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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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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642회   작성일Date 17-06-17 06:33

    본문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10)



    世上에 積善積德의 方法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울님의 眞理를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 만큼 無量大福을 받는 행위는 없으리라.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再生復活케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남에게 전할 재료가 없어서 空手來空手去를 한탄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이며, 또 獨善其身(자기만 생각하고 남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 -오암) 하여 善知識을 가지고도 그대로 죽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자기의 知德行이 充溢치 못한데서 나온 것이라 볼수 있다.布德이란 것은 하기 싫은 일을 일부러 하는것이 아니요 마음에서 넘치는 道味의 喜悅에서 不知 중에 넘쳐 웃음도 되고 올음도 되고 말도 되고 글도 되고 행위도 되어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마치 물이 웅덩이에 차면 넘쳐 흐르는 것과 같이 필연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法悅이 充溢하여 氣化作用을 일으켜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수운선생은 覺道 以前 二十年間을 「不意布德之心 極念致誠之端/修德文 經典對照」이라 하였다. 그는 法悅의 自然 充溢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하여「開門納客 肆筵說法/ 修德文 經典對照」의 大布德이 시작된 것이다. 要는 布德이란 것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充溢한 法悅的 念이 行爲로 化하여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을 이름이다. 人生의 五福은 布德廣濟에서 無量大福의 人生 目的을 達하는 것이다. PP.214-217.

    註 00 ; 開門納客 肆筵說法 - 修德文의 ‘胸藏不死之藥 弓乙其形 口誦長生之呪 三七其字 開門納客 其數其然 肆筵說法 其味其如 冠子進退 怳若有三千之班 童子拜拱 倚然有六七之詠 年高於我 是亦子貢之禮 歌詠而舞 豈非仲尼之蹈’에서 온 말.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가슴속(내 마음 속에)에 不死藥을 담고 있으니 그 모양새는 弓乙과 같다, 입으로 長生하는 주문을 외우니 그 글자 수가 스물한자이다. 대문을 열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들이니 그 數가 상당히 많아, 자리를 넓게 펴고 설법을 하는 재미가 성인들이 느꼈던 즐거움과 같았다. 어른들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모양은 마치 공자가 삼천제자를 거느린 班列(어던 위치 또는 등급-오암)과 같았고, 어린이들이 서로 손잡고 절하는 모습은 육, 명이 詩歌를 읊는 모습과 비슷하구나.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이 또한 子貢이 공자를 대하는 예절과 같고, 공자가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습과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六七之詠 - 6,7명이 어울리어 시를 읊는다. 옛날 공자 당시에 어느 날 제자인 子路, 염유(冉有) , 증석(曾皙/증자의 아버지), 공서화(公西華) 등 네 사람이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에 공자께서 "각 각 마음에 있는 말을 하라" 하시니 증석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다 되었거든 어른 3,4명과 동자 6,7명으로 沂水에서 목욕하고 무후에서 바람을 쐬고 詩文을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하니 공자께서 칭찬하시며 "나도 증석과 같이 하겠다"고 하셨다. 이런 아이들이 절을 하고 손을 맞잡고 앉아 있는 것은 공자의 제자 증석이 말한 것을 공자께서도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 내용을 그대로 이루어 놓은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孔門十哲/四科十哲-『論語)』「先進篇」2章에 공자가 진채(陳蔡)의 들판에서 위난(危難)을 당하였을 때 함께 있던 제자들 10명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그는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 · 민자건(閔子騫) · 염백우(冉伯牛) · 중궁(仲弓)이 있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 · 자공(子貢)이 있고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 · 계로(季路), 그리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 · 자하(子夏)가 뛰어나다고 하였다./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德行、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言語、宰我・子貢。政事、冉有・季路。文學、子游・子夏。 德行· 言語· 政事· 文學을 四科라고 한다. 공자의 열 명의 제자를 孔門十哲, 四科十哲이라고도 한다.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 재정리.

    第三章 同歸一體; P.219.

    一 社會와 個體; P.219.

    사회가 먼저 생겼는가? 個體가 먼저 생겨 났는가? 누가 생각하든지 개체의 집단으로 사회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狹義的 의미에서 생각되는 말이요 廣義로서 個體와 사회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사회는 언제든지 個體보다 先存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간 사회는 인간개인의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그로나 인간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게 된 創始初는 까마득한 옛날이 되리라. 일단 사회가 이루어진 뒤에는 개인이 사회안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사회는 先存的(먼저 있었던 -이미 있었던-오암)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原始創造로 보면 個人이 사회보다 먼저 있을 수 있으리라는 理論이 성립될 것 같으나 그 때에도 역시 사회가 先存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理論이라기 보다 直覺으로 알 수 있다. 만약 無何有之鄕의 一物에서 아담이라든가 天皇氏라든가 한 개인이 생겼다고 하면 그 개인은 生存이 불가능할 것은 직각적 판단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原始的 개인이 있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개인이 생존할만 한 선존적 사회가 旣存하였을 것은 사실이다. 先存的 사회가 비록 인간 사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이 탄생될만한 여건을 가진 사회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先存的 사회는 비록 인간 사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를 탄생시킬만한 母體的 인간 사회의 조건은 될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廣義의 사회는 언제든지 개체보다 먼저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개체의 母體이다. 따라서 사회는 인간 개성의 母體이다. 인간 개성은 자식이요 사회 전체는 母體이다. 개체가 母體에 의하여 생존하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PP.219-220.

