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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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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402회   작성일Date 17-06-17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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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11)



    ■ 唯物史觀/史的 唯物論 - 唯物史觀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창한 설로서, 보통은 史的 唯物論(historical Materialism: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 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唯物史觀의 根幹을 이루고 있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철학에 대한 辨證法的 접근 둘째, 역사에 대한 唯物論的 해석 셋째, 資本主義의 사회적 분석 넷째, 사회주의에 대한 公約 이 네 가지로서, 핵심개념과 개념들은 ‘史的 辨證法’, ‘歷史的 決定論’, ‘生業力’, ‘生産條件과 이데올로기적 上部構造’, 社會革命‘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唯物史觀은 歷史理論으로 출발하여 거기에 그치지 않고 社會理論으로까지 발전한 하나의 사상체계인데, 즉 그것은 사관인 동시에 사회이론이요, 경제이론이다.

    唯物史觀의 출발은 槪念的 哲學史想의 거부에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중엽 이후, 한때를 風味했던 헤겔, 피히테, 쉘링 등의 관념론 철학사상에 대해 反旗를 든 포이에르바하에 대하여, “唯物論적인 토대위에 서 있으면서도 直觀性과 非歷史性에 얽매여 唯物論에 투철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면서 唯物辨證法을 전개시켰다. 마르크스는 이 唯物辨證法을 사회의 발전에 적용시켜 역사발전을 원시 노예제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사회, 자본주의 사회, 사회주의→공산주의사회의 다섯 段階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즉 첫째, 인간은 그들의 생활의 社會的 生産에서 그들의 意思에 의존하지 않는 一定한 必然的인 段階, 즉 그들의 物質的 生産力의 일정한 發展段階에 상응하는 生産段階에 들어선다. 둘째, 이 생산단계의 總體는 사회의 經濟的 構造 즉 現實的 土臺를 이루는데 그 뒤에 法律的 및 政治的 上部構造가 서며 일정한 社會的 意識形態들이 그것에 상응한다. 셋째, 人間의 必要와 能力에 基盤을 둔 生産力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生産力의 累積的 발전의 법칙) 넷째, 기존의 생산관계를 固守하려는 계급과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에 利害關係를 갖는 다른 계급이 필연적으로 충돌한다는 것(계급투쟁) 등이 그것이다.

    唯物史觀의 핵심은, 剩餘價値의 창조 및 處分을 중심으로 한 資本主義的 生産樣式의 내재적 모순을 계급투쟁이라는 정치 이론과 결부시켜 唯物論的 辨證法의 철학체계에 묶어 부각시켜서 자본주의 사회의 멸망과 공산주의 사회 到來의 필연성을 주장한데 있다 /[출처] 유물사관 indykwon

    人間性(humanity) -인간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본질 및 본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 호모 폴리티쿠스(政治的 人間)의 특징을 지닌다. 인간성의 자각적인 추구는 로마의 공화정(共和政) 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거기서는 인간적 인간이란 야만적 인간에 대하여 로마적 덕(德)과 그리스적 교양을 갖춘 인간을 뜻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인간이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인 행동으로 이를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관념이 사회 전반에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나타난 이후 인간의 비이성적·본능적인 면이 폭넓게 조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생득적이라는 맹자의 주장과 경험적·후천적이라는 고자의 생각이 〈맹자〉의 〈고자〉편에 두 사람의 철학적 논쟁을 통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전통은 근세 초 르네상스기의 人文主義에서 부활되어, 근대 전체에 걸친 하나의 지도이념으로 계속 존속되어 왔으나, 현대에 와서 F.W.니체, M.하이데거, 푸코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성 시대의 종말을 고하였다.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도구를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조해서 호모 파베르(工作人)의 개념이 널리 /다움백과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人間性 喪失(humanity lose/loss of humanity)은 20세기 이후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달하여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인간 소외'. 를 불러왔다. 그리고 현대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성이 상실되고, 인간이 획일화 수단화 되어 가고 있다.

    非人格化(impersonalization)는 인간의 개성이나 정서적인 측면이 배제되어 하나의 조직 속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비인격화 현상은 대규모 관료제 조직이나 오늘날의 대중사회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개성· 이성· 감성을 상실하여 인격적 존재가 아닌 거대한 사회의 분자로서 존재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당한다고 할 때의 인간의 事物化 되는 것을 말하였고, 막스 베버(Max Weber)는 관료제에 있어서 특징적으로 인정한 대상적 관계, 또는 그와 같은 관계를 강요당하는 관료 등이 모두 비인격화를 이른다고 하였다.

