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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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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68회   작성일Date 17-06-17 06:33

    본문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9)



    이렇듯이 道成德立은 인간 자신이 타고난 天賦의 본질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그 고유의 본질을 발휘하면 道成德立의 境涯에 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발휘하게 하는 방법에는 보통 누구나 자신이 淺見博識(깊이가 얕은 견문과 지식-오암)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반드시 善知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고로 선생은 道成德立은 在誠在人이라하여 사람 즉 善知識의 교훈을 절대 필요로 하였다. 誠은 自己의 일이어니와 人格完成의 範疇는 善知識의 天定要路(하늘이 정해준 매우 가장 緊要한 길, 즉 人格完成을 위한 바른 가르침-오암)를 받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선생 자신은 神의 啓示에 의하여 된 것이로되 後生된 徒弟는 오직 선생의 路程記를 어기지 말고 確信無疑한 修行을 하는데서 도리어 甘受和白受采의 功을 쉽게 이루리라 하였다.

    註 00 ; 善知識 - 활용하기 좋은 지식이란 의미가 아니라,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덕행을 갖추어 바른 도[正道]로써 가르쳐 이끌어주는 지도자를 말한다. 梵語 kalyāṇa-mitra, 팔리어 kalyāṇa-mitta의 번역이며, 가라밀(迦羅蜜)·가리야낭밀달라(迦里也曩蜜怛羅) 등으로 음역한다. 知識· 善親友 善友· 親友· 勝友라고도 한다. 좋은 친구라는 뜻이며, 佛道에 들어가도록 바르게 이끌어주는 훌륭한 지도자를 일컫는다. 이와 반대로, 그릇된 길[邪道]로 이끄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이라고 한다. 선지식은 수행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보살펴줄 부모가 필요하고, 장님에게는 눈이 필요하듯이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지도자가 필요하다.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권4 (65)에서,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선지식은 범행(梵行)의 절반[半體]이며, 악지식이나 나쁜 벗이 아닙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선지식은 착한 벗이며 착한 道伴이니, 梵行의 全體이다. --- 나도 선지식으로 인하여 생사에서 벗어났다.’ 고 하였다. 즉,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선지식에 의존해야함을 강조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하여 정리함.

    註 00 ; 甘受和白受采 - 예기(禮器)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에서 발췌.

    父黨無容。非謂全無禮節也。謂其刊落浮文。無相䟱薄也。因名山升中于天注。旣曰廵守。至於方岳燔柴祭天。此正釋也。又引孝經說曰。封乎泰山。考績燔燎。禪乎梁甫。刻石紀號。正義。又引諸說。以實封禪之事。不正莫甚焉。

    甘受和。白受采。案味之甘。較夫色之白。則甘似歸乎一偏。當曰淡受和。然水味至淡。而形容其味。則謂之甘可也

    아버지의 족당(族黨)을 뵐 때에는 몸가짐을 꾸미지 않는다.[父黨無容] 전연 예절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실없는 겉치레[浮文]를 제거하여 서로 소박(疏薄)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명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하고 〈제후(諸侯)의 치공(治功)의 성취를〉 하늘에 고한다.[因名山升中于天] 주에서 이미 “순수(巡守)할 때 방악(方岳)에 이르러서 나무를 태워 하늘에 제사지낸 것이다.”고 풀이하였으니,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그런데 《효경설(孝經說)》에 “태산(泰山)에 봉(封)하고 고적(考績)하고, 번료(燔燎)하고, 양보(梁甫)에 선(禪)하고 돌에 새겨 호(號)를 기록하였다.”라는 것을 또 인용하였으며, 정의에서는 또 여러 설들을 인용하여 봉선의 사실을 실증하였으니 옳지 않음이 막심하다.

    단것[甘]이라야 조리를 받고 흰것[白]이라야 채색(采色)을 받는다.[甘受和白受采] 맛 중에 단맛을 흰 색깔에 비교한다면 달다[甘]는 표현은 너무 일방적인 비유인 듯하니, 마땅히 담수화(淡受和) 즉 담담한 것이 화미(和味)를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맛은 지극히 담담하지만, 그 맛을 형용할 때에는 단것[甘]으로 해야 옳다.

    14 明理傳 - 治國平天下之政策章 4.를 참조.

    大抵書生之遊學은 農商工業發達之基礎也니 學彼先覺之學文하여 試用於未開之土地則 山野川澤과 規矩準繩과 輸出輸入이 自在方針矣리니 夫如是而才藝兼人之能行儀至於君子之境而 加彼勞苦勤勉之道則 甘受和白受采를 於斯可見矣니라

