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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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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395회   작성일Date 17-02-25 17:30

    본문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5)


    註 00 ; 고어에선 ‘하다’는 많다(多), 크다(大), 높다(高貴). 바르다(正)의 의미를 담은 형용사이고 ‘다’는 행위를 말하는 동사이다.  은 밝음(光). 넓음(廣). 둥금(圓象/둥글다의 명사형)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논학문에서 수운이 말하는 ‘天主’는 古語 表記로는 ‘님’이 아닌 ‘하님’이다. 왜냐하면 ‘하’ 은 하다의 관형형인 ‘한’과 명사인 ‘’이 합쳐서 ‘한(天)’인데 連音이 되어 ‘하’이 되는 것이다. ‘하(天)’ 에다 존칭사 ‘님(主)’을 붙여 ‘하님(天主)’ 이 된 것이다.

    註 00 ; 「月刊 말」 誌 -「月刊 말」지는 19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결성된 뒤, 이듬해 6월 15일 이 협의회의 기관지로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진보적 성격을 띤 월간지로, 정치에 대한 대항매체가 전무하던 시절에 각종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제도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한 민중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1989년 2월 정기간행물로 등록한 뒤, 이듬해 2월 월간 말(주)을 설립하면서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진보적 성격의 월간지로 판형은 4·6배판이며, 분량은 250여 쪽이다. 2009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 상태다. 개혁을 선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정론지를 자처하면서 남북 7,000만 겨레에게 사랑받는 민족지, 민중 생존권의 파수꾼이자 재벌 개혁의 감시자, 21세기의 비전을 제시하는 희망의 청사진을 지향했다.

    창간 이래 각종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데 적극 앞장섰고, 특히 1986년 9월에는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이듬해 6월 항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한편, 1987년 12월에는 특집호를 발행해 '폭력과 조작의 진상-부정선거'를 통해 정치권의 부패상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두산백과와 위키 백과사전 등 관련자료 종합.

    註 00 ; 동학 복원운동 전국 연합회는 공개적으로 교단 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조직이었다. 창립 당시의 회장은 이세권이었지만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적어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그러므로 전국 연합회란 명칭은 지부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외적인 홍보용이고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 줄 사람들에게 알린 이름뿐인 조직이었던 것이었다. 이 조직은 이미 활동이 중지된 상태에 들어갔다가 이세권의 환원으로 사라져버린 조직이었다.

    註 00 ; 以堂 金殷鎬(1892-1979/일본식 이름: 鶴山殷鎬 쓰루야마 마사시노기,) - 아명(兒名)은 김양은(金良殷)이며 아호는 ‘이당(以堂)’이다. 김은호는 근현대 동양화단에서 채색화의 대가로 꼽히는 화가이다. 경기도 인천 출생으로 관립인천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인흥학교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측량기사의 조수로 일하고 고서를 베끼는 일을 하다가 이왕직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인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 편입하여 화가가 되었다. 서화미술회 편입에는 사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도움이 있었다.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송병준, 대한제국 순종황제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12년 서화미술회에서 조석진·안중식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다. 1920년 도일하여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청강생으로 3년 동안 수학했다. 1922년에서 1930년 사이 선전에 출품하여, 5회(1·2·3·4·8회) 입선, 2회(6,7회) 특선을 기록하였다. 1933년 ‘제미전(帝美展)’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1936년 후소회라는 미술 단체를 창립했다. 1937년의 제16회 선전에서는 창덕궁상을 받아 다음해에는 선전 참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2년간 체류하였다. 이당은 채색 인물화와 화조화에 뛰어났는데, 특히 인물화에 능해 서화미술회 시절에 순종의 초상화를 그렸을 만큼 천부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산수화는 채색 위주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일제 시대의 친일행적으로 해방 후 친일파 화가로 따돌림을 받기도 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화단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해방 후 1949년 국전 추천작가, 1955년에서 57년에는 제4,5,6회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1]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3·1문화상(1965)과 예술원상(1968)도 수상했다.

    작품 및 화풍 - 한국 화가로는 드문 북종화 계통의 화가로서 채화(彩畵)를 통하여 한국의 풍속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갔으며, 중국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이나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도 비견할 사녀도(仕女圖) 형식의 한국적 화풍을 수립한 화가로 평가된다. 그외 채색화로서 산수·인물·화조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전개시켰고 재래 도화서풍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작품으로 〈향로(香爐)〉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와 관련자료 종합.

