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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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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94회   작성일Date 17-02-20 21:47

    본문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3)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당의 방향이 청년당의 기본 목적에 따라 3대 개벽과 지상천국건설의 방향이나 내용이 변하게 된 상황과 변천한 내용이 『天道敎靑年黨小史』에 기술되어 있다. 창당 10주년을 맞은 시대적 상황과 교단의 대내외적인 변화를 수용하여 신문화운동에 매진하려 했던 시기가 1935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30년대의 변화를, 천도교가 有機的 前衛體를 組織하여 天道敎靑年黨의 운동을 통하여 실현하려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천도교의 30년대의 변화를 의심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趙基栞은 第二章 黨의 任務. 二. 天道敎와 靑年黨에서 天道敎와 黨과의 關係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天道敎自體가 한個의黨이어늘 또天道敎靑年黨이라는 別個의機關을가지는것은 무슨뜻이냐 勿論이러케생각할수잇다. 그러므로 天道敎靑年黨이라함은 秋毫라도 天道敎그自體의黨的 意義를慊然함이아니요, 徹頭徹尾一元的體系임은勿論인바 이를한層더 積極的 具體的으로 進展發揮키爲한 天道敎自體의 一種前衛組織이다. ‘水不離波波是水’라는말과같이 天道敎를떠나서는 靑年黨이잇을수없는것이며 靑年黨의運動은 곳天道敎運動의하나이다. (중략) 要컨대 이와같은靑年黨은 우리敎內에 언제든지 잇을것이다. 있어야될것이다. 더구나 이즘과같은過渡期에잇어 一層重要한意義를가지는것이事實이며 이리하던지 저리하던지不拘하고 黨의一體가 天道敎의 全的意志 乃至範疇를 버서나서있지못할것은勿論이다.’/原文의 表記대로./『天道敎靑年黨小史』PP. 23-25.

    註 00 ; 天道敎靑年黨憲./原文의 表記대로.

    第1條. 天道敎의主義目的을社會的으로達成코저이에始終할同德으로써한個有機的前衛體를組織하야그名稱을天道敎靑年黨이라함.

    第2條. 本黨의主義綱領은아래와같음

    主義 地上天國建設.

    綱領 사람自然性에맞는(畧)實現.

    事人如天精神에맞는새倫理의樹立.

    第3條 本黨은 前條의主義綱領을實現코저精神開闢(畧)을期 함./『天道敎靑年黨小史』P.102.)

    ※ 당헌을 기술하는 중에 (畧)이라 한 것은, 日帝의 强壓的인 民族宗敎 抹殺政策으로 인한 생략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오암.

    天道敎와 黨과의 關係를 위의 설명과 같이 설정하고 당의 운영을 박차를 가하여 10년을 달려왔지만, 日帝의 强壓的인 民族宗敎 抹殺政策으로 인하여 교단은 생각지도 못한 시대적 상황에서 오는 변화를 수용하여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교단은 교단대로 신앙생활과 교의해석의 어느 정도를 시대적 상황에 따르는 변화를 가져와야 했고, 예를 들면 「안심가」에서의 일본과 관련된 부분의 삭제할 수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으로 서는 당명을 교단내의 신구파의 갈등에 따라 또는 식민지 치하에서의 굴욕적인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었고 드디어 1939. 4. 3-4. 日帝의 强壓으로 創立 16年만에 天道敎靑年黨 解體를 선언하였다. 매우 참담한 일이었다. 당의 해체가 의미하는 것은. 天道敎와 黨과의 關係를 ‘天道敎 靑年黨이라함은 秋毫라도 天道敎 그 自體의 黨的 意義를 慊然함이 아니요, 徹頭徹尾 一元的 體系임은 勿論인 바 이를 한 層 더 積極的 具體的으로 進展發揮키 爲한 天道敎 自體의 一種 前衛組織이다. ‘水不離波波是水’라는 말과 같이 天道敎를 떠나서는 靑年黨이 잇을 수 없는 것이며 靑年黨의 運動은 곳 天道敎運動의 하나이다.’라는 선언에 입장에서 보면 교단의 해체나 다름이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천도교의 1차적인 暗黑期에 들어갔다고 단언할 수 있다.

    註 00 ; 경전에서 삭제를 강요한 「안심가」중의 내용.