    甘受和白受采 - 甘受和는 단 것이 꿀을 받아드려 더 달게 되고, 白受采는 흰 색에 물을 드리면 더 아름다워 진다는 뜻으로, 甘受和白受采는 전보다 더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甘受和白受采의 甘과 白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甘과 白을 모두 기질 또는 성품으로 보면 같은 것이 되나, 甘을 修其身의 신(身)으로 보고, 白을 正其心의 심(心)으로 나누어 본다면, 甘과 白은 다른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身은 기질(氣質)이 되고 心은 본성(本性)이 되기 때문이다. / 필자의「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4)」를 참조.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性은 本質, 身은 器具, 氣는 活用이라고하고 보면 道成德立의 造化의 機는 至氣의 降臨과 氣化의 作用에 있다. 擺脫乾坤 振撼宇宙(震撼宇宙)의 大活力을 얻는 동시에 五湖細月을 寸裡(心)에서 발견하고 千古英雄이 掌握(손안에 쥔다는 뜻. 把握, 掌握, 征服, 支配하다 -오암.) 中에 돌아 올 것이다. 선생이 이 점에서 儒佛을 體 로 하고 仙을 用으로 삼은듯 하다. 至上神仙이 이에서 나온 것이다. 仙은 陽氣를 主로 한 것이므로 天地의 精氣, 大宇宙의 渾元的 氣, 卽 無事不涉 無事不命의 至大至剛한 渾元的 一氣의 至氣를 몸에 길러서 道心과 誠精에 合一케 하면 道成德立의 大人格을 自然 가운데서 化出한다고 하였다. 東學의 降靈法이 修道의 初學入德之門으로 가장 必要 불가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屢言複言(누누히 다시 말하다 重言復言하다.-오암)한 道成德立은 知識的이 아니요 「隱隱聰明 化出自然」이라 한 神話的인 萬事知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道成德立의 결과는 無不所通이 活用된다. 苦는 苦 가운데서 道成德立의 맛을 活用하고 樂은 樂 가운데서 道成德立의 맛을 活用한다. 빈천하면 빈천한 가운데서 부귀하면 부귀한 가운데서 道成德立의 맛을 活用한다. 이것이 大乘的 道成德立이다. 구구한 小節小目을 가르쳐 小學에서 大學에 이르는 小乘的 道成德立이 아니오 心學 一本의 直覺에 의한 通神的 道成德立이다. 十三字 呪文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弟子呪文 中 本呪文; 經典對照」의 풀이에 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 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經典對照」라고 했다. 이것을 大乘的 道成德立의 節次로 보아도 무방하다. 道成德立의 原因은 萬事知요 萬事知의 原因은 侍天主이다. 그리하여 至化 至氣 至於 至聖된다.(至化至氣 至於至聖이 바른 표기가 된다.-오암) 「侍」一字가 究極 至聖 卽 道成德立에 달하는 것이다.

    註 00; 造化의 機 - 이 표현은 莊子가 말한 ‘萬物皆出於機’/우주만물은 모두 다 機에서 나왔다. 이라고 한 문장에서 연유된 것 같다, 機 또는 機運은 우주 만물을 생성해 내는 것 또는 자연. 造化를 의미하기도 한다./어학사전을 바탕으로 관련 자료에서 재정리.

    註 00 ; 擺脫乾坤 振撼宇宙의 大活力 - 擺脫乾坤은 온 누리의 질서를 벗어 버리고, 振撼宇宙는 우주를 흔들어 떨쳐 버리다.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드높은 기개의 대 위력’으로 해석하면 된다.

    二. 朝鮮靑年聯合會는 朝鮮有史以來 初有의 事

    天地間모든일이란논힘과가티孤獨하고微弱함이업고 모힘과가티和樂하고偉大함이업는것이 올는* 아모리天地의主人公이되고 萬物의靈長이라하시다리사람일지라도 自己호올로無人孤島에 處하고보면 하잘것업고 보잘것업는一個可憐한動物에不過할것이지마는 내가잇자남이잇고 내남이모혀社會를이루고 社會가모혀 世界를組織함에이르러 이에서처음으로擺脫乾坤·振撼宇宙의大偉力이나타나는것이올시다. 그럼으로一國家나一民族이나一社會가다가티모힘이强한者는興하고 모힘이弱한者는衰退하나니 이實로天地의 眞理요萬物의公則이라할것입니다./李敦化「朝鮮靑年會聯合會의 成立에 就하야」/개벽 제7호/1921년 01월 01일. PP.33-37.

    註 00 ; 五湖細月을 寸裡(心)에서 발견하고 - 五湖四海/전국각지 또는 온 세상의 뜻)의 줄인 말로, 온 세상에 높이 뜬 초생달을 마음속에서 발견하고,

    五湖는 중국에서 유명한 다섯 개의 호수로, 타이후(太湖)· 포양후(鄱陽湖)· 둥팅후(洞庭湖)· 펑리후(彭蠡湖)· 차오후(巢湖)등이다. 細月은 초승달이고 寸裡는 마음속이다./ 어학사전에 발췌하여 재해석함.

    註 00 ; 隱隱聰明 化出自然 - 歎道儒心急에 나오는 구절로, 非徒心至 惟在正心 隱隱聰明 仙出自然 來頭百事 同歸一理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비단 마음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있다. 드러나지 않는 총명함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니 다가올 온갖 일이 한 이치로 돌아가리라.

    註 00 ; 大乘과 小乘 - 대승은 梵語 mahayna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연[摩訶衍]이라 음역하며 상연[上衍]. 상승[上乘]이라고도 한다. 소승은 hinayana의 번역이다. 승[乘]은 수례를 의미하며 미혹의 차안에서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는 교법을 가리킨다. 대승. 소승이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그의 언행의 전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좌부 불교가 주석적인 연구의 불교로 발전하여 대중들로 부터 유리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살도를 설하는 불교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보살도를 추구하는 무리들이 자신들이 받들고 있는 교리를 높여 대승이라 부르고, 기존의 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한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기존의 불교도는 소승불교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상좌부 불교라 했다. 따라서 상좌부 불교의 입장에선 보살도 불교 즉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반론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상사적으로는 소승이 대승불교의 교학적 기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소승은 자신의 해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조자도[自調自度: 調는 번뇌를 제도하여 없애는 것, 度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의 성문. 연각의 수행도며, 대승은 열반의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하고 자리와 이타의 양면을 모두 갖춘 보살의 수행도를 의미한다. 소승의 대표적 경론은 아함부 경전을 비롯하여 등이 있고, 대승에는 등이 있다. 인도의 대승에는 중관. 유식. 여래장. 밀교 등이 있고, 중국의 대승에는 삼론. 열반. 정토. 선. 천태. 화엄 등이 있어 각 종파의 우월한 점을 내세우려 노력했다.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일본. 몽골. 서장불교는 대승 불교로 분류되며,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불교는 소승불교로 분류된다. 초기 대승불교운동의 순수한 종교적 정신이 사라지면서 중기 대승불교 이후는 소승과 대승의 구별이 관념화되었다. / 문화콘텐츠 용어사전에서

    註 00 ; 侍天主 - ‘한울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신다.’ 는 시천주는 2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초월적·인격적인 상제로서의 천주를 모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신으로 인간의 숭배를 받아야 하는 신이다.

