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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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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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8(2017)년 2월 20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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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意事項 ;
1. 이 글은 초고본(草稿本)으로 오류(誤謬)가 다수 있을 수 있음으로 참고로 읽어주시고 인용을 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 글은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속의 3. 著者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으로 함께 게재하여야 하나, 독자 중에는 별도로 필요할 수가 있다고 생각되어 따로 게재하오니 惠諒하여주시기 바람.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는 바로 이어서 게재할 예정임.
2. 이 글에는 새로 발굴된 새로운 자료에 의한 기술이 많은 데, 본문에서 직접 설명하기엔 애매한 점이 있어 註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교리 교사에 관련된 중요 자료에 대한 설명이 註에 기술되어 있으므로 熟讀하여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람. / 필자 ; 오암 김용천 심고.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의 目次 參考.
1. 들어가는 말.
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資料에 대한 說明
3. 著者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
4. 資料 提供者 金京昌의 神觀과 信仰.
5.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6. 나가는 말.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
일반적으로는 야뢰의 탄생과 1920년대 전후까지의 입교와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고 있다.
야뢰는 1884년 1월 10일에 함경남도 고원군 고원읍 신정리의 평범한 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는 서당교육(書堂先生은 張之綱/자서전)을 받은 뒤, 1896년 무렵 함남 영흥으로 유학을 가서 3년 정도 수학하고 1902년에는 동학에 입도하였다 한다. 1905년에는 평양사범학교의 전신인 평양일어학교 속성과를 졸업하였으나 주로 독학으로 서구와 일본이 수용한 서구의 근대사상을 접해서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동학에 입교 후부터는 동학‧ 천도교를 그의 활동과 사상의 토대로 삼아 신앙과 교의 연구에 시간을 보냈다. 1910년에 천도교의 월간지인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가 발족되자 사원으로 입사하여 천도교사상의 정립과 보급에 힘썼다,
註 00 ; 차웅렬은 야뢰가 동학에 입도한 시기를 ‘포덕 44(1903)년 10월 27일’ 이라고 ‘천도교를 빛낸 별,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신인간 통권 616호 P.107.에서 기술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에 지도자로 참여 했던 손병희(孫秉熙) 등이 일제에 의해 구금된 후, 1919년 9월에 천도교 청년 교리 강연부(靑年敎理講硏部)를 창립시켜 교세확장에 앞장섰고, 1920년에는 청년 교리 강연부를 천도교 청년회로 개편 조직하였다, 1920년에는 6월에는 잡지 종합 월간지『開闢』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있으면서, 1926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회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해석과 민족자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썼다. 1922년 『婦人誌』를 창간하여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여성의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그 후 1923년에는 金起田· 朴來弘 등과 천도교 청년회를 발전적 해체를 하여 天道敎 靑年黨로 창립하였고, 1926년에는 신파 중심의 교화용 월간지인 『新人間』을 창간하고 편집인 및 발행인이 되었다.
이돈화는 천도교 청년당의 조직과 신문화운동을 주도했고, 1920년대 서구 근대철학을 국내에 소개한 천도교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인내천 사상에 입각하여 서구 근대철학을 수용‧ 비판하였고, 동학을 근대적 용어로 인식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는 자민족(自民族) 중심의 민족주의나 계급운동과는 구별되는 ‘전적(全的) 생명’으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여 동학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서구 근대문명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맹목적 추종이나 부정을 지양했다. 천도교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인내천 교의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특히 그는 『개벽』(1925.11)에 발표한 「生의 個的 價値와 全的 價値」라는 글에서 “과학은 우주만유를 부분적으로 분해하여 생각하는 데서 진리를 개적(個的)으로 생각할 뿐에 그치고 전적(全的)으로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사회변혁의 궁극은 인간으로써 우주전체라는 인간의 뿌리를 얻게 함에 있고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전체라는 전적(全的) 생명으로 살아나가는 것에 진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1924년 3월에 발표한 그의 『新人哲學』에서는 수운이「흥비가」에서 말했던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말한 것에 근거하여 ‘무궁한 이 울’ 은 곧 ‘한울’ 을 가리켜 하는 말이요 한울은 ‘크다’라는 뜻의 ‘한’과 우주전체를 가리키는 ‘울’의 합성어라 했다. 한울은 곧 우리라는 뜻으로서 ‘큰 나(大我)’를 지칭하는 말인데, 오늘날 천도교에서 시천주의 천(天)을 한울님이라 하는 것은 이돈화의 이론적 체계화에 힘입은 것이다. 또 이돈화는 『신인철학』에서 水雲의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을 신사회건설로 해석하였다. 이돈화는 후천을 수운의 교의를 바탕으로 신 사회에로의 개벽을 문화 개조의 의미로 해석했다. 이돈화는 이 책을 통해 문화개혁에 의한 신 사회에로의 건설을 강력히 주창했던 것이다.