    註解 ; 社會와 個體 - 사회가 먼저 생겼는가? 個體가 먼저 생겨났는가? 라고 묻는 것은, 광의적으로 만물의 존재양식과 조건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라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社會의 필요성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 말은 만물의 존재양식을 말할 때에는 필요한 질문이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社會의 필요성을 논할 때에는 사회가 먼저 생겼는가? 個體가 먼저 생겨났는가? 라는 양단논법에 의한 질문은 매우 불필요하고 적절치 못한 愚問賢答일 수 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질문인가? 사회와 인간 개개인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사회와 인간 개개인의 존재과정과 실존의 행태를 설명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에게는 현재라는 시간에 자신의 실존여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社會(society)는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의 집단으로, 정치, 문화, 제도적으로 독자성을 지닌 공통의 관심과 신념, 이해에 基盤한 多人 이상의 개인적 집합, 결사체이다. 소규모의 가족에서부터 직장과 학교, 전체사회 및 그 일부인 정치· 경제· 시민· 노동· 문화사회 등을 지칭한다. 사회는 "한국사회", "중국사회"와 같이 국가에 따른 구분과 "쿠르드 사회"와 같이 민족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고 문화, 지역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나 그 기준은 연구 대상과 관점에 따라 다르다. 오늘날 사회 개념은 무한 확장하여 세계사회, 지구사회는 물론 동물사회 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사회는 근대이행기에 생성된 신개념으로 봉건사회나 원시사회 등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회 구성에 대한 연구는 문화, 정치, 신념 등의 기준에 따른 자발적 구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사회라는 말은 영어 낱말에 있는 societ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원래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社會라는 단어의 용례는 "제의(祭儀)를 위한 특수한 모임"으로 오늘날의 뜻과는 다르며, 개별 한자의 뜻도 모일 (社) 모일 (會)로 개별 한자의 의미에서 전체적인 의미가 도출되지 않는다. 중국어에서는 송(宋)나라의 유학자 정이천(程伊川:1033~1107)의 유저 〈이정회서 二程會書〉에 있는 '鄕民爲社會'라는 말이 사회의 어원으로 인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중국어에서 '社'는 '토지의 신을 제사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인 '會'를 붙여서 '마을 사람들이 토지의 신을 모신 곳에 제사를 하기 위하여 모인다.'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이므로 현대적인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일본에서는 번역 작업시 유럽의 society에 해당하는 개념이나 실체가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한자에 있는 거의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는 다른 단어를 인용하여 번역했다가, 고전에서 찾아낸 이 낯선 번역어에 서구적인 의미를 덧씌워 정착하게 되었다. 일본의 번역서를 수입한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에서 社會라는 한자를 각각 자국 발음으로 읽는 단어를 쓰고 있다. 또 영어의 낱말인 society는 프랑스어의 société를 도입한 것이고, 이는 다시 라틴어 societas에서 온 말이다. 라틴어 societas는 동료, 동업자 등의 관계를 포함한 친근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대체로 동료· 공동· 연합· 동맹 등의 '결합하다'라는 의미였다. 고 한다.

    원시사회의 체제는 사회의 기능 분화가 일어나지 않는 단순 사회로서 대체로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경향을 보이고 사회제도가 주로 친족제도의 원리 안에 통합되고 조정되는 특성이 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이 사회의 실질적인 생산주체는 주로 집단 내부에서 충원되었다. 원시사회의 변천은, 분명히 원시적 사회체제· 봉건제적 사회체제· 근대 자본주의적 사회체제의 계기적(繼起的)인 발생→발전→소멸의 과정을 밟아온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변천에의 흐름은 사회의 지배관계 변화에서 그 일각을 찾아볼 수 있다. 사회관계의 핵심은 대체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를 반영한 지배관계 안에서 구현되며, 개개의 사회가 어떤 사회집단과 규범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가에 의해 사회적 성격의 틀이 규정되고 가치경향의 모든 시스템도 이러한 전체적 사물관계 안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사회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몇 가지 의미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흔히 인간의 사회적 삶이라는 일반적 사실, 즉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매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인간의 삶이 항상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며, 자연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② 사회라는 말은 그때그때 사회관계의 특징을 이루는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도 종종 사용된다. 농업사회라든가 산업사회라는 식의 예가 이에 해당한다.

    ③ 지역이나 특성 면에서 제한된 사회관계만을 한정하여 나타내기도 한다.

    한국사회라든가 지식인사회와 같은 경우가 그 예이다. 이처럼 사회는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별될 수 있다.’/백과사전들과 어학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註 00 ; 無何有之鄕 - 아무것도 없는 곳.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 장자가 말하는 이상향을 말한다. 무하유(無何有)는 ‘어떤 것도 없는 것’을 말하고, 향(鄕)은 ‘곳’을 가리킨다.