    두 번째 의미에서의 천주는 인간에 내재하는 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시천주는 '부모님처럼 하느님을 정성껏 받든다.'는 의미와 '사람은 누구나 이미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즉 최제우에게 있어서 시천주는 초월적 의미와 내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최제우가 종교체험을 할 때 받은 21자(字) 주문(呪文)에 처음 등장한다. 즉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최제우는 『東經大全』 論學文에서 시천주에 대해 주석하면서, "시(侍)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어서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옮기지 못할 것을 아는 것이고, 주(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마찬가지로 섬긴다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은 시천주 대신에 '사인여천'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제3대 교조이자 천도교를 창시한 손병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내세웠다. 천주를 모신다는 뜻이다. 천주는 일반적으로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의미하는데, 천도교에서는 하느님을 한자로 표기할 때 쓴다. 많은 종교에서나 일반인들의 사상 속에서 초월자나 절대자는 인간계와는 멀리 떨어져 높이 있는, 전지전능하며 형상을 가진 존재로 믿고 있으나, 천도교에서는 인간 속에 하느님이 내재한다고 본다.

    최제우는 그의 설법 가운데서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내 몸에 모셨으나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라 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하느님이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벌을 줄지도 모르는 무서운 절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올바른 언행을 가르쳐주는 친근한 존재임을 말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는 놀라운 힘을 낼 수 있고, 인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시천주사상이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무속(巫俗)에서 무당이 ‘몸주’를 모시고 그 신을 자기 몸에 내리게 하듯이, 하느님만을 믿어서 내 몸에 모시면 놀라운 기운이 내린다[降靈]고 본 것이다. 최제우는 모시는 사람[侍者]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첫째, 시자는 정신적인 신기한 영감(神靈)이 있어서 하느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경지를 이루게 되고,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고 한다.

    둘째, 시자는 육체적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기운(氣化)과 하나가 된다고 보았다.

    셋째, 온 세상의 시자는 모두 깨달을 수 있고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고 그 사람의 기운이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지를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경지를 자각하여 길이 잊지 않는 성실한 태도를 말한다. 이 시천주와 관련된 신이(神異)도 동학의 발달과 함께 다소 변천되었다. 초기에는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신기한 외적 경이에 치중되었으나, 뒤에는 외적인 남용을 금하고 마음으로 하느님과 통하는 정신적 노력이 중요시되었다. 시천주에 의한 종교 신앙은 안정된 심정 속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어 인생의 최고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의식면에서도 절대자나 초월자를 우상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 속에 모신 하느님과의 맹세로써 인격향상을 가져와 돈독한 신앙심을 굳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천주사상은 곧 하느님이라고 하는 인간지상주의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시킨다.

    동학에 관한 경전을 종합해보면 시천주가 2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초월적·인격적인 상제(上帝)로서의 천주(天主)를 모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신으로 인간의 숭배를 받아야 하는 신이며, 〈용담유사 龍潭遺事〉에 실린 〈안심가 安心歌〉의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2번째 의미에서의 천주는 인간에 내재하는 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용담유사〉에 실린 〈교훈가 敎訓歌〉의 "하염없는 이것들아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느님만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시천주는 '부모님처럼 하느님을 정성껏 받든다'는 의미와 '사람은 누구나 이미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최제우에게 있어서 시천주는 초월적 의미와 내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은 시천주 대신에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이것은 천주라는 인격적 존재 대신에 '천'이라는 비인격적 존재가 강조된 것이다. 한편 제3대 교조이자 천도교를 창시한 손병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웠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과 다움백과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참고문헌 ;『동경대전(東經大全)』,『천도교』(최동희·김용천, 원광대학교 출판국, 1976)

    事人如天 - 동학의 2대교조 崔時亨이 侍天主思想에 의거하여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한 가르침으로. 시천주사상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하늘처럼 섬겨야만 한다.

    최시형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하라(道家人來 勿人來言 天主降臨爲言).”라고 하였고,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니라(打兒 卽打天矣).”라고 하였다. 또, 청주의 서택순(徐0x979c淳) 집을 지나다가 그 집 며느리의 베짜는 소리를 듣고 “그대 며느리 베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인가(君之子婦織布 眞是君之子婦織布耶)?”라고 반문함으로써 하느님의 베짜는 소리임을 示唆하였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할 때에는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드는 것을 주로 하라. 저 사람이 사나운 악으로 나를 대하거든 나는 어질고 충서(忠恕)로써 대하고, 저 사람이 간교함과 거짓으로 말을 꾸미거든 나는 정직으로써 순히 받으면 자연히 돌아와 감화되리라(待人接物 必隱惡揚善爲主 彼以暴惡對我則 我以仁恕待之 彼以狡詐飾辭則我以正直順受之則 自然歸化矣).”라는 실천적인 윤리가 전개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人乃天 - 동학의 제3대 교조 孫秉熙가 주장한 天道敎의 宗旨로, 1905년을 전후하여 간행된 손병희의 ≪대종정의설 大宗正義說≫에서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상적 근원은 최제우(崔濟愚)에 두고 있는데, “대신사께서 일찍이 주문의 뜻을 풀어 가라사대, 모심이란 안으로 신령을 지니고 있으며 밖으로 기화(氣化)함을 지니고 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옮길 수 없는 것으로 깨달아 앎이니, 이는 영(靈)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의를 말씀한 것이니라(大神師 嘗呪文之意 解釋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是指稱以靈之有機的表顯道破人乃天之定義也).”라 하였다.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이라는 구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인내천사상의 근거는 ‘시천주(侍天主)’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한갓 ‘시존(侍存)’일 뿐, 신앙의 본존으로서 지고무상의 하느님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약 손병희의 주장하는 바가 인간이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천지조화의 밝은 덕에 합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함을 강조한 것이라면, 이는 마땅히 인간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시존주의(侍存主義) 동학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천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이돈화(李敦化)는 ≪신인철학 新人哲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내천의 신은…… 노력과 진화와 자기관조로부터 생긴 신인고로 인내천의 신은 만유평등(萬有平等)의 내재적 신이 되는 동시에 인간성에서 신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원천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심’이라는 것을 초월적 신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으로 생각한다면, 인내천의 교의와 시천주의 교의는 서로 양립될 수 있을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註 00 ; 內有神靈 - 천도교에서, 마음속에는 신비스러운 영험이 있어 그 영험을 느끼는 일