『신인철학』과 같은 해에 출간된『人乃天要義』는 천도교의 종지(宗旨)인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확립하기 위해 간행한 것으로 ‘인내천’을 천도교의 목적이라고 강조하였다. 序言에서 인내천과 천도, 인내천의 진리, 인내천의 목적, 인내천의 수련, 인내천의 잡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도교의 종지가 인내천이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인내천의 발원’, ‘인내천의 신앙’, ‘인내천의 철리’가 인내천주의의 정신이고, 인내천의 목적은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고 하였다. 이를 토대로 1920년대 천도교 청년단체인 천도교 청년회는 인내천주의를 제창하며 신문화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론적 논거를 제시하였다.
이 책은 인쇄본으로 1권(288쪽). 1924년 3월 30일 개벽사출판부에서 초판을 발행하였다. 인쇄인은 민영순이고, 인쇄소는 대동인쇄주식회사이며, 초판 정가는 70전이다. 1925년 2월(재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관련 자료에서 종합.
註 00 ; 天道敎 敎團의 宗旨로서의 敎義와 그 根源과 變遷過程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자 하시는 분은, 拙著 『東學思想 展開의 諸問題』중의 「人乃天의 참뜻과 유래에 관한 연구」2004, PP.71-138.을 필독하시기 바람.
일제 말기와 해방공간에서의 천도교의 상황을 연구하는 몇몇 연구자들의 종합적으로 의견으로 모아진 내용으로, 이돈화는 1939년부터 1940년 까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산하 국민정신 총동원 천도교연맹 이사를 역임하였고. 1941년 임전대책 협력회의 채권 가두판매대로 활동하고, 이후에도 국민총력 조선연맹 산하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에 협력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좌파의 연합체인 민전에 가담하여 천도교 청우당 활동을 하다가 1946년 4월 북조선 천도교와 청우당의 확장을 위하여 북조선 종리원의 중요 교역자로 교화부분에 책임을 맡아 월북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학계의 일부 연구자는 이돈화가 1946년 4월 미군정의 탄압으로 월북하였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행적을 알 수 없었다고 했고. 일부는 6.25동란 당시 이돈화는 平安南道 陽德郡에 있는 天道敎 陽德修道院에 머물고 있었으며,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갔다는 설이 있어 납북된 것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천도교사상의 정립과 보급에 힘썼으나. 1950년 12월 전후로 환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10대 시절인 1920년대에 읽은『개벽』에 대해서 혁신적인 대중잡지로 높이 평가하면서, 『개벽』의 편집인이자 주요 필진이기도 했던 이돈화에 대해서도 "동학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는데서 주동적 역할을 한 재능 있는 이론가"라고 평했다. 고 기술하고 있다.’/김일성 제1부 항일혁명 편, 제15장 지하전선의 확〉/『세기와 더불어』.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재인용
註 00 ; 일부의 기록에서는 1946년 4월 미군정의 탄압으로 월북하였다. 고 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
註 00 ; 차웅렬은 ‘천도교를 빛낸 별,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에서 아직까지 정확히 확인된 기록이 없는 야뢰의 환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야뢰는 6.25전쟁 때 양덕 천도교 수도원에 있다가 인민군을 따라 자강도 지역까지 후퇴해 갔으나, 거기서 미군의 폭격으로 폭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인용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 저작에 나타난 내용으로, 이 소식을 접한 당시 북한의 최고 지도자들도 야뢰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하니,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천도교로서는 너무도 큰 손실이었다. P.108.’
