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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암리~수도암~수촌리 (158.3.28)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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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명림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701회   작성일Date 17-03-29 13:54

    본문

    http://cafe.daum.net/suwon-chondo/Umj/620?svc=cafeapp&sns=talk


    답사일시 158.3.28

    조사지역 화성시 제암리~수촌리 

    참여자. 이길원, 최명림, 황문식, 이광호, 심국보


    최명림 수원교구장 

    - 제암리에만  집중된 화성시의 삼일운동 기념사업은 시정되어야  

    - 고주리의 기념탑 건과 생가 복원이 필요  

    - 제암리~고주리~수촌리 등 화성지역의 삼일운동 사적지를 연결하는 화성삼일운동 순례길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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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지역에 동학이 들어간 것은 동학혁명 이전.

    水雲 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 1862년 12월 흥해에서 接을 조직하고 接主를 임명, 金周瑞를 대구·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접주로 임명. 이 무렵 경기도 지역에까지 동학이 전파. 수원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이보다 20여 년 후인 1880년경.

    수원지역에 동학을 전래한 주요인물은 徐仁周와 安敎善이다.

    안교선은 호남 출신으로 1883년 최시형이 경주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 윤상오와 같이 有司로 참여하였다. 그는 1884년 2월경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安承寬과 金鼎鉉(金乃鉉)이 그에게 입도하였다. 이들은 수원지역 동학 포교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880년 徐丙學·張晩秀·李圭植·金永根·羅天綱·申奎植이 六任으로, 안승관은 京湖大接主, 金鼎鉉은 京湖大接司로, 林炳昇·白蘭洙·羅天綱·申龍九·羅正完·李敏道는 각각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으로 수원지역의 동학교인은 수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이로써 수원지역의 동학은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대접주, 대접사, 접주, 육임 등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敎祖伸寃運動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893년 3월 10일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斥倭洋倡義運動을 전개하자

    신용구와 이민도의 주선으로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관변측 기록인 「聚語」에는 수원과 용인의 동학교인 3백여 명, 수원접이라는 자들과 그 밖의 무리들 1천여 명, 수원접 840여 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주영장 보고는 840여 명.

    - 1894년 9월 18일 반외세의 봉기령에 따라 즉각 기포, 수원지역의 동학군의 활동에 대해 오지영의 『東學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安承寬·金昇(鼎)鉉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바 官兵과 日兵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고......

    그러나 수원의 동학군을 지휘한 안승관과 김정현은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南筏院에서 효수되었고 수원성에서 체포된 金元八도 효수되었다. 그리고 남양지역의 동학군도 白樂烈과 金興烈의 지휘하에 수원의 高錫柱·김정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천도교 수원대교구♣

    1905년 이종석, 임기진이 일진회 사무소를 수원읍 신풍리에 두고 활동. 의암성사 손병희가 친일세력 제거 후 1905 천도교로 선포,

    임기진은 전답을 팔아 큰 재산을 희사하여 수년간 빚을 갚고 천도교 확장을 위해 노력.

    안성 출신의 金漢式, 남양지역은 백낙렬의 등의 노력으로 다시 세력을 회복.

    1906년 5월에 충북 진천 대접주 출신 이종석이 수원교구장.

    북문 밖 영화리에 십여 칸 초가를 사서 천도교 수원교구 간판.

    1907년 구락서 교구장. 3월에 손병희 의암성사 연무대에서 교리를 연설,

    1908년 12월 교리강습소를 설립하여 100여 명을 양성하였으며 당시 수원 교인 수는 1천200여 호이었다.


    etc_06.gif?v=2 성미납부 성적- 1909년 8월


    남양교구는 전국 1등, 수원교구는 2등.


    수촌리의 백낙렬은 삼괴지역, 김성렬은 팔탄면 고주리, 李秉夔은 팔탄면 노하리의 포교책임자, 1910년에는 수촌리를 비롯하여 독정리·어은리·장안리·화산리·이화리·덕목리·고주리·매향리 등 8개의 전교실을 설치.


    1910년대 들어 전국 각 지역에 교리강습소를 설립, 근대교육활동을 실시하자 수원지역에는

    栗北面 佛井里에 309강습소,

    貢鄕面 堤巖洞에 310강습소,

    鴨丁面 沙基村에 제446강습소,

    수원군내에 544강습소, 634강습소,

    陰德面 北洞에 733강습소,

    장안면 장안리에 734강습소 등 7개의 강습소를 설립 운영하였다.