    개같은 왜적(倭賊)놈아 너희신명 돌아보라

    너희역시 하륙(下陸)해서 무슨은덕(恩德) 있었던고

    전세임진(前世壬辰) 그때라도 오성한음(熬城漢陰) 없었으면

    옥새보전(玉璽保全) 뉘가할꼬 아국명현(我國名賢) 다시없다. -중략-

    개같은 왜적놈이 전세임진 왔다가서

    술싼일 못했다고 쇠술로 안먹는줄

    세상사람 뉘가알꼬 그역시(亦是) 원수(怨讐)로다. -중략-.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받아

    일야(一夜)에 멸(滅)하고서 전지무궁(傳之無窮) 하여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盟誓)하고 한(汗)의원수(怨讐) 갚아보세.

    해방과 더불어 천도교는 부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명분없는 이유로 해체되었던 天道敎靑友黨이 해방과 함께 1945. 9. 14일에 復活하였으나, 4년 만에 1949년 12월 26일에 天道敎靑友黨이 單政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李承晩 政權이 左翼으로 몰아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또다시 强制로 解散시켜 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짐으로 인하여 교단이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강제해산을 당하고,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도 해산을 당하는 이 비참함을 극복해야 하는 교단에게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 수습이 어렵게 되는 제2차 암흑기에 진입하는 명암이 드리워졌다. 혹시나 이승만 정권과 맥아더 사령부가 민족주의 집단의 강세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천도교 청우당의 해체를 강력히 추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들은 일제의 강력한 식민지하에서 진행되었던 민족종교의 탄압 속에서도 굴복함이 없이 천도교 교단 주도로 기획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기미년 3월 1일에 독립만세 운동을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게 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전위단체인 천도교 청년당/청우당을 통하여 신문화운동을 7개 부문을 통하여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하여 민족문화의 저력과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자부심을 심어주어 교도 300여만의 대종단이 되었던 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다 그 당시의 천도교 청우당의 부활을 위하여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결성하였고 초기 당원의 수가 일 년 만에 50만 명이 넘는 거대정당이 되어가는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하여 강인철이 밝힌 천도교 청우당의 부활로 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해방직후 천도교 지도자들은 각 지역에서 식민지 시대 말기 해산된 천도교 청우당 조직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45년 9월 14일에 당을 정식으로 부활시켰다.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천도교 청우당 부활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복원’ 혹은 ‘부활’이라고는 하지만, 해방 후 등장한 천도교 청우당은 정당 정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 시대의 정치결사와는 질이 다른 정당 조직이었다. 천도교 청우당은 창당한 지 불과 1년 만에 당원 50만 명을 자랑하는 거대정당으로 성장했다.’/PP, 102-103./강인철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1945 -2012』.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천도교 청우당을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천도교단의 융성 발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 銳鋒을 잘라버렸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만큼 이승만 정권과 맥아더 사령부는 민족종교로서의 자부심과 애국애족의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는 백절불굴의 천도교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청우당의 저력을 두려워했던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는 그 후 지속적으로 왜래 종교인 기독교를 음으로 양으로 공사를 막론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오늘의 대 교단을 만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외부적으로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설 자리를 철저히 봉쇄되어 그 동력을 잃은 것이 가장 치명적인 상황의 지속인데다가, 안으로는 교단마저 신구파의 갈등으로 서서히 퇴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악조건에 더하여, 북한에서 1948년에 三一再顯運動과 靈友會事件이 일어났지만 실패로 돌아가 많은 지도자와 교인들이 사형과 중벌을 받은 일이 벌어져, 교단이 현대사의 중심에서 밀러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註 00 ; 單選單政 反對運動의 顚末

    信託統治 反對運動이란 1945년 12월 28일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 안에 대하여 전 국민이 반대를 했던 전국적으로 펼쳐진 광범위한 운동으로, 이 운동의 역사적 배경은 세계 2차 대전의 종전으로 인하여 피 식민지 국가이었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대한 종전 후 처리문제가 연합국의 중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반도에 관련된 4개국(미국· 영국· 중국· 소련)들이 최고 5년 기간의 신탁통치 안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광복의 기쁨으로 들떠 있던 우리 국민들은 즉각 거세게 반발하게 되었다.

    36년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에게 독립자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는 지상명제였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이든 또다시 외국의 지배가 연장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국민감정이었다. 한국의 독립은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 등으로 여러 차례 공언되었지만, 광복 직후 미소의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이 확정되고 남과 북에서 모두 군정이 개시되자 남북 분단이 고착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전해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안의 결정이라는 소식은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현실화시켰다. 아울러 민족적 자존심에도 크게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신탁통치 안이 보도된 1945년 12월 28일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전국적인 반탁운동이 시작되었다.