    『莊子』「應帝王」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天根이 殷山의 남쪽에서 놀다가 요수(蓼水)의 강가에 이르러 無名人을 만나 물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무명인이 말하였다. “물러가거라. 너는 비천한 사람이로구나. 어찌 그따위 유쾌하지 못한 일을 묻는가? 나는 지금 조물주와 더불어 벗하고 있지만, 싫증이 나면 저 하늘을 나는 새를 타고 천지의 밖으로 나아가 그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에서 노닐다가 광야에 살고자 한다. 너는 어찌 천하를 다스리는 일 따위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려 드는가?/天根遊於殷陽, 至蓼水之上, 適遭無名人而問焉. 曰, 請問爲天下. 無名氏曰, 去. 汝鄙人也. 何問之不豫也. 予方將與造物者爲人厭, 則又乘夫莽之鳥, 以出六極之外, 而遊無何有之鄕, 以處壙垠之野. 汝又何以治天下感予之心爲.

    ‘무하유지향’ 이란 이른바 무위자연의 도가 행해질 때 到來하는, 生死도 없고 是非도 없으며 人爲的인 것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 또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무하유지향’은 『莊子』의 「逍遙遊」와 「知北遊」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莊子가 말하는 ‘무하유지향’은 동양의 이상 사회로, 유학의 대동 사회이며, 사람이 천지 만물과 서로 융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사람의 신분이 평등하고 재화가 공평하게 분배되며, 인륜이 구현되는 이상 사회를 의미하고 있다. ‘무하유지향’은 ‘현실적으로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인 유토피아(Utopia)와 동일한 개념을 가진 말이다. Utopia는 그리스 어의 ‘없는(ou-)’과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로,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의 공상소설 제목이다. 동서양이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 고사성어 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도가가 바라는 이상사회는, 부국강병이라 측면에서 고려된 '큰 나라에 많은 백성(大國萬民)'이 아닌,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小國寡民) '이라는 의미로, 소규모의 농촌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도가는 人爲와 制度를 거부하고, 문명의 발달이 없는 無爲와 無慾의 이상사회로, 장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 할 수 있다./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註 00 ; 그러므로 原始的 개인이 있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개인이 생존할만 한 선존적 사회가 旣存하였을 것은 사실이다. 先存的 사회가 비록 인간 사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이 탄생될만한 여건을 가진 사회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先存的 사회는 비록 인간 사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를 탄생시킬만한 母體的 인간 사회의 조건은 될수 있는 것이다. - 李敦化는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新人哲學』의 第二章 量的 한울과 宇宙의 本體 1.科學的 立場에서 본 한울의 진화’ 2. 科學的 進化說과 水雲主義 進化說의 差異點’에서 物質科學의 宇宙觀과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P.15-18.

    ‘위에 말한 바와 같이 水雲主義에서도 科學者의 進化論을 是認하는 것은 亦是 科學者에 못지 아니하다. 水雲主義 進化說은 本質的 進化說로서 科學的 進化說을 作用的 意味에서만 是認하는 것이 彼此 相異한 點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水雲主義進化說의 要點은 部分과 全體를 明瞭히 區分하는 데 있다. 假令 여기에 어떠한 個體가 있다 하고 이 個體가 어디서 생겼느냐 물으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個體는 全體 卽 「한울」의 必然性으로부터 생긴것이라고 대답할수 있다. 그러므로 水雲主義의 立場에서 보면 個體로부터 社會(全體)가 생긴 것이 아니라 社會(全體)로부터 個體가 생긴 것이다. 人類社會라든지 動物社會라든지 어쨌든 社會(全體)라는 것은 先存的인 것이 있고 個體는 그 先存的 社會(全體)로부터 化生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는 이러한 疑問이 생길 수 있다. 人類(或은 他動物)가 적으나마 社會를 이룬 뒤의 일은 勿論이지만 이스라엘 神話에 잇는 말과 같이 人類의 原始祖를 假令 單一個人인「아담」뿐이다. 假定한다면 人類社會가 없는 곳에서「아담」같은 一個性이 化生할 수 있는 것은 무슨 理由이냐고 質疑하는 基督敎信者가 있다 하자 나는 이러한 神話迷信者에게도 위의 眞理로서 確實한 對答을 할 수 있다고 본다. 卽 그러한 境遇에도 社會(全體)는 先存的 存在가 된다 할수 있다. 卽 神의 創造說에도 社會를 先存的으로 잡지 않으면 모든 解答이 極히 困難해진다. 假令 어느 곳에 松栮가 생겼다 하면 그 松栮가 생기기 前에 벌써 그 環境은 松栮가 생길만한 모든 條件을 具備하고 있었을 것이다. 濕氣라든가 適當한 氣候라든가 土質이라듲가 이미 松栮가 나기 前에 松栮가 날만한 條件이 具備되어 있었을 것이다. 神이「아담」을 創造하였다 할지라도 「아담」이 나기 前에 地球는 이미 사람이 나서 살만한 社會的 條件을 準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五十萬年 以前에 猿流로부터 進化하여 一個體의 人間이 地球上에는 人間이 나기 前에 이미 人間이 생길만한 假人間(類人猿)의 社會가 생겨 있었던 것이다. 이 點에서 사람은 條件없이 個體가 化生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길만한 條件 卽 準人間社會로부터 眞人間이 化生하였다 볼수 있다. 卽 準人間社會는 眞人間이 생기기 以前에 모든 社會的 條件을 先存的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理致를 延長하여 當初 無生物의 地球로부터 原始生物인 아메바가 생겼다고 하면 아메바라는 個體가 出生하기 以前에 自然의 環境은 이미 아메바가 化生치 아니치 못할만한 모든 條件이 具備되어 있었던 것이다. 勿論 여기에서 科學的으로 어떠한 動機에 依하여 아메바 卽 原始生物이 되었다는 것을 確實히 證明할수는 없으나 그 環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個體가 생겼다는 것은 어떤 論理로도 否認치 못할 O(脫字임/필자)이다. 그가 電擊的 突變으로 化生하였든지 無機物의 化學的 性質變化로 생겼든지, 또는 神의 創造로 생겼든지 어쨌든 아메바가 나기 以前에 準아메바의 社會가 모든 社會的 條件을 具備하고 있었던 것은 原理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個體가 생기기 以前에 社會(廣義的 意味의 社會)가 먼저 先存的으로 있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是認치 아니치 못할 것인즉 水雲主義는 이 先存的 社會를 稱하여「한울」이라 한다. 그러므로 宇宙는 外形으로 볼 때에는 千差萬別의 各異한 特徵을 가졌다 할수 있으나 內容으로 볼 때에는 全宇宙에 磅磚(磅礡/방박의 잘못. 의미는 混元한 것/필자)한 一元的 勢力(至氣)이 있어 天地未生 以前의 無何有의 鄕으로부터 흘러내려 百千億 無量數의 劫灰를 지나 今日의 어마어마한 組織이 있는 宇宙를 보게 되었다. 할수 있다. 이것이 곧 水雲主義 進化說이다. 科學的 進化說은 作用의 便을 말하고 本體의 便을 말하지 않는데 反하여 水雲主義 進化說은 本體論으로 부터 作用論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科學은 證明의 學이니 만치 外部에 나타난 組織의 解釋으로 부터 進化를 論하게 되고 水雲主義 는 作用과 組織의 本源인「한울」의 本體的 系統으로 부터 進化의 形式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二 社會와 精神; P.221.