■ 자강도(慈江道 /Jagangdo) - 광복 후 1949년에 평안북도의 일부 지역과 함경남도의 장진군을 통합하여 새롭게 신설하면서 이 지역의 중심지역인 자성군(慈城郡)의 ‘자’와 강계군(江界郡)의 ‘강’자를 따서 자강도라 명명하였다. 자강도의 동쪽은 량강도(兩江道)와 함경남도, 남쪽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에 접해 있으며, 서쪽과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면적은 16,765㎢이고, 인구는 131만 3,000여 명(2008년 기준)이다. 북동-남서간의 길이는 200㎞이고, 남동-북서간의 길이는 98㎞에 달한다. / 관련 백과사전에서 정리.
李敦化의 號는 야뢰(夜雷), 백두산인(白頭山人), 道號는 긍암(亘菴), 저암(猪岩), 筆名은 창해거사(滄海居士), 創氏名은 히로야마 가즈구사(白山一熊)로, 때로는 白山으로 줄여서 쓰기도 했다.
經歷은 각종 잡지의 창간과 편집을 하였고 이에 수많은 글을 게재하였다. 천도교중앙종리원 주임종리사(主任宗理師)·지도관장(知道觀長)·상주선도사(常住宣道師)·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 歷任함.
著書로는『天道敎創建史』『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東學之人生觀』『敎政雙全』『천도교교리독본』『소설 동학당』 『福念』『天道敎史傳』 『새말』『수도요령』 『천도교요의』 등과 『天道敎會月報』『開闢』『新人間』『婦人誌』 等에 多數의 글을 발표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각종 백과사전 그리고 인명사전과 관련자료 종합.
註 00 ; 號는 相互間에 본이름이나 字 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유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에서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으로, 사람의 別稱이나 筆名 또는 別號나 雅號 등을 가리킨다. 호는 원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옛날에는 아무나 호를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학자나 군인, 예술가 등 능력이 출중하거나 큰 명성을 날린 사람이어야만 호를 가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대개 모든 사람들이 각자 호를 가질 수 있으며, 그것도 주로 유림 모임, 문단 등의 특정 분야에서나 통용되는 경향이 크다.
또한 2종 이상의 이름을 갖는 풍속(複名俗)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禮儀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유교 문화권의 인식 및 풍속(實名敬避俗/타인의 본명을 부르기를 삼가하는 풍습/오암) 때문에 자와 호가 동아시아에서 널리 퍼졌다. 중국의 경우, 호의 사용은 당대(唐代)부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는 보편화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원효(元曉)의 호는 ‘소성거사(小性居士)’, 효자인 성각(聖覺)의 호는 ‘거사(居士)’, 낭산(狼山) 아래 살던 음악가의 호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알 수 있다.
호는 종종 그 사람의 취미나 성격, 능력 등을 반영하는데, 일반적으로 이름과 자는 부모나 연장자가 지어 주지만, 호는 본인이 스스로 또는 친우가 짓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다. 이러한 호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호는 아호(雅號)와 당호(堂號)로 나누기도 한다. 아호는 흔히 詩·文·書·畵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호라는 뜻으로 일컬음이요, 堂號는 본래 집(正堂과 屋宇)의 호를 말함이나, 그 집의 주인을 일컫게도 되어 아호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호를 짓는 기준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호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세 가지 기준을 볼 수 있는데, 신용호(申用浩)는 이 세 가지 기준에,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경지나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와 의지에 따라서 호를 짓기도 한다.”는 한 가지를 더하여, 네 가지 기준으로 들어 말한 바 있다.
① 소처이호(所處以號):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로 호를 삼는 것,
② 소지이호(所志以號):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호를 삼는 것,
③ 소우이호(所遇以號):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는 것,
④ 소축이호(所蓄以號):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것 등의 네 가지가 곧 그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스스로 호를 짓기도 하고, 부모나 스승·친구가 호를 지어주기도 하여, 사람에 따라서는 한 사람이 여러 가지의 호를 쓰기도 한다. 호 이외에도 옛날에는 이름을 귀중하게 여겨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았다. 그래서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갖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명(名)과 호(號)만 남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명(名) - 태어나서 부모가 지어주는 이름이다. 비난할 때 주로 쓴다.