    人間疎外(human alienation). 人間疎外現象(Human alienation phenomenon) - 人間疎外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인간성이 상실되어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리는 현상. 또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박탈당하여 비인간화되며, 물질문명에 예속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소외는 사회적 제도나 정치· 경제체제. 기계 문명이나 고도로 정보화 등 일반적으로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발전과 더불어,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 대하여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고 한다. 사회과학적으로는 자신의 주변, 노동 및 노동의 산물,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된 듯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현상을 뜻한다. 원래 인간이 자기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낸 물질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자신의 운명이 자기 스스로의 뜻대로 되지 않고 외부의 힘에 결정되는 듯한 무력감, 세상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심정, 사회의 기존 가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듯이 느껴지는 감정, 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고립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괴리감을 뜻하는 자기소외도 있다.

    이러한 상태 하에서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가 당사자인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외적· 강제적인 것으로 나타나, 인간의 본질은 인간에 외재(外在)하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J.J.루소에 의하여 지적되었고, K.마르크스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병리현상(病理現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상의 어휘들은 각종 백과사전과 어학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註 00 ; 同歸一體(同歸一體論) - 어학사전에는 천도교의 종교용어로, 한가지로 돌아가 한 몸이 된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모두 한울님의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서로 화합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교단의 일반적인 해석은, 교훈가에서 한울님께서 말씀하신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의미를 바탕으로, 徒弟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한울님께 誠, 敬, 信을 다해서 한울님의 덕과 나의 德이 合致되도록 하며(合其德), 한울님의 마음을 본받으려 노력하여(定其心) 天人合一의 境涯에 머물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人心卽天心, 吾心卽汝心. 이러한 해석은 수운의 법설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연유되었다고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 한울님 하신말씀 너도역시 사람이라 무엇을 알았으며 억조창생(億兆蒼生) 많은사람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는줄을 사십평생 알았더냐/敎訓歌

    ■ 시운(時運)을 의논(議論)해도 일성일쇠(一盛一衰) 아닐런가 쇠운(衰運)이 지극(至極)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賢淑)한 모든군자(君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勸學歌

    ■ 그러나 한울님은 지공무사(至公無私) 하신마음 불택선악(不擇善惡) 하시나니 효박(淆薄)한 이세상(世上)을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단말가/道德歌

    同歸一理 - 山河大運 盡歸此道 其源極深 其理甚遠 固我心柱 乃知道味 一念在玆 萬事如意 消除濁氣 兒養淑氣 非徒心至 惟在正心 隱隱聰明 仙出自然 來頭百事 同歸一理 他人細過 勿論我心 我心小慧 以施於人 / 歎道儒心急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세상의 큰 운수가 다 이 도(무위이화하는 천도자연의 이치, 인간본성에로의 복귀, 새로운 세상의 시작)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 도의 바탕은 깊고 도의 이치가 매우 멀고 깊은 데 있다. 나의 마음의 줏대를(主體性) 굳건히 해야 도의 참맛(진정한 의미)을 알게 될 것이요, 한결같은 생각이 이 도에 있으면 무위이화의 이치대로 모든 일이 뜻대로 될 것이다. 흐린 생명에 기운(욕심이 가득 찬 마음)을 깨끗이 씻고 어린아이와 같은 고운 마음씨(욕심이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를 길러라. 오직 마음을 닦는데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르게 갖는 데 있다. 그렇게 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총명함으로 자연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일은 이 이치로 함께 돌아갈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잘못을 내 마음속에 두고 시비하지 말고 내 마음의 작은 지혜로 다른 사람에게 베풀도록 하라.

    第 四 編 人生問題(夜雷對正菴問答編); P.229.

    註解 ; 第 四編 人生問題(夜雷 對 正菴 問答編)는 수운의 법설인 『東經大全』布德文과 論學文(一名 東學論 )에 수록된, 득도과정에서 보여준 天師問答이라는 형식을 빌려, 李敦化인 正菴 對 夜雷가 自問自答의 問答形式으로, 外的으로는 광의적인 종교와 기성종교(基督敎와 佛敎 等)가 당면한, 아래와 같은 열 가지의 문제를, 內的으로는 이에 따른 동학, 천도교의 종교적 특수성을 설명하고 있다. 야뢰의 이 문답은 천도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앞장 선 교역자들이 현장에서 당면할 핵심 주제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포덕을 하는데 참고가 되도록 하기 위한 의도와 일반 신도들과 동학과 천도교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들려주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그 설명이 지루할 정도로 길고, 불필요 하다고 느껴지는 예화(例話)들을 삽입함으로써 매우 산만(散漫)하여 야뢰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가 왜곡(歪曲)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는 의욕이 앞서 야뢰만이 해석할 수 있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의 논리라 평가하여도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없다고 사료된다. 또 蛇足을 붙인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적 환경 속에서 人生問題에 대하여 야뢰가 선정하고 설명한 10개 항목이 올바른 선정인가 하는 문제이다. 더 나아가 종교인 특히 동학을 좋아하고 천도교를 신앙하는 교도들에게, 각자가 無窮我로서 法悅이 가득하게 찬 삶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설명과 설득이 될 수 있는 문답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註解者는 매우 부정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장황한 설명 속에서 기성종교와 전혀 다른, ‘고등종교로서의 민족종교’ 라고 까지 자처하는 동학과 천도교의 특수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논의되어진 것들은 한 두 마디 신,성사님의 법설의 인용으로 매우 평범한 주제에 대한 路邊閑談과 같은 문답이란 점이다. 좀 더 종교학적인 측면과 동학과 천도교의 신앙 수련방법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다고 註解者는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인 각종 종교인들의 시각과 신앙이 아닌 동학과 천도교만의 특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천도교를 왜 신앙해야 하며, 천도교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날마다 희열이 가들찬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고, 도인들이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높은 수준의 신앙심을 담고 신앙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술한 열 개의 주제들은, 야뢰가 선정한 인생문제의 열 가지이다.