    社會는 하나의 추상적 관념의 존재이다. 사회를 구성한 個體 個體를 보면 구체적 형상을 가진 實在體이다. 막연히 사회라 하면 개성의 觀念 중에 들어 있는 추상적 존재이다. 즉 개체 가운데 선천적으로 우주 전체의 實像이 투영되어 있는 本能으로부터 社會觀念은 인간이 존재한 시초부터 추상적 존재로 있었다. 이것이 사회가 精神體로서 존재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언제든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無形的 존재이다.

    정신적 성장인 無形的 존재가 사실로 나타나는 것은 氣化이다. 수운선생의 外有氣化란 말은 정신을 내포한 기화작용을 이름인데 聽之不聞 視之不見 無事不涉 無事不命이 氣化神의 造化作用이다. 자연계의 사회와 인간계의 사회가 氣化的 작용으로 상호 무의식적 보조작용을 하는 것이라든지 인간과 인간과의 無意識的 혹은 有意識的으로 互相 보조의 본능을 갖고 있는 것은 氣化神의 運用의 妙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는 氣化的 존재이며, 그래서 精神氣化의 妙法을 無爲而化라 하고 無爲而化의 本源은 大天主의 造化의 자취로 나타나는 것이다.

    註 00 ; 聽之不聞 視之不見 無事不涉 無事不命 - 聽之不聞 視之不見은 아래 법설에서 보면, 視之不見 聽之不聞으로 기술되어 있고, 無事不涉 無事不命은 降靈呪文을 설명하는 문장 속에 있는 것을 任意로 발췌하여 인용하였다.

    擧此一一不已故 吾亦悚然 只有恨生晩之際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經典對照「論學文」에서

    曰降靈之文 何爲其然也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今至者 於斯入道 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經典對照「論學文」에서

    伏羲 神農 시대와 같은 태고 원시사회는 無爲而化의 德治로 산다. 그러나 그들은 無爲而化의 생활이 天道의 본능에서 나온 것을 의식치 못하였다. 고로 수운선생은 曰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布德文 經典對照」라 하였다. 그들은 無爲而化 가운데 살면서도 大自然의 惠澤이 한울님의 大道大德인 것을 모르는 愚民이었다. 이른바 愚民이란 愚는 原始 淳朴 無知를 가르친 愚이다. 즉 赤子的 愚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장래 洋洋하게 발전이 있는 美德의 愚이다. 愚民은 점차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형성하게 된다. 이로부터는 太古 結繩의 政으로는 복잡해 가는 생활형태를 거느려 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聖子(聖者의 잘못 표기-오암)의 敎化가 필요하게 되었다. 수운선생 曰「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 一盛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天理者也 故 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修其德故 乃成君子 至於至聖 豈不欽歎哉/布德文 經典對照」라 하였다. 五帝는 伏羲 神農 黃帝 堯 舜을 이름인데 德治生活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 天道 天德의 無爲而化의 생활이 無意識的으로부터 有意識的 境涯에 도달하였다. 이것이 종교생활의 시초이며 敎政一致의 原始 德治生活이다.