    비상 국민회의에서는 최고 정무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이승만(李承晩)· 김구 두 지도자에게 일임하였다. 그러나 혁신 계열 및 좌익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비상 국민회의는 민족진영만으로 구성되고 이것이 전국적인 반탁운동 전개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비상 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28명)는 1946년 2월 14일 미군정 고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으로 개편되어 일종의 입법기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비상 국민회의는 존속되어, 1947년 2월 16일 제2차 본회의를 열고 국민의회로 개칭하는 한편,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광복 직후 이승만 주도하에 결성되었던 독립촉성중앙위원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 국민회로 개칭되었고, 이승만은 이를 중심으로 하여 자율정부 수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이처럼 신탁통치반대, 즉 반탁운동은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우익 및 민족진영에 의하여 주도되어 나갔으나, 반탁운동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문제를 둘러싸고 결국에는 이승만의 단정(단독정부)노선과 김구의 단정불가·통일정부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코뮤니케 제5호’에 대한 하지의 해석을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의견대립이 심각해져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6월 3일 이른바 ‘정읍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시작하였다. 반탁운동 속에서도 노선 대립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6월 27일에는 독립촉성 국민회를 중심으로 민족통일 총본부를 구성하여 명분상으로 남북 통일정부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내세웠다.

    이승만의 단정노선에 대항하여 김구는 반탁· 반단정 노선을 분명히 하고 나선 셈이었지만 이것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기조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남한단정노선으로 미군정의 정책이 선회한 것이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민족주체성이라는 명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였지만, 광복 뒤 냉전의 각축장이었던 한반도에서의 복잡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대한 대응책으로서는 상당한 한계를 갖는 정치운동이기도 하였다.

    ‘ 미군정은 1947년 말 이후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예상하면서, 그가 세울 단독정부의 성격이 “심지어 우리도 반동적인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비평했다. 미국에게는 이승만이 유일한 대안이긴 했지만, 그의 극렬한 반소반북주의 성향은 일정하게 제어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적 행보가 대중적 지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미국의 이러한 우려는 김구가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와 연대하여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자 즉각 현실화했다. 남북협상과 김구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고양되면서 이승만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했다’/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6) - 남북 단정 수립과 김구에서

    ‘김구 김규식 두 사람은 5월 7일에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연석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위원회를 설치하고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음을 밝혔지만--- 또 두 김은 북조선 당국자도 절대 단정을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하였음을 밝혔으나 그것은 비현실적인 낙관이었다. 두 김은 공동성명서가 발표되기 직전인 4월 28-29일 열린 북조선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원안대로 통과시킨 것에 대하여---그것은 북에서 단정수립을 전제한 것이었다.’ / 서중석 『한국현대 민족운동 연구』PP.55-56.

    ‘1946년 대구 10.1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은 독립을 방해하는 미군정이 실시하려는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단선단정 반대를 위한 대중 운동이었다.’/당시 미 국무차관보 존 디. 히카슨의 폭로한 내용 중‘에서.

    북한 측에서 6월 2차 회담을 해주(海州)에서 열자고 제의해 왔으나 이번에는 '북측에서 홍명희를 대표로 보내라' 고 회신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어 백범의 통일 노력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범은 남북 정부 모두의 냉대를 받았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건국실천원 양성소 활동까지 탄압을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민족의 비극이 아니던가. / 평전 - 『김창숙선생 생애』 중, ‘단정수립 반대운동’과 성균관 복원

    김구 김규식이 단선단정을 반대하기 위한 남북협상 일정의 요약.

    1월 27일 : 김구 김규식. 유엔 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2월 03일 : 이승만, 단독선거 촉구 성명(이승만. 단독선거를 위한 다양한 교섭에 2월 26일 유엔한국위원단 메논 위원장의 보고를 심의한 유엔소총회가 단선을 결의했고, 3월 1일 하지 사령관이 단선 실시를 발표)

    2월 04일 :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에 합의.

    2월 10일 : 김구,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성명.

    2월 16일 : 김구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 협상 제의.

    2월 27일 : 김규식을 비롯한 단선 반대자 20여명 입법 의원 탈퇴.

    3월 12일 :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단선 불참 공동성명.

    3월 25일 : 북한, 남북회담 안 수락 발표.

    3월 31일 : 김구 김규식, 남북 왕복 문서 공개.

    4월 03일 : 유림이 주도한 통일독립 운동자 협의회 결성, 남북협상지원.

    4월 18일 : 문인 108명, 남북 협상 지지 성명.

    4월 19일 : 김구, 평양 남북 대표자 회의 참석차 출발 (김규식 21일 출발.)

    5월 05일 : 김구 김규식, 서울 귀환.

    [참고문헌]

    송남헌, 『해방삼십년사』까치, 1985.

    송건호 외,『해방40년의 재인식』 Ⅰ·Ⅱ. 돌베개, 1985.

    Cummings,B. 외, 『분단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1983.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6) - 남북 단정 수립과 김구. 에서

    서중석 『한국현대 민족운동 연구』PP.55-56.

