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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민석의 비열한 만행을 보면서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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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호성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882회   작성일Date 17-03-17 16: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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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우연히 SBS 8시 뉴스를 보다가 설민석 역사왜곡에 대한 보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33인 유족회에서 항의를 해서 취재가 이루어진 것 같았는데, 그 내용을 듣다 보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서 기사를 보고서 설민석을 나무라는 댓글을 달고 나왔더니 엄청난 악성 댓글이 순식간에 달리는 것을 보고 나도 무척 놀랐습니다. 이번 사건이 역사를 잘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설민석이가 서울신문에 사과문을 발표했다고 해서 인터넷을 열어보았더니, 사과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너무 분한 마음에 설민석을 나무라는 댓글을 달았더니 악성댓글이 순식간에 몰려들더군요. 이것은 참으로 분통이 터지는 역사왜곡입니다. 어찌 이런 일을 당하고도 그냥 방관만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청년회를 할 당시에는 그래도 청년들이 좀 있어서 천도교 선열들을 모욕하는 글을 쓰는 자가 나오면 당장에 몰려가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총부에서도 오늘 아침에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한 끝에 단계별로 대응해 나감으로써 앞으로 설민석 같은 사기꾼이 대중을 상대로 더이상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우리 천도교 동덕 여러분들도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각자가 할 일을 생각해보시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설민석 강의 동영상 및 이번에 출판해서 15만부 이상이나 팔리고 있다는 책의 내용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내용을 사진을 찍어서 알려 드립니다. 한번 보시고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모욕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처하게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교인 여러분의 지혜와 용기를 모아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 설민석강의 동영상 :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QBDvEgymIu8


    이 동영상은 3년 전에 방송되었던 것인데, 그 당시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책으로도 출판해서 전국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판매되고 있답니다. 초판본은 이미 다 팔려서 수정판을 지금 팔고 있다는데, 이미 15만부나 팔렸다고 하더군요. 상황이 이러한 데도 그냥 방치한다면 그건 스승님의 제자된 도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천도교 부문단체에서는 타종단 부문단체들과 협의를 해서 기자회견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의 조치를 시급히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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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운동의 역사적 진실은 이렇습니다. 이 내용은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의암손병희선생자서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설민석이 주장하는 왜곡된 엉터리 내용과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228일 저녁 5시경 가회동 170번지 의암성사 자택에 참석한 사람은 총 23인이었습니다. 성사께서 인사말씀을 마치고 나자 내일의 거사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함께 숙의한 끝에 내일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에 많이 참석한다는 정보가 있는데 만약 군중심리에서 과격하게 행동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 일본 헌병대에서 폭력으로 진압하여 폭동으로 유도할 수가 있으니 대표자 일동은 근처에 있는 태화관으로 모여서 그곳에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새벽이면 독립선언서가 이미 집집마다 뿌려질 텐데 이것이 바로 독립선언서 낭독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따로 무슨 발표낭독의 형식이 필요하겠는가.라는 것이 대체로 일치된 견해여서 그대로 시행키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만일에 잡혀갔을 때 서로 말이 일치하지 않으면 곤란한 경우가 있었던 경험이 있는데, 우리도 대충 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최린은 각자가 아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대답하면 말을 맞추지 않아도 될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말하자 모두들 웃으며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31일 아침 성사께서 가회동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앉아계실 때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시중의 동태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했을 뿐 별 말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 최린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자신의 집 대문에 뿌려져 있던 독립선언서 2장을 보고서 성사께 달려왔다면서 선언서가 발표된 이상 일경이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그냥 둘 리가 없으니 집에 앉아서 연행되어 가느니 차라리 예정된 장소에 가서 동지들과 함께 함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신 성사께서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시고 오전 12시경 태화관에 도착하셨습니다. 1시 반이 넘어서자 33인 중에서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만을 제외하고 29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독립운동을 위해서 민족대표 29명이 함께 모였던 태화관은 공교롭게도 이완용의 옛집이었습니다.