    註 00 ; 結繩의 政/結繩之政 - 神農氏가 노끈을 묶어 의사를 표현하는 정사[結繩之政]를 펼치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서계(書契/나무에 새겨서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한다)를 만들어서 이를 대체하였다는 기록이 『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와 『史記』 권1 五帝本紀에 보인다./『史記』 「補史記」의 「三皇本紀」와 史記索隱 권30의 三皇本紀에 공히 보이는 내용

    太皡庖犧氏風姓 代燧人氏繼天……有聖德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旁觀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始畫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造書契 以代結繩之政

    태호 포희씨는 풍성으로 수인씨를 대신하여 계속 천하를 다스렸는데,……성덕이 있었다. 위로는 하늘의 상과 아래로는 땅의 법을 관찰하고 옆으로 새와 짐승의 글과 천지의 마땅함을 관찰하며 가까이로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로는 물건에서 취하여, 비로소 팔괘를 만들어 신명의 덕을 통하고 만물의 정을 분류하였으며 書契를 만들어 결승의 정치를 대신하였다.

    창힐(蒼頡): 상고시대 黃帝의 신하로, 새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象形文字를 만들어 結繩之政(아주 먼 상고 시대에 글자 대신 노끈을 맺어 일을 표시하던 행정)을 대신하였다. /각종 어학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 『童蒙先習』에 기술된 내용 - 蓋自太極肇判하여 陰陽始分으로 五行이 相生에 先有理氣라 人物之生이 林林總總하더니 於是에 聖人이 首出하사 繼天立極하시니 天皇氏와 地皇氏와 人皇氏와 有巢氏와 燧人氏가 是爲太古니 在書契以前이라 不可考로다.

    伏羲氏始畫八卦하며 造書契하여 以代結繩之政하시고 神農氏作耒耜하며 製醫藥하시고 黃帝氏用干戈하며 作舟車하며 造曆算하며 制音律하시니 是爲三皇이니 至德之世라 無爲而治하니라

    少昊와 顓頊과 帝嚳과 帝堯와 帝舜이 是爲五帝라 皐夔稷契이 佐堯舜하여 而堯舜之治 卓冠百王이라 孔子定書에 斷自唐虞하시니라

    태극이 처음으로 판별되어 음과 양이 비로소 나누어진 시기로부터 五行이 서로 생성됨에 먼저 理와 氣가 있었다. 사람과 물건이 많이 생성되더니 이에 聖人이 먼저 나타나서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인간의 표준을 세웠으니, 天皇氏와 地皇氏와 人皇氏와 有巢氏와 燧人氏가 태고시절의 성인이다. 書契문자가 나타나기 이전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가 없다.

    복희씨가 처음으로 八卦를 긋고 書契문자를 만들어 結繩문자로 시행하던 정사를 대신했고, 신농씨가 쟁기와 보습을 만들며 의술과 약을 만들고, 황제씨가 방패와 창을 사용하며 배와 수레를 만들었으며 달력과 산수를 만들며 音律을 제정하셨으니 이들을 三皇이라 일컫는다. 이때는 사람들의 본성이 지극히 순박했기 때문에 인위적인 정치를 베풀지 않고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少昊와 顓頊과 帝嚳과 요임금, 순임금을 五帝라 일컫는다. 皐陶와 夔와 稷과 契이 요임금과 순임금을 보좌했으니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모든 왕의 으뜸이 되었다. 공자께서 書經을 刪定하심에 唐․虞시대로부터 단정하셨다./ 『童蒙先習』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註 00 ; 聖者와 聖子 - 聖者는 聖人과 같은 말이다. 聖者란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는 古今을 막론하고 인류 중에 전 생애를 모범적인 생활을 하여, 그 가르침이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을 때 성자라고 존경하여 부른다. 공자나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聖子로, 성스러운 아들 즉, 신의 아들을 뜻한다. 예수가 죽고 나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로 승격시킨 것이다. 마치 석가를 신들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각종 어학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註 00 ; 五帝 - 고대 중국의 다섯 성군으로, 곧 태호(太昊) 즉 복희(伏羲), 염제(炎帝) 즉 신농(神農), 황제(黃帝), 소호(少昊), 전욱(顓頊)를 말하고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를 가리키기도 한다. 『史記』에서는 소호 대신 黃帝를 꼽았다.