    一 進化와 創造; P.231/二 無神論; P.235./ 三 旣成宗敎; P.238./ 四 福善禍淫; P.240./ 五 攸好德; P.246./ 六 精神統一; P.255./ 七 法悅; P.261./ 八 樂天과 厭世; P.266./ 九 利己와 利他; P.271./ 十 無窮我; P.275.

    一 進化와 創造; P.231

    正菴. 과학과 종교의 모순 충돌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도 進化 對 創造의 논쟁이 문제 되는데 美國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나라에서도 年前의 某洲에서 進化論은 神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여 법률로서 진화론의 학교교육을 금지하였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夜雷는 종교적 입장에서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夜雷. 이 兩者의 모순 충돌은 기독교 대 과학에서 尤甚(더욱 심하다-오암)하다고 생각 된다. 왜 그러냐 하면 기독교는 철저한 一神敎라는 점에서 창조설에 대한 變通自在(제멋대로 또는 임의로, 제 마음대로 -오암)한 해석은 곤란하고 이스라엘 神話를 宇宙觀으로 하는데서 진화론의 이론 모순이 尤甚하다. 그러나 廣義로 말하면 진화론도 究極(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또는 窮極的으로 -오암)에 가서는 創造를 시인할 필연성이 있고 종교도 발전상태로 보아서는 진화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正菴 進化論이 究極에 가서는 創造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理論이 무엇인가

    夜雷 進化의 究極은 種의 문제로부터 시작 된다. 그리하여 順次로 現象에 까지 진화 계단을 解說하게 된다. 그러므로 現象界의 구조 원리를 逆說하여 究極原理인 種에 이른다면 進化論의 論法은 停止되고 만다. 즉 理論的 증명으로 解說치 못할 限界에 도달한다. 그 한계는 창조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神이 창조하였다든지 理의 無爲而化로 창조가 되었다 든지 어쨌든 창조의 觀念을 갖지 않을수 없게된다. 이러한 究極的인 境涯에 도달하면 진화설 보다 창조설이 유력하게 된다.

    註 00 ; 變通自在 - 의미상 無限變通 自在其中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다. 無限變通 自在其中이란 天理속에는 무한히 변화하는 이치가 본디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變通自在란 융통성 있게 자유자재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어학사전을 바탕으로 재 기술함.

    註 00 ; 進化論(evolution theory) - 진화론이란, 생물은 진화하는 것이라는 주장, 혹은 진화에 관한 각종 연구와 논의 또는 그 중에서 진화 요인론. 최초의 체계적인 이론은 J.B.Lamarck의 학설이며, C.R.Darwin의 自然選擇說에 의해 진화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그 후 신다윈설, 신라마르크설, 정향진화설, 격리설, 돌연변이설에 이어 小突然變異說, 전체돌연변이설 등이 제기되었다.

    19세기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다윈(Charles Darwin)에 의하여 제창된 진화론이었다. 진화론은 특이하게 학문적 영역에서보다도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다윈은 뉴턴이 물리학에서 달성한 것을 생물학에서 이루었다. 생물학을 일반법칙에 토대를 둔 과학적 학문으로 만들며 코페르니쿠스와 비견될 지식혁명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1859년 찰스 다윈이 『種의 起源(On the Origin of Species』을 출판하고 1871년 《인류의 혈통》을 저술하였을 때 이 글들이 사회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다윈은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동물들의 여러 변종이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라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았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들을 사용하여 자기주장을 폈다. 식량의 증가가 인구의 증가를 감당하지 못하므로 필연적인 '생존경쟁'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다윈의 주장은 우선 종교계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약 6천여 년 전 확정된 수의 생물이 순간적으로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믿음은 다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윈의 주장은 '성경 말씀'을 거짓이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단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로 결정하였다. / 각종 백과사전과 어학사전들에서 발췌 재정리함.