    이 우주에 꽉 차 있는 것은 살아 있는 神靈의 기운이다. 내 몸이 생겨지기 전에는 내유신령과 외유기화의 구분이 없었고 오직 외유기화의 작용만이 있었을 뿐이다./어학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註 00 ; 外有氣化 - 內有神靈과 外有氣化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다만 하나의 기운이 表顯하고 있는 位置가 다르고 표현하는 작용이 다르므로 이릉을 각각 다르게 붙여 놓은 것이다. '外有氣化'는 이 우주에 꽉 차 있는 하나의 기운 작용이다. 그러나 그 작용에는 여러 가지 표현 작용이 있다. 크게 구분해 보면 自然의 기운과 心靈의 기운으로 區分되며, 자연의 기운에도 電波, 引力, 重力, 大氣, 空氣, 酸素 등 여러 가지 작용이 있으며, 心靈의 기운 작용에도 靈, 神, 鬼神등 여러 가지 작용이 있으며,靈에도 그 작용에 따라 性靈, 精靈, 心靈 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어학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註 00 ; 各知不移 - 천도교에서, 각자가 깨닫고 마음에 새겨 변함이 없는 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 내면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그에 합당한 참된 경천(敬天)의 실천을 해야 함. 동학과 천도교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그의 핵심 원리인 시천주(侍天主)의 ‘시(侍)’ 자를 풀이하면서 나온 말이다.

    金芝河의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에서 발췌.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에서의 ‘각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역사적ㆍ사회적 조건, 개인적으로는 개성, 개체의 이러저러한 특수한 성격적ㆍ환경적ㆍ선천적ㆍ후천적 온갖 조건, 주ㆍ객관적 조건 전체를 뜻합니다. 그 같은 조건에 입각하여, 조건을 통해서 조건과 더불어 본질적인, 본성적인 생명의 실상을 깨우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의 안다는 ‘지知’는 감각, 지각, 또는 통각을 통해서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지혜나 각성이 아니라, 깨우쳐 앎이며 실천적 지혜로서의 앎입니다. 머리로 분석해서 계산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의 지혜로서 아는 것입니다. 즉, 앎으로서의 참삶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우쳐 아는 것인가? 역사적, 사회적, 주ㆍ객관적 조건을 통해서, 의지해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아는 것인가? ‘각지불이자各知不移者’ 그것은 즉 ‘불이자不移者’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서로 옮겨 살 수 없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니 불不 자, 옮길 이移 자에 놈 자者 자가 붙음으로 해서 그것은 본성 자체부터, 본성적으로, 본시부터 옮길 수 없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어느 때는 옮길 수 있고 어느 때는 옮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을 놈 자者 자로 표현하여 못박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옮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제멋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랬다저랬다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저 좋은 대로 제 이익대로 제 마음대로 놀아나고 방자하게 세상을 휘둘러버리려는 것, 그것이 본성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 본성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또한 유기적ㆍ연대적인 관계를 떠나서 저 혼자서만, 따로 살짝 혼자서만 살 궁리를 하는 도생圖生주의적인 방자한 태도를 말합니다. 공동체로부터 따로 떨어져 산속에서, 남모르는 숲 속에 들어가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이 본성적으로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공동체 안에 살면서도 스스로는 따로 사는 것, 당파를 만들고 분파주의를 일삼고 서로 헐뜯고 저만 혼자 잘살고 우뚝 서려고 하는 태도, 경쟁적인 태도,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다 옮김입니다.

    둘째로, 이 옮김은 생명의 본성에서의 옮김, 생명의 본성에서 떨어져나감을 뜻합니다. 생명의 본성인 신령기화 또는 신기영화, 기화신령, 즉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성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생명의 본성, 협동적으로 살게 되어 있는 생명의 본성, 자유롭고 무궁무궁하게 확장하는 생명의 본성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민중이 자신의 본성인 이 같은 생명의 실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가 그 실상을 오히려 역습하는, 자신의 자아를 오히려 깎아먹고 파괴하는 자기배신을 뜻합니다. 이 자기배신을 소외라고도 부르는데, 이 소외가 바로 옮김입니다.

    셋째로, 그것은 어떤 힘에 의해서, 어떤 죽임의 힘에 의해서 죽임당하고 타율적으로 격리당하고 차단당하고 분단당하고 억압당하고 약탈당하고 막힘당하고 감금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함께 살게 되어 있는 것이 함께 살 수 없도록 강제로 헤어지게 되는, 자유롭게 살도록 된, 자유롭게 살아가야 할 본성이 감금당하는, 계속 흘러넘쳐야 할 생명이 냉동당하는, 서로 연결 속에서 유기적으로 상호교환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생명이 분단ㆍ고립당하는, 자유롭게 자기를 무궁무궁 신장시켜야 할 생명이 그 본성과 반대로 거슬러서 어떤 억압과 죽임의 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억눌림당하는 이 모든 것을 옮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넷째, 그것은 기화신령氣化神靈, 공동체적 영성을 말합니다(공동체적 영성이란 말이 요즘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방편상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만, 그러나 기화신령이란 말은 공동체적 영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화신령은 훨씬 넓고 다양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적인 자유라 할까요?). 그것은 본성적인 생명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 고립화되고 물질화되어 굳어져 신선한 생명의 자유로운 물결을 거스르고, 통일적인 공동체활동을 역습하고 파괴하고 분단하는 생명에 대한 억압ㆍ착취ㆍ분열ㆍ해체ㆍ분단ㆍ독재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고립화, 입자화, 이것저것을 따로 꿰어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 것처럼 요소요소로 나누어서 보는 요소론要素論, 생명의 분할, 모든 생명활동에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 삶이란 본디부터, 바탕에서부터 오로지 투쟁하는 것이고, 서로 충돌하는 것이고, 갈등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이해하도록 세뇌시키고, 말을 안 들을 때는 총을 갖다 대고 억지로 강요하고 주입시킴으로써 본성적인 생명의 자유롭고 생생한 활동의 전개를 죽이는, 자르고 눌러서 죽이는 죽임,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인위적인 죽임, 억압자에 의한 인위적인 죽임 일체를 옮김이라 부릅니다.

