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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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볼 때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이었지만, 천도교 3세 교조이신 의암(義菴) 손병희 성사(聖師)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그렇게까지 거족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었던 위대한 역사적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왜곡에 가까운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 관계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삼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삼일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있어서 우리민족 모두는 삼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서 선열들의 충정에 감사드리고 그 정신을 올곧게 이어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발간된 책들 중에서 삼일운동에 관한 가장 많은 참고자료들에 기초해서 객관적으로 저술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의암손병희선생전기」(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발간)와 「천도교100년약사」(천도교중앙총부 발간)에 기록된 삼일운동 관련 자료들에 근거해서 그 당시 거족적으로 전개되었던 삼일운동 전개과정을 기억하기 쉽도록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해서 기술하고자 합니다.
성사께서는 58세가 되던 해인 1918년 8월에 천도교의 여러 중진들을 가회동 자택에 모이게 하시고 「지금은 사람과 물건이 개벽을 하는 때」라는 요지로 설교하시면서 시국의 추세를 언급하시고 항상 대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성사께서는 항상 국제정세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는데 1918년 12월 초에 일본 대판매일신보를 통해서 「민족자결주의원칙」이 파리평화회의에서 논의될 것을 알게 되셨고, 이때를 기해서 뭔가 새로운 행동지표를 세워야 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사께서는 실행가능하면서도 큰 효과를 거두고 희생을 적게 낼 수 있는 좋은 방안을 비밀리에 연구하도록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1918년 12월 24일 다수의 지방 교구장 및 간부들과 중앙의 두목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방에 내려가면 명년(1919년) 1월 5일부터 49일 특별 기도를 실시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때가 이르면 분발하라.」는 내용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신환성(以身換性)의 정신으로 정신을 개벽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정하고 중앙에서 각 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특별 기도식을 지도케 하셨으며, 닥쳐올 대사에 대비하여 각 지방의 교구조직을 점검토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사께서도 상춘원에서 연성기도생활에 들어가셨습니다.
한편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은 성사께서 분부하신 내용을 실천에 옮기고자 보성고보 교장 최린과 더불어 민족운동 전개방법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최린은 교육계 인사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의 지도층인사와도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계획의 수립 및 추진에는 적임자였습니다. 세 사람은 동대문 밖에 있는 상춘원으로 성사를 찾아뵙고서 그 자리에서 논의한 결과 독립운동 추진방향에 대한 세 가지 원칙에 합의하였습니다.
1. 독립운동을 대중화 할 것.
2. 독립운동을 일원화 할 것.
3. 독립운동을 비폭력화 할 것.
1919년 1월 중순경 세 사람은 가회동 자택으로 성사를 찾아뵙고서 그 자리에서 거족적 독립운동전개에는 반드시 각계 인사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린은 저명인사의 포섭과 인선에 함께 참여할 동지를 찾던 중 중앙고보 교장이던 송진우와 중앙고보 교사인 현상윤을 자택으로 초청해서 거사계획을 알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찬성하고 함께 일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무렵 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계획을 알리려고 송계백이 일본에서 서울로 들어와 현상윤을 찾아와서 거사 일정을 2월 8일로 정했음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각모자 안감을 뜯고서 그 속에서 이광수가 초안한 독립선언문을 내놓았습니다. 현상윤은 이를 즉시 송진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최남선을 찾아가서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을 보여주었더니 최남선도 참가를 승낙하였습니다. 현상윤은 이 독립선언문을 최린에게도 보여주었고, 이 사실이 성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사께서는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에게 「어린 사람들이 저렇게 민족을 위하여 독립운동을 한다는데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시면서 독립운동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사의 지시를 받은 최린은 중앙고보 내에 있는 송진우의 집에서 송진우, 최린, 현상윤, 최남선 4인이 모여서 포섭대상 인물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포섭대상으로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윤구영 등을 정하고 교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성사께 보고하자 성사께서는 포섭대상에 이완용도 넣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성사께서 직접 포섭해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자 이완용의 조카인 이회구를 대동하고 이완용을 찾아가서 거사계획을 이야기하고 동참을 제안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완용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천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란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독립이 되면 나를 때려죽일 사람은 아마도 우리 동네 이웃사람들일 것입니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부디 성공해서 내가 그들에게 맞아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완용은 독립운동 가담은 거절했지만 끝내 이 일을 일본 측 인사에게 누설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 저명인사의 포섭을 위해서 사람을 바꾸어 가면서 누차 교섭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전부터 논의돼 오던 기독교 측과의 연합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기독교 측과의 교량 역할은 최남선이 맞기로 했습니다. 현상윤은 같은 고향 출신인 정주 오산학교 이사장 이승훈을 추천했습니다. 이승훈은 기독교 장로로 있으면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애국지사였습니다.