     

    잠시 후 파고다 공원에 집결한 학생 대표들이 태화관으로 몰려왔습니다.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함께 파고다공원으로 가자고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최린이 폭력행동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이들을 겨우 설득해서 돌려보냈습니다. 잠시 후 오후 2시에 요리상이 나오자 일동은 큰 소리로 만세삼창을 외치고 나서 축배를 들었습니다.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태화관 주인은 혼비백산해서 그 자리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성사께서는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태화관 주인에게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서 이 사실을 고발토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혐의를 없애주려는 배려에서 하신 조치였습니다. 그 때 이미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 함성은 서울시내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잠시 후 일본 헌병들이 태화관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당장 연행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냥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오후 4시경 최린이 밖으로 나가서 학생들의 흥분을 방지하기 위해서 호송차를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차 한 대가 도착해서 세 사람씩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남산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했습니다. 길 좌우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도열해서 연행되어 가는 민족대표들에게 모자를 벗어서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차 안에 있는 민족대표들도 손을 흔들며 화답하고 목 메인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수십만 군중의 만세시위 행진은 그날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도 서울과 때를 같이 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저 멀리 만주와 미국 일본 등 해외에 살고 있던 동포들 사회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중국 상해에서는 19194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주권이 보장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191931일에 일어난 삼일운동은 국민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한 최초의 날이 된 셈입니다.

     

    독립만세운동은 한번만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은 420일을 전후한 무렵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장날마다 거의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독립운동의 함성이 전 조선을 진동하고 있을 때 독립선언서와 통고문은 일본, 미국, 불란서에도 각기 전달되었습니다. 이는 사전에 미리 준비했던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은 천도교 측에서 맡아서 처리했고, 미국과 불란서는 기독교 측에서 맡아서 처리했습니다.

     

    5월말까지 집회에 참가한 인원수는 총 2,023,098명이었으며, 집회 건수는 총 1,542회나 됐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은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 년 동안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가해진 피해는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살해 : 7,605명.  부상 : 45,562명.  체포 : 49,811

     

    가옥소각 : 724건.  교회소각 : 59건.  학교소각 : 3

     

    민족대표 29인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불렀던 태화관은 523일 새벽 원인 모를 발화로 인해서 완전 소실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는 628일 밤 원인 모를 발화로 인해서 인쇄공장과 출판사 전부가 소실되었습니다.

     

    일본 고등계 형사 신승희는 성사로부터 5천원을 받고서 끝까지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는 삼일운동 이후에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5월 초순에 만주 봉천으로 출장을 갔다가 514일 귀경하던 차에 서울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헌병대에 수감되자 다음날 가지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출장기간 동안 그의 직무유기와 수뢰사실이 헌병대에 탄로되어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31일에 태화관에 참석치 못한 기독교 측 대표인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3인은 지방에서 늦게 상경한 까닭으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장에는 나오지 못했으나 거리의 시위 군중들로부터 민족대표 29명이 모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각각 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측 대표 김병조는 끝내 자수하지 않고 의주를 거쳐서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내란죄 혐의를 쓰고 있던 민족대표자들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취조대 앞에 나선 민족대표들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심문에 응하였습니다. 심문과정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치 않았으면서도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이 모두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함태영,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박인호, 노헌용, 김홍규, 김도태, 임규, 안세항, 이경섭, 김세환 등 모두 16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 모의로 인해서 체포되어 공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48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부릅니다.

     

    일본 검사는 민족대표들을 내란교사죄로 뒤집어씌우려고 집요하게 유도심문을 하였으나 모두들 평소 자신의 소신대로 솔직하게 답변해서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보안법과 출판법을 위반한 것으로 밖에는 달리 처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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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의암성사께서 주옥경 사모님과 결혼한 때는 성사께서 56세가 되던 해였고, 주사모님은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의암성사 비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셨습니다. 그리고 3.1독립선언을 하던 때는 성사께서 59세가 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설민석의 주장은 사실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터무니 없는 야비한 모함인 것입니다. 주사모님은 의암성사께서 환원하시자 2년 후인 1924년 4월5일에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효시인 천도교내수단을 창단하시고 여성운동을 이끈 뛰어난 지도자셨습니다. 이런 훌륭한 분을 설민석 같은 사기꾼이 온갖 치졸한 소설을 써가면서 모욕을 했으니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3.1운동의 진실을 온 천하에 널리 알리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천도교가 다시 중흥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 3월 17일 화암(和菴) 김 호성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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