    /http://blog.naver.com/digitalan/10097213660/ 당시 미 국무차관보 존 디. 히카슨의 폭로한 내용 중 에서

    평전 - 『김창숙선생 생애』 중, ‘단정수립 반대운동’과 성균관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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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창은「夜雷 李敦化」라는 글에서 이돈화의 사상 형성과정을 아래의 참고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규태, 『천도교의 민족운동 연구』,선인, 2006.

    이돈화, 『시대정신에 합일된 사람성(性) 주의(외)』, 이돈화 논설선집, 범우비평한국문학 38, 조남현 편, 범우사, 2007.

    최수일, 『「개벽」연구』, 소명출판, 2008.

    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한울, 2009.

    허 수, 『이돈화 연구. 종교와 사회의 경계』, 역사비평사, 2011.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이대출판부, 2012.

    이돈화, 『동학당』,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4.

    ‘이돈화의 사상은 3단계로 변화하는데, 1기는 종교⟶사회(1910년대), 2기는 종교적 사회개조(1920년대 즉,『개벽』시대), 3기는 사회⟶종교(1930년대 이후)의 양상을 보인다.

    그는 1910년대 일본의 현상즉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종교• 사회를 실재• 본질,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현상즉실재론은 일본 메이지 시대 철학의 주류로서, 현상과 실재를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상즉(相卽)’의 관계로 보았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이노우에 테쓰지로(井上哲次郞). 1910〜1920년대 초에 형성된 이돈화 사상의 핵심은 ‘사람性主義’인데, 이는 ‘우주-인간’과 ‘개인-사회’를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삼고 있다. 동학은 “성리학이라는 ‘천지-자기형 코스모로지’ 안에서 발생한 이단”이다(야스마루 요시오, 安本良夫). 서구 근대의 이원론적 사유와 구별되는 동학의 ‘侍天主’ ‘人乃天‘ 이란 성리학의 ’天人合一‘的 사유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야스마루는 서양 근대의 이원론적 사유에 대해 근세적 코스모로지의 一元論的 사유가 대립할 경우, 결국 일원론적 사유는 二元論的 사유에 패배하게 되고, 현실에 대한 根源的 否定性을 갖게 되는 상황을 ’종교적 근대‘의 출발점으로 본다. 일본의 근대종교인 “天理敎, 金光敎, 大本敎의 교주들은 대부분 無學者들인데 비해, 崔濟愚나 拜上帝敎〔태평천국〕의 洪秀全은 儒學者였으며 기독교와 서구 세력의 압박을 강하게 의식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혁명사상을 만들었다.”

    註 00 ; 필자는 이 글에서 사용된 人名과 순 한글로 표기된 단어들 중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용어들은 한자어로 바꿨다.

    註 00 ; 상즉(相卽)의 관계 - 불교의 용어로, 두 가지의 개념이나 현상이 서로 융합하여 무차별 일체(無差別一體)가 되어 있는 관계를 말한다.

    註 00 ; 코스모로지(cosmology / 宇宙論) - 모든 사물과 인간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장(場)으로서의 우주의 기원· 구조· 생성· 변화에 관한 논리로, 자연과학 중 천문학과 물리학을 함께 사용하며 물리적 우주를 하나로 통합된 전체로 파악하려는 연구 분야이다.

    서양에서의 우주론의 기원과 발달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주론(宇宙論, 그리스어:κοσμολογία)이란, 전체적인 우주, 나아가서 그 내부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正量的(주로 수학적)인 연구를 말한다. 이 단어는 최근(일반 우주론 - Cosmologia Generalis, 크리스챤 볼프, 1730년)에 생겼지만, 우주에 대한 연구는 과학, 철학, 비밀주의, 종교와 관련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사회와 발전된 헬레니즘 문명 이전까지 우주론과 종교는 분리되지 않았으며, 신화의 주요부분을 이루었다. 과학적 우주론의 발전은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구형 지구의 개념을 도입하고, 바빌로니아인이나 이집트인과는 달리 자연법칙의 조화관계에 의해 천체의 운동이 지배된다고 가정한 BC 6세기에 시작되었다. 뒤이어 무한한 원자 우주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나왔는데, 무한한 세계는 생명체로 가득 찬 원자의 우연한 집합체의 결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 우주는 BC 4세기에 출현했다. 이 우주에서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행성들이 반투명한 구에 붙어 공전하며, 가장 바깥쪽 구에는 붙박이 별이 매달려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발전을 거듭하여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으로 절정에 달했다. 13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채택되었으며, 단테에 의해 〈신곡 Divine Comedy〉에 묘사되기도 했다. 2번째 시기는 코페르니쿠스의 회전론에 의해 선도되었다(코페르니쿠스 체계). 16세기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우주를 제안하여 고대의 사상을 부활시켰으나, 17세기에는 훗날 1900년대 초까지 성행했던 역학적이고 무한한 뉴턴 우주로 바뀌었다.

