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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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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235회   작성일Date 17-02-20 21:47

    본문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4)


        허 수는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사상적 변천으로 인한 틈이 벌어지게 된 저변에는 ‘현상즉실재론’ 수용에 대한 자기비판이 놓여 있었다. 고 했다. 그로 인하여 ‘종교의 철학화, 그리고 神을 ‘實在’로 파악하는 이전의 ‘철학’적 관점은 自己否定을 겪었다. 이는 곧 1910년대 이래 이돈화의 사상적 전개를 지탱해 왔던 종교적 계몽의 해체를 의미했다.’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하여 허 수의 위와 같은 평가가 있기 40여 년 전인 1963년에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합본 중간하면서 서두에 붙인 重刊辭에서 이런 思想的 間隙을 자백하고 있었다. 당시 교단내외에서 교리와 교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일부와 韓國思想硏究會에 참여한 다수의 학자들, 그 중에 각종 출간에 참여했던 연구자들의 견해가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사상적 변천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 수의 시각과 관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합본 출간에 붙인 重刊辭를 보면 다음과 같다./1963년 9월 10일에 韓國思想叢書 Ⓘ로 간행된 『新人哲學』附『東學之人生觀』. 참조.

    重刊辭

    夜雷 李敦化 先生- 아마 지금 三·四十代 까지의 靑壯年은 先生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러나 『開闢』誌라든가 그 무렵의 綜合誌 이름을 대면 누구나 쉽게 「안다」고 대답하리라 믿는다. 막상 『開闢』誌等이 우리 近代文化의 形成期에 이룬 功過를 묻는다면, 역시 大部分이 모호한 對答을 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우리는 이만큼 우리 自身에 對해 無知하다. 우리의 참된 자랑꺼리가 무엇인가를 전혀 찾지 않고 있다.

    李敦化 先生은 『開闢』誌 主幹으로서 近代文化 形成에 至大한 功을 남긴 분이요 또한 當代의 思想界의 巨人으로서 東學思想을 現代化 哲學化한 분이다. 지금 우리 哲學界의 關心을 모으고 있는 「人乃天」이라든가 「事人如天」의 思想은 先生의 손으로 體系化되었다. 先生은 이런 意味에서 우리 思想을 本格的으로 體系化한 분이라고 해도 너무 지나친 말만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先生을 記憶하는 이는 天道敎 系統의 몇 분 뿐, 그의 業績과 함께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슬픈 事實이 아닐 수 없다. 『新人哲學』을 비롯하여 先生의 數多한 著述은 이제 絶種의 危機에 부디친 것이다.

    또 恨心한 것은 『新人哲學』이나 『人乃天要義』하면 「天道敎關係 書籍이군」하고 速斷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新人哲學은 水雲의 思想을 根本으러 하고 있지만 決코 天道敎의 敎理解說學만은 아니다. 先生의 雄渾한 點은 天道敎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決코 思想的으로 制約을 받지 않았다는 點이리라. 『新人哲學』은 自己의 立觀的 主場에서(主觀的 主張에서의 잘못인 듯. 오암) 水雲의 思想을 再解釋하여 體系化한 훌륭한 自己哲學이지 편협한 敎理의 固執은 아니다. 東西의 여러 思想을 從으로 橫으로 驅使하여 水雲思想의 卓越한 點을 들어내고 나아가 近代社會를 批判하고 未來를 透視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時代의 制約에서 오는 先生의 過失을 辯護할 程度로 固執하지는 않다.(固執하지는 않다. 는 固執하지는 않는다. 의 잘못인 듯. 오암)

    『新人哲學』을 通讀하면서 우리가 이미 退色한 思想을 자주 發見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거의 四十年前에 出版된 것임을 생각할때 勢의 當然이라 하겠으나 그以外에도 남의 思想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너무 조급했던 점, 例컨대 唯物論과 經驗論의 混同이라든가 唯物論의 認識方法이 科學的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조급한 結論을 散見하게 된다. 그러나 이 冊이 著述되던 當時의 社會的 文化的 環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따뜻한 웃음을 짓는데 그치고 말 것이며 또한 이것은 우리 社會 文化의 近代化에 當時 知識人들이 얼마나 無謀할 만큼 情熱的이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歷史的 證據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이 冊을 重刊하는 것은 첫째 우리 思想史上의 古典의 絶滅을 막자는 것이요 또한 비록 時代의 變移로 言及된 問題, 借用한 理論이 이미 時代의 後景으로 물러나고 文體가 鈍重하지만 그러한 表皮를 뚫고 眞實로 「韓國的인 것」을 발견한 先生의 思想的 核心에 接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오늘날 우리 自身의 主體性을 恢復하는 作業에 큰 役割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註 00 ; 恢復은 回復과 同義語로, 원래의 좋은 상태로 되돌리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을 의미함.