    自然選擇說(自然淘汰說natural selection theory)/生存競爭(struggle for existence) - C.R.Darwin이 수립한 진화의 요인론(要因論). 생물의 종은 자손을 많이 번식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 때문에 생기는 생존경쟁에서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개체가 생존하여 자손을 남기게 되고, 그 변이가 다음 자손에 전해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모든 종은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과정을 가리켜 자연선택설이라 한다. 모든 어린 생명이 다 생존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태의 원칙에 있다. 생존에 적합한 종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되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 예를 들면 기린은 살아남기 위하여 목이 길게 발달되었으며,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바꾸는 생체 조직을 개발하였다. 아주 조그마한 생체조직의 변화라도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계속해서 발전시킨다. 수 세대에 걸쳐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면 낡은 형태는 소멸되고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을 이룬다.

    지구가 처음 생성될 때 존재하였던 종이 현존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종은 원형으로부터 형질이 변화하여 현재 생존하는 데 유리하도록 바뀐 것들이다. 인간도 이 같은 자연의 법칙으로 진화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 각종 백과사전과 어학사전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 基督敎와 進化論 -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의 『종의 기원』이 등장한 뒤로 '진화론 패러다임'은 오늘날 인간 사유의 대전제가 됐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창조론이 설 땅을 잃었다는 뜻이고, 바꿔 말하면 기독교의 오랜 신앙적 기초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인으로 생활하며 구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김용준은 이 모순적 갈등 상황을 정직하게 돌파하려 한다. 다시 말해 과학과 종교를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하거나 둘 가운데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식의 쉬운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 둘 사이의 대립을 인정한 채로 대화와 화해의 지평을 찾아나가는 것의 그의 탐구 자세다. 이 책에서 그는 우주의 시작과 전개에서부터 생물의 탄생과 진화를 거쳐 인류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전 역사를 꼼꼼히 검토하면서 각각의 주제들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논점과 쟁점을 살핀다. 과학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로 이어지고 철학 문제는 다시 종교 문제로 이어진다.

    그의 잠정적 결론은 '진화신학'으로 나타난다. 진화신학의 요체는 '다윈주의적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진화 속에서 진화와 함께 역사하는 신'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신은 우주의 탄생 시점에서 '질서의 기원'으로 활동하다가 침묵 속으로 들어간 존재가 아니다. 진화는 각각의 생명체 차원에서 보면 고통과 투쟁과 희생을 동반하는데 신은 이 비극을 고난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다. "모든 피조물과 더블어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개방성에 동참하는" 신이 '진화신학'에서 말하는 신이다. 이 신은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대립하지 않고도 삶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부여해주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진화신학을 통해서도 신의 존재와 가치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김용준은 '대화를 통한 만남'을 이야기한다. 과학과 종교는 결코 완전히 일치할 수도 완전히 결별할 수도 없다. 둘 사이에는 '불완전한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한한 대화'만이 이 긴장을 창조적 긴장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 김용준의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의 서평에서

    註 00 ; 創造論(doctrine of creation) - 고대인(古代人)은 일반적으로 규정이 없는 ‘혼돈’(混沌, chaos) 속에 생명적인 것이 있어, 그것이 천지만물을 형성(facere)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카오스’와 생명적인 것을 하나로 생각할 때 자신 속에서 현상을 낳는다(creare)는 ‘생산론’(生産論)이 되며, 이는 일원론(一元論)적인 사상으로 호칭되는 사고법을 출현케 하였고, 그것이 각기 구별된다고 생각할 때는 형성론(形成論)이 되어 이원론(二元論)적인 세계 발생설을 주장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적인 창조론에 따르면, 위에 말한 모든 일원론적 혹은 철저한 이원론적인 창조론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이 있는 유일신 곧 하느님이 완전한 자유의 입장에서 무(無)로부터(ex nihilo)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본다. 가톨릭 교리에서는, 세계를 창조하는 하느님의 내적인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계 없이도 완전하며 또한 지복(至福)하다. 세계는 하느님을 보충해 줄 부분이 아니며, 본질에 있어 하느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하느님의 사상에 따라서 형성되었고, 창조된 영혼은 하느님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졌다. 일원론 및 철저한 이론적인 입장에 대응하여 이를 막아 지켜낸 가톨릭교회의 창조론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장 상세히 밝혀졌다.

    ‘창조’란 물질적, 정신적인 것의 본체(本體)가 하느님에 의하여 무로부터 생산되는 것을 지칭하는데, 이를 창조하고 하는 까닭은, 하느님이 물질과 영혼의 쌍방을 무에서 창조하였는데 게다가 기존의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처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요, 또한 창조행위에 있어서도 자신의 존재를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엄밀한 뜻에서의 창조 즉 ‘제1의 창조’는, 창세기(創世記)에 기록되어 있는, 이른바 ‘제2의 창조’와는 구별됨이 옳겠다. 제2의 창조에 의해 무형의 물질에 형체가 부여되었고, 생명과 활동이 부여된 것이다(창세 1:1-3).