    -

    1906년 충북진천 대접주 출신의 이종석이 수원교구장.

    1914년 당시 경기도에는 3개 대교구가 있었다. (괄호 안은 대교구장) / 

    - 경성부대교구(京城府大敎區)(장기렴(張基濂)) 

    수원대교구(水原大敎區)(이종석(李鐘奭)) : 안성, 진위, 용인, 광주, 남양, 시흥, 안산, 부평, 인천, 강화 등 10개 교구를 관할 

    - 이천대교구(利川大敎區)(전철진(全哲鎭))

     

    서울 우이동 봉황각 3.1운동 준비 기도에 참석

    수원지역에서는 이종석·鄭道永·金正淡·李圭植·李敏道·韓世敎·金興烈·金昌植 등이 참여하였다.이들은 3·1운동 당시 앞장서서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밖에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중앙대교당 건축비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할 때 남양지역에서는 백낙렬을 비롯하여 솔선해서 자금을 갹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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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수류정(용두각, 지붕에 용모양 조각이 있다.)


     수원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이 발발한곳.

     "3월 1일 북문안 용두각에 수백명의 주민이 모여 갑자기「조선독립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만세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명이 되었다.(아래 주소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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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6일~

    ⊙ 3월 16일 수원면 서장대와 연무대의 만세시위,

    ⊙ 3월 21일의 동탄면 구오산리의 만세시위,

    ⊙3월 23일 수원면 서호의 만세시위,

    ⊙ 3월 25일 수원면 청년학생 및 노동자의 만세시위,

    ⊙ 3월 28일 만세시위와 29일 수원기생조합의 만세시위,

    ⊙ 3월 25일 성호면 천도교인과 보통학교 졸업자의 만세시위,

    ⊙ 3월 29일 성호면 오산 장날의 만세시위,

    ⊙ 3월 26일의 송산면 만세시위,

    ⊙ 3월 29일 송산면 사강리 장날의 만세시위, 동일 양감면의 횃불시위, 동일 태장면과 안용면의 만세시위,

    ⊙3월 31일 향남면 팔탄면의 발안 장날 만세시위,

    ⊙ 4월 3일 우정면 장안면의 만세시위 등 20여 차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중 천도교인이 주도하거나 참여하였던 만세운동은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 동탄면, 성호면 등지에서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서울에서 李炳憲이 북수동 수원교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논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수원교구에 내려온 이병헌는 서울에서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교인을 모두 동원,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이날 밤 북수리 수원교구에서 이병헌과 교구장 金仁泰, 理文員 安政玉, 典制員 金正淡, 講道員 羅天綱, 巡廻敎師 李星九·安鍾麟, 傳敎師 洪鍾珏·安鍾煥 등 주요교역자들이 모여 만세시위와 독립운동비 모금을 비롯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수원교구의 교인들은 4월 5일 서울로 올라가 천도교의 교주인 의암 손병희가 독립운동의 주모자로 일경에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구출하려는 비밀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교구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측의 소방대와 일본인은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에 난입하여 교인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金正淡·金正模·安鍾煥·安鍾麟·洪鍾珏·金相根·李炳憲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수원지역 천도교인의 3·1운동은 수원의 외곽인 남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양지역에 처음으로 천도교인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은 동탄면 구오산리였다. 

    구오산리 만세운동은 朴斗秉·金在天)·金鎭聲 등이 만세운동을 계획, 인근 촌락의 유지, 기독교인과 연락을 취하면서 이동식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오산 장날을 이용하여 밤늦게까지 횃불을 들고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뒤 천도교전교실 앞에서 해산하였다. 이로 인해 천도교 간부와 교인들이 용인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으며 전교실은 폐쇄되었다.

    두 번째의 만세운동은 성호면 오산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울과 수원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산주민들은 천도교인과 3월 14일 시위를 전개하려 했으나 일제의 경계와 준비의 미흡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때 준비했던 만세운동은 열흘 정도 늦은 3월 25일 천도교인과 보통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융조합과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였다.  이어 3월 29일 장날을 기해 유진홍, 이성구, 김정윤, 안낙순, 모영철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3월 31일 발안리 만세운동

    안정옥과 김흥렬,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李正根가 중심이 된 이날 시위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이정근의 제자들, 그리고 장날에 모인 주민 등 1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를 불렀으며 일경은 이를 제지하고 해산시키려했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이에 저항하고 계속 시위하자 일경은 시위행렬을 향해 발포 2, 3명이 희생되고 해산하였다.


