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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산 정갑수 선생의 멱심론(覓心論)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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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환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971회   작성일Date 16-10-06 07:0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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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용담정 수운 최제우  대신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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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황성공원 내에 자리한 해월 최시형 신사



    花開於扶安(화개어부안) 結實於扶安(결실어부안)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하리라

    -해월 신사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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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의 제자 용암 김낙철 성도사(1858~1910) 내외

     



    용암 김낙철 선생의 발자취

    용암(龍庵) 김낙철(金洛喆)은 1858년 부안읍 쟁갈리(長葛里, 부안읍에서 5리)에서 태어났다. ‘하인이 수십 명이었다. 고

    전해올 정도로 천 석 군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김낙철은 3형제 중 맏이인데 자는 汝仲, 이름은 洛喆, 본관은 扶安이다.

    그리고 동생의 자는 明仲, 明眞이고, 이름은 洛鳳, 洛眞이다.1890년 6월 7일/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포덕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때 해월 최시형은 구암 김연국, 장백원(蔣伯元), 아들 덕기(德基)를 데리고 공주 보평(洑坪)에 있는 유상오 두목의

    집에 머물렀는데 김낙철은 동생 낙봉을 비롯하여 김영조, 손화중과 같이 찾아가 처음으로 직접 지도를 받게 되었다.

    해월도 신입교인을 지도하는 한편 전라도 관내 도우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해 7월에 부안, 금구, 전주 등지를

    순회하였다. 윤상오 소실이 부안 신리에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곳으로 가서 수백 명의 도인을 모아 놓고 교화하였다.

    이로부터 전라도 각지에서는 동학군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1893년 2월과 3월/광화문전 복소신원운동(일종의 현도운동)과 보은장내 대선생신원집회에 많은 도인을 동원하여

    도내 도도집(都都執)의 책임을 지고 참가하여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그 해 3월 보은장내집회가 있은 이후부터

     각지에서는 탄압이 심해지기 시작하여많은 교도들이 체포되어 가산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1894년 3월/전봉준 장군에 의해 동학혁명은 드디어 폭발하였다.
    1894년 4월 1일/수백 명 교도들과 같이 송정리(松亭里)에 가서 신(辛)씨 제각에다 동학혁명군 도소(都所)를 설치

    하였으며, 동생 낙봉도 신소능과 더불어 부안 줄포에 도소를 설치하고 혁명대열에 참가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김용덕, 김의환, 최동희 공저)]에 의하면 전봉준은 3월21일(음력) 백산에서 동학혁명군의 대오를

    편성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후 4월3일(음력) 일대를 부안현 부흥역(扶興驛)으로 보내어 부안현 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이철화(李哲和)를 결박하고 군기고를 타파한 후, 이곳 군기와 전곡을 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군장급(軍長級)은 신명언. 백이구 등이었다.

    그러니까 김낙철 선생이 도소를 송정리 신씨 제각에 설치한 것은 동학군이 부안현을 점령하기 바로 이틀 전인 셈이다.
    그런데 이 무렵 癸巳 甲午 두 해에 걸쳐 전라도 남쪽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특히 제주도의

    식량난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제주도 배들이 부안의 문포와 대벌리항에 와서 많은 양곡을 사들여 배에 싣고 수로로 떠나려

    하는데 일부 동학군들이 이들의 식량을 약탈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낙철은 급히 현지로 달려가 동학군들을

    크게 꾸짖고 단 한 홉의 양곡도 빼앗지 못하게 보호하여 무사히 선단을 귀환케 하여 주어

    제주도민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또 당시 부안군수 이철화(李哲和)를 동학군들이 체포하여 살해하려 하는 것을 김낙철이
    「人命을 함부로 해친다면

    우리가 짐승과 무엇이 다르다 하랴」하고 극력 만류하여 놓아 주었다. 이처럼 민심의 수습과 안정에 힘쓰며 동학군들의

    민폐를 엄금하였다. 따라서 현감 이철화는 여러 동학접주와 사전 협의하여 행정을 처리 하였다. 7월이 되자 이철화 대신

    윤시영(尹時榮)이 현감으로 임명되어 왔으나 그도 모든 일을 동학접주들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다.

    1894년 9월/일제가 한반도를 짓밟자 동학군들은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남북접이 협력하여 재기포 하였다.

    그러나 10월(음력) 공주전투에서 동학군이 패하자 정세는 뒤집혔다. 김낙철 형제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동학군 소탕령으로 이 해 12월 11일(음력) 부안에서 체포되었다. 1894년 12월 23일/ 경군(京軍)과 일병(日兵)이

    부안에 도착 수감 중인 동학군 32명(김낙철 선생 포함)을 인도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1895년 1월 3일/나주수성군 50여명과 관속들은 도착한 동학군 32명을 문루 앞에 모아놓고 약 2시간에 걸쳐

    무수타지(無數打之)해댔다. 무참한 난타로 동학군들은 여러 차례 기절을 하는 등 급기야는 사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제주도에까지 전해지자 제주선인(濟州船人) 4~50명이 나주에 몰려와 “갑오년 제주도의 흉년으로 제주도 경내

     기만명인민이 아사지경에 이르렀을 때, 부안의 김낙철 형제의 애휼지덕으로 기만 명 인명을 보존하였거늘 김낙철

    형제가 죽게 되었는데 하늘이 어찌 무심한고 (若金某兄弟 至於死境 天何不願乎 )라고 외치며 만약 김낙철. 낙봉 형제를

    죽일 터이면 우리들을 대신 죽여 달라”며 나주목사에게 살려 줄 것을 청했다.