자(字) - 옛날에는 남의 이름(名〕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장가를 가거나 시집간 후에 새로 이름(字)을 지어 본명 대신에 썼다. 본인이 직접 짓기도 한다. 영예롭거나 칭찬할 때 쓴다.
호(號) - 명(名)이나 자(字) 말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짓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서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이름이다.
시(諡) - 죽은 다음에 推尊해서 부르는 이름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관련자료들에서 재정리함.
李敦化의 道號를 多數의 百科事典이나 人名辭典에서 두암(豆菴)이라고 잘못 기록되어있다. 亘의 本字가 亙 字인데 亙菴을 잘못 보고 豆菴이라 한 것으로 추측된다. 夜雷 李敦化의 道號가 豆菴이 아니고 긍암(亘菴)이라는 기록이 있다. 천도교회월보 통권 245호(1931년 5월)에 ‘先聖師의 첫印象과 深刻히 들은 말슴’을 15명의 교단 원로들이 述懷한 글(PP.4-10./ 이 중에 興庵 金庚咸 元老의 글이 먹칠을 하여 삭제된 흔적을 남겼다. P.7.)중에, 夜雷는 道號를 ‘亘菴 李敦化’로(P. 9.上段 左) 적고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이 당시는 道號의 암 자를 庵과 菴을 두루 사용하였는데 庵 字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나는무엇보다도 이말슴이제일좃흡듸다. 『종교가는아무것도 안하는것이종교가라고하는사람이 잇지만은 무슨주의의표준을세워가지고 작구하야된다.』는 말슴도 조케들엇지만은 그보다도『나는나대로하는것이 종교이다.』이말슴이가장쾨합듸다. 참말기고만장한어른입니다.
또한말슴은 리관령감보고『그머리속에시서를빼어라.그래야새것이들어간다니까.』이말슴도 대다니조흔말슴입니다. 누구던지 그럿지요 머릿속에 다른 무엇을가득두고 무엇을들을나면 들려지나요. 라고 하였다.
註 00 ; 亘은 亙의 간단체 亙 뻗칠 긍, 베풀 선, 굳셀 환,
뻗칠 긍, 뻗치다 극진하다(極盡--) 마침내(境), 건너다 이끌다 두루 널리
베풀 선, 베풀다 (선) 선포하다
굳셀 환, 굳세다. 용맹스럽다.
1934년 11월 1일애 발간된『開闢』續刊 第1號(新刊號/PP.27-42)에. 朝鮮三大宗敎功罪論 이란 특집란에 基督敎會, 朝鮮佛敎, 그리고 天道敎 等 三大宗敎의 功罪論이 게재되었다.
이 중 李敦化의 「天道敎의 功過論」에서는 功績만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과오에 대해서는 下略이라고 하고 글을 마침으로서 功過의 실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基督敎會는 과오를, 一. 思想의 沈滯(잘못). 二. 都市中心主義. 三. 暗鬪와 分爭, 四. 迷信的信條 등으로 나누어 상세히 과오를 고백하였고(PP.29-3). 朝鮮佛敎는 五. 結語에서 간략하게나마 과오를 기술하고 있다.(P.36.)
李敦化의 「天道敎의 功過論」이 비록 功績만 설명하고 있지만, 과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추측할 수 있다. 下略 속에 담겨질 수 있는 과오는 천도교의 교화와 포교 등의 종교 활동과 청년당/청우당의 당 활동의 과오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제목에서 주목했던 것은, 천도교 시대의 교리해석에 있어 중심적인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던 상당한 용어들이 야뢰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신, 성사님의 법설의 이해와 교의해석에 있어 공과를 기대했지만 그것에 대한 반성은 없어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 아쉬움 중에 하나는 『東學之人生觀』에 나타난 야뢰 사상의 변화의 동기와 구체적인 이유 그리고 내용의 摘示가 切實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렇게 변했다가 아니라 왜, 어떤 사상적 변화가 동학, 천도교의 교의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변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천도교 교단이 야뢰의 반성을 통하여 변화된 것을 재빨리 이해하고 수용할 수만 있었더라면 오늘의 世界思潮와 竝存했거나 先導的 役割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볼 수밖에 없는 지금의 안타까운 심정에서이다.
註 00; 執筆者와 題目들.