    성서의 창조론은 구원론적(救援論的) 또는 그리스도론적인 견지에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창조론이 이론적인 이성(理性)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론에서는 창조의 주체 즉 창조자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고, 창조의 행위는 곧 언어행위이며, 이 언어행위를 통하여 하느님은 세계의 존재와 사물을 규정하였다. 피조물의 총체로서의 창조의 구조는 언어적인 성격이 있고, 그 성격은 다시 창조자의 성격에서 온다. 창조자는 그 자체가 질문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는 존재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증명 가운데의 하나는, 창조란 사물의 존재적인 의존성, 법칙적인 질서, 목적성에 의해 나타나므로, 이상 세 가지 관점에 입각한 확대된 하느님의 존재의 증명 즉 직접적인 증명이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 세계를 전제한 뒤,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창조론으로 풀어가는 길을 간접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느님이 무에서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의 세계가 항상 무로 구획되고 있음을 나타내며, 하느님이 피조물을 계속 보존함은 보통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로서 파악되고 있다. 하느님은 계속적으로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때문에 그의 존립을 보존한다. 흡사 창조가 세계의 건설을 위해 불가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지속’ 으로서의 보존의 전통적인 개념은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 불가결한 것이다./ 가톨릭대사전 에서 발췌.

    ■ 창조론과 대립하는 것과 관련되어서 의미 있는 진화론의 주장 내용은

    1. 최초의 원시적 생명체는 무기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2. 최초의 원시적 생명체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의 형태였다는 것,

    3. 여러 곳에서 발생한 이 단세포 생명체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것을 '비평가적 진화'라 한다),

    4.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는 이 단세포 생명체의 수억 년 동안의 계속적인 발달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5. 따라서 과거에는 생명체들이 지금보다 덜 진화한 채로 태어나서 죽었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는 모든 생명체가 계통발달을 반복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관련 자료들에서 발췌.

    正菴. 夜雷가 주장하는 至氣一元論에서는 創造와 進化의 調和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夜雷. 이것은 前編의 至氣一元論을 보면 자연히 이해할 수 있다. 至氣一元論의 論法으로 보면 이 現象의 萬有는 至氣的 種의 物形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단정한다. 精神과 質料는 至氣의 固有本能으로서 그 固有本能이 神의 無爲而化的 理法에 의하여 進化에 進化를 加하여 百千億 無量數의 우주 현상이 성립된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至氣一元論에서는 發展階段原理에서 是認한다.

    註 00 ; 前編 - 前編은 前篇과 같이 통용되지만, 前編은 엄격히 말하면 중국이나 일본식 표기에 가깝다. 前篇이 바른 표기-오암)/夜雷의 代表的인 著述인『天道敎創建史』와『新人哲學』그리고『東學之人生觀』은「編」으로 구성되어 있고,『人乃天要義』와『水雲心法講義』는「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正菴. 神의 創造를 어떻게 말하는가?

    夜雷. 神의 創造는 至氣와 神의 關係에서 본다. 神의 全知全能의 힘은 至氣로 進展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至氣는 神의 被造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흡사 光源과 光線의 관계와 같이 神과 至氣는 하나임과 동시에 둘이다. 이런 의미에서 萬有는 根本原理에서는 다 神의 創造요 그 發展 原理에서는 다 神의 無爲而化的 天理, 卽 進化의 原理로 된다고 보겠다.

    註解 ; 윗글에서 야뢰가 至氣와 神의 關係에서 결론으로 제시한 ‘神과 至氣는 하나임과 동시에 둘이다.’ 이라는 이론적 주장을 지금의 교단의 입장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至氣란 신인철학에서는 한울님으로 先存的인 存在로 파악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이 주장은 至氣가 神이라는 존재에 앞서야 하는 유일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註解者는 이해하고 있었다. ‘神과 至氣는 하나임과 동시에 둘이다.’라는 주장은 二元論이면서 一元論이란 뜻으로 누가 먼저 인가에(先存的인 存在) 대한 설명에는 부족한 것이 된다. 교단에서 해석하고 있는 至極한 氣運이란 최초의 기운이란 의미로 해석한다고 본다면, 최초의 존재인 至氣는 先存的인 存在인 것이 된다. 그런데 야뢰는 더 나아가 ‘그러므로 至氣는 神의 被造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흡사 光源과 光線의 관계와 같다.’라고 하고 이다. 이런 결론과 해석이 수운의 지기에 대한 해석과 같은 사상과 신앙의 脈絡이라 할 수 있을까가 매우 의심스럽다. 야뢰는 有神論의 대표적인 一神論의 주장과 꼭 닮은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萬有는 根本原理에서는 다 神의 創造요 그 發展 原理에서는 다 神의 無爲而化的 天理, 卽 進化의 原理로 된다고 보겠다.’ 만약 위의 주장과 해석이 맞는다면, 至氣는 神의 創造이므로, 천도교는 창조론의 바탕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교의를 정립하고 있는가? 아니면 至氣의 無爲而化的 天理, 卽 進化의 原理로 종교적 교의를 정립하고 있는가? 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야뢰는 이와 관련하여 동학의 위치와 신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敎政雙全/東學之人生觀의 附錄』·/東學之人生觀의 附錄에서