    三皇五帝/Sanhuang Wuti -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초까지의 기간은 구전되어오던 전설을 정리해 집성한 시기로, 이때 문헌과 민간전승을 통해 보존되어 있던 옛 제왕의 전설을 수집하여 시대 순으로 배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3황5제라는 명칭은 이때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3황설 가운데 天皇· 地皇· 人皇은 天地人 3才에서 이끌어낸 추상적인 표현일 뿐이며, 燧人· 伏羲· 神農 등은 옛 전설을 담고 있다. 수인· 복희· 신농 전설은 정통 유가의 고전에는 거의 기록이 없지만, 전한 말 신비사상이 발전하면서 옛 전설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신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이것이 동중서 등의 역사순환론인 3통설·3정설에 근거하여 셋으로 정리되었다. 5제는 5行說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황5제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중국의 신화전설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황(皇)과 5제(帝)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우선 3황으로는 ①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사기 史記〉), ② 천황· 지황· 인황(人皇/河圖), ③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尙書大傳), ④ 복희· 신농· 축융(祝融)(〈白虎通), ⑤ 복희·여와(女媧)·신농(春秋運科樞), ⑥ 복희· 신농· 황제(黃帝)(尙書 孔安國序) 등의 여러 설이 있다.

    5제에 대해서는 ① 태호(太皥 : 복희)·염제(炎帝:신농)· 황제· 소호(少皥)· 전욱(顓頊)(禮記), ② 황제· 전욱· 제곡(帝嚳)· 당뇨(唐堯)· 우순(虞舜)(史記), ③ 소호·전욱·고신(高辛:제곡)· 당뇨· 우순(尙書 孔安國序) 등 설이 다양하다.

    이같이 다양한 주장이 있는 것을 보면 삼황오제라는 말이 먼저 생겨난 후에 그에 맞추어 제왕의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초(漢初)까지의 기간은 예로부터 구전되어오던 전설을 정리해 집성한 시기로, 이때 문헌과 민간전승을 통해 보존되어 있던 옛 제왕의 전설을 시대 순으로 수집·배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삼황오제라는 명칭도 이때 생겨났을 것이다.

    3황설 가운데 천황· 지황· 인황을 말한 것은 그 자체의 내용은 없고 다만 天地人 三才에서 이끌어낸 추상적인 표현일 뿐이며, 수인· 복희· 신농 등은 옛 전설을 담고 있다. 수인·복희·신농 전설은 정통 유가의 고전에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한말 신비사상이 발전하면서 옛 전설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신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이것이 동중서 등의 역사순환론인 3통설(三統說)· 3정설(三正說)에 근거하여 셋으로 정리되었다.

    5帝에 대해서는 五行說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황오제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중국의 신화전설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다움 백과에서 재정리.

    세상은 점차 성장하였다. 성장은 복잡을 의미하고 복잡은 知識을 의미하며 분열을 의미한다. 여기서 원시 德治生活은 파괴의 운명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든지 생활의 안전을 도모하는 본능적 의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於是呼(여기에 또는 여기에 있어-오암)사회 치안의 방법은 두가지로 나누어지게 된다. 소위 以力服人의 法政治家와 以德服人의 德政治家로서 사회 치안을 목적함은 동일하되 前者는 强制를 수단으로 하므로 官의 權力을 要하고 後者는 德化를 주장함에서 聖者의 인격을 要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세상은 英雄本位로 나가게 된다. 前者와 後者가 方面은 다르되 다 같이 人物 중심주의인 것은 틀림없다. 인물중심에는 여러 가지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영웅과 영웅의 투쟁은 사회를 전쟁으로 몰아 넣는다 德化를 본위로 하는 聖者의 敎化는 權力의 專壓.아래 權力 보조자의 행위를 취하게 된다. 孔子도 列國 君主 앞에 정치적 권력을 빌어 王道정치의 실현을 꾀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을 취하였다. 로마法皇은 그 자체가 以德服人의 본질을 위반하고 以力服人하는 강제권을 가졌던 것이다. 이로부터 사회적 정신은 일층 타락하게 되었다. 氣化는 一層 退衰하여 相互扶助의 德治정신은 여지 없이 몰락 된다. 수운선생은 曰 「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布德文 經典對照」라 하였다. 社會는 精神이요 精神은 氣化요 氣化는 相互扶助이다. 精神을 잃은 현대의 사회가 氣化의 不調和로 인하여 疾病상태에 빠질것은 勢不得已한 일이다.PP.221-224.

    註 00 ; 以力服人과 以德服人 - 以力服人 힘으로 남을 내리 누르다. 또는 강압적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이고. 以德服人은 덕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백성을 다스리는 것.

    ■『孟子』 公孫丑章句 上에 기술된 以力服人과 以德服人에 관련된 내용.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如七十子之服孔子也.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武力으로 남을 강압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힘으로 대항해서 이길 수 없어 마지못해 복종하는 것이다. 德行 또는 德治로 남과 백성을 복종시키거나 다스리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정말로 복종하는 것으로, 그것은 마치 70명의 제자가 孔子에게 성심을 다하여 복종한 것과 같은 것이다. / 『孟子』와 관련 자료들에서 재정리함

    三 同歸一體의 社會; P.224.