    3일 후, 혐의가 없는 3명만 석방하고 나머지 29명은 곧 일본군대 대장소로 끌고 가, 김낙철. 낙봉 형제는 순사청으로

    돌리고 나머지 27명의 동학군은 1월 6일 신시에 무참히 사살했다. [녹두장군 전봉준] 기록에는  이때 나주옥에는

    전봉준 장군과 손화중도 있었는데 이들은 1월6일 서울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1895년월12일/서울로 압송. 21일경에 경성 이현(진고개) 일인 순사청에 도착했다.
    서울로 이송된 김낙철. 봉 형제는 다행히 그가 살려준 전 부안군수 이철화가 이를 알고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십부대신에게 “김낙철. 낙봉 형제의 덕화로 하관도 생명보존했을 뿐 아니라 부안 경내 인민이

    다 김형제의 덕화로 생명보존하였거늘, 김형제를 죽일 터이면 나를 대신 죽이고 그들을 살려달라”며 애걸. 이때 서울

    감옥에는 구암 김연국을 비롯하여 전봉준. 손화중 등 각지에서 체포되어 온 동학군 수백 명이 여러 곳에 갇혀

    있었는데 전봉준 장군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1895년 3월21일/김낙철. 낙봉 형제 무사특방되었다.
    그간 부안에서는 향유(유정문. 최봉수) 등이 충동으로 군수로 하여금 무죄한 교인 20여명을 총살하였고, 가족들의

    고초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부안 사람들은 그들이 갑오년에 체포된 그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야로 청수단에 청수를 모셔놓고 김낙철 형제가무사하기를 기원하였다. 김낙철 형제가 부안에 나타나자 동민들과

    군 유지들은 쌀을 가져온다, 고기를 가져온다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온 이들 형제분을 극진하게 환영하였다.

    이는 동학혁명 때 이들 형제가 도소를 잘 지휘하여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1896년 8월/동학군 지목이 수그러지자, 동생(김낙봉)과 더불어 상주 화항에서 해월신사를 만나

    신사로부터 여러 가지 도리를 배워 각처에 다니면서 포덕하니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1897년 1월/해월신사가 이천 앵산동으로 이사하여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
    1897년 8월/해월신사 원주 전거론리로 이사. 이때 전거론리 해월신사 측근에는 의암 손병희를 비롯하여 구암 김연국,

     강암 손병흠, 용암 김낙철, 김낙봉 형제, 염창순, 이용한, 이춘경, 장석 도집 임춘호 등이 있었다.

    1898년1월 4일/원주 전거론리에서 김낙철은 해월신사를 비롯한 동학 지도부가 관군의 급습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해월신사를 대신하여 체포됨으로써 동학의 명맥을 살려 놓았다. 그러나 이 생생한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의 정사인

     ‘천도교서’와 ‘천도교창건사’에는 빠져 있다.

    이는 김낙철이 한 때 구암 김연국을 따라 시천교에 몸담고 있었던 관계로 여겨진다.

    1898년 6월 13일/ 경성감옥에서 며칠동안 모진 고초를 겪은 후 수원으로 이송되었다가 5개월여 후인 6월 13일에 석방.

    김낙철을 석방한 것은  김낙철은 모르고 있었지만 해월신가 6월 2일 경성감옥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

    동생 김낙봉과 김일서를 만났으나 뜻밖에도 해월신사께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 했다.

    그토록 해월신사의 안위를 위해 혹심했던 극형도 참아왔건만... 동생과 함께 비통한 마음으로 수원 남문누상에 올라

    북쪽의 아득한 하늘을 향해 봉두난발로 허리 굽혀 4배를 올렸다.

    해월신사가 순도한 이후 다시 교인수습에 나선 김낙철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일반도인들은 ‘해월신사가 화선(化仙)하였으니 운이 끊겼다.’며 반도하는 교인이 태반이었다. ‘요순공맹이 수천년 전에

    돌아갔으나 그 덕이 오늘에 미치고 있거늘 해월신사 역시 육신은 돌아가셨어도 그 덕화는 죽지 않았다.’며 반도들을

    설득했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월신사가 순도한 후 구암 김연국은 연기군 보통리에, 의암 손병희는 해월신사 사모님을 모시고 면천군으로 갔다가

    정산군에 있었다. 1900년 3월/해월신사 영위조문 차 동생 낙봉과 함께 정산에 있는 의암 손병희를 찾아가 조문하였다.
    1900년 6월1일/의암 손병희를 다시 찾아갔다. 이때에 의암에 의해 4도주 5편의장(4道主 5便義長)을 정하게 되었는데,

    편의장에 김낙철이 선임되었다. 편의장은 한 도만 맡은 편의장이 아니라 팔역(八域)을 통괄했다.