    ‘外國 學者中에는 동학의 天主思想을 西道의 天主사상에서 본떠온 것이라 하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우리의 歷史를 모르는 말이다. 朝鮮古神道에는 天主사상이 있다. 우리나라 古代敎化인 단군神話에 나타난 桓因(한울님)은 단군의 할아버지이신도로 한울님은 우리민족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歷史以前의 우라나라 神話時代에는 天主사상이 敎化의 中心이되었다.

    이 天主사상은 只今까지도 우리민족의 信仰的中心이 되어 비록 體系있는 신앙의 信條는 없다 할지라도 一般民間人이 다 上下계급을 勿論하고 天命, 天理, 天運, 天定, 天幸, 天心, 天罰, 天福 등등으로 無言中에 信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天」字를 혹은 中國사상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中國文化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한국에 固有하는 天主사상을 漢字로 바꾸어 놓은 것이요 그 實은 中國文化가 가르친 思想은 아니다.

    中國의 儒, 彿, 仙 三도의 文化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우리의 固有文化이던 天主사상은 換骨脫態가 되어 中國文化처럼 變하였던 것이다. 庚申 四月五日에 최수운대신사는 三十七年間 心工 끝에 무극대도를 대각하신 後 도의 本體를 韓國固有의 天主사상으로 확인하시고 天主의 理想을 爲해서 말한 汎神觀的一神觀을 定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의 本體인 天主사상은 한국고유의 사상인 點에서 한국혼의 中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앞에서 전제된

    ‘神과 至氣는 하나임과 동시에 둘이다.’PP.326-327. 라는 주장으로는 동학과 천도교의 神觀을 汎神觀的一神觀으로 定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수운의 법설부터 시작하여 해월과 의암의 법설의 窮極的인 到達點이 무엇인가를 反芻해야 할 것이다. / 『敎政雙全/東學之人生觀의 附錄』PP.314-327.까지의 내용을 必讀하시기를 권합니다.

    朴大福은 「建國神話의 天觀念과 巫觀念」에서

    ‘天意가 天文現象에 반영된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天觀念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建國神話의 天觀念은 인간계와 천상계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自然의 變化 현상을 보고 인간사의 未來를 豫知하고 있으며, 예지의 방법 또한 전문적인 知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天觀念이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존재했으나, 점차 복잡하게 象徵的으로 形象化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P.232.라고 結語부분에서 단군신화에 담겨진 天觀念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변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朴大福은 建國神話의 天觀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建國神話에서 天觀念과의 관련성이 신성혈통으로 표출되는 대표적인 예는 檀君神話이다단군은 天帝의 직계자손이다. 天帝子인 桓雄이 직접 하강하여 熊女와의 神聖婚에 의해 단군이 출생되고 古朝鮮의 建國始祖가 된다. 즉 단군은 天帝의 직계자손이라는 神聖血統이 建國의 절대적 기반이 된다. 따라서 실제 檀君神話는 天降한 桓雄을 중심으로 天上存在의 절대적인 權能이 표출된다. 그는 天神의 권능으로써 社會制度와 秩序規範을 창조하고, 神을 통솔하는 桓雄天王으로서 지상에 神政을 베푸는 존재이다. 환웅은 천상의 많은 존재들을 거느리고 하강하였다. 그는 三千의 무리를 이끌고(率) 風伯․ 雨師․ 雲師를거느리고(將) 하강하여穀食․ 生命․ 疾病․ 刑罰․ 善惡 등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였다. 환웅은 多神들을 지배하는 종교적 권능과 인간사를 주관하는 세속적 권위가 결합된 天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군신화는 天上에서 환웅과 함께 하강한 三千의 무리가운데 風伯․ 雨師․ 雲師의존재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농사와 직결되는 기후를 담당하는 職能"神의 성격을지니고 있다. 따라서 환웅은 下位神인 풍백, 우사, 운사로 하여금 농경에 관한 문제를 담당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原註 - 神聖과 神異는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개념을 뚜렷이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聖’과 ‘異’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잠정적으로 사용한다. 첫째, 초월성이 천(天帝)에 근거를 두고 표출되는 경우에 神聖으로, 天帝 이외의 천문현상과 지상의 자연현상 등이 인간의 認知 가능성을 바탕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神異로 범칭한다. 둘째, 신성은천(天帝)에 직적인 관련성을 갖고, 神異는 징조를 통하여 간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神異도 결과적으로는 천에 귀결된다. 셋째, 신성은 血統觀念에 기반을 두고 있고, 신이는 徵兆의 意味와 解釋에 기반을 두고 있다./P.222/中央大學校 語文硏究 제32권제3호(2004년 가을호)