    18세기 중반 토머스 라이트는 우주가 수많은 은하로 이루어졌다는 개념을 제안했으며, 윌리엄 허셜과 뒤이은 다른 많은 천문학자들은 별과 우리은하(지구가 속한 은하)에 대한 연구를 크게 발전시켰다. 3번째 시기는 20세기 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제시하고 그것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시작되었다. 또한 동시에 베스토 슬라이퍼가 외부은하의 적색편이를 발견했고 은하계 밖의 성운이 우리은하와 같은 종류의 은하임을 보였으며 에드윈 허블이 이러한 은하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기 시작하는 등 천문학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발견과 함께 빌렘 드 지터, 알렉산더 프리드만, 조르주 르메트르가 일반상대성이론을 우주론에 적용, 결국에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견해가 나타났다(팽창우주). 현재 우주론에 대한 기본 전제는 우주가 공간에서 균질(어떤 시간에 모든 장소가 평균적으로 같음)하고 물리법칙이 어디에서나 똑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관측된 우주의 등방성(모든 방향이 평균적으로 같음)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우주론에 적용된 일반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공간이 동역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균일하게 굽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곡률이 음(쌍곡형)이거나 0(편평한)이면 우주는 열려 있고 공간은 무한하며, 곡률이 양(구형)이면 우주는 닫혀 있고 공간은 유한하다. 공간은 스스로 팽창하고, 공간에 있는 은하들이 서로 멀어진다. 같이 움직이는 관측자에 대한 상대적인 모든 후퇴속도는 허블 법칙(→ 허블 상수)에 따르며, 이들의 거리증가는 빛의 속도에 제한받지 않는다(허블 상수). 빛은 팽창하는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 동안 점차 파장이 늘어난다. 따라서 먼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더 긴 파장으로 도달하게 되며, 이것이 우주론적 적색편이의 원인이다. 팽창은 우주의 기원이 약 100억 년 전의 밀집된 상태(대폭발)라는 것을 나타낸다.

    대폭발 이론을 반대하는 정상우주론은 대폭발의 잔광이라고 생각되는 초단파 배경복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반박당했다. 약 3K(켈빈) 온도를 갖는 이러한 열적 복사는 1950년대초 조지 가모브가 예측했으며, 1965년 아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이 발견했다. 이때부터 약 10만 년 동안 지속되었을 초기우주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서양의 우주론과는 다른 동양에서의 우주론의 기원과 발달과정은 다음과 같다. 특히, 유학의 우주론은 『역전/易傳』을 근거로 노자(老子)와 음양가(陰陽家)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우주는 일반적으로 공간적인 시각에서 이해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시간적 의미까지도 포괄한다.

    『상산전집/象山全集』 잡설(雜說)의 “사방과 상하를 우(宇)라 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주(宙)라 한다(四方上下曰宇 往古來今曰宙).”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주는 세계의 총체 또는 근원을 지칭하는 상제· 천· 천지· 도· 자연 등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동양에서의 우주론의 시작은 중국 춘추시대 이후 인문주의적인 사고의 발전으로 상당히 일찍 자연주의적인 물질적 우주관으로 전환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노자의 자연주의적 우주론과 『易傳』의 천인론(天人論)에 입각한 우주론이다. 여기에 전국시대에 형성된 음양론자의 우주론이 결합되어, 중국 우주론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천지보다 앞선 우주의 근원을 도라고 규정하고, 이 도가 生成論的으로 전개되어 우주의 만물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易傳』은 존재 세계의 변화를 중시, 그 변화가 음양의 구조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그 전개 과정을 태극(太極)→음양(陰陽)→사상(四象)→팔괘(八卦)의 도식으로 설명하였다(周易 繫辭 上).

    『道德經』이나 『易傳』에서의 우주론은 생성론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자연·태극 등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존재론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들의 관심은 주로 우주의 기원과 그 생성·변화의 근본적인 힘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해명하는 데 치중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전국시대에 나타난 추연(騶衍) 등의 음양론자들은 우주의 변화를 循環論的인 시각에서 파악, 그 변화를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克)으로 이해하였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이런 여러 사상들은 하나의 중국적인 우주론으로 체계화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天人論의 입장에서 우주론을 전개한 동중서(董仲舒)와 노장적인 성격이 강한 회남자(淮南子)의 사상이다. 특히 동중서는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역사철학적인 시각에서 유가의 천인론과 음양론자의 우주관을 결합, 인간을 소우주로, 세계를 대우주로 보는 독특한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우주론은 송대 성리학에 오면 태극인 이(理)와 음양오행인 기(氣)의 결합에 의한 이기론적 우주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에는 크게 세 유형의 우주론이 상호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된다.

