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3·1운동 100년, 사드가 촉발한 ‘새로운 광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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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사드가 촉발한 ‘새로운 광복운동’
3·1운동 백년 기념사업추진위 임정 순례
상하이서 항저우-난징, 광저우-류저우-충칭
사드 반대하는 중국, 순례단 출정식 불허
상하이서 항저우-난징, 광저우-류저우-충칭
사드 반대하는 중국, 순례단 출정식 불허
8월16일 상하이 루쉰 공원(옛 훙커우 공원) 매헌정(매정) 앞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독립 대장정.
“중국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쌓은 우의여 영원하라!”(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노래>의 주인공 김산(장지락)과 오성륜, 김성숙 등이 참여한 1927년의 ‘광저우 기의(起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광저우 기의 열사능원’의 중조인민혈의정(血誼亭) 석비 앞면에 큼직하게 새겨진 문구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상임공동대표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가 주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례기행 ‘3·1운동 100년 독립 대장정’(8월16~21일) 사흘째인 18일에 찾은 열사능원의 표제는 중국의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 혈의정 석비는 중국 국가원수와 공산당 부주석을 지낸 예젠잉의 글씨였다. 석비 뒷면 글은 1927년 중국 공산당 주도 광저우 봉기(광저우 코뮌) 때 희생당한 조선 청년 150여명의 “위대한 무산계급 국제주의 정신 및 두려움 없는 혁명영웅 기개”를 기리면서 “조선동지 영원불후!”를 기원했다. 국공합작을 깨뜨리고 공산세력 제거에 나선 장제스 군에 저항했던 광저우 코뮌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5천명이 희생됐다.
광저우 기의 열사능원에 있는 중조인민혈의정. 그 안쪽 석비에 “중국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쌓은 우의여 영원하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백범일지> 등에 기록돼 있는 광저우 동산백원(東山柏園)의 임시정부 광저우 청사는 건재했다. 1938년 7월 임시정부 가족들이 후난성 창사에서 옮겨와 두달간 머문 그 건물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민간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고 올해 2월 임정 청사로 공인됐다. 이 임정 청사 발굴작업에는 광저우 한국총영사관과 광저우 역사박물관 및 공산당 관계자들이 자료를 주고받으며 긴밀히 협력했다고 강정애 총영사관 행정원은 말했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뒤 상하이에서 여러 곳을 거쳐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 발자취에 초점을 맞춘 이번 대장정 기획에 공동대표로 참여한 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발굴, 보존은 한국보다 오히려 중국이 훨씬 더 적극적”이라며 부끄럽다는 말까지 했다.
19일 광시좡족자치구 류저우에서 만난 임정 청사의 전시 내용도 상하이나 광저우 못지않았다. 베트남혁명의 아버지 호찌민도 살았다는 그곳 ‘멋쟁이’ 관장의 친절은 인상적이었다.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유적지도 잘 보존돼 있었다. 17일에 찾아간, 후난성 창사의 중난대 부속 샹야의원은 1937년 김구 등이 반대파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은 ‘난무팅(남목청) 사건’ 때 김구를 살려낸 인연으로 학장까지 나와 후대했다.
이달 18일에 새 건물에서 개학한 광저우 한국학교 내의 ‘독립운동역사 전시실’에는 황푸(황포)군관학교 교관이었던 김덕목, 김산, 김성숙 등과 학생이던 김근제, 김은제, 김원봉, 김훈(양림), 이육사(이원록), 최용건(최추해), 안응근 등이 기수별, 개인별로 정리돼 있었다. 그들의 활동과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 쪽 항일투쟁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계돼 있었는지도 사진과 지도, 도표 등으로 정리해 일목요연했다. 류저우 임정 기념관은 중국의 항일전쟁 기념관이기도 했다. 한때 조선인 학생이 880여명이나 됐다는 황푸군관학교에 좌우는 없었다. 가장 잘 훈련된 광저우 기의 선봉대였던 조선인 학생들의 황푸군관학교 내 유·무명 묘비들에도 좌우는 없었다.