    附錄으로 실은 『東學之人生觀』은 先生이 講壇에서 敎人들을 가르칠 때 草稿로 作成하신 것으로 先生으로서는 晩年에 속하는 最後著述이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아니 變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 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判斷하는 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 준 態度가 進取的이요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요 冥想的이었다. 한 個人의 靑年期와 老年期에 있어서의 思想的變化의 크기에 興味도 있었지만 周圍의 勸誘와 先生自身의 思想的 健全性을 위해서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한편 이 論文은 이번 처음으로 活字化되어 公刊되는 것이다.

    또한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復刊함에 있어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

    끝으로 우리의 이러한 努力이 韓國思想의 確立에 적은 礎石이라도 된다면 그 以上의 多幸은 없다고 생각한다.

    〈1963. 8. 1〉

    註 00 ; 윗글에서 『東學之人生觀』이 ‘晩年에 속하는 最後著述이다.’는 틀린 기술이다. 이후에도 『黨志』,『敎政雙全』,『天道敎靑友黨論』等 이외에도 몇 개의 책이 북한에서 저술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월북이전의 저서로는 ‘『東學之人生觀』이 最後著述이다.’ 해야 옳지만, 『東學之人生觀』은 실제로 1945년 2월부터 시작하여 후반부는 북한에서 저술되었기 때문에 ‘晩年에 속하는 最後著述이다.’는 틀린 기술이 된다.

    이로부터 5년 후인 1968에 『東學之人生觀』이 重刊辭만 달리하고, 본문은 1963년도 판의 지형을 그대로 복간하게 된다. 5년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교단 밖은 군사정부가 안정되어가면서, 월남파병, 한일협정, 파독 광부 간호원, 1962년부터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고도성장의 단계로 진입하는 등등의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있었고, 대내적으로 40여년의 갈등을 풀기위한 신구파 합동 수습을 위한 위원회를 천도교 중앙 총부차원에서 신,구파를 대표하는 원, 주직의 원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논의로, 표면적으로는 갈등을 제거했다. 그 결과로 구파 교인들 중 상당수가 총부와 연결을 맺고 신앙을 강화하였지만 내부적으로 약간의 상충되는 문제로 한 때는 소송에 이르는 사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구파의 상고가 기각됨으로 인하여 일단 수습국면으로 돌아서 1925년 신구파의 갈등의 시작이후 공존의 시대가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東學之人生觀』이 重刊은 의미있는 교서의 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중간사는 새로이 써서 간행을 했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이 전달하고자 하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메시지가 필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重刊辭(1968년도판)

    夜雷 李敦化先生은 當時 天道敎의 代表的 理論家로서 近代文化形成에 至大한 功을 남긴 분이요 또한 當代의 思想界의 巨人으로서 東學思想을 現代化 哲學化한 분이다. /초반의 상당부분을 삭제함/오암.

    지금 우리 哲學界의 關心을 모으고 있는 人乃天思想은 先生의 손으로 體系化되었다. 先生은 이런 意味에서 우리 思想을 本格的으로 體系化한 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것 같다. 東西의 여러 思想을 從으로 橫으로 驅使하여 東學思想/水雲思想을 동학사상으로 擴張시킴/오암)의 卓越한 點을 들어내고 나아가 近代社會를 批判하고 未來를 透視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時代의 制約에서 오는 先生의 지나친 표현들을 무조건 변호할 정도로 頑固해서는 옳지 않을 줄 안다.(1963년도 판에서는 ‘過失을 辯護할 程度로 固執하지는 않다.)