    4월 3일,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

    수원지역에서 가장 격렬하였던 4월 3일의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수촌리의 백낙렬은 李鳳九·鄭淳榮·洪秀光 등과 같이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다. 이어 화수리주재소를 포위 역시 방화하였으며, 주재소 안에에서 총격을 하던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순사를 폭행하여 참살하였다. 그밖에 음덕면과 마도면, 비봉면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朴夏遠)과 丁大成가 일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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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의 향토사학자 이길선생의 안내로 제암리, 수도암, 백낙렬선생의 묘소있던 곳, 수촌리를 둘러보다. 

    최명림 수원교구장, 황문식동덕, 이광호 동덕과 함께하였다. 

    이길원 선생은 1943년생, 수년전 화성시장에도 출마했었다. 지역의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많은 자료를 박환 교수에게 제공하였고 박환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수원-화성의 삼일운동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http://blog.naver.com/kfmbodo/80208533901

    http://cafe.daum.net/finecitydongtan/38Ya/410?q=%C0%CC%B1%E6%BF%F8%20%C8%AD%BC%BA%BD%C3

    http://cafe.daum.net/sorysayee/1R8o/2912?q=%C0%CC%B1%E6%BF%F8%20%C8%AD%BC%BA%BD%C3

    http://www.ggdaily.kr/sub_read.html?uid=62479§ion=sc3


    이 선생의 증언과 기존의 자료를 참고하여 수원화성지역의 삼일운동을 개관 

    - 내용 계속 업데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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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암리 학살로 순국한 고결한 희생, 김흥렬

    김흥렬 선생은 남양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다.

     1894년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수촌리 백낙렬과 힘을 합해 향남․팔탄면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고주리와 제암리 교인들과 함께 상투를 자르고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로서 사랑방을 전교실로 개조하여 고주리․제암리 주위의 교인들을 시일마다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인근의 유학자이자 발안장터 만세운동에서 순국한 이정근과도 자주 만나 교유하였다.

    일제강점기 수원지역의 천도교는 교세가 매우 강했는데, 수원교구 산하의 남양교구가 성미 실적 전국 제1위를 할 때에도 김흥렬은 백낙렬과 함께 성미를 당나귀에 싣고 중앙총부에 상납할 정도로 충실한 신자였다.

    김흥렬은 김창식과 함께 1914년에 제7회로 105일간 연성수련을 했다. 

    김흥렬에겐 외동딸 김철화가 있었는데, 이 딸을 천도교 제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의 며느리로 출가시킬 정도로 천도교의 핵심세력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동생 김성열을 시켜 고주리․제암리 주위 부락 젊은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조직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한 인물이었다.

    1918년 천도교에서 대교당 건축성금을 모금할 때 김흥렬은 자신의 논 3천평과 밭 3천평을 팔아 중앙총부에 헌납하였고, 인근 부락 교인들에게도 헌납을 권유하여 모금한 후 총부로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김흥렬은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백낙렬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수원지역 3․1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고주리․제암리․가재리 등의 만세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하였고, 발안장터에서도 이정근․안정옥 등과 함께 군중들을 지휘하여 항일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계획적이면서 조직적으로 일어나 일제 식민지배의 말단 행정기구였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공격하여 갖은 악행을 일삼던 일제의 주구 일본순사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일제는 가옥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보복적 행동을 감행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수색한다는 핑계로 살인과 방화, 구타 등을 벌이며 ‘제암리 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은 후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4월 3일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토벌작전은 더욱 더 거칠어졌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시위주동자인 김교철과 백낙렬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야간에 수촌리 마을에 들이닥쳐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수촌리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혔다.

    또한 일제는 만세운동이 벌어진 상황이 내란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3․1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진압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지 않아 아리타는 제암리에 대대적인 진압을 시작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과 사사카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의 주동자로 인정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인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불러 모았다. 그런 다음 그들 모두를 교회에 가둬 놓고 불을 질러 3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리타는 제암리 촌락의 대부분을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향남면 제암리는 발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으로 모두 33호의 농가가 있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종교적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포교가 많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감리교가 전파되어 초가집의 교당이 제암리에 있었고, 인근 지역을 합하여 15호의 신자 집이 있었다.

    ani_22.gif?v=2제암리 여러 희생자들과 함께 김흥렬은 고주리에서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가족과 함께 학살되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3․1운동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갔던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일제 보복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1년 애국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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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렬 선생의 묘소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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