대장정 참가자들이 8월18일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안에 있는 1927년 광저우 기의 때의 조선인 희생자들 묘에 헌화하기에 앞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종교·시민운동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14명의 공동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임을 주창해온 역사학자 윤경로 한성대 총장도 그 점을 상기시켰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좌우 이념으로 나눠 한쪽을 배제,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그들에겐 민족해방·독립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우리의 항일투쟁 역사는 중국에 가야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좌우를 망라한 항일투쟁 역사를 국가와 지역사회 중심에 앉힌 중국 쪽 기록과 기념물들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항일투쟁사의 폭과 깊이가 훨씬 더 거대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대장정은 상하이에서의 출정식 이후 자싱-항저우-난징으로 간 4박5일 일정의 시민·학생단(28명)과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간 5박6일 일정의 공동대표단(18명),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됐다. 하지만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첫날인 16일 상하이 임정 기념관에서 열기로 돼 있던 대장정 ‘출정식’은 예정보다 1시간 반이나 늦게 윤봉길 의거 현장인 루쉰 공원 ‘매정’(梅亭) 앞에서 열렸다. 중국 정부가 파견한 임정 기념관장과 상하이 한국총영사 등이 참석하리라던 임정 기념관 내 출정식은 불허됐다. 기념관 직원들은 내부 전시물 사진촬영조차 안 된다며 막았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한국 배치 때문이었다. 예정됐던 20일의 충칭 임정 기념관 행사에도 기념관장과 부관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낮하늘의 별들”(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끈기있게 발굴해온 강정애 행정원은 동산백원 임정 식구들 거처를 기념관으로 만들자던 움직임도 사드 사태 이후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19일 류저우 임시정부 기념관 내의 독립군 동상 앞에서. 붉은 셔츠에 흰 모자 차림의 사람은 중국인 기념관장.
“집행위의 잘못이든, 국제정세 탓이든, 남북관계 탓이든 이것이 우리 현실이며, 광복 72주년 기념일 바로 다음날 여기에 온 우리 젊은이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입니다.” 출정식에서 박남수 상임대표는 격려사를 “그들(젊은이들)이 맞이하게 될 3·1운동 120주년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 섞인 메시지로 격려사를 마무리했다.
시민·학생단의 한국사 지도강사로 동참한 박광일씨는 윤봉길 의사 의거가, 그 전해인 1931년에 일제가 왜곡 날조한 완바오산(만보산) 사건 등으로 조선사람과 중국인들 사이에 심화된 “조선이 일본과 한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단번에 날려버린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사드 사태를 완바오산 사건에 비길 수 있을까. 완바오산 사건 당시 중국은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하이국제우인연구회 강진호 이사는 지금의 중국을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한나라 문제·경제의 ‘문경지치’, 당 태종의 ‘정관지치’, 당 현종의 ‘개원지치’, 청나라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강건지치’에 이은 제5의 ‘동평지치’”라고 했다. 동평은 마오쩌둥(모택동)과 덩샤오핑(등소평)이다. 최고 시속 300㎞ 이상으로 달린 창사-광저우, 류저우-구이양 간 고속철과 구이양~치장 간 고속도로변은 고층아파트를 비롯한 거대 건축물들이 줄을 이었고, 창사와 구이양, 충칭, 상하이 등의 즐비한 마천루들은 거대 중국의 자신감과 에너지를 실감케 했다. 그런 중국이 사드 사태를 대하는 태도는 한국에 이제 미-일 동맹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하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걸로 비친다.
3·1독립선언서는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말 독립국이며 자주민인지 사드 사태는 다시 묻게 만든다.
광저우 류저우 충칭/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8월20일 충칭 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선열 추모식을 마치고 만세 삼창을 하며 결의를 다지는 대장정 참가자들.
순례 대장정 참가자들을 환영해준 창사 중난대 부속 샹야의원 학장(가운데). 이 바로 앞 정문 벽에 ‘구사부상(救死扶傷. 죽음에서 구하고 다친 이를 돕는다) 실천혁명적 인도주의’라는 마오쩌둥의 친필 휘호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황푸군관학교에 세워져 있는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입간판. 국가는 ‘부강 민주 문명 화해’하고, 사회는 ‘자유 평등 공정 법치’하며, 공민은 ‘애국 경업(공경) 성신(믿음) 우선(우의와 선의)’한다는 내용의 이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은 각종 기관과 학교, 거리 등 중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
30여년 전 중국에 유학 가 2001년 이후 광저우 한국 총영사관에서 잊혀간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강정애 행정원. 무명의 그들 삶을 복원하면서 많이 울었다는 강 행정원은 그들을 밝은 때는 보이지 않는 ‘낮하늘의 별’들이라며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08458.html#csidx3d9f43763b7ffbbbaca66c0fb68e3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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