    현대 사회는 法治사회요 唯物的 資本主義의 사회이다. 그리고 정신의 지배를 잃은 정신병적 사회이다. 이 질병은 안으로부터 원인이 되어 질병적 현상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이 질병을 치료하는데 대하여 外派와 內派(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방법을 각각 찾아 內,外科기술의 분리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一群의 무리들-오암) 兩論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는 外科수술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요, 하나는 內科수술을 주장하는 唯心論이다. 이 兩論이 각기 일장일단이 있다. 外科수술은 速効(速效-오암)는 있으되 근본적인 치료가 못되는 이상 病因의 伏在는 再發우려가 十分 가능하고 內科치료는 근본적인 해결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고통이 있다. 그러므로 이 兩者는 피차 고집할 문제가 아니라 反對一致의 眞理에 의하여 相互一致의 理想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이 수운 선생의 名言인 「同歸一體論」이다.

    인간의 個體가 정신과 육체의 合一로 구성된 것과 같이 사회도 정신과 육체의 兩方面으 로 되었다. 정신과 육체의 合一로 된 個體의 集團이 사회라 하면 사회 역시 정신과 육체의 合一인 것을 理論할 필요 없이 直覺的 原理라고 할 수 있다. 唯物 唯心 兩論者들의 心主肉從 肉主心從과 같은 것은 學에 속한 문제요 實現에 속한 문제는 아니다. 心主肉從이든지 肉主心從이든지 어쨌든 현실적으로 정신과 육체가 엄연한 靑天白日과 같이 존재하는 이상은 그 존재의 현실로부터 改造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內科치료자와 外科치료자가 어떤 原理에서 合致할 가능성이 있을까? 同歸一體의 主張으로 말하면 兩者가 다 一體의 大觀 아래서 自治機能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內科는 外科를 버리고 一體로 초월한다는 것이 아니요 內科를 가지고서 一體에 同歸하고 外科는 外科를 가지고 一體에 同歸한다는 것이다. 內科 外科 각 부분에서는 피차 반대가 된다고 할지라도 一體의 原理에 同歸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말을 다시 구체적으로 하면 內科는 外科를 認定하는 內科과 되고 外科는 內科를 인정하는 外科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피차 시인하게 되는가? 사회라는 一體主義에서 각자의 부분적 치료를 단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外的 제도를 改造코저 하는 자기 정신 문제를 시인하는데서 무슨 妨害와 幣가 있으며, 內的 정신을 개발하는 者가 外的 制度를 시인하는데 무슨 弊害가 있단 말인가? 물론 兩者의 습관상의 문제로 다소 弊害와 장애가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反對一致의 眞理로서 容易하게 해결할 수가 있다. 만약에 해결치 못할 근본 문제라면 兩者가 다 眞理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해결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차 감정상 고집을 부린다면 이러한 인물은 근본적으로 天理에 용납지 못할 존재라 할 수 있다.

    同歸一體의 社會觀은 反對一致의 眞理觀 에 입각한 근본 원리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個體에서 性身雙全의 竝行을 주장하며, 사회적 입장에서도 정신과 물질이 雙全 竝行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현대 사회가 이와 같은 病的 形態를 나타낸 것은 唯物資本偏重主義라고 보는 점에서 정신을 물질과 같은 정도의 一致線에 올리려는 주장을 하게 되며, 資本偏重을 정신과 같은 정도의 一致線에 내리게 하는 社會 改造를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社會 卽 大我를 살리는 道라고 본다. 社會는 卽 大我다. 大我의 입장에서 여러분들이 주장하는 理論을 들어 보면 다 같이 大我를 위하는 점에서 일치되지 않은가?

    大我는 여러분의 주장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분이 서로 투쟁하는 것 만이 진리가 아니다. 왼손이 바른손을 치고, 바른손이 왼손을 치는 것은 一體, 즉 전체 생명으로 보면 동물적 狂者의 행위라 할 수 있다.

    新世界는 오리라. 新世界란 거은 별 것이 아니오 同歸一體의 社會를 가르킴이다.PP.224

    -228.