    『新人哲學』을 通讀하면서 우리가 이미 退色한 사상적 표현을 자주 發見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거의 四十年前에 出版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勢의 當然이라 하겠으나 그 以外에도 남의 思想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너무 조급했던 점, 例컨대 唯物論과 經驗論의 混同이라든가 唯物論의 認識方法이 科學的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結論을 散見하게 된다. 그러나 이 冊이 著述되던 當時의 文化的 社會的 環境을 고려한다면 우리 사회文化의 近代化에 當時 知識人들이 얼마나 無謀할 만큼 정열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歷史的 證據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시대의 變移로 말미암아 言及된 문제와 借用한 理論이 이미 시대의 後景으로 물러나고 文體가 鈍重하지만 그러한 表皮를 뚫고 진실로 「한국적인 것을」 發見한 선생의 사상적 核心에 接할수만 있다면 그것도 오늘날 우리自身의 主體性을 회복하는 作業에 큰 役割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附錄으로 실은 『東學之人生觀』은 先生께서 講道會를 열고 교인들에게 說敎하던 講義案草稿로서 先生으로 서는 晩年에 屬하는 최후 著述이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 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 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 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그리고 이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絶版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使用하게 된 것을 밝혀둔다.

    布德 109年 2월 15일

    崔 德 新 心告

    註 00 ; 후반부에는, 63년도 판에 서술되었던 아래의 내용이 전부 삭제되었다.

    ‘한 個人의 靑年期와 老年期에 있어서의 思想的變化의 크기에 興味도 있었지만 周圍의 勸誘와 先生自身의 思想的 健全性을 위해서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한편 이 論文은 이번 처음으로 活字化되어 公刊되는 것이다.

    또한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復刊함에 있어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듬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

    끝으로 우리의 이러한 努力이 韓國思想의 確立에 적은 礎石이라도 된다면 그 以上의 多幸은 없다고 생각한다.’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東學之人生觀』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복간과 중간에서 나타난 필자의 의도와 사상을 가늠해 보는데 매우 어려움을 가져오고 있다. 다음의 글에서 알아보아야 할 저자인 야뢰 선생의 교의 해석의 변화와 사상적 추이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의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천도교 교단에 있어서의 해방공간에서부터 70년대 전후까지는 명암이 같이 존재했던 시기이다. 6.25동란까지를 암울한 시기라 한다면, 6.25동란으로 인하여 북한의 교도들의 상당수가 북한에서 반동으로 몰려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월남자들이 1.4후퇴를 기점으로 하여 남하했고, 인민군으로 동란에 불가피하게 참여했던 포로들이 反共捕虜釋放 이란 세계사적 대 사건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프로 중에 상당수가 천도교인이거나 청우당 당원이었으므로 반공포로에 가담하여 석방되었다. 반공포로 석방과정에서 반공포로 제1진이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건너오는 그 장면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맨 앞에 선 기수 두 명에 손에 들린 대형국기가 있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자료로 확인된 것이지만 하나는 태극기이고 다른 하나는 천도교의 궁을기였다. 일설에는 이 궁을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한의 기자들이 매우 당황하여 신문보도에 망설여 대 다수의 신문에는 이 장면이 게재되지 않았다. 또한 역사적 유물로 지방자치단체가 만들어 놓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그려져 있는 포로 수송 열차 문에 게양된 국기, 태극기와 궁을기가 엑스자 형태로 당시의 상황 그대로 그려져 있다.

    1953년 말 휴전된 이후 교단은, 북한에서 남하한 천도교 교도와 청우당원으로 인하여 교도수가 100만 명 이상의 대 교단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6.25동란 당시의 북한의 교인 수 290여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고 천도교청우당이 55여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남하한 교인과 당원을 미루어 추산해보면, 그 정도가 100여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라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남한의 교도 수는 20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繁昌期는 약 20 여년 만에 점점 사라져 재가교인과 냉담자로 변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가장 큰 것은 남북한의 교도들의 신앙태도가 근본적으로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신앙중심의 남한 교도들과는 달리 북한 교도들은 일제와 맞서고 공산당과의 대적에서 신앙을 했기 때문에 남한교도들이 靜的 신앙이었다면, 북한교도들은 動的 신앙이었던 것이다. 교단이 이 異質的인 신앙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지 못했고, 인적 물적인 운영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한 교도들의 이탈이 가속화 되었다. 더욱이나 50년대 초기에는 북한에서 남하한 북한 교역자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중견 교역자로 활동하였으나 그들의 후계자가 없자 북한 교역자들의 소통의 창구를 잃어버렸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들의 신앙과 관련된 태도와 심정을 이야기 하면, 이해줄 수 있는 인간적 유대를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북한 교도들이 추구했고 신앙이라 믿었던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적의 실현을 위한 활동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이 이탈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註 00 ; 필자는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 /2013년 8월 22일에서, 1945년 해방이후의 북한의 천도교와 청우당에 관련된 실상을 자세히 밝힌 바가 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北韓의 宗敎政策.