    正菴. 進化論에서는 人類를 猿類의 進化로 보는 점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夜雷. 人類가 猿類로부터 나온 것인지 또는 原始人類의 구조가 猿類와 유사한 점에서 그를 혼동한 오해인지 그것은 考古學의 책임이오 인류資格의 神聖 不神聖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原來 進化論은 外的 형식의 구조 상태로부터 연구하여 진화의 계단을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原始人類와 가장 근사한 구조가 猿類이다. 인류로 진화한 동물이라고 본다면 猿類는 아니더라도 猿類와 같은 現象에서부터 進化하여 今日의 현상으로 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理論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진화론은 곧 파괴되고 말 것이다. 進化論의 理論이 眞理라고 하여 宗敎의 理論이 파멸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이념은 그로 인하여 오히려 유력한 근거가 서게 된다. 至氣一元論에서는 생명의 창조 觀念을 至氣로부터 현실적인 해석을 加하여 생명의 순수 지속사태가 현상의 進化릉 通하여 人類에 까지 도달하였다고 보는데서 현재 인류의 현상구조가 지금 보다 불완전한 계단에서 진화되었다고 할지라도 神的 생명의 理念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不變者인 生命의 순수 지속으로 보면 創造的 定在인 것이며 현상 구조의 변화로 보면 生滅的 進化 理法으로 論하게 되는 것이다..PP.231-234.

    二 無神論; P.235.

    正菴. 無神論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夜雷. 無神論은 知之謂知之 不知之謂不知라는 知的 한계에서「不知」라는 두 글자를 「無」라는 한 글자 대체한 일종의 決定的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註 00 ; 知之謂知之 不知之謂不知 - 原文은 知之謂知之 不知謂不知 是知也이므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 『論語』「爲政篇」17장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라고, 잘 모르는 일을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子路에게 공자가 앎(知)에 대하여 가르침을 준 내용이다.

    正菴. 唯物論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夜雷. 그렇다.

    正菴. 不知의 無는 본질이 다르지 않은가? 저 집 속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이 경우에 無라고 단언하는 것은 不知가 아니요 知가 되지 않을까?

    夜雷. 그렇다. 不知라는 疑問을 無라는 轉斷的 知로 대표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貪 嗔 痴 三者 중 곧 痴毒에 속한 일종이다. 그러한 轉斷의 痴想(어리석은 생각.-오암)이 인간의 이상적인 생활을 障碍(가로 막는-오암)하는 惡이 된다.

    註 00 ; 轉斷的 - 轉斷的이 명백하고 분명하게의 의미로, 잘라서 말하면 ,簡明하게 로 해석해야 한다면 轉斷的(돌려서 말하면-오암)이 아니고 專斷的(제 멋대로, 제 마음대로-오암)이 바른 표기이다. 轉斷이 불교와 중국 그리고 일본식 표기에서 딱 잘라 말한다. 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문으로 不退轉斷言을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딱 잘라 말하다. 로 풀이를 하고 있다.

    註 00 ; 痴毒 - 三毒인 탐독(貪毒), 진독(嗔毒), 치독(痴毒)의 하나로, 어리석음으로 인한 해로움을 의미한다.

    正菴. 無神論者의 理想은 무엇인가? 또 그들의 人生觀的 目的은 무엇인가? 有神論者로 말하면 되고 안되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어쨌든 인간의 神格化를 목적한데서 무궁한 진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無神論은 오직 인간의 현실 개조를 최고 이상으로 한데서 不完全을 不完全으로 계속케 하는 輪回的 理想目的이 아닌가?

    夜雷. 그러나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不完全한 것이다. 불완전한 세상이 어떤 超越體를 인정하고 完全으로 향상코저 하는데서 存在의 의미가 있다. 다만 不完全한 現實體만 떼어 가지고 개량하겠다는 것은 不完全을 不完全으로 輪回케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상적 목적이라는 것은 不完全 위에 완전한 超越體를 이념으로 하고 그를 향해 향상 발전하고 무궁적 心情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無神論은 인간에게 面墻直立의 고뇌를 주게 된다.

    註 00 ; 面墻直立 - 牆面而立의 잘못 인용인 듯하다.