    첫째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타난 우주론이다. 그는 우주의 본질을 태극으로 보고, 이 태극이 음양오행과의 결합으로 만물을 생성하며 변화를 무궁하게 이어간다고 하였다.

    둘째는 장재(張載)의 우주론인데, 그는 태허일기(太虛一氣)의 승강부침(升降浮沈)과 이합취산(離合聚散)에 의해 우주가 생성, 변화한다고 파악하였다.

    셋째는 소옹(邵雍)의 우주론이다. 그는 『周易』의 선후천론(先後天論)에 근거해 우주의 개벽설을 주장,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周易』의 괘도(卦圖)와 수리(數理)로써 해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은 주희(朱熹)에 이르러 理氣論的 세계관과 우주론으로 통합되었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전통적으로 주희의 우주론을 수용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중국 성리학이 우주론·존재론적 문제에 그 관심이 편향된 데 비해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심성론 등 인간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우주론에 대한 관심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특한 우주론을 전개한 사상가들이 있었으니, 예를 들면 조선 중기의 서경덕(徐敬德)과 이이(李珥) 및 후기 기철학파(氣哲學派)와 최한기(崔漢綺) 등이 그들이다. 서경덕의 우주론은 태허·원기 등을 논해 보통 장재에 비유된다.

    하지만, 그것은 ≪주역≫을 터전으로 그의 독창적인 생기론(生氣論)에서 전개된 것이다. 곧, 그는 우주의 생성·변화의 원리를 ‘선천’과 ‘후천’으로 설명하였는데, 선천이란 본체라 할 수 있고, 후천이란 그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본체는 기라는 것이다. 이이의 사상은 정통적인 성리학의 체계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초기의 저작인 <천도책 天道策>·<역수책 易數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연 이론과 본체론적 실재로서의 도의 이론을 종합, 통일적으로 파악한 체계를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서경덕과 이이 등 성리학의 우주론은 단순히 물질적 우주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본체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흐름에서 이 우주론은 기철학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실학의 대두 이후 서구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서구의 근대적 세계관을 수용한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등은 자연과학적인 세계관과 우주관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실학적 세계관은 조선 후기 최한기에 이르러 독특한 철학 체계를 형성한다. 그는 청조(淸朝)를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성리학의 기철학적 세계관을 天人論의 입장에서 결합시켜 독특한 우주론을 전개한다.곧,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운화(運化)라 하고, 우주의 변화를 대기운화(大氣運化), 인간의 변화를 통민운화(統民運化)라 하여(人政 권12), 이를 모두 신기(神氣)의 운화로 파악하였다. 즉, 신기를 모든 변화의 근원적인 힘으로 보고, 천인론의 입장에서 인간과 우주의 변화를 해명한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다움 백과를 바탕으로 관련자료들에서 정리함.

    참고문헌

    『화담집(花潭集)』

    『율곡전서(栗谷全書)』

    『명남루전집(明南樓全集)』

    『주역(周易)』

    『도덕경(道德經)』

    『주자전서(周子全書)』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풍우란)

    『中國哲學史』(勞思光, 三民書局)

    『한국의 사상』(윤사순·고익진 편, 열음사, 1984)

    한편 1910년대부터 천도교의 3대 이론가로 두각을 나타낸 李 瓘, 吳知泳, 李敦化의 종교통일론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들은 모두 천도교가 통일적 종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는 점은 같았으나 이관은 한문으로 성리학적 개념과 표현을 사용하여 성리학적 교양층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돈화는 국한문 혼용체로 근대적 개념을 사용하여 신 지식인층에게 호소한 반면, 오지영은 성리학적 내용과 문체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순한글의 대중적이고 평이한 문체로 농민대중과 부녀자층을 독자로 삼았다. 오지영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남접의 일원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1921년부터 최시형의 장자 최동희와 함께 교단의 지방분권화와 중의제(衆議制) 실시를 요구하는 혁신운동에 앞장섰다가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1922년 천도교연합회를 창설하여 천도교단을 이탈했다. 오지영과 최동희는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단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이돈화를 비롯한 『개벽』 주도층은, 처음에 개혁파에 동조하다가 이들이 점차 과격한 개혁과 쇄신을 요구하자 이들을 ‘파괴주의자’로 비판하면서 배척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개혁사상으로 청년지식인층을 사로잡은 맑스주의를 개방적으로 수용, 소개하는 동시에 이를 자기화하고 전유하려고 노력했다. 이돈화는 1923년 한 해 동안 맑스주의를 공부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천도교측 논리를 개발하여 1924년에 『인내천요의』를 발표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교단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종교사상인 인내천주의를 강조함으로서 이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3절인 ‘인내천과 진리’가 분량이 전체의 36.3%로 가장 많다. 3절 가운데는 4절인 ‘인내천의 철리(哲理)’가 절반을 넘는다.