    註 00 ; 唯物的 資本主義 - 唯物的 資本主義란 용어는 학계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다.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로 본다면, 자본주의가 극도로 타락하여 金錢萬能主義(黃金萬能主義/拜金思想)과 道德不感症’에 빠져 人間性喪失(人間不在) 또는 人間의 主體性喪失을 초래한 현실을 慨歎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 같다. 唯物論(materialism/唯物主義/崇物主義)은 정신적인 것을 근원적이며 제1차적이라고 하는 관념론이나 유심론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유물론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등은 자연적인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원리를 물, 공기, 불과 같은 물질에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화학자 R. 보일이 유물론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철학자 G. 라이프니츠와 그의 제자 C. 볼프가 이 용어를 보급시켰다. 19세기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엥겔스 등이 유물론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계승하면서 그 결함을 극복하고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인 실천에 기초를 두는 유물론을 구축했는데, 그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資本主義(capitalism)는 이윤의 획득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경제활동이다. 화폐를 투입하여 이윤과 함께 회수하면 화폐는 이윤을 생산하는 자본으로 이용된다. 어떤 물건을 싸게 사들여서 비싸게 판다든지, 또는 물품을 직접 제작하여 이윤을 붙여 판다든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는다든지 하여 이윤을 획득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16~18세기에 걸쳐 영국에서 꽃피운 직물산업의 성장에 의해 주도되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계기로 경제적인 문제에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자유방임정책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말을 고했고, 한동안 자본주의체제 전체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영국·서독·일본이 거둔 자본주의적 성과는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입증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원시 공산제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다시 사회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의 차례로 발전한다고 주장하며, 노예제에서 자본제까지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인정되고 따라서 계급대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역사관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변신론적(辯神論的) 역사 해석의 전통이 세속화되어 계승되어 있고 따라서 계몽사관의 전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독창적인 부분은 매우 근소하다고 보기도 한다. /다움 백과와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 歷史的唯物論(historischer Matherialismus/ historical materialism) -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역사 이론 또는 사회·역사 철학을 나타내는 용어로. 마르크스 자신은 이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 용어의 개념 규정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마르크스는 그의 사상체계와 그 부문분류의 구상에 대해서 명시적인 형태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유물변증법)이라는 전반적 세계관 또는 제일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먼저 있어서, 이것을 자연계에 적용함으로써 자연변증법이 성립하고 인간계(시회·역사)의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역사적 유물론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문관과 역사적 유물론의 자리매김에 관해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당시(黨是)로 삼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적 지도자인 K. J. 카우츠키와 그를 배교자로 단정한 레닌도 동의했으며,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도 동의한 공시적(公示的)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규정하는 단계에 이르면, 논자(論者)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G.V. 플레하노프는 역사적 유물론은 "학문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장래의 모든 사회학에 대한 프롤로그"라고 규정하고, 사회철학 또는 여러 가지 사회과학·역사과학에 대한 인식론적인 기초부문으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이에 대해 볼셰비키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물론자로 알려진 부하린은 "역사적 유물론은 프롤레타리아적 사회학 그 자체"라고 규정하고 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과학의 차원에 속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때로는 "역사적 유물론은 비로소 과학적 사회학의 가능성을 창출했다"고 플레하노프에 가까운 규정을 내리고, 또 어느 때는 역사적 유물론을 '과학적 사회학', '유물론적 사회학'이라고 불러 부하린에 가까운 규정을 내렸다. 이러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문적 성격규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적 유물론의 학문적 성격 규정에 대해서는 이처럼 의견이 다양하지만, 역사적 유물론 내지 유물사관이라고 할 때의 '사'(史)는 좁은 뜻의 통시적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상(事象) 전반을 수용하는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공시적 구조도 주제적 여건으로서 포함된다.

    이것을 감안해서 우선 형식적으로 규정한다면, 유물사관 내지 역사적 유물론이란 사회적 구조와 그 역사적 변천에 관한 유물론적인 파악의 원리적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논자들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에서 규정한 정식(定式)을 '유물사관의 공식'으로 속칭하고, 이에 의거하여 역사적 유물론의 테두리를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공식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그 삶의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해진 필연적인 여러 관계, 즉 물질적 생산제력(生産諸力)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照應)하는 생산 제관계(生産諸關係)에 들어간다.

    이 생산 제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실제적인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법제적·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조성되며 또 거기에 사회적 의식의 여러 형태가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인 생활과정 전반을 제약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제력은 그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현존하는 여러 생산관계 또는 이들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그때까지 생산제력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온 재산소유 제 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여러 관계가 생산제력의 발전형식에서 그 질곡으로 변해 버리며, 그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반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또는 급격히 전복된다……사회 구성체는 그것이 생산제력에 의해 충분한 여지를 가지므로 생산제력이 완전히 발전하기까지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한마디로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적 제단계로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꼽을 수 있다."

    이 '공식'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기초개념으로 삼으면서, 사회구성체를 공시적으로는 토대와 그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라는 구도로 파악하고, 통시적으로는 사회구성체의 변증법적 비약에 의한 발전적인 여러 단계적 천이상(遷移相)으로 인류사를 파악하고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마르크스는 "경제적 구조가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 "사람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의적(一義的)으로 결정한다든가 경제가 사람들의 의식을 일의적으로 결정한다든가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때로 유물사관을 '경제결정론'으로 오해하고 하부구조가 '일방적 원인'인 듯이 오해하는데,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에 있어서 궁극적인 규정계기는 현실적인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그 이상은 마르크스도 나도 일찍이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계기인 것으로 왜곡된다면 앞에서 말한 제재(題材)는 내용없는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경제적 상태는 토대이기는 하지만 상부구조의 여러 가지 계기가 역사적 투쟁의 도상발전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했으며, 이외에 만년의 엥겔스는 일련의 저작이나 편지에서 상부구조의 하부구조에 대한 '반작용'이나 여러 계기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결정론적 법칙관 그 자체도 비변증법적이라는 점에서 배제했다.

    역사적 유물론은 카우츠키·부하린 등의 몇몇 이론가에 의해서 그 체계적 논술이 시도되었고, 또 소련과 독일의 철학교정(哲學敎程) 형태로도 시도되었는데, 아직도 이론체계로서 완전히 정비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앞에서 본 마르크스의 '공식'에 등장하지 않은 원시계급사회나 공산주의 사회구성체의 자리매김을 둘러싸고, 또는 인류사(사회구성체의 천이)가 단선적이냐 복선적이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마르크스 해석이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대립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이론에 세계관적 기초와 전망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다움백과에서

    ---------------------------------------------東學之人生觀 註解書 14-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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