    註 00 ; 春谷 高羲東(1886-1965) - 본관은 제주. 호는 춘곡(春谷). 서울 출생. 대한제국 말기에 군수를 지낸 영철(永喆)의 셋째 아들이다. 14세 때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궁내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 이 무렵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였다.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의 화보(畫譜: 그림을 모아서 만든 책)를 충실히 임모(臨模: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洋畫科)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서양화 제작이 되었다.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자 그는 신미술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1918년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하였다(초대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서화협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書畫協會報)』를 창간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회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 그 뒤 줄곧 서화협회만을 이끌었다.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서화협회가 해산되기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평가 -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 후 10년 만에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양식적으로는 독자성을 이루지 못하여 독립된 화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경력과 대표작 ; 조선 미술 건설본부 위원장, 조선 미술 협회 회장, 민주당 참의원을 역임했고, 대표작은 정원에서,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

    『한국근대미술산고(韓國近代美術散考)』(이구열, 을유문화사, 1978)

    『한국근대미술연구(韓國近代美術硏究)』(이경성, 동화출판공사, 1980)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오광수, 열화당, 1982)

    / 초판은 지선당에서 1997.10.31에 554P.로 간행하였으므로 2000년도 본은 수정보완본이다. 책의 내용 요약과 목차는 다음과 같다.

    수운 최제우의 창조신관과 생성신관, 시천주 사상, 천주와 상제, 이기와 생성의 세계, 수운의 인간관, 동학의 인식론, 수양방법, 동학사상에 나타난 철학개념 등 동학의 사상과 수양방법을 상세히 소개했다.

    1997년도판과 2000년도판의 목차 비교

    2000년도판 목차

    머리말

    서시

    목차

    서론

    1997년도판 001. 수운의 神觀과 諸神觀

    2000년도판 〈一〉수운의 神觀과 諸神觀

    1. 창조신관과 생성신관의 기능

    2. 수운의 生成神觀

    1997년도판 002. 侍天主 思想

    2000년도판 〈二〉侍天主 思想

    1997년도판 003. 天主와 上帝

    2000년도판 〈三〉 天主와 上帝

    1997년도판 004. 理氣와 生成(造化)의 世界

    2000년도판 〈四〉理氣와 生成(造化)의 世界

    1997년도판 005. 수운의 人間學

    2000년도판 〈五〉수운의 人間學

    1997년도판 006. 東學의 認識論

    2000년도판 〈六〉東學의 認識論

    1997년도판 007. 自己를 創造하는 人間

    2000년도판 《七》 自己를 創造하는 人間

    1997년도판 008. 修養方法(心法)

    2000년도판 《八》 修養方法(心法)