李萬珪의 「基督敎會의 功과 過」 PP.27-31.
金泰洽의 「朝鮮佛敎의 功過論」 PP.32-36.
李敦化의 「天道敎의 功過論」 PP.36-42.
야뢰는 이 글에서 기성 종교의 폐단을 적시하면서 동학, 천도교의 등장의 경이로움과 선후천의 갈아들므로 인한 개벽의 전환점에 천도교의 역량과 나아갈 바를 감격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저들反動派가 엇지하야 東學을恐怖하고 東學을嫉妬하엿는가? 뭇지안어도 거기에는 明白한理由가잇다. 東學思想은 廣濟蒼生. 輔國安民이라는 標榜아래서 自由平等의新思想을 鼓吹하야슴으로써이다. 즉 東學의 自由平等的新思想아래는 저들反動者들이 가지고잇는 旣得權이 危殆하게됨으로써이다. 그리하야 天道敎의70年史는 東學思想과 그를反對하는舊思想이서로 競爭해온 經路를말하는것이니 天道敎의 公罪論도 한이경로로부터 훌터보지안으면 안될줄로생각한다. -중략- 儒敎를밋는다는 家庭의內容을 드러가본다면 철철이 佛堂에가서 祈禱를 들이는일과 한달에도 멧 번式 山神, 地神, 祖靈神, 水神, 地隍神等, 雜神의게 祭祀를 들이고 잇으며 其外에도 巫堂, 卜術, 地師等의 崇拜갓흔것은 일우드러 말할수업스리만치 그敎가만타. 오즉 儒敎를밋는것은 그들의 兩班行勢 儒生行勢를하는 標準에지내지안이하엿고 그 實內容은 全部가 雜神을 崇拜하고왓든것은 事實이다. -중략- 只今도佛敎를밋는寺院에가면 누구나보는바와갓치 山神堂, 七星堂, 地獄堂, 其他雜神, 甚至於厠間神까지잇서 이것을보면 佛堂은 眞正한佛堂이라니보다 雜神堂이라는便이 오히려 名實相符한이름이라할수잇다. -중략- 이点으로본다면 朝鮮은 中國과갓치 世界唯一의 雜神國이었다.
이런 雜神國에서 人乃天이라는 東學思想이이러낫섰다. 東學思想의 첫재條件은 雜神信仰의打破로부터始作되였다. 水雲先生은 經典에다 露骨로 雜神信仰을 痛罵하얏을뿐안이라. 實際行爲에서 雜神信仰을 破壞한것이다. 그럼으로 當時 東學을 밋는東學敎徒로서는 첫재條件이 家庭에잇든 雜神信仰物을 불로살나야하고 巫堂卜術을 들이지안어야하고 風水 四柱等의 迷信을 打破하여야된다는것이다. 그래서 東學사상이 이르는곳에는 思想淸潔이 第一條件이 되여젔다. 思想은思想으로 막어야한다는 眞言은 實로 東學運動에서 明白히 볼수잇섯다. / PP.38-39.
이 글은 80여 년 전에 쓰여진 글로 천도교의 자랑스러운 功績의 하나로 야뢰는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旣成宗敎의 積弊를 우리는 지금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80 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단 안에 巫俗的인 思考나 삶이 없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無爲而化와 無窮造化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 말을 통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야뢰가 지적한 ‘이런 雜神國에서 人乃天이라는 東學思想이이러낫섰다. 東學思想의 첫재條件은 雜神信仰의打破로부터始作되였다. 水雲先生은 經典에다 露骨로 雜神信仰을 痛罵하얏을뿐안이라. 實際行爲에서 雜神信仰을 破壞한것이다. 그럼으로 當時 東學을 밋는東學敎徒로서는 첫재條件이 家庭에잇든 雜神信仰物을 불로살나야하고 巫堂卜術을 들이지안어야하고 風水 四柱等의 迷信을 打破하여야된다는것이다. 그래서 東學사상이 이르는곳에는 思想淸潔이 第一條件이 되여젔다. 思想은思想으로 막어야한다는 眞言은 實로 東學運動에서 明白히 볼수잇섯다.’ 는 말씀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고 진정한 천도교인이라면, 진정으로 독실한 천도교인이 되고 싶다면 수운대신사의 말씀을 實踐躬行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나 야뢰는 위에서 제시한 人乃天이라는 東學思想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과 모두가 동참하여 줄 것을 강경하게 촉구하면서 우리가 나아갈 바를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成敗利鈍을 關係치안코 그저 人間의本務와 天職으로 根氣와 忍耐와 誠敬信을가지고 오늘일은 오늘하면서 永遠에理想을向해서 나아갈따름입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깊이 돌아봐야 할 것이다.