    3. 北韓의 宗敎批判.

    4. 北韓의 各 宗敎 自由現況

    5. 北韓의 天道敎 靑友黨의 現況.

    6. 北韓의 天道敎 靑友黨 組織과 黨員數.

    7. 韓國의 現實 政況.

    8. 筆者의 現實 認識.

    9. 나가는 말.

    註 00 ; 三一再顯運動 - 1948년에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천도교인들이 벌인 운동. 통일을 바라던 천도교 원로들은 총선을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유엔 결의를 찬성하였다. 그러나 남북정치상황이 민족분단으로 고정되어 가자 북한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평화적 민중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최린(崔麟), 김광호(金光浩), 전의찬(全義贊), 최단봉(崔丹鳳), 이응진(李應辰) 등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5개항의 공약을 만들어 북한 천도교회와 천도교 청우당에 연락을 취했다. 이들은 공약에 자유의사에 의거하지 않은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배격하고, 통일과 민족단결을 막는 세력을 봉쇄하며, 유엔의 결의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환영하고,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일관할 것 등을 명시하였다.

    1948년 2월 준비활동이 북한당국에 노출되어 3월 1일 기념행사가 모두 중지되고 북한지역의 천도교 간부 1만 7000여 명이 붙잡혔다. 그러나 영변과 희천에서는 미소양군 철수와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외치며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북한당국은 주동인물 87명을 선별하여 김덕린(金德麟), 주명득(朱明得), 유은덕(劉恩德)은 사형, 나머지 사람들은 4년에서 15년의 징역에 처하였다.

    註 00 ; 靈友會事件-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천도교 비밀결사단체이다. 이 조직은 처음에 평양의 천도교 종리원(天道敎宗理院)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 2월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을 찬성하는 내용의 민족통일방안을 담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3월 1일을 기해 통일시위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던 3·1절 재현운동이 북한 당국의 탄압으로 제지당하고 주모자들이 검거 투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북한 지역의 천도교 조직이 거의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1948년 4월 29일에 북한의 독신 교인들만으로 비밀조직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일을 기해서 장세덕(張世德), 이세정(李世正), 윤문원(尹文元), 김성흔(金聖昕), 김상열(金商說), 장기초(張基礎), 장근영(張根榮) 등 7인이 영우회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 후 영우회 조직은 북한 전역에 급속도로 확대되어, 1년 뒤인 1949년 5월 1일에는 20만 3607명이 이 조직에 가입하였고, 1950년 5월에는 40만 7214명으로 그 인원은 더욱 늘어났다. 참고로 1950년 초의 북한 전 지역의 천도교인은 총수는 286만 6300명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영우회는 1950년 4월경에 북한 당국에 발각되고 말았다. 6·25전쟁 중 평양 감옥 지하실에서 영우회의 주모자 165인이 비밀재판을 받았는데, 그 판결문에서 북한 당국은 영우회가 “천도교의 종파적인 편견에서 미제의 괴뢰 이승만 도당의 내란 도발 흉책과 함께 무장 폭동의 방법으로서 공화국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평양 감옥에서는 영우회의 주요 간부 165인이 처형당하였고, 각 지방에서도 수많은 검거, 투옥,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나 영우회는 방대한 계보로 이루어지면서도 비밀조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6·25전쟁의 와중에 많은 조직원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에는 앞서서 촌락을 점거하고 자체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1950년 말에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면서 수십만의 교인들이 월남하면서 그 활동도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영우회비사』(동학영우회, 1989)

    네이버 지식백과 영우회(靈友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1.