    1997년도판 009. 수운이 예언한 末世와 새세상

    2000년도판 《九》 수운이 예언한 末世와 새 세상

    1997년도판 010. 동학사상에 나타난 철학개념들의 발생과 그 변천과정의 고찰

    2000년도판 《十》 동학사상에 나타난 철학개념들의 발생과 그 변천과정의 고찰

    1997년도판 011. 結語

    2000년도판 結語

    1997년도판 012. 後天 橫的時代의 三神五帝의 使命

    2000년도판 1. 後天 橫的時代의 三神五帝의 使命

    1997년도판 013. 東學과 西學의 一致

    2000년도판 2. 東學과 西學의 一致

    1997년도판 014. 東學復元의 의미

    2000년도판 3. 東學復元의 의미

    1997년도판 015. 後天文明

    2000년도판 4. 後天文明

    김경창은「하날님 말씀」만을 신봉하는 매우 閉鎖的인 인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행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자료라는 것이 한 인간을 평가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그 자료를 근거로 하여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학생회 활동과 한국사상연구소, 총부에 근무할 시절에 김경창 원로를 생전에 가끔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는 했지만 교리나 교사를 놓고 토론을 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교단 안팎에 교리와 교사에 해박한 원로들도 많이 있었고 교단이 가장 활동적이었던, 1910년대부터 해방공간 전후까지 30여 년 동안을 교단에 직접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지도자급의 원로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김경창, 한길호, 이세권 등등 이 분들과 뜻을 같이 하던 분들과는 일상적인 생활과 신앙에 관련된 일 이외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 분들이 하시는 일과 입장과 주장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필자로서는 논의를 자청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교단의 입장에 서서 제가 맡은 교화와 『신인간』을 알차게 발행하는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鏡庵 李世權 원로께서 환원하시기 한두 달 전쯤에 필자를 불러서 찾아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간의 일과 과정을 설명하면서 올바른 교의를 해석함에 있어 노력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몇 권에 자료를 주어 받은 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주장이나 그 주장에 대한 관철을 부탁받은 적은 없다. 이미 그 분들의 생각과 주장들을 그 분들이 출간한 교서들의 서문이나 후기의 전문을 소개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그분들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그런 주장과 논의를 충분히 거쳐 오늘의 교단의 공식 입장이 수립되었으리라 필자는 믿고 싶다.

    필자는 이와 같은 경우를 구파의 마지막 지킴이였던 優菴 李威卿 원로로부터 신구파가 갈등을 겪었던 과정과 내용을 加減없이 정리해달라는 당부와 구파에서 사용하던 교리 교사에 관련된 수 권의 자료들을 물려받은 적도 있다. 한 결 같이 그 분들의 마지막 부탁은 지나간 긴 시간의 尖銳한 갈등과 논쟁의 입장들은 묻어버리고, 앞으로 수백만의 대교단으로, 교단이 중흥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私心없이 정리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김경창은「하날님 말씀」의 後記에서「하날님 말씀」에 수록된 영인본의 가치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과 평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날님 말씀」은 하날님께서 水雲 崔濟愚先生임에게 내리신 「하날님 말씀」이 東經大全과 용담유사이며 天理요, 東學이다. 하날님은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이며 「造化者」이며 「造物主」이며 天主이시다. -중략-「하날님 말씀」이 곧 心學이다. 이제 우리의 信仰은 하날님이니 「하날님 말씀」인 東學에서 宗敎의 定義를 찾아야 하고 東學에 歸結하여 定立되어져야 할 것이다. -중략-「하날님 말씀」은 前世와 現世와 來世의 가르침이며 人間觀이오 世界觀이오 史觀이오 輔國安民하는 國家觀이며 民族의 統一理念이며 世界기 平和를 이룩하여야 하는 眞理이다.「하날님 말씀」이 우리에게 있음은 오늘에 이른 우리 文化民族의 矜持이다. 여기에 民族의 正氣가 살아있으며 사람마다 하날님을 直接 모시는 最高地上의 民主主義의 학이 「하날님 말씀」이다.

    또 金京昌은 布德124(1983)年 四月 二日에 간행한「註釋 典籍東學文化財」/ 東經大全 文化財登錄나-1-20098號, 용담유사 文化財登錄나-1-20099號라는 교서를 正民社에서 출간하였다. 이 서문에서 東學文化財로서 등록된 『東經大全』과 『용담유사』의 가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심한 國粹主義라 비난받을 만큼의 강한 민족주의를 들어내고 있다.

    ‘우리 祖國의 精神文化는 뿌리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아서 무한한 持久力과 무궁한 持續性을 지니고 있다는 事實을 오늘날 東學의 中興으로써 立證할 것이다.

    祖國의 옛 祖上들은 文字 以前의 言語生活時代부터「」님을 地上最高의 存在로서 組織하고 敬拜하기 시작하여 漢文의 專用時代까지 계속 경배하면서 口碑로 지켜왔다. -중략- 그런데 不幸하게도 日帝의 御用學者들이 祖國의 古典에 담긴「」님을 훼손하고 비뚤어지게한 탓으로 日帝 以前에 탄생한 젊은세대들로 하여금 祖國의 固有信仰을 찾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비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은 하날님 신앙은 시들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아 靜中動으로 存在하던 하날님 신앙이 담긴 東經大全과 용담유사가 大韓民國의 典籍文化財가 된 것이다.