    1916년 2월3일/김낙철은 이후 파란곡절을 겪으시다가 한때 시천교(侍天敎)로 가서 중책을 맡은 바 있었으나,

    1916년 2월 3일 뜻한 바 있어 의암 손병희를 찾아가 ‘해월신사의 정통연원은 의암, 구암, 송암 등 3인 중에 의암이

    주장으로 임명받았으니 이제 정통연원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친히 이 뜻을 받아들여

    직접 전수 하리라하고 즉석에서 수수예식을 봉행하였다.

    1917년 12월 14일(양력)/천도교 성도사(小師)직을 받았다.
    1917년 12월 22일(양력)/60세를 일기로 환원하심. 당시 묘소는 서울 이태원이었으나

     그 후 충남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 산37-10로 옮겼다.


    <위 내용은 '부안독립신문'에서 발췌 정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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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암 김낙철 선생의 제자이자 호암수도원 창립자 학산 정갑수(1884~1952) 성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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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산 정갑수의 제자 해원 박기중(1898~2000) 종법사



     

    동학(東學) 2대교주 崔時亨 '통문'담긴 문집 발견  


    (전주(全州)=연합(聯合)) 동학(東學) 2대 교주인 해월(海月) 崔時亨의 문집과 농민군 지도자가 쓴 친필 수기등 동학관련 희귀자료 10여점이 발굴돼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갑오년 당시의 동학교단 동향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북(全北) 부안(扶安) 천도교 호암수도원의 朴奇重종법사(96)는 15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동학 2대교주 崔時亨의 '해월(海月)文集'과 부안(扶安) 출신인 농민군 지도자 金洛喆대접주의 친필수기인 '龍菴誠道師歷史略抄', 동학교단 초기역사를 담고 있는 '大先生事蹟', 김낙철부부의 사진원본등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5일 언론에 공개했다.


    이중 학계의 관심과 함께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자료는 '해월문집'과 '용암성도사역사약초'.

    해월문집에는 崔時亨이 1885년부터 1892년말까지 각지역의 동학지도자들에게 보낸 '통문'을 연도별로 정리해 1880년대와 1890년대 동학교단의 동향과 갑오년 직전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세의 조직화 과정을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 문집은 가로 21㎝ 세로 24㎝크기의 한지에 순한문체로 씌어져 있는데 이자료를 통해 갑오년 당시의 동학교세및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동학사상과 지도부의 역할등을 새롭게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농민군지도자의 친필수기로는 처음 공개되는 '용암성도사역사약초(일명 김낙철 역사)는 국한문 혼용체이며 김낙철이 죽기 직전인 1917년말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수기는 김낙철이 1890년 동생과 동학에 입교한 이후의 체험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농민군 1,2차 봉기에 참여한뒤 경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32명의 농민군과 함께 나주(羅州)로 압송돼 고문을 받은 사실, 서울로 압송된뒤 일본 순사청에 수감되어 있던 전봉준,손화중,최경선등 농민군 지도자들을 만난 정황등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놨다.

    이 자료들이 발견된 호암수도원은 1948년 김낙철 대접주의 수제자인 鶴山 丁甲秀가 설립한 것으로 동학관련 자료들이 소중하게 간직돼오다 동학 1백주년을 맞아 햇빛을 보게됐다.


    동학농민혁명에 끼친 동학사상의 역할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해온 朴孟洙교수(원불교 영산대학)는 " 해월문집은 그동안 동학사상의 역할과 종교적 측면을 과소 평가해왔던 기존 학계의 입장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돼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김낙철역사는 1,2차 봉기에 참여했던 농민군 지도자로서 두차례에 걸쳐 체포됐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실을 증언해 준 유일무이한 자료"라고 평가했다.(끝)


    (1994년 연합뉴스 보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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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산 정갑수 종법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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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산선생 사모님 묘비.






      鶴 山 丁 甲 秀 先 生 論 說



         心    

      멱 심 론  

    무진년(茂辰年1928) 七月


    마음을 찾는 말씀



    大道대도 無形무형이라  

    以心學之이심학지 其所明證기소명중 吾所獨知오소독지人所難見인소난이나

    而知之本연이지지본難測여난측 知而不知지이부지 无爲自化무위자화라


    큰 도는 형상이 없는지라

     마음으로써 배우나니 밝게 증험한바는 내가 홀로 아는 바요사람들이 쉽게 보아내지 못하는 것이나

    앎의 근본은 또한 헤아리기 어려우니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은 하염 없이 스스로 화하는 이치이다



    此是神明所助차시신명소조 神明者신명자는 誰也수야오 天地元氣천지원기며 卽吾心之靈神즉오심지령신이니라

    天地之氣一也심일즉천지기기일야  以合一之心이합일지심으로 用事 용사하면

    天地造化權能천지화권능 在我재아오不在他也부재타야로되 此是眞言차시진인지언이요


    이것은 神明이 돕는바이니 신명이란 것은 누구인가? 천지의 큰 기운이며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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