    『천도교 운동사』/ 홍장화, 천도교중앙총부, 1992.

    註 00 ; 反共捕虜釋放 -이 사건은 교단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므로, 구체적으로 설명된 자료를 선정했다. 이는 교단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를 마련했던 계기가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반공포로 석방이 교단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이지만, 반공포로 중에 포함되어 있었던 천도교인과 청우당원들의 분포와 구체적인 활동, 그리고 석방이후의 교단과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연구를 위해 언제인가는 한 번 논의를 해보아야 할 사건인 것이다. 반공포로석방은 1953년 6월 18~19일 당시 부산, 광주, 논산 등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이승만 정권의 주도하에 반공포로 3만 5천여 명을 탈출시킨 세계사적 대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몇 가지 휴전조건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었을 때까지 한국정부는 유엔군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휴전협상에 진전이 있을 때에는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다. 휴전협정이 성립될 가능성이 짙어진 1953년 4월 이후부터는 한국의 휴전반대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휴전회담 재개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성명을 통해 평화수립 전제조건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① 북괴 반역군의 무장을 즉시 해제시킬 것, ② 한국 영토로부터 중공군은 즉시 철수할 것, ③ 국제연합 관리 하에 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 ④ 외국 침략에 대하여 국제적 보증을 확보할 것, ⑤ 포로송환을 다루는 국제회의에서 한국대표를 참가시킬 것 등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국회도 미국에 대해 한국의 완전통일을 보증하지 않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6.25동란으로 인한 남북한에 체포된 포로들의 교환을 위한 논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 측의 휴전반대운동도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 위치에서의 휴전보다는 군사적 승리와 압록강까지의 진격을 부르짖었다. 서울에서는 군중대회가 개최되어 5만여 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연사들은 한결 같이 휴전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없이 휴전회담 대표들은 1953년 4월 10일 휴전을 요구하는 국제정세에 밀려 제네바협약 제109조에 따라 병약 및 부상포로들의 교환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국민은 이날부터 대대적인 휴전반대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4월 21일 국회는 북진 통일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3일 후에 대통령은 중공군이 압록강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면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위임한 것을 철회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싸울 것이라고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통보하였다. 4월 27일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회수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였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중요한 문제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군이었다.

    미국은 휴전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비밀회담을 열어 병상포로 교환 이후 그동안 타협에 이르지 못했던 포로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본국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관리위원회의 관리하에 두고 이들 포로를 설득하며, 여기서도 송환을 거부하면 정치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는 유엔 총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 소식은 한국정부와 국민을 경악케 하였으며 심한 반발마저 초래하였다. 우선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는 회담 참석을 거부했다. 한국정부는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계속 싸울 것임을 주장하였으나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미국의 확고한 의도를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문제에 관한 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휴전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유엔군 측이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월 25일의 제안을 기초로 하여 협상을 지속시켜 나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6월 6일 휴전에 대한 대안을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동시에 철군하고, 이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에 대해 미국은 즉각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곧 성립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모종의 압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1953년 6월 6일 한국대통령은 반공포로의 석방을 추진하였다. 그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러 반공포로의 석방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남한 전역에 임시 비상경계령을 발령하고, 모든 미국 주재 한국 관리들을 귀국조치시킴과 동시에 한국 측 휴전회담 대표를 소환하여 휴전반대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6월 8일 한국 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없이 포로송환협정은 조인되었다. 포로송환협정의 조인은 사실상의 휴전성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례 없는 반미징후가 한국전역에서 일기 시작하고, 휴전반대시위가 그 빈도나 규모면에서 증가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의 석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심의 이면에는 반공포로를 송환시킬 수 없다는 이념적인 측면과 외교적 주도권의 장악 및 한국국민의 반공통일에 대한 의지, 그리고 휴전협상에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주장이 전혀 참작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렇듯 반공포로의 석방은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민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나 공산군 측의 비난과 유엔 참전국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은 1953년 5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할지도 모르며 그러한 움직임으로 저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상부에 경고한 바 있었다. 한국 내에는 약 3만 5천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각 수용소장은 소수의 행정참모와 기술참모를 거느린 반면,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었다.