    위의 두 개의 글에서 김경창이 말하고자 하는 신념에 가까운 주장의 핵심적을 발췌한 것을 바탕으로 김경창의 동학에 대한 사상과 신앙을 살펴본다면, 그는 천도교 시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동학사상만을 인정하고, 수운의 설법을 ‘前世와 現世와 來世의 가르침이며 人間觀이오 世界觀이오 史觀이오 輔國安民하는 國家觀이며 民族의 統一理念이며 世界기 平和를 이룩하여야 하는 眞理이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동학이 이렇게 퇴행하게 된 원인을 ‘그런데 不幸하게도日帝의 御用學者들이 祖國의 古典에 담긴「」님을 훼손하고 비뚤어지게 한 탓으로 日帝 以前에 탄생한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祖國의 固有信仰을 찾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비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다행하게도 『東經大全』과 『용담유사』가 典籍文化財로 지정됨으로 인한 가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鼓舞的인 일이라 했다. 그 기쁨과 기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은 하날님 신앙은 시들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아 靜中動으로 存在하던 하날님 신앙이 담긴 東經大全과 용담유사가 大韓民國의 典籍文化財가 된 것이다.,

    註 00 ; 용담유사에 표기된 「님」을 하날님으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기일 수 있다. 두 번째 음절의 아래「 」는 정문법에서는 대다수가 「ㅡ」로 변하기 때문에, 굳이 현대어 표기를 한다면 ‘하늘님’이어야 하고, 유성음 아래에서 ‘ㄹ’은 음운탈락으로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 요즘 개신교에서 애국가의 민족의 신인 ‘하느님’을 ‘하나님’과 동의어로 폭을 넓혀 사용하고 있다. 만약 김경창과 뜻을 같이 했던 분들이 신앙의 대상을 님→하날님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정문법에서는 ‘하느님’이어야 하기 때문에, 김경창과 뜻을 같이 했던 분들이 믿은 종교는 개신교거나 개신교 중의 하나의 교파를 신봉하는 모습이 되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경창에게는 한울님이 없고,「」님 신앙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이 말은 그의 마음속에는, 천도교 시대는 없고 동학시대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경창이 프린트 본 원문을 가지고 있었던『東學之人生觀』에서는 의아하리만치 한울님이란 용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東學之人生觀』을 전후로 출판된 교서에는 한울님이 자주 보인다. 김경창은 그의 신념과 주장 때문에 의도적으로 한울님은 피하고 「」님만 있게 되었으리라 추론해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東學之人生觀』에서 자주 보이는 『天主』『天主思想』이란 용어는 야뢰도 사용한 용어이긴 하지만, 김경창이 신봉했던 동학사상이고 그의 신앙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김경창은 한울님과「」님의 차이를 다만 표기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인지하고 있을 뿐 그 용어에 내재된 종교적 의미의 현격한 차이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말은 그가 ‘의미의 현격한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학을 신봉한 것이 아니라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는 『天主』『天主思想』이 민족의 혼이 담긴 尊崇과 신앙의 대상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天主』『天主思想』의 핵심인 侍天主의 한울님이「」님 이 되는 순간, 國籍없는 無名의 宗敎로 추락하고 말았으며, 그가 그의 주장대로 자랑스럽게 믿고 싶었던 동학과 천도교에는「」님 신앙은 존재할 수 없음을 몰랐던 것이다.