    1921년 『개벽』11월호에 이돈화의 ‘사람性주의’가 발표되었는데, 이는 천도교 문화운동론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집필(발표는 1922년 5월)했다. 1922년 총독부의 정치기사 게재 허용 이후 천도교청년당이 결성되고 『개벽』은 社友制로 조직을 강화하여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1923년 1월호 『개벽』 31호에는 제호 ‘개벽’ 위에 에스페란토어로 'LA CREADO' (창조) 라고 표기했다. 당시 동북아의 진보적 지식인층,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에스페란토에 관심을 가지고 국제주의적 연대와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여기에 무기명으로 「범인간적 민족주의」라는 논설이 발표되었는데, 이 글은 이돈화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첫째, 세계를 국가단위에서 민족단위로 나아가게 하자.

    둘째 각 민족이 서로 도덕적 원조하에 각자 성장을 이루자.

    셋째, 현대의 가장 최선(最善)한 문화를 표준점으로 하고 각 민족의 정도를 그 표준점의 수평선상으로 인상(引上)케 하자. 고 주장했다. 여기서 이돈화를 비롯한 『개벽』주도층은 민족주의와 인류주의의 조화, 지양을 추구했으며 민족주의의 배타적 성격을 견제하는 논리로 러셀의 사회개조론을 원용했다. “그러므로 이에 범인간적 민족주의는 민족으로써 타민족의 소유권 침해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류의 무한한 욕망을 유한적 물질적 경쟁에 희생치 말고 무한한 창조적 생산에 용심(用心)하게 되면 인류는 스스로 각자의 행복하에 인도적 생활을 경영하게 될지니 이것이 범인간적 민족주의의 요점이다.”

    이돈화는 맑스주의의 영향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며 호사와 사치를 누리는 자본가를 비판하는 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유물론적 사고가 현상적 사람만 알고 그 이면의 창조적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개벽』49호, 1924.7). 이돈화는 여기서 러셀의 창조충동론을 이용하여 맑스주의를 비판하는데, 러셀의 창조충동이란 소유충동과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가치를 가지되 독점할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지식이나 예술 등을 추구하는 충동’을 말한다. 이돈화는 이후 맑스주의의 ‘민중주의’ 대신에 ‘창조충동’을, ‘계급의식’ 대신에 ‘초월의식’을 강조하고, ‘충동’과 ‘의식’을 종합하는 ‘생명’ 개념을 기초로 ‘생명사관’을 제시하여 맑스주의 유물사관에 맞섰다. 요컨대 이돈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 대안으로 맑스주의적 유물사관에 입각한 물적 개조보다는 생명사관에 입각한 사람 본위의 사회 건설을 주장하였다.

    註 00 ; 『개벽』49호, 1924.7이란 創刊 4週年 特刊號인 1924년 7월호를 말하는 것이며, ‘유물론적 사고가 현상적 사람만 알고 그 이면의 창조적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는 평가와 판단은, 『개벽』통권 49호에 게재된 이돈화의 「天國行/PP.4-11」의 핵심주제인 평등적인 한울님의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추론된 가치로 추정되는 평가로 보인다.

    이돈화를 비롯한 『개벽』주도층은 동학의 인간관을 구현한 새로운 인간, 즉 ‘新人間’을 문화운동의 목표로 제시했다. 1926년 창간된 천도교 잡지 『신인간(新人間)』의 제호에서 드러나듯 동학/천도교 문화운동은 안으로는 심성이 우주적 생기와 소통하고 밖으로는 타자를 동포로 포용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했다. “이돈화는 무극대도인 무한자를 우주 진화의 창조적 원리로 해석한다. 신인간은 그 창조적 원리가 자신의 본질임을 자각하여 우주적 주체성으로 거듭난 인간이다. 이러한 주체성이 자주성의 토대이다. 자주성은 만유 그리고 타인들과의 공감적 유대로 나아가는 연대성의 기초이다”(이규성, 앞의 책, 135쪽). 이돈화는 자주성과 독립성, 평등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인간은 자기 내부의 무한성을 자신의 ‘성(性)’으로 자각하고, 그것이 초자연이 아니라 ‘천연(天然)’의 자연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性주의’ 또는 ‘사람주의’라 불렀다(이돈화,「시대정신에 합일된 사람性주의」).