    6월 18일부터 이틀간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하여 온 반공포로의 석방이 단행되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반공포로들은 거제리 수용소, 가야리 수용소, 광주 수용소 등 총 8개 수용소 총 인원 35,698명 가운데 27,388명이 탈출하였다. 반면 56명의 포로들이 탈출과정 중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은 탈출 포로들을 따듯하게 대하여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으며 심지어 영웅으로 취급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행정기관과 국민들이 포로들에게 옷을 주고 민가에 숨겨 주어 미군 당국의 재수용 노력도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반공포로가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공산군 측은 물론 세계여론의 관심이 한국에 집중되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는 공산군 측 수석대표에게 반공포로의 수용소 탈출 사실을 통지하였다. 공산군 측은 대단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모든 포로들을 재수용하라고 강력히 요청하였다.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방주민들과 섞여 버렸고 더구나 한국정부 당국이 그들을 비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재수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반공포로들의 탈출 소식을 확인한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제네바협약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되었어야 할 것인데…… 국제 관계로 인해 불공평하게 그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었다. (중략) 그러므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포로를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반공포로 석방에 관한 공산군 측의 반응은 다음날인 6월 19일 아침에야 나타났다. 그들은 통역관 회의와 비무장지대의 세부 작업을 책임진 다른 참모장교회의도 취소하였다. 6월 20일 본회담이 재개되었을 때, 적의 대표는 유엔군 측이 포로 석방을 함에 있어 이승만과 공모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의의 -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일이라도 단독으로 단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국군과 군사시설이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 대통령이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어떠한 협정을 체결하더라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정리함.

    참고문헌

    『한국전쟁과 포로』(조성훈, 선인, 2010)

    『한국전쟁』하(국방군사연구소, 1997)

    『한국전쟁휴전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9)

    강인철은, 해방 전, 후 공간에서의 천도교의 상황을 종전의 많은 연구자들과는 조금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1945-2012』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도교 신파는 反대한민국 취향에 건국반대운동 최대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참여. 그리고 북한정권 토대인 ‘북조선천도교 청우당’과 관련이 있고, 1972년 이후 대남 종교통일전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멀리는 20년대 조선농민사를 매개로 소련 코민테른과 연결한 역사를 가진다.

      개신교 외에 ‘해방정국’에서 종교정당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천도교였다. 개신교의 종교정당 활동이 북한 지역 중심이었던 데 비해, 천도교의 종교 정당 활동은 남한에서 시작되었다. 해방직후 천도교 지도자들은 각 지역에서 식민지 시대 말기 해산된 천도교 청우당 조직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45년 9월 14일에 당을 정식으로 부활시켰다.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천도교 청우당 부활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복원’ 혹은 ‘부활’이라고는 하지만, 해방 후 등장한 천도교 청우당은 정당 정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 시대의 정치결사와는 질이 다른 정당조직이었다. 천도교 청우당은 창당한 지 불과 1년 만에 당원 50만 명을 자랑하는 거대정당으로 성장했다. 한편 천도교 신파가 주도하는 천도교 청우당이 좌파 주도의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하자, 천도교 구파는 1946년 5월 교단 분립과 동시에 천도교 보국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했다. 1947년 8월부터 미군정으로부터 좌익으로 몰려 당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거나 천도교 보국당원들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당하면서 천도교 청우당은 빠르게 쇠퇴했고, 급기야 1949년 12월 26일에는 강제로 해체․정리되었다. 천도교 보국당 역시 1949년 1월 천도교 청년단체와 결합하여 萬化會를 결성하면서 해산되었다.

    한편 38선의 존재로 인해 남, 북간의 연락이 원활할 수 없던 상태에서, 1946년 1월에 열린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회 참가자 대다수가 “북한지역에 독립적인 당을 창설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같은 해 2월 8일에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창당되었다./ PP, 102-103. /강인철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1945-2012』.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http://www.ilbe.com/4516553112/일간베스트 2014.10.19에서 재인용. 원문을 확인 못함.

    註 00 ; 윗글에 내용이 다른 부분.

    l. 舊派 天道敎 保國黨 創黨.은 1946년 5월이 아니라 1946년 7월 7일이다.