    김경창이 영인하여 간행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하날님 말씀』이란 書名으로 출간하면서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하날님 말씀이 되는 순간 수운은 사라지고 천주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하날님은 백번 양보해서 천주라 할 수는 있지만 수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경창은 또 다른 실수를 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하날님님의 현대어 표기가 아니다. 正文法에서 님의 현대어 표기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앙 대상으로 하늘의 주재자인 천주를 의미한다. 기독교가 19세기 초에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여호아와 God의 한국어 번역을 하나님으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하인 天의 개념이 사라지고 유일신의 개념인 ‘하나’ 라는 數詞로 變轉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김경창이 님의 정문법 표기가 하날님이라 생각했다면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학의 신앙대상인 한울님이 서학의 신앙대상인 하나님으로 變轉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운이 지적한 서학과 동학에 대한 설법인 논학문에 ‘斯人 道稱西道 學稱天主 敎則聖敎 此非知天時而 受天命耶’와 ‘曰同道言之則 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受於斯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란 수운의 설명에 정면으로 背馳(背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기를 잘못 생각함으로 인하여 갑자기 東學이 西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김경창은 정문법의 필요성은 알았으나 구체적이고 깊은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인 유일신의 호칭인 ‘하나님’이란 非文法 表記이기 때문이다. 정문법에서는 數詞에는 ‘님’ 이라는 존칭사를 붙일 수 없다. 우리문법에서는 非文法 表記를 묵인하는 분야가 있는데 예술과 종교분야가 이에 해당된다. 이 분야는 정문법 표기보기보다는 그 용어에 담겨진 의미의 함축성과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근호는 『조선조 대외사상의 흐름』에서 수운의 동학의 독자성과 신앙의 대상이 무엇이며 동학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동학은 성리학의 천도(天道)를 깨닫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중 많은 시간을 요하는 강학(講學)과 같은 논리적 추리의 과정을 빼고도, 내심(內心)의 성찰을 통하여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강조한 수양법은 성(誠), 경(敬), 신(信)에 두었는데 성(誠)과 경(敬)은 성리학에서 이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존양(存養)하는 심(心)의 수양법(修養法)으로 강조되어 온 것이다. 최제우는 여기에 신(信)을 더하여 이 세자 중 특히 신(信)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가 수양법으로 강조한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성(誠), 경(敬), 신(信)의 수양방법으로 이를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신(信)을 특히 중시하고 있다. 동학에서는 신(信)과 성(誠)을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는 “신(信)은 사람의 말들 가운데서 옳은 것을 가려내서 다시 생각해보고 굳게 지켜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옳은 말을 변함없이 꾸준히 지켜 나가면, 정성도 지극하게 되므로 신(信)과 성(誠)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말음 믿을 만한 옳은 것이다. 이 말을 굳게 믿고 수도에 공경과 정성을 다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지성으로 믿는 궁극적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속에 내재하여 있는 한울님, 다시 말하면 천도(天道)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교의 천도(天道)가 형이상의 원리로서 논리적 인식과정을 통하여 추구될 수 있는 형이상의 실체로 인식된 데 대하여, 최제우의 동학은 이 점으로부터 유교와 결별하고 천도(天道) 즉 한울님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득도하는 종교로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면 동학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천도 즉 한울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유교에 있어 천도가 인간 소게 본연지성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것이나, 이제 이러한 동학의 천도는 단순한 우주 삼라만상의 궁극적 원리라던가 이(理)라는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천주(天主) 또는 한울님과 같은 존봉(尊奉)의 대상으로 변질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유교의 천도(天道), 태극(太極) 상제(上帝)등은 그것이 형이상의 이(理)인 때문에 존봉의 대상이 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유교에서는 이러한 리(理)를 구현한 인간, 즉 성인을 존봉할 뿐이다.

    그러나 동학에서의 천주(天主), 한울님은 이제 인격신과 같이 존봉의 대상으로 된 데 특징이 있으며 또 이는 동학이 종교로서 성립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신(神)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관계가 있다.”PP.296-298.라고 하였다.

    유근호가 말하고 있는 ‘동학이 종교로서 성립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신(神)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관계가 있다.’라는 판단은 성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 교단에서는 동학시대를 도학(道學)의 시대라고, 하고 있고, 천도교시대를 종교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교단의 입장의 말은 동학시대에는 천주, 하님이고, 천도교시대는 천주, 한울님의 시대라는 뜻이므로 유근호가 말하고 있는 동학과 천도교신앙의 대상에 대한 판단은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註) 00 ; 「교훈가」 의 아래 법설을 참조할 것.

    나는도시 믿지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

    내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믿고

    해몽(解夢)못한 너희들은 서책(書冊)은 아주폐(廢)코

    수도(修道)하기 힘쓰기는 그도또한 도덕(道德)이라

    문장(文章)이고 도덕(道德)이고 귀어허사(歸於虛事) 될까보다

    열세자 지극(至極)하면 만권시서(萬卷詩書) 무엇하며

    심학(心學)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不忘其意) 하였어라

    주(註) 00 ; 「修德文」 중에 아래의 법설을 음미하시기 바람.

    大抵此道 心信爲誠 以信爲幻 人而言之 言之其中 曰可曰否 取可退否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 如斯修之 乃成其誠 誠與信兮 其則不遠 人言以成 先信後誠 吾今明諭 豈非信言 敬以誠之 無違訓辭 ⑫

    또 해월신사의 법설 중 「十. 誠․敬․信」의 全文을 必讀하시기 바람. 『天道敎經典』PP.303-309.