    이때 李敦化와 金起田 등 『개벽』주도층은 1920년 당시 중국에 머물면서 순회강연을 하고 있던 버트란드 러셀(1872〜1970)의 영향을 받고 그의 創造衝動論을 수용하여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원용했다. 1921년 『개벽』5월호에는 「사상계의 큰별 버트란드 러셀씨를 소개함」이라는 김기전의 글이 실렸다. 이돈화도 같은 해 8월호에 실린 「최근 사회의 新現狀을 보고 道德心의 수립을 切望함」이라는 글에서 “러셀의, 이른바 소유충동, 창조충동이라 함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를 물질 방면이라 할 것이요, 후자를 정신 방면이라 할 것이라”라고 하면서, 창조충동을 수용하는 것은 수운주의 정신과 부합한다고 보았다.(이규성, 앞의 책, 138쪽) 요컨대 이돈화의 ‘사람性주의’는 독립 자주의 정신을 근간으로 종교, 예술, 도덕을 개조하여 ‘현대문화주의’를 창조하는 문화운동의 표어였다. 그의 의하면 “억조(億兆) 각자 스스로가 신이 되며 영웅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전세계의 전 인류는 처음 신화적인 초인간적 신의 숭배로부터 낭만적인 영웅 숭배를 지나 결국에는 현실, 즉 신과 영웅을 다같이 사람 자기의 가운데에서 구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람주의’는 ‘불완전’으로부터 ‘완전’으로 나아가는 '향상 진보주의‘이다(이규성, 앞의 책, 141쪽). / 無碍洞天/ 세상과 사람 / http://blog.daum.net/muaedongcheon / 2016.03.22.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중반 해방공간까지의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대응하는 과정에서의 이돈화의 사상의 변화를 許 洙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新人哲學』은 ‘宇宙觀, 人生觀, 社會觀, 開闢思想, 道德觀.’의 다섯 編17개 章으로 구성되었다. 「우주관, 인생관, 사회관」은 ‘理想’, 「開闢思想」은 ‘現實’,에 해당하며, 「道德觀」편은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되 보다 理想에 치우쳐 있었다. 이 점에서 그것은 ‘現實理想主義’의 구성을 취했다. 내용을 보면 ‘우주관’, ‘인생관’에서 그는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全的 존재’임을 강조했으며, ‘사회관’에서는 사회주의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에 치중했다. 이점에서 「우주관, 인생관, 사회관」편은 ‘反개인주의·反사회주의’의 관점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開闢思想, 道德觀」에서도 민족개벽, 사회개벽이 지상천국의 과도기로 상대화되어 있다. 이와같이 형성된 『新人哲學』은 그 체계성과 포괄성의 측면에서 ‘水雲主義 세계’에 해당했다. 이러한 기반은 1932년 좌익언론과의 ‘종교’논쟁에서 천도교 청년당 측에 이론적 자신감을 주었다. 『新人哲學』은 일제하에서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출간된 거의 최초의 근대 철학서라는 점, 그리고 천도교단 안팎에서 일정한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 등에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종교사상과 사회사상의 종합 시도는 절충적인 데 그쳤다는 한계도 있다. 『新人哲學』에서 ‘종교’(우주관, 인생관)와 ‘사회’(사회관)사이에 미묘하게 존재했던 틈은 이미 1910년대 말부터 존재했던 종교와 사회의 ‘비대칭적 관계’의 연장이었다. 10여년 뒤에 쓰여진 그의 저작인 『東學之人生觀』(1945.2)에서는 이런 ‘틈’이 벌어져 급기야 ‘사회’와 ‘개벽’, ‘도덕’ 등은 책의 구성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그 배경에는 ‘현상즉실재론’ 수용에 대한 자기비판이 놓여 있었다. 이에 따라 종교의 철학화, 그리고 神을 ‘實在’로 파악하는 이전의 ‘철학’적 관점은 自己否定을 겪었다. 이는 곧 1910년대 이래 이돈화의 사상적 전개를 지탱해 왔던 종교적 계몽의 해체를 의미했다. / 「일제하 李敦化의 사회사상과 天道敎」PP.169-170.

    註 00 ; 『新人哲學』의 初刊이 1924년 3월 30일이고 프린트 본『東學之人生觀』1945년 전후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10여년 뒤에 쓰여진 그의 저작인 『東學之人生觀』’ 은 잘못된 기술로, ‘30년 뒤에 쓰여진 그의 저작인 『東學之人生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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