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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 광화문 복합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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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송암이윤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031회   작성일Date 17-03-26 10:29

    본문

     

    * 이윤영 저술 원본, 동학농민혁명역사소설 '혁명'의 내용중 '광화문복합상소문' 요지를 올립니다. 원본 전체는 편집과정을 거처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송암심고.

     

    (상략)

    1893년 21일 광화문 근처 최창한 접주집에 임시본부 도소를 설치하고 지도부가 모였다. 강시원, 송병희, 서장옥, 서병학, 박인호, 김연국, 박광호 등 지도부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효과적인 집회를 위해 전략을 논의하였다.

    (중략)

    광화문 집회의 대표단이 확정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온건파 손병희와 강경파 서병학이 주도한다. 광화문 부근에는 본부 대표단을 비롯해서 50여명의 지방대표단이 광화문 앞 부근에 잠입한다. 일반 도유들은 동대문 밖 낙타산 부근과 남문 밖 이문동 부근에 모이도록 하였다. 도유들은 긴장과 기대 속에 수천 명이 무리지어 본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복합상소 집회의 참여자들은 삼례집회의 규모를 넘어선 5천명에 육박하였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막 피어나는 화창한 초봄이었다. 대표단은 210() 저녁 기도식, 복합상소 기원의 봉고식을 거행한다. 이어 11일 아침 일찍 대표단 9인과 지방대표 40여 명은 의관정제하고 광화문으로 향한다. 광화문 앞 길가에 각자 돗자리를 깔고 빨간색 보자기에 싼 상소문을 소반위에 올려놓는다. 박광호 접주의 주도로 복합상소 취회의 예식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한 종교의식으로 거행된다.

     

    문필 손천민이 작성하고, 법헌 최시형이 감수한 상소문의 요지이다.

     

    최근에 살펴보면 올바른 선비는 많지 않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수운 대선생께서 하늘의 뜻으로 도를 깨달아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쳤습니다. 그 후 3년 만에 못된 학문으로 몰려 대구감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백옥처럼 작은 흠집도 없는 큰 진리가 뜻밖에 불행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동학은 유학에 비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바른 도리입니다. 부모님을 하늘님처럼 섬기라 하는 말씀이 어찌 바르지 않겠습니까. 동학은 동학이고, 서학은 서학인바 어찌 동학을 서학으로 모함하여 빼앗아 가고 잡아가두는 탄압을 합니까. 대선생은 먼저 지나간 성현들이 밝히지 못한 가르침을 다시 창시하여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리와 근본을 다하게 하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있다면 감히 임금을 속인 것이 되므로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천지부모 은덕으로 신들의 스승을 억울하고 분한 죄목에서 풀어주소서. 끝으로 감영이나 고을에서 죄 아닌 죄로 벌을 받고 귀양 간 도인들의 생령을 살려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집회 초반의 광경을 목격한, 대궐문을 출입하는 대관들과 외국인들은 호기심과 놀랜 모습으로 어리둥절하였다. 집회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광화문 앞 지도부는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며 대선생 신원과 동학공인을 호소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앞에 집결한 수천의 도유들은 주문을 외우며 구호를 외치면서 점진적으로 집회가 강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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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전하. 대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소서!

    -전하. 동학의 자유로운 포덕을 허락하소서!

    -전하. 백성을 구하시고 부패를 척결하소서!

    -전하. 서양세력과 일본세력을 몰아내소서!!

     

    동학도들의 집회시위는 갈수록 적극적이며 노골화되어갔다. 광화문 야간 취회는 여러 곳에 큰 횃불을 밝혀놓아서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조선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다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동학도들의 적극적인 시위 현장이 걱정스러웠는지 13일 오후쯤에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소원을 베풀어 주겠노라성의 없는 한마디를 전할 뿐이었다. 격분한 도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를 더욱 강렬하게 진행하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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