    우리교단에서도 한 때는, 일군의 연구자들이나 교회의 중앙지도자들이 정문법 표기를 주장하여 ‘한울님’ 보다는 ‘하느님’이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한 시기도 있었다. 그들 주장의 근저에는 우리민족의 민족신을 ‘하느님’이라 하고 있으니 민족종교로서 이에 따라 ‘하느님’으로 표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단의 衆意에 따라 ‘한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하여 사용하고 있고 다른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에 대한 기피현상도 殘存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또 어떤 연구자는 깊은 연구도 하지 않고 ‘한울님’이 비문법 표기이고, 표준어가 아닌 方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여 ‘한울님’ 대신 다른 신앙의 대상을 찾아 사용하는 것이 어떤가하고 아직도 그런 주장을 암시적으로 제기하는 사람도 잔존하고 있다.

    종교의 신앙의 대상이라 함은, 그 종교의 교의를 얼마나 함축성과 상징성을 담고 있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교의와 동떨어진 용어가 신앙의 대상으로 불리어진다면 그것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종교의 신앙대상들은 별다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호칭들임이 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졌고, 굳이 신앙의 대상에 의미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회학, 종교학의 연구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더구나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이 더 고급종교라는 논리도 없다. 고급종교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인류를 위하여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인류문명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얼마만큼 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5.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1968년도 판 東學之人生觀』은 古語文體로 된 漢主國從體의 國漢文混用體이고 1972년도 판 東學之人生觀』은 現代語文體로 된 國主漢從體의 國漢文混用體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내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이 글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원문을 정리한 사람의 이해력의 정도와 개인의 사견(私見)이 상당 수 반영된 것으로써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李敦化의「東學之人生觀」과 매우 유사한 東學之人生觀』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1972년도 판「東學之人生觀」의 發刊辭 말미에서 말한 다음의 말이 헛말이 되어버린 점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意味에서 오늘 우리는 先生께서 平生을 바쳐 敎理천명에 힘쓰신 當身의 最後著述인 本書를 出版하여 앞으로 天道敎思想을 硏究하는 後學들에게 先生이 쓰신 原典대로 刊行하여 資料에 供코져 하는 바이다.」 이 말이 얼마나 虛荒된 말이며 欺瞞的인 말인가.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 되는 이유는, 天道敎 敎團 內에서 敎書를 다루는 잘못된 태도에서 온 過誤들인 것이다. 原典대로 인쇄하지 않고 현대어로 간행하는 교단이나 사람들이 별다른 罪責感이나 反省도 없이 任意로 修訂하거나 補完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고 最惡의 경우에는 加筆은 물론이거니와 原著者의 意圖와는 전혀 다른 私見도 添加하는 경우가 非一非再하다.

    「東學之人生觀」의 비교 연구는 원문과 다르더라도 내용상 큰 문제가 없다고 보이는 아래와 같은 記述은 생략했다. 그러나 전체 글의 脈絡으로 볼 때 잘못된 現代語化일 때는 比較文을 제시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왜 한글로 轉換(國主漢從體)하는 이 글에서 原則도 없이 漢字로 表記되고 있는 상당수의 단어들을 散見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編纂하는 사람의 無心한 태도에서 온 잘못’에서 招來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思料된다. 아래의 비교문장에서 고딕체로 된 것은 相異한 문장이나 내용임을 알려주는 것임.

    例示文

    1968년도판 緖言 P. 215.

    1972년도판 머릿말 P. 7.

    1968년도판 -전략- 學의 緖言으로 보아도 無妨하다. 學이라 하면 廣義의 意味에서 다 人間學으로 볼수 있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學의 서언으로 보아도 無妨하나 學이라 하면 넓은 意味에서 모두 인간학으로 볼 수 있다. P. 7.

    1968년도판 -전략- 世上에는 人間과 關係를 가지지 않은 學이 없기 때문이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세상에는 인간과 관계를 갖지 않은 學이 없으므로 써이다. P. 7.

    ■『東學之人生觀』의 內容 比較 硏究.

    1968년도판 -전략- 人間學이라 하면 廣義의 의미에서는 -중략- 人間 其者를 直接으로 說明하는 學이 될 것이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인간학이라 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중략- 인간 그 자의 직접을 설명하는 학이 된다. P. 7.