「偉大한理想下에서 嚴正한現實을 開拓하자」
는 것이다. 偉大한理想이라함은 天道敎가目的한 地上天國運動을이름이며 嚴正한現實이라함은 世界及朝鮮의 現實을 잘洞察하야가지고 그에適應한活動을하야 가면서 段一段으로 偉大한 理想을 向하야 거러나아가자는 意味었다.
「우리東學運動은 萬里에 初步도되지못함니다. 우리의功은 아즉도 압헤 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成敗利鈍을 關係치안코 그저 人間의本務와 天職으로 根氣와 忍耐와 誠敬信을가지고 오늘일은 오늘하면서 永遠에理想을向해서 나아갈따름입니다」-(下略)- / P. 42.
「天道敎의 功過論」에서 天道敎의 功過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이해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했지만, 李敦化가 夜雷라는 號를 쓰게 된 心情的 動機를 다음 글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러튼 思想界에 녯업든 새宗敎의이름 새思想의부르지짐은 實로靑天霹靂的이엇다. 즉 東學의새소리는 忽然一聲半夜雷의感이 업지안엇섯다. 저들民衆으로 東學에對해서 驚異의態를가지게될것은 極히當然한일이엿다. -중략- 이러한驚異의感情은 天道敎七十年史에서 如實히볼수잇으니 距今七十五年前 李朝哲宗十년 庚申四月五日에慶州一隅에서 崔水雲先生의 부르지짐으로 나타난 東學의소리는 當時朝鮮社會에 空前한 驚異의 天雷를 던진것이엇다.’/李敦化「天道敎의 功過論」『開闢』 續刊 제1호(新刊號/ 1934-11-01) /P.37.
註 00 ; 차웅렬은 이돈화의 호인 야뢰(夜雷)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야뢰는 잠꼬대가 유난히 심했던 것 같다.지방 순회를 다니면서 피공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 때면 한참을 자다가 별안간에 큰 소리를 지르고 또 코를 몹시 골기 때문에 옆에서 같이 자는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다. 그것이 야뢰(夜雷 밤 뇌성)이라는 그의 호가 생긴 인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신인간 통권616호 천도교를 빛낸 별,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P.106./ 2001.12/PP.102-108.
註 00 ; 筆者가 直接 確認 拔萃한 筆名의 最初 使用時期.
滄海居士라는 筆名은『천도교회월보』통권 제88호. 1917. ‘追僧과 活僧’에서 처음 사용.
夜雷는 『천도교회월보』통권 제89호. 1917. ‘永久之愛妻P.29.’이라는 글에 처음 사용하였다. 한 號에 두 개 이상의 글을 게재할 때 여러 개의 필명을 사용함.
猪菴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01호. 1919. ‘祈禱’에서 처음 사용함.
白頭山人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04호. 1919. ‘余의 告白’에서 처음 사용함.
亘菴의 사용은『 新人間』통권 136호/1939.부터 150호/1940.까지 계속 사용함. 통권 144호는 제외.
白山一熊은 『新人間』통권 150호. 1940.부터 시작되었다.
白山은 『新人間』통권 167호. 1942.에서 처음 사용한 이후 白山一熊 을 白山 으로 줄여서 썼다.
차웅렬은 '이돈화는 야뢰 외에도 백두산인(白頭山人), 저암(猪岩) 창해거사(滄海居士), 단암(旦菴) 등의 필명을 썼다. 야뢰의 글은 천도교 교리를 철학화하는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자라기보다 실천적 사색인이었고 우리 민족의 지도이념을 모색한 종교철학적 계몽운동가였으며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전개에 힘쓴 천도교 이론가였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천도교를 빛낸 별,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P.102./인간 통권616호/2001.12/PP.102-108
註 00 ; 단암(旦菴)은 긍암(亘菴)의 잘못이다.