현상윤은 오산학교 출신 김도제의 힘을 빌려 당시 선천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에게 「오산학교경영에 관하여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급히 상경해 달라.」는 최남선의 편지를 전하게 했습니다. 당시 오산학교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승훈은 이 기별을 받자마자 즉시 상경했습니다. 이날이 2월 11일이었습니다.
이 때 최남선은 은밀한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진우에게 자기 대신 이승훈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송진우는 현상윤과 함께 계동에 있던 김성수의 집에서 이승훈을 만났습니다. 송진우는 천도교 측의 운동계획과 그동안 추진상황 등을 설명하고서 기독교 측에서도 이번 거사에 적극 가담해서 범민족적인 운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이승훈은 쾌히 승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2월 12일 선천으로 다시 돌아간 이승훈은 평북지방 기독교 중진들을 찾아다니며 모두 참여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2월 17일 이승훈은 서울로 다시 상경해서 숙소를 정하고 송진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송진우의 태도가 전일과 다르게 많이 냉각되어 있었고 또 교섭의 장본인인 최남선은 보이지를 않자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희도에게 기독교 측 동향을 물어 보았더니 서울의 각 교회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는 한창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결정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2월 20일 이승훈은 박희도 집에서 다른 기독교 중진들과 회동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은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도 동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대부분 찬성하였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들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박희도는 이미 서울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청년학생단을 조직해서 독자적인 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기독교 측은 이에 가담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 숙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동안 일경(日警)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 만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최린의 집에 함께 가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고 말했습니다. 이승훈은 최린과 함께 한 자리에서 기독교 측은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최린은 그 말을 듣고서 기독교 측의 계획을 반대했습니다. 최린은 「이번 거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전선 결성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파를 초월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승훈은 개인적으로는 그 의견에 찬성하지만 전체의 뜻을 모으기 위해서는 다시 회동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회의에서 나왔던 얘기가 거사자금이 5천원은 필요한데, 그 돈을 지금 당장 변통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천도교 측에서 이 돈을 변통해줄 수 있다면 천도교 측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 같은데, 5천원이 어렵다면 3천원만이라도 변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최린은 2월 21일 저녁 상춘원으로 성사를 찾아뵙고 그간의 진행상황과 기독교 측의 요구를 말씀드렸더니 성사께서 「5천원을 융통해 주도록 춘암에게 말해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월 22일 춘암상사의 지시를 받은 천도교 금융관장으로부터 5천원을 건네받은 최린은 이승훈의 숙소를 찾아가 김자성이란 이름으로 그의 방을 들어가서 돈을 전달했습니다. 이승훈은 「대사가 이로 인하여 성취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이 때 상해 신한청년당에 김철을 통하여 3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셨고, 만주 독립군부대에도 김상규를 통하여 6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셨습니다. 2월 23일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이 최린의 집에 와서 전날 기독교 측 사람들과 회의한 결과를 말했습니다. 즉 「독립선언서 보다는 독립청원서로 하는 것이 좋겠고, 천도교 측에서 만주로부터 무기를 사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무력봉기를 계획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기독교 측에서 천도교에서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는 정보를 듣고서 이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후에 공판과정에서 이 돈에 대해서 추궁하자 성사께서는 해외에서 좁쌀을 수입하기 위해서 보낸 돈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최린은 「이번 독립운동은 윌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국제정세와 우리의 자주정신의 전통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 하는 것이 옳지 독립청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독립청원보다는 독립선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조선내의 사회적 사정으로 볼 때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동으로 하지 않으면 전 민중을 총동원시킬 수 없고,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지 못하면 조선민족의 위대함을 발휘할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2월 23일 밤 최린과 헤어진 두 사람은 함태영의 집에서 오기선, 박희도, 안세항 등과 다시 회합하여 여러 가지로 숙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학생대표인 김원벽으로부터 「학생들이 단독으로 하는 것을 포기하고 교단 측과 합류하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기독교 측의 운동을 무조건 천도교 측과 합류하기로 하며, 독립청원서의 제출은 독립선언서의 선포와 병행하여 추진키로 완전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태영, 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임하고 이후 천도교 측과의 제반 교섭은 이 두 사람이 담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무렵 천도교단에서 실시한 49일 특별기도가 2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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