    1968년도판 -전략- 그것은 人間自體에 屬한 部分을 外的 科學으로 說明한 것이므로 人間其者 全體의 學은 아니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그것은 인간의 신체에 속한 어떤 부분을 外的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므로 인간 그 자의 전체학은 아니다. P. 7.

    1968년도판 -전략- 人間學은 自我學이다. 自我가 무엇인가를 自覺하는 學 이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인간학은 自我의 學이다. 즉 自我 그 자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學이다. P. 7.

    1968년도판 -전략- 그러니까 現世의 生活은 이러하여야 可하다(處世論)는 根本學일 것이다. 이러한 學을 쓰는 것이 宗敎的 人生觀이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그러므로 현세의 생활은 이렇게 해야 可하다(處世論)는 근본학일 것이다. 이러한 學을 다루러는 것이 東學之人生觀이다. P. 8.

    1968년도판 -전략- 사람은 自己의 面目을 直接으로 보지 못한다. 거울이라는 客體를 經由하여 처음으로 그 形象을 彷佛하게 짐작한다. P. 215.

    1972년도판 -전략- 사람은 자기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한다. 거울이라는 客體를 통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을 비슷하게 짐작한다. P 8.

    1968년도판 -전략- 그러므로 그는 普通敎育이나 槪念的敎育으로는 到底히 될수 없는 일이리요 그리하여 直觀의 敎育은 他人의 訓敎에 依하여 되는 것이아니요 直接自我의 實薦自覺에 屬한것인 故로 自己로서 自己를 敎育하는 學이라 할수 있다. PP. 215-216.

    1972년도판 -전략-그러므로 그는 直觀과 直覺의 체험이 아니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며, 그리하여 直觀의 교육은 타인의 교육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요 직접 自我의 실천자각에 속한 것이므로 자기로써 자기를 교육하는 學이라 할 수 있다. P. 8.

    1968년도판 -전략- 말부터 어려우리만큼 要領을 捕捉하기가 困難하다. P. 216.

    1972년도판 -전략- 그 말부터가 어려우니 만치 요령을 잡기가 곤란지만, P. 9.

    1968년도판 -전략- 人間은 超越者인 大我를 自覺할만 한 本能을 가진 것이다. P. 216.

    1972년도판 -전략-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超越者인 大我를 자각할만 한 본능을 가진 것이다. P. 9.

    1968년도판 -전략- 水雲先生은 이말 한마디 만으로 萬國의 師表가 되는 大覺者이시다. P. 216.

    1972년도판 -전략- 수운선생은 이말 한마디 뿐으로도 만고의 사표가 되는 大覺者이시다. P. 9.

    1968년도판 -전략- 「無窮한이 理致」란 것은 神이 理念人格을 이름이며, P. 216.

    1972년도판 -전략- 「無窮한 그 理致」란 것은 神의 理念現象을 이름이며, P. 9.

    1968년도판 -전략- 이것은 自力도 아니며他力도 아닌 化 一致의 힘이며 이는 범신도 아니요 일신도 아닌 人乃天의 신이며 이는 靈界도 아닌 地上神仙이며 이는 唯心도 아니요 唯物도 아닌 物心合致의 至氣一元論이다. P. 216.

    1972년도판 -전략- 이는 자력도 아니며 타력도 아닌 同化一致의 힘이며 범신도 아니요 일신도 아닌 人乃天의 신이며, 이는 유심론도 아니요 유물론도 아닌 물심합치의 至氣一元論이다. P. 10.

    1968년도판 -전략- 水雲先生은 「學則東 道則天道」라 하고 또「吾道는 今不問古不問 今不比 古不比之理」라 道破하였다. P. 216.

    1972년도판 -전략- 수운선생은 「道雖天道 學則東學」이라 하고 또 말씀하되「吾道 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이라고 道破하였다. P. 10.

    1968년도판 -전략- 現像界 差別相에도 大小 어느 곳에나 無所不在로 들어있다. 크면 大天星辰으로부터 적으면 微塵芥 에 이르기 까지를 다 들어있다. P. 216.

    1972년도판 -전략- 現象界 差別相에도 大的大 小的小에 無所不在로 들어 있다. 크면 大天 星辰으로부터 작은 티끌에 까지 없는 곳이 없다. P. 10.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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