차웅렬은 계속해서 이돈화가 차지하고 있는 1920년대를 전후한 그의 교단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일제 총독 당국의『개벽』지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져서 -중략-이러한 상황에서 야뢰는 비상한 각오로 첫 천도교리연구서 『인내천요의(要義)』『신인철학』을 포덕65(1924)년 3월 30일자로 발간했다. 이로써 아직 『동경대전』과『용담유사』의 경전만 있고 체계적 교리로 이론화되지 못했던 동학사상은 비로소 종교철학적 탐구의 경지를 열어 가게 되었다. 수운대신사나 해월신사 때에도 손천민 등 유학자가 경전 풀이를 했고, 의암성사 때에는 양한묵 같은 유학자가 한학적 지식으로 이 방면에 연구 성과를 축적해왔으나, 천도교 교리를 근대적 종교이론으로 체계화하는 데는 1920년대 야뢰의 교리 해석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뢰는 기독교 교리 형성사상(形成史上)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으로 천도교 이론과 해석 정립의 큰일을 하신 선각자이시다.’/PP.104-105. -중략- 야뢰 철학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한학 교양을 기초로 하되 멀리 서구철학사상을 주체적으로 이해해서 교리 해석에 참고도 하고 수용한 점이다. 그는 ‘사람성(性) 자연(自然)’ 등의 독특한 용어를 창안하여 이를 그의 인내천 해석과 합쳤으며 ‘다시 개벽’ ‘후천개벽’이란 기본개념에 근대적 혁명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3개 항목으로 체계화했다. ‘지기일원론’ ‘교정쌍전’ 등도 서양의 철학을 수용한 흥미 있는 본보기이다. P.105.’라고 하여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야뢰의 역할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註 00 ; 포덕65(1924)년 3월 30일. 같은 날자로 『水雲心法講義』도 발간됐다.
註 00 ; 여기서 3개 항목으로 체계화란,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의미한다./ 『신인철학』 P.147. 水雲主義 圖形 참조
이돈화의 생애에 대하여 야뢰의 사상과 교단에서의 역할에 대하여 연구하는 결과물들 중에 소개된 몇 개의 자료들에 의한 기술이외에 정확한 것은 없다. 야뢰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인 허 수에 의해 정리된 연대기적인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註 00 ; 許 洙의 學位論文의 附錄 1.로 정리된 이돈화의 행적과 저작활동./ PP.171-172.
1984년 1월. 1세. 함경남도 고원군 출생.
1984년 11세. 서재 훈장에게서 한학교육.
1987년 14세. 영흥에서 留學生活.
1900년 17세. 결혼.
1901년 봄 18세. 가출. 황해도 평안남도 방향.
1903년 20세. 동학입교.
1905년 22세. 평양일어학교 속성과 입학.
1911년 5월 28세. 「宗敎統一은 自然의 勢」(天道敎會月報)
1918년 11월. 35세. 「信仰性과 社會性」(天道敎會月報)
1920년 4월 25일 37세. 天道敎靑年會를 주도적으로 조직.
1920년 6월 37세. 『開闢』창간 편집인.
1920년 12월 37세. 「文化主義와 人格上 平等」(『開闢』)
1921년 4월 38세. 「사람性의 解放과 사람性의 自然主義」(『開闢』)
1921년 11월 38세. 「時代精神에 合一된 사람性主義」(『開闢』)
1923년 1월. 40세. 汎人間的 民族主義.(『開闢』)
1923년 4월. 40세. 宗理師로 선출.
1923년 9월. 40세. 天道敎靑年黨 조직의 상무위원.
1924년 3월. 41세. 『人乃天要義』 간행.
1925년 12월. 42세. 『朝鮮農民』의 편집겸발행인.
1926년 3월. 43세. 『水雲心法講義』 간행.
1926년 7월. 43세. 「盜跖」연재.(『開闢』)
1927년 3월 22일. 44세. 천도교청년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1928년 8월 16일. 45세. 천도교강사양성강습회 강의담당.
1931년 8월. 48세. 『新人哲學』간행.
1933년. 50세. 『天道敎創建史』간행.
1934년 11월 5일. 51세. 최 린의 時中會에 참가.