    다섯째, 그것은 우리가 제3세계론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민중의 ‘뿌리뽑힘’입니다. 자기 생명의 익숙한 연대적 관계로부터, 그리고 자기와 친화해 있는 자연, 동식물과 흙과 물과 바람으로부터, 고향과 문화적인 공동체의 추억과 자기 민족의 역사로부터,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자기 이웃들과의 끈질긴 정으로 연결된 온갖 생명의 유기적인 상태로부터 뿌리뽑아서 옮겨놓은 것, 뿌리뽑힌 상태, 뿌리뽑혀 유랑하는 것, 끊임없는 유민상태로 내던져지는 것, 원자적으로 분해되어버리는 것, 분열되는 것, 객체로 전화되는 것, 끝없는 이민ㆍ유민ㆍ천민의 상태로,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물질로, 도구로, 연장으로 종살이로, 노동노예로, 임금노예로, 또는 천대받는 범죄자로, 쓰레기로 전락해가는 것을 옮김이라고 부릅니다.

    여섯째, 생명활동은 공동체적으로 생산하며 그 결과로 축성築城된 생산가치를 평등하게 분배해서 나누어 먹고 다시금 확대생산을 위한 생명활동의 역량을 축적시키는 것을 그 본성으로 하는데, 이 같은 본성으로부터 민중을 떼어내는 것을 옮김이라고 합니다. 생명활동인 노동력과 그 노동의 결과인 가치를, 그리고 미래에 확대재생산될 생명활동, 질적으로 높아지고 심화되고 확장된 생명활동의 기본적 동기인 노동의욕, 삶의 의욕 일체를 빼앗아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즉, 생명활동의 결과인 밥, 그리고 그 밥을 통한 새로운 확대재생산의 의욕, 즉 생명의욕을 모두 다 약탈해서 그것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다른 곳으로 강제이동ㆍ수송시키는, 본자리로부터 옮겨놓는 일체의 수탈ㆍ착취ㆍ약탈을 옮김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거미줄 같이 쳐진 도로ㆍ항로ㆍ공로와 통신망과 위성 등을 통한 일체 물질적 및 문화적 가치들의 국제적 이전ㆍ수송 또한 옮김입니다. 원래 노동의 결과인 밥은 노동의 주체인 민중에게 되돌아와 다시 확대재생산되는 것이 생명의 본성적ㆍ창조적 순환의 원리입니다. 바로 이 같은 순환활동을 차단해서 생산된 가치, 즉 밥을, 잉여를 그 주체에게 되돌려 보내지 않고 고정시키고 감금시키고 독점함으로써 본래의 가치의 순환으로부터 가치 자체를 떼어내는 것, 이 독점을 또한 옮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본래 통일적이고 일원적인 생명을 이원적으로 분리시켜, 본시 가져가는 자가 따로 있고 일하는 자가 따로 있다는 듯이, 너와 나를 분열시키고 문화와 노동을 분리ㆍ분열시키는 것, 하늘과 땅이, 인간과 신이 분열되고 주인과 노예는 본래부터 다른 것이고, 귀족과 천민은 원래 따로 있는 것이고, 노동자와 기업가가, 자본과 노동이 원래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갈라 보는 이원론, 극대화된 분별지分別智, 이것을 우리는 본성적 생명인식으로부터 옮김이라고 부릅니다. 거짓말인 이원론을 생명의 실상인 것처럼 속여먹고 세뇌시키는 것, 음양의 잠정적인 분리를 생명활동의 본성인 것처럼 속여먹는 일체의 교육, 대중매체 활동, 예술, 학문, 과학활동이 바로 옮김입니다.

    또한 이로부터 받는 고통의 짐을 제 스스로 지지 않고 남에게 전가시키는 짐의 옮김도 ‘옮김’입니다. 집을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면 가족으로부터 고향으로부터, 사회적인 집인 민족으로부터, 역사로부터 자기이탈을 함으로써 자신을 배반하고 민족을, 인간생명을 배반하는 이탈, 이것이 옮김입니다. 자기 고통을 남에게 옮기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옮김입니다. 영웅은 제후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제후는 신하에게, 신하는 백성에게, 밑바닥 민중에게, 노동하는 민중에게 자기의 고통을 전가시키고, 또는 한 민족은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짓밟고 약탈하고 억누름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옮기고, 또한 개인은 밖에서 받은 고통을 집안에 들어와 여편네를 두들겨팸으로써 마누라에게 옮기고, 여편네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받은 고통,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억압당한 여자로서의 고통을 아이를 두들겨팸으로써 자식에게 옮기고, 아이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중생, 즉 풀과 나무와 벌레와 짐승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밟아 죽이고 찢어 죽이고 잡아먹어 잔인성을 발휘함으로써, 원풀이를 함으로써 다른 생명체로 자기 고통을 옮기는 이 같은 연쇄적인 옮김, 이 모든 것이 옮김 입니다.

    그러나 옮김 가운데서도 가장 커다란 옮김, 옮김 중에도 못된 옮김은 한 민족을 분단시켜 허리를 잘라버리는 죽임입니다. 집단적 생명체인 민족에게서 생명을 떼어내 버리며, 민족 혈액의 순환을 막아 활력을 빼내며, 민족문화와 민족혼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악마혼, 매판문화, 죽임의 문화로 옮겨놓는 것, 북쪽 사람을 가족과 떼어내 남쪽으로 옮겨놓고, 남쪽 사람을 가족과 떼어내 북쪽으로 옮겨놓는 것, 무수한 사람을 이민이란 이름으로 오대양 육대주의 낯선 도시와 황야로 옮겨놓는 것.