    『論語』 陽貨編을 보면 공자께서 伯魚(伯御)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기록이 나온다. “너는 詩經의 周南編과 召南編을 공부하였느냐? 공부하는 사람이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아마도 담벼락을 마주보고 서 있는 것[牆面而立]과 같으리라!”/ 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여기에서 ‘담벼락을 마주보다’란 의미의 ‘장면(牆面)’ 또는 ‘면장(面牆)’이란 단어가 유래했다고 한다. 후에 와서 ‘공부하지 않으면 또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의미의 ‘면장(面牆)’은 이후 ‘담벼락을 마주 서듯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의미로 또 한 번 바뀌었다. /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에서 발췌 재정리함.

    正菴. 만일 세상 사람 전체가 無神論者로 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夜雷. 완전한 무신론의 세상으로 된다면 세상에 종교는 없어지고 만다. 儒敎와 같은 道學도 없어진다. 고상한 이상도 없어지며 一切의 無窮的 靈脈도 끊어지고 만다. 다만 남는 것은 물질적 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심을 調和하는 방책으로 경박비열한 예술만이 있을 것이다. 투쟁에서 투쟁으로 무한히 투쟁 의욕만이 발달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低級한 세상으로 化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우주 이념의 존재다. 결코 그러한 세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註解 ; 야뢰는 무신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지나치게 부정적이며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종교학이나 신학 또는 사회학에서 까지 無神論을 有神論의 한 분야로 이해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看過해서는 안 된다. 無神論에서 부정되고 있는 神 즉 神이 없다는 無神의 神은 어떤 神인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一神敎의 神을 말한다 하더라도 一神敎 각각의 종교의 神들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一神敎 각각의 종교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一神敎 각각의 神들이 아니라면 巫俗에 담겨진 수많은 萬神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神들의 幅을 더 넓힌다면 一神敎 각각의 神들과 巫俗에 담겨진 수많은 萬神을 포함한 神들을 부정하는 無神이라 하더라도 論爭의 主體는 당연히 神이 되므로, 無神論이 有神論의 한 분야로 이해될 수 있는 餘地도 있는 것이다. 없다는 神이 어떤 神이라는 것이냐에 대한 해답이 매우 중요하다. 니이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神의 不在에 대한 命題로 ‘神은 죽었다.’라고 했을 때, 그 죽은 神은 인류가 共有할 수 있는 通念的인 神일까? 아니면 니이체 만의 特殊한 役割을 하는 神일까? 에 대한 명확한 답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막연한 神의 不在로서 ‘神은 죽었다.’인가는 개개인이 수용하고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야뢰가 위의 말을 한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다수의 무신론자들이 종교부정을 하고 있지만 代替宗敎의 등장으로 새로운 종교와 신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야뢰가 말한 神이 至氣라면, 동학과 천도교가 대체종교로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儒敎와 같은 道學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학계에서 동양학의 하나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고상한 이상도 없어지며 一切의 無窮的 靈脈도 끊어지고 만다.’는 야뢰 라는 개별적 인간의 私見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이며 과장적인 의사 표현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경박비열 - 輕薄卑劣로 경박(輕薄)은 생각이 깊지 않아 조심성이 없어, 매사에 말과 행동을 가볍게 하는 것이며(경솔한 사람/ 輕薄의 원어(原語)는 경박부허(輕薄浮虛), 경조부박(輕佻浮薄)이다. 비열(卑劣)은 사람이나 그 태도가 천박(淺薄/학문이나 생각 따위가 얕거나, 말이나 행동 따위가 상스러움)하고 너절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박비열은 학문의 깊이가 없거나 깊은 생각이 없이 매사에 천박하고 경솔한 언행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어학사전을 바탕으로 새로이 기술함.

    正菴. 현대 무신론이 과학의 발달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과학이 발달 될수록 무신론도 발달될 것이다 그렇다면 最終은 無神論의 세계가 될른지도 모르는게 아닌가?

    夜雷. 과학 이론이 앞으로 발달할수록 無神論은 없어진다. 왜 그러냐 하면 과학이 무한이 발달하여 理論이 深遠해질수록 神이 意匠(外觀 또는 形相-오암)을 엿볼 수 있게 되고, 과학이 자기의 영역을 다 발굴하고 더 나아갈 前途가 막혔다 할지라도 그 때 神의 光明이 그들의 疑念뒤에 비추어 올것이다. 어쨌든 앞날의 無神論은 불원간 소멸할 운명에 놓여 있다. 소위 十八世紀 科學 勃興, 十九世紀 懷疑悲哀, 二十世紀 靈의 復活이란 표어는 역사의 한 발전으로서 어느덧 세상은 과학지식의 기초 위에 새 有神觀이 擡頭하여 있는 것이다. PP.2

    34-238.

    ----------------------------------------------東學之人生觀 註解書 14-1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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