1940년 4월 4일. 57세. 천도교 신구파 합동 선언. ‘상주선도사’로 선출.
1941년 6월. 58세. 夫餘神宮公事에 참여.
1945년 2월. 62세. 『東學之人生觀』저술.
1946년 64세. 『黨志』발행.
1947년 10월 5일. 65세. 『敎政雙全』 발행.
1948년 2월 17일. 66세. ‘3.1재현운동’ 모의.
1950년 67세. 평양근처에서 미공군 공습에 爆死(?)
■ 기록상에 차이가 있는 것./ 吾菴 정리.
1. 야뢰의 입교는 1902년으로 기록된 것이 많음.
2. 『水雲心法講義』은 1924년 3월에 간행됨.
3. 『新人哲學』은 1924년 3월에 간행됨.
4. 야뢰는 1950년 6.25사변 당시 평안남도 양덕군 천도교 수도원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기록들과, 동년 12월경에 자강도 근처에서 미 공군의 공습으로 爆死했다는 기록이 있음.
야뢰가 직접 자신에 대한 자서전 형태의 글인 ‘나의 半生 -自敍傳’이란 고백이 『天道敎會月報』 통권 249-251호/1931.9-11월호에 실려 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나의 半生續’이 『天道敎會月報』통권 253호/1932.1월호에 시렸다. 그러나 이 4편의 글에서 밝혀진 것은 야뢰가 태어난 고장의 정경과 황해도와 평안도를 두루 방랑과 동학에 입도를 하게 된 동기와 정경이 그려져 있고, 敎團史에 관련된, 1900년도 전후의 교단의 사정과 急變하는 周邊國家의 潮流에 對處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李仁淑으로 하여금 당시 議政大臣 尹容.善에게 보낸 上疏文 全文을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하여 기록된 자료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전략- 出生地말슴입니까 그럼그것붓허이약기를 하여야 順序겟습니다. 여러분이 地圖를 노코한번보면알려니와 白頭山中樞山脉이 咸鏡沿岸을 휘-싸고돌적에 北靑에厚峙嶺 咸興에黃草嶺 永興에狼林山 高原에載靈山 文川에頭流山 安邊에鐵嶺山等이되야 東海와西海의 分水嶺을일어노치안엇습니까. 그런데 이제말하고저하는 으로 말하면 高原하고도載靈山밋헤 花南村이라는 山谷幽峽입니다. 이곳으로말하면 嶺넘어가 平安道陽德이요, 江건너가文川이요, 山뒤가永興입니다.
中間에는載靈山에서 發源한크도족도안이한花南江 이 晝夜로 自然의노래를부르면서 不斷히흘어있는 太古의村落이엇습니다. P.20./천도교회월보 통권 249호/1931.9월호 /PP.19-27.
出家하여 放浪하는 중에 여러 지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천도교회월보 통권 250호/1931.10월호 /PP.23-30.
-전략- 그들의待人接物하는擧動이야말로 道德君子이엇다. 世上이다-亡해가는이末世에 이럿듯이待人接物하는道가 생길줄을누가헤알려스랴. 그들은 누구를만나든지 依例히鞠躬拜禮하고 서로 서로부르기를接長님이라 稱하고貧富貴賤老少의區別이업시 平等으로敬語를쓰고 모든 것에絶對信用이잇고 말에絶對秘密을직히고 指目을避하게爲하야는낫에는집에잇고 밤이면十里二十里를혜이지안코秘密히傳道에熱中하고잇다. 이光景을본나는再三再四-驚歎함을마지하지인이하엿다. 내가처음으로首接主李正芳氏를뵈온즉 그는나를甚히사랑하야 대번에우리敎에 큰일군하나를 어덧다하야닭을잡고국수를눌러먹엇다. 그들은別로敎理를說明하는배업고 압헤조흔일이잇다는것이 한語套이엇다. 그러나그들의말업는가운데는 엇든和氣融融한道氣가天地에가득한듯보인다. 그들은實로伏龍鳳雛와갓치 무리에出家한것이나타난다. 나는이길에여러道人宅신세를지고 집에돌아와서는 布德에從事한것이한달안에 接主가되었다. P. 36./천도교회월보 통권 251호/1931.11월호 /PP.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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