甲寺)

    ( 23일 아침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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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 556년(백제 위덕왕 3) 혜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혜명대사가 중창했다는 설이 있다. 679년(문무왕 19)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건물 1,000여 칸을 더 짓고 절 이름을 계룡갑사에서 갑사로 바꾸어 화엄대학지소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다. 1579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1654년(효종 5) 사정·신휘 등이 관청의 도움을 받아 중수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천불전·응향각·진해당·적묵당·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중요문화재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공주 갑사 승탑(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월인석보목판(보물 제582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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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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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채와 구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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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승탑


    보물 제257호. 높이 205cm. 원래 갑사 뒤쪽의 계룡산에 있던 것을 1917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8각의 높은 지대석 위에 3층으로 된 하대석과 탑신, 옥개가 있는 8각원당형 구조이다. 하대석의 모서리에는 피어나는 연꽃을, 각 면에는 1구씩의 사자를 조각했는데 환조에 가까운 입체감을 준다. 그 위에는 구름 속에 있는 용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고, 운룡문과 사자상 사이에 홈이 파져 물이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중대석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양각되어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꽃봉오리 같은 장식이 돌출되어 있다. 상대석 밑에는 높은 부연이 있으며 그 윗면에 32엽의 복련이 돌아가며 장식되어 있다.팔각형 탑신석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우고, 앞뒤 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기고 그 좌우면에 2구의 사천왕상을 각각 배치했다. 옥개가 기단이나 탑신부에 비해 높고 폭이 좁은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옥개 밑에 작은 서까래를 촘촘히 새기고, 지붕 위의 낙수면에는 목조건축의 팔모지붕을 모방해 굵고 네모난 우동 사이로 가늘고 긴 기왓골을 표현했다. 상륜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뒤에 보수한 보주만 놓여 있다.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장식적이며 목조건축의 세부까지 표현했으나 전체비례에서 옥개석이 유달리 작아진 점이나 기단부의 장식문양과 뛰어난 조각솜씨 등으로 보아 신라승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승탑의 우수한 예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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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철당간

    보물 제256호. 철당간높이 15m, 지주높이 3m. 기단은 단층으로 길쭉한 돌 2장을 합쳐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 접착부위에 돌을 서로 연결하는 쇠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옆면 사방은 아래 위로 굽을 둘렀고, 좌우 두 면에는 안상을 2구씩, 앞뒤 두 면에는 3구씩 음각했다. 이러한 장식수법은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다.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아무런 조각이 없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부 한 곳에만 구멍을 파서 철제당간의 오절철통을 쇠줄로 3번 돌려 고정시켰다. 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연결한 것으로, 원래는 28개였는데 1893년(고종 30) 4개가 부러졌다고 한다. 철제당간에서 기단까지 모두 갖춘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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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 비 앞에서


    생년 미상 ~ 1592년)는 조선 중기의 승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 호는 기허, 속성은 박으로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500명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다시 제2차 금산 전투를 벌였고 격전 끝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금산칠백의총에 묻히고 종용사에 제향되었으며 법도, 대인에 의해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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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유스호스텔에서의 역사 토크 및 대담

    (23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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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민족통일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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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 강사의 수운 대신사님에 대한 설명 중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암 이국진 동덕께서 바로 잡고 보충 설명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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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탁으로 이어진 자유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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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치 전적] 사적 제387호(1994.03.17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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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적지는 공주시 금학동,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목인 견준산 기슭 우금치 일대로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격전지이다.

    이곳에는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동학혁명군 전적비를 세워 당시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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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아산만이 진주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6월 21일 조선의 내정 개혁을 내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여 친일 내각을 성립시킨 일본군은 이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을 본격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의 무력 점령 사건이 전해지기 시작한 6월 말부터 전국 각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재봉기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공주 지역에서도 6월경부터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공주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서울로 향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회덕과 진잠에서는 무기고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인 반송의 접주 김필수의 주도 하에 “지금 외국이 내침하여 종사가 매우 위급하니 군대를 일으켜 한번 토벌하여 환난을 평정하고자 한다”며 군량과 마필, 총 등을 거두어가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 달동 출신의 접주 장준환은 부여·광천 등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8월 1일에는 공주 대접주 임기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정안면 궁원에 집결하여 공주감영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당시 공주감영만이 점령되지 않았을 뿐이지 공주부 내 대부분 지역이 동학농민군에 의해서 장악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9월 10일 ‘척왜(斥倭)’의 명분을 내세운 재봉기를 선언하고 북상을 위해 논산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동학 교단지도부 또한 ‘기포령’을 내린 뒤 논산의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였으며, 공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논산으로 집결하면서 그 수가 4만여 명을 넘어섰다. 특히 공주 유생 이유상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집결해 있던 부여 건평 유회군 200여 명을 이끌고 논산의 동학농민군 연합 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이는 “나는 유도(儒道) 수령으로 동학당을 치고자 왔으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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