    2. '1947년 8월부터 미군정으로부터 좌익으로 몰려 당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거나 천도교 보국당원들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당하면서 천도교 청우당은 빠르게 쇠퇴했고,' 미군정으로부터 좌익으로 몰려 당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는 것은, 單政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아 당의 간부들이 대거 검거한 것이다. 실제로 천도교 보국당원들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폭력사건이 일어나 중상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지금 우이동으로 이전한 천도교중앙총부 본관건물의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 신,구파가 각각의 교무를 보고 있었다.

    3. 自由新聞 1949년 01월 28일에 天道敎輔國黨이 萬化會로 재발족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에 의하면 萬化會는 ‘慶雲洞에 있는 천도교보국당은 去 1월 18일로서 완전히 해체하고 민족사상 정화를 목표로 한 조직체인 萬化會로 갱신 발족하게 되었다. 이에 동 보국당에서는 27일 정치운동을 포기하는 동시 人乃天정신에서 同歸一體의 행동으로 政經·문화·민생문제를 해결할 일대 사상운동을 지향하기 위해 동 당을 발전적으로 解消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신 조직체인 만화회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申肅 △부위원장:李應辰, 金中正 △중앙위원:孫在基 외 107인.’

    4. 1946년 2월 1일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에서 출발해 1946년 2월 8일 金達鉉에 의해 창당되었으며, 1950년 집단 월북한 천도교 청우당과 합당해 오늘에 이른다. 1947년 4월 제1차 당 대회를 가진 후 1982년 8월 23일까지 모두 6차례 전당대회를 열었다. 창당 초기부터 민족자주의 이상적인 민주국가의 수립, 인내천의 사상구현, 회귀일체의 신생활 이념을 기초로 한 경제제도의 실현 등을 당 강령으로 삼고 있다. /다음 백과에서

    5. 剛菴 申 肅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천도교 중앙총부 道師로 추대된 선생은,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서 종교 활동에 진력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국토가 폐허화되자 선생은 피난지 부산에서 천도교보국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월남교인 수습과 조직 발전을 위해 각 지방에 지부를 조직하여 천도교 발전에 노력하였다. 선생은 1957년 보국연맹과 청년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동학회가 조직되자 고문으로, 1960년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3월 천도교 이념에 입각한 정당으로 동학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자 대표 책임위원으로 추대되어 정당 활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自由新聞 1949년 01월 28일자.

    후천개벽을 위하여 ‘다시 개벽’을 부르짖었던 동학, 천도교가 해방 전, 후 공간에서의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의 핵심주체였던 천도교 청우당이 일본제국자들의 의한 강제 해산은 수용할 수 있는 민족종교 말살정책이라는 상황으로 이해 할 수 있지만, 單選單政反對 즉 남 북이 각각 단독으로 선거를 하여 각각의 단독정부를 세우겠다는 남, 북의 주장을 반대했다고 천도교 청우당을 강제 해산시킨 것은, 이승만 정권이 민족의 장래를 외면하면서 까지 단독정부를 세워 정권을 사유화하겠다는 매우 이기적인 발상인 것이 확연히 들어나는 상황에서 그 강제해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나 民戰을 이용했다고 하여 좌익으로 몰아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해산시킨 것은 매우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천도교 청우당이 1947년 1월말에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대하여 천도교 청우당이 單選單政反對하면서 그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소 공동위가 재개될 가능성이 있는 이때에 있어서 국내 국외의 일부 완매한 분자들이 호응하여 우리 민족에게 유리한 정세를 악화시키려는 음모를 활발히 전개시킴과 함께 자주독립의 기초를 파괴하는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노골적으로 시작하여 정치 교양 훈련이 부족한 민중으로 하여금 본의 아닌 추종 혹은 망동을 하게 할 염려가 불무하다. 우리는 진정한 애국자 민주주의자의 광범 또는 공고한 결속 하에 당당한 행동으로서 국제민주주의의 협동노선에 의거한 남북통일정권의 수립을 촉진시키기를 다시 강조한다.’/조선일보 1947년 2월 1일자. 라고 하여 천도교 청우당은 이승만계와 한민당계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을 강력히 주장했다./『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제4절 단독정부수립 반대와 천도교 청우당의 해체./ P. 681. 구체적인 내용은 PP.674-685.까지 참조하시기 바람.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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