    이 같은 옮김이 생명의 본성에 알맞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불이자야’의 아니 ‘불不’ 자의 뜻입니다. 생명은 본래 통일적이고 일원적이고 유기적이고 연대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자유롭고 해방적이고 창조적이고 영성적인 것이다, 서로 섬김, 상호존중이 삶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떨어져나감은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런 삶은 올바르지 않다라는 것이 ‘불’ 자의 뜻입니다. 그렇게 살 때는 문제가 생긴다, 병이 생긴다, 생명의 길, 즉 기혈이 막힌다, 개인도 병들고 사회도 병든다, 썩어 문드러진다, 고통이 만연한다, 죽음이 지배질서로 등장하게 되어 있다라는 것이 ‘불’ 자의 가르침입니다. 억압자, 약탈자들에 의해 민중이 소외당하고 죽임당하고 끊임없이 고통을 전가받는 삶, 허우적거리는 삶, 약육강식, 타인도태, 독극물에 의한 소비자 살해, 대규모 살상무기의 생산, 전쟁, 자원의 약탈과 고갈, 수질오염, 대기오염, 탄압, 고문, 대량학살, 군비경쟁, 전쟁, 핵확산 등 일체의 생명파괴 활동은 생명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부정적ㆍ악마적 현실이다라는 뜻이 ‘불이자不移者’ 안에는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정은 부정되어야 한다라는 뜻을 아니 ‘불’ 자는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니 ‘불’ 자는 본질적으로 그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실천적인 부정을 뜻합니다. 민중생명의 자기복귀는 이 같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민중생명 전체의 자체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저항, 전면적이고 지속적이고 확장적인 끊임없는 저항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민중이, 민족이 현실적으로 당하고 있는 고통, 제3세계 민중 전체가 당하고 있는, 인간 전체와 중생계 전체가 당하고 있는 일체의 억압과 독재와 독점, 차단과 분열ㆍ공해ㆍ전쟁 등 보편적인 생명파괴 현상을 세계의 실상인 것으로 착각시키는, 그래서 민중을 자기 배신의 소외의 늪으로 몰아넣는 인간의 물질화ㆍ생명파괴 등 ‘옮김’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에 따른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불 자는 역동적ㆍ실천적인 부정의 부정입니다.

    바로 이 ‘불이자不移者’ 곧 ‘옮길 수 없음’의 실천적 표현이 동학에서는 ‘십무천十毋天’과 ‘삼전론三戰論’으로 명확히 나타납니다. ‘십무천’은 이 ‘옮김’이라는 부정에 대한 ‘하지 말라’라는 실천적 부정의 표현입니다../김지하 전집 1. 철학사상.

    崔時亨의 「靈符呪文」“동경대전에서 말하기를「侍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는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안으로 신령이 있다고 함은 처음 땅에 떨어진 벌거숭이 어린이가 타고난 참된 마음이요, 밖으로 기화가 있다고 함은 아기를 밸 때 理와 氣가 질(質)에 응하여 새로운 형체를 이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이 몸에 내려 지피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리는 가르침이 있다고 함과, 하늘 조화의 지극한 기운으로서의 虛靈이 이제 나에게 이르러 기화되기를 원한다고 함이 이것이다. /經曰「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故 「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至氣今至願爲大降」是也/ 海月神師 法說 「靈符呪文」/靈符呪文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金芝河의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에서 발췌.

    내유신령內有神靈의 ‘신’ 자와 외유기화外有氣化의 ‘기’ 자는 맞짝을 이루어 하나의 말, 즉 ‘신기神氣’란 말을 만듭니다. 이 ‘신기’는 유기론唯氣論에서 말하는 일기一氣로서 음양의 통일로서의 태극, 근원적인ㆍ통일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화氣化’는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도道의 물화物化, 진리의 운동을 뜻하는 물화에 대비되며, 역학易學에서 말하는 기氣의 운동, 즉 변화 발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의 기화란 생명의 무궁한 활동, 즉 인간 역사의 경우 노동이며, 순환이며, 창조이며, 확장이며, 반복이며, 통일이며, 수렴을 말합니다. 그것은 끝도 가도 없이 물결치는 바다 같은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모심’이란 생명이 바로 그 본성에 따라 활동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유신령 외유기화’에서의 ‘유有’는 단순히 ‘무無’에 대립하는 ‘유’가 아니라, 단순한 ‘있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 참답게 활동다웁게 살아 있음, 즉 활동하게 함을 뜻합니다. 존재는 곧 활동이며, 활동은 곧 존재입니다. 활동과 분리된, 정지된 존재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일체의 ‘유’는 활동하는 유이지 정지된 유가 아닙니다. 즉, 생존生存입니다.

    ‘외유기화’에 있어서의 ‘화化’, 여기에서의 ‘화’는 온갖 천변만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역易’, 역학에서 말하는 변할 ‘역’입니다. 그것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ㆍ운동ㆍ확장ㆍ수렴하는 운동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운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노동입니다. 음양의 끝없는 접촉과 상호작용과 변화와 순환과 창조적인 활동, 즉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그것의 성장과 쇠퇴 전체를 가리켜 말합니다. 또한 이 ‘화’는 일치함, 통일, 협동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공생함, 서로 얽힘, 서로 상생相生함을 뜻합니다. 즉, 창조적 노동 속에서 협동적으로 생산하며 평등하게 협동적으로 나누며 서로 일치 통일하는 활동, 상부상조하고 상보相補하는 공생의 공동체 활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유신령 외유기화’라 하여 ‘안’과 ‘밖’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유有’란 살아 생존하는 존재이므로 안과 밖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의 역사적 한계, 사람 삶의 물질적 한계 때문에 방편상 분별해서 쓰고 있을 뿐, 그것은 분단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 관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과 밖으로 표현한 것은 살아 활동하는 생존, 즉 존재의 활동은 근원적으로 일원적이고 통일적이되, 구체적인 생명의 운동 과정에서는 안과 밖의 잠정적 분리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수운사상의 일원론에 입각한 역동적인 이원론, 일원적 이원론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과 기화를 따로 나누지 않고 통일적으로 파악한다면 신령기화, 즉 신령의 기화활동이겠는데, 이것은 ‘체體’ 즉 본질에서, ‘용用’ 즉 현상으로 활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용에서 체로도 활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디는 체와 용이 따로 없고 본성에서 현상으로, 현상에서 본성으로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활동 전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신령의 기화란 말은 ‘신기神氣’가 ‘영화靈化’한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영성화靈性化로서 해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노동, 공동체적 노동과 공동분배, 공동체적 민중생존의 확대를 말하는 동시에 영성화, 무궁무한한 영원, 영원한 생명상태로 확장 해방해 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상적 노동활동의 한울님으로서의 확장이면서 한울님으로 변화함, 한울님과 같이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상태로 해방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역동적 창조노동 속에서의 인간의 사회적 성화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영성은 개인적인 영성이면서도, 사회적인ㆍ공동체적인 영성입니다. 이 모든 것의 비밀은 ‘유有’, 있음, 살아 생동하는 활동적 존재인 ‘유’에 숨어 있습니다. 이 ‘유’는 안과 밖의 신령과 기화를 신기의 영화로, 또는 신령의 기화로, 노동의 해방으로, 해방의 노동으로, 안을 밖으로, 밖을 안으로 역동적으로 통일시키는 보편적 생존의 활동을 압축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과 밖이 따로 있으면서도 동시에 따로 분별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일원론 위에서의 역동적인 이원론에 수운 선생과 동학의 생명관, 민중적 생명의 세계관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김지하 전집 1. 철학사상.

    여기에서 한가지 말해 둘것은 道成德立이라든지 至聖이란 말 가운데는 보편 타당성을 缺하여 어떤 특수 인격자에 한해서만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선생의 말씀은 道成德立은 특수인에 한하여 할 수 있는 難行한 것이 아니오 사람이면 老少 男女 賢不肖를 막론하고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을 이름이다. 마치 자연계의 각 개체가 개체 그대로 완성됨과 같이 인간의 개체도 아동은 아동의 개체 그대로, 어른은 어른 그대로, 男은 男, 女는 女, 각기 天賦 個性의 地位에 서게 되는것인 만큼 각자의 神性을 발휘하는 것이다. 누구나 內有神靈이 있고 外有氣化가 있고 各知不移의 念을 갖고 있다. 그것을 無爲而化의 修行에 의해서 天心에 合하여 神人合一의 境에 달하면 萬事知, 卽 萬事如意의 道成德立이 될 것이다. 수운 선생은 曰 「父子 兄弟 그 가운데 道成立德 各各이라/경전 敎訓歌 대조) 하였다. 父는 父의 個性대로 각기 그의 神性을 발휘하면 父慈子孝의 相對性은 不言의 敎에서 化出할 것이며, 兄은 兄의 個性대로 弟는 弟의 個性대로 각기 그의 神性을 발휘하면 兄友弟恭은 天然自在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各個의 道成德立이 필경 社會的 道成德立이 되어지는 것이다.

    社會的 道成德立은 同歸一體의 章에서 論하기로 한다./ PP.210-214.

    註 00 ; 難行 - 행하기 어려운 고된 修行. 반대로 하기 쉬운 행위를 이행(易行)이라고 한다.

    註 00 ; 賢不肖 -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과 사리에 어둡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

    註 00 ; 萬事知, 卽 萬事如意의 道成德立이 될 것이다. - 萬事知는 곧 세상 모든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듯이, 萬事知를 항상 잊지 않고 수행을 하면(永世不忘萬事知) 道成德立이 쉽게 될 것이다. 萬事知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온갖 일들이 서로 마나고 흩어짐의 이치를 꿰뚫어 다 안다는 것. 全知와 같다. 萬事如意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됨 또는 세상 모든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짐. 만사휴의(萬事休矣)와는 정반대되는 의미로 萬事亨通과 비슷한 뜻 가진 말이다./천도교경전과 어학사정을 바탕으로 재정리.

    ■ 先生呪文. 本呪文 : 侍 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

    弟子呪文. 本呪文 : 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 天依人 人依食 萬事知 食一碗/海月神師의 法說 「天地父母」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한울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衣食住) 의지하므로,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五 布德廣濟; P.214.

    이상에서 말한 四大福은 純然한 자연의 自我個性에 관한 福이지만 布德廣濟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되는 福을 이름이다. 사람은 인간을 떠나 완전한 福을 얻을 수 없다. 또 인간과 인간의 相克(相剋이 올바른 표기, 相克은 일본이나 중국식 표기이다.-오암)으로써 福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피차 德을 주고 德을 펴는데서 無量大福(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이 많고 덕이 두터움-오암)이 생긴다.

    수운선생은 曰 「我心小慧 以施於人/歎道儒心急 原文 對照)」이라고 하였다. 小慧는 적은 福念이라도 남에게 布施(보시/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풀어 줌-오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적은 지식과 또는 교활한 모략으로 뽐내는 것은 惡德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慧 즉 福念에 있어서는 비록 적은 것이라도 말로나 글로나 形容으로나 行爲로나 무엇으로든지 그것을 布施하는 것은 積善과 積德의 一部가 되는 것이다. 例를 들면 普通 待人接物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남에게 小慧를 布施할 수 있다. 溫言順辭(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씨 또는 상냥한 말솜씨 또는 말투-오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물로서 동정을 표시하는 것도 慧의 표시이며 웃음으로서 애정을 표시하는 것도 慧의 表示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行에서 小慧를 布施하는 것은 실로 道成德立의 善行이 된다.

    註 00 ; 보시(布施/dana) - 대승불교의 실천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베풀어 주는 일을 말하며, 중생의 구제를 그 목표로 하고 있는 이타정신(利他精神)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보시란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결실과 함께 구제받지 못한 세상의 모든 有情物을 구제해 준다는 이타의 서원(誓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반야(般若)의 지혜를 떠나서는 올바른 보시가 성립되지 않는다. 반야에 입각한 보시는 主客이 분리된 입장에서 構築되는 의도가 아니라 分別을 초월한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 보시는 현실사회 속에서 자비로써 작용되어야만 하며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 전체를 의미한다. 사찰에 대한 각종 보시 외에도 과수원을 일구어서 나무를 심고, 의약품을 병자에게 주고, 배를 비치하고, 다리를 놓고, 도로 근처에 우물을 파두는 등의 세간적(世間的)인 선업(善業)이 모두 보시라는 관념으로 확대된다. 더 나아가서 보시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일체 중생의 성불(成佛)이라는 데로 그 뜻이 확산되어 간다.

    보시는 二種施· 三施· 四施· 八種施 등으로 분류된다. 이종시는 財施와 法施로 나누어지고, 삼시는 財施와 法施와 無畏施로 나누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三施說을 널리 채택하고 있다.

    첫째, 재시는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능력에 따라서 재물을 베풀고, 스스로 인색하고 탐욕한 생각을 버려서 구하러 온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끔 하는 것이다.

    둘째, 법시는 중생이 진리를 구하러 오거든 자기가 아는 대로 좋은 방편을 써서 이야기해 주되, 명예나 이익이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수도상의 이익과 남의 구제를 위하여 이익을 줄 수 있게 되기만을 염원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셋째,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재액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공포와 위험 앞에 놓여 있을 때 자기가 스스로 그 난을 받아 감당하고 그 사람을 공포 속에서 구출해 내어 평화와 안전을 베풀어 주는 보시이다.

    또 삼시는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飮食施, 가난한 이에게 재물을 주는 珍寶施, 正法의 수호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身命施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리고 팔종시는 ① 나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수지시(隨至施), ② 재물이 없어지거나 못 쓰게 될 것을 걱정해서 차라리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보시하는 怖畏施, ③ 먼저 보시를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그에게 도로 보시하는 報恩施, ④ 지금 저에게 보시하고 다음에 그에게서 보시받기를 바라는 求報施, ⑤ 조상에게 배워서 보시하는 習先施, ⑥ 하늘에 나기를 바라서 보시하는 希天施, ⑦ 좋은 소문이 나기를 바라서 보시하는 要名施, ⑧ 마음을 장엄하여 아끼는 마음을 없애고 定을 얻어 열반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보시하는 爲莊嚴心等施 등이다. 그러나 보시에는 보시하는 이, 보시받는 이, 보시하는 물건이라고 하는 三輪相이 없어야 한다. 이 삼륜의 상을 마음에 두는 것을 有相布施라고 하는데 이는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삼륜상을 없애고 無心에 주하여 행하는 보시를 청정하고 참된 보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無住相布施라고 하여 불교의 보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결국 무주상보시는 “내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온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 걸림이 없고[無礙] 머무름이 없는[無住] 원만한 보시를 무주상보시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정리.

    참고문헌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元曉), 『불교개론』(김동화, 보련각, 1954)

    註 00 ; 溫言順辭 - 女人偏性 其或生性 爲其夫者盡心盡誠 拜之一拜二拜 溫言順辭勿加怒氣 雖盜跖之惡 必入於化育之中 如是拜如是拜 / 海月神師 法說. 17.夫和婦順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여자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질을 지녀 혹시라도 성을 내더라도 그 남편이 되는 사람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절을 하라. 한 번 절하고 두 번 절을 하며 온순한 말로 성을 내지 않으면, 비록 도척과 같이 사악한 마음을 가졌더라도 반드시 感化가 될 것이니, 절하고 또 절하라. (한 번 절하고 두 번 절을 하고 더 절을 하라)

    ■ 化育의 의미는 자연이 만물을 낳고 자라게 함이다. 다른 의미로는 사람을 가르쳐 感化게 하여 기른다. 의 뜻이 있다. 生成化育-자연이 끊임없이 만물을 만들고 길러 냄을 참조.

    ■ 海月神師 法說. 17.夫和婦順은 布德 二十六年 해월신사께서 九月에 忠北 報恩에서 尙州郡 化寧面 前村으로 옮기셨다. 이때 徒弟들에게 講道하신 것 중에 하나이다./天道敎創建史 第二編 第六章 布德 降書 敎說一般. PP. 35-36.에서 발췌 정리.

    徒弟 한사람이 海月선생에게 물었다. 「小生의 妻는 아무리 修道를 권하여도 듣지 않으니 무슨 妙策이 없습니까?」하였다. 海月선생 曰 「절을 하라, 한번 해서 듣지 않거든 두 번 하라 두해서 듣지 않거든 몇 번이라도 하라. 그러하면 盜跖이라도 化하느니라」하였다. 절은 行으로서 德을 삼는 禮節이다. 徒弟 한사람이 海月선생에게 告하여 가로되 「우리 同德 가운데 某 는 우리 敎 가 儒彿仙 合一이라 하여 殺生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이(虱/蝨;슬의 通字-오암)를 잡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으로 그를 시정토록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고 했다. 그 다음 當者가 앞에 와서 앉아 있을 때를 기다려 일부러 이를 잡아가지고 當者가 보는 앞에서 목침 위 놓고 죽였다. 當者는 그 후부터 그런 버릇을 고쳤다. 이러한 이야기는 海月선생의 행적 가운데 얼마던지 있다.

    석가는 말을 많이 한 聖者로서 第一을 꼽는다. 四十年 長廣舌(사람들이 지루해지도록 쓸데없이 번잡하고 길게 늘